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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 치즈코 초청 특별 강연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초청 특별 강연
알라딘 인문학스터디
2016년 6월 4일 토요일 오후 2시
마포구립 서강도서관 2층 다목적실
 
* 통역 서혜정
* 들으면서 적었으므로 옮기면서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 소제목은 발표 슬라이드를 참고하여 임의로 정리했습니다.
* 본문의 (웃음)이나 (박수)는 사람들 반응
* 수정 및 건의는 @lakinan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와 여성 혐오
(슬라이드로 보여준 일본판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표지)
표지 디자이너는 남성이었는데, 책을 보면 뭘로 찔리는 것 같아서 이런 (뾰족뾰족한) 디자인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책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읽혔나. 이 책의 제목에는 페미니즘도 젠더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페미니즘을 전혀 모르던 젊은 여성들이 많이 읽어주셨습니다. 오늘도 많이 오셨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는데, 일본에서도 페미니즘은 다들 싫어해요.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여성들이, 이런 일을 처음 알았다고 말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페미 버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왜 그렇게 많이 읽혔나 생각해봤습니다. (여성 혐오라는 개념은) 페미니즘과 젠더의 세계적 성과물입니다. 제가 참고로 한 책이 있습니다. 미소지니라는 말, 여성 혐오라는 말은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처음 만든 사람은 이브 세즈윅이라는 미국의 영문학 연구자입니다. 19세기 영국문학을 연구하며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 말을 딱 놓고 보면, 온갖 것이 이 말로 해결되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문학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 지금의 한국에 쓰인다는 게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여기 계신 많은 젊은 여성 분들이 제 책을 보고 '아 이런 일이 있었어? 언제 일이야? 화석 시대 일이야?' 하면 좋을 텐데요.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많이 오신 것이겠죠.
 
미소지니, 여성 혐오의 정의는 매우 간단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자기 것으로 함으로써 자신이 남자라는 걸 증명하는 것. 그것이 여성 혐오의 정의입니다. 일본어에는 내것으로 한다, 내 물건으로 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야말로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인 거죠. 이런 시각에서 보게 되면 남성의 수수께끼가 차례차례 풀립니다. 어째서 여자를 좋아한다는 남자가(여기선 '호색한') 차례차례 여자를 자기 것으로 한 것을 자랑하는가. 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매춘, 여자를 사는 일을 하는가. 혹시 남자는 여자랑 있기보다 남자와 있는 쪽이 기분이 좋고 편안한 게 아닌가. 남자를 진정한 남자로 만드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남자가 아닌가. 이렇게 평소 의문을 품었던 수수께끼들이 풀려 나갑니다.
 
또 이런 미소지니, 여성 혐오라는 말은 여성의 수수께끼도 풀어줍니다. 이 여성 혐오라는 건 사회 전체에 공기처럼 퍼져 있기 때문에 여성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여자가 좋아한다는 남자, 끌린다는 남자는 어째서 학력이 높고 경제력이 있고 키가 큰 그런 남자인 것인가. 왜 여자는 질투심이 많다는 말을 듣는가. 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들 하는가. 어째서 여자끼리의 우정은 성립하지 않는다고들 하는 걸까. 여러분은 여자끼리의 우정이 가능하고 성립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 들어주세요. (사람들 묵묵부답) 어라, 아무도 없나요. 제가 젊었을 때는 여자끼리의 우정이 성립하는가 하는 토론이 정말 진지하게 펼쳐졌습니다. 왜냐면 우정은 남자끼리의 독점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호모소셜, 미소지니, 호모포비아
여성혐오와 세트를 이루고 있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게 호모소셜이라는 겁니다. 남자끼리의 유대라고 번역이 가능합니다. 이 말도 일단 자기 것으로 하고 보면 굉장히 사용할 데가 많은 말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생각하기를, 남자가 (자신에게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갖는 것은 어디서 올까 했습니다. 그건 여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남자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로부터 남자라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시대극 같은 데서 많이 나오잖아요. 남자들끼리 맞대결을 펼치면서, 칼을 교차시키며 서로 얼굴을 귓가에 탁 갖다대고, "너 제법 하는데", "제법이군", 하는 장면. 그게 남자로서는 최고로 자기를 인정받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남자를 남자로 만들어주는 건 남자인데, 또 여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도 남자라는 점에서 비대칭성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서로를 남자로서 인정한 이런 남자들의 유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호모소셜이라고 말합니다.
 
(그림: 남성끼리만 원 안에 존재하고, 여성은 원 밖으로 내보내짐. 그리고 원 안에 있던 일부 남성도 밖으로 배제됨.)
 
여자가 여기에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남자에게 선택되는 것입니다. 여자들끼리는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에게 선택받는 데)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원 안이 호모소셜, 그 밖이 미소지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개념이 호모포비아, 원 안에서 배제되는 남성 부분입니다. 이건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배제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집애같다는 말을 듣는 것은 남자아이에게 최대의 모욕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는 다음 네 가지 구성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남자에게 남자로 인정받은 남자
2)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 이들은 반드시 여성화됩니다.
3) 여자 (남자에게 여자로 인정받은 여자)
4) 남자에게 여자로 인정받지 못한 여자. 남자들의 말을 빌리면, '추녀는 여자가 아니다'죠. '나를 가슴뛰게 하지 않는 건 여자가 아니다'라고들 늘 말합니다.
 
다음은 호모소셜에 대한 정의입니다. 호모소셜은 서로의 구성원 자격을 인정한 남성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어에 코이, 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건 연애, 사랑을 뜻하는데, 원래는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남자는 남자에게 반합니다. 남자에게 반하는 것에 비하면 여자에게 반하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한국에서 데이트를 할 때 이런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남자친구가 데이트 중에 남자인 친구를 마주칩니다. 그러자 남자가 나 잠깐 다녀올게, 라면서 (여자친구를 두고) 그 남자와 함께 사라집니다. 이런 경험 없나요? 없다면 다행한 일이네요. 제가 젊을 적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벌써 40년 전이네요. 남자들 간의 관계를 여자와의 관계보다 우선하는 것, 이게 남자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남자들에게 있습니다. 혹시 들으면서 떠오르는 경험들이 있나요.
 
그런데 남자에게 반하는 욕망을 육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게이죠. 그런데 남자인데도 욕망의 대상에 놓인다는 건, 남자에게 있어 '여성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건 남자의 위치를 위협합니다. 군대에서 호모섹슈얼이 왜 그렇게 기피되는가 하는 것도, 군대라는 건 남성다움의 학교죠. 그래서 호모섹슈얼에 대한 기피가 있습니다. 남성을 여성화하는 것이 가장 큰 모욕이니까, 그래서 반대로 군대에서 새로 들어온 신입들을 괴롭힐 때는 동성애 행위를 시키는 게 과거 일본 군대에 있었습니다. 한국 군대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요.
 
 
성적 주체화의 젠더 비대칭성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젠더 비대칭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완전히 몸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건 내가 무엇에 성적으로 가슴이 떨리는가, 마음이 움직이는가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연구가 있는데요. 남성이 여성에게 반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얼굴이나 그 여성의 인품을 보고서가 아니라고, 가슴이 얼마나 나왔느냐, 몸매의 선이 어떠냐 등 육체적인 부위를 보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여성의 전체가 아니라 여성의 특정 부분에 가슴이 떨리는 거죠. 아주 단순하고 알기 쉬운 동물이죠. (웃음) 그런데 여성은 그럼 남성의 어떤 부분에 가슴이 뛰고 떨리는가. 남성 몸의 부위나 성기 등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걸로 가슴이 떨리는 건 아니라는 거죠. 여성은 자신을 (남성이 그리는) 성적 신체에 투영해서, 거기에 나르시시즘적으로 가슴이 떨린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성욕'이 남성 중심으로 편재가 되어 있다 보니, 여성조차 '남성의 시선'으로 자신이나 다른 여성을 보고 거기에 투영해서 그 모습에 욕구를 느낀다는 거죠.
 
그러니까 미소지니, 여성혐오,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 멸시라고 볼 수 있는 단어인데요, 이 안에 비대칭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남성은 여성을 자기 것으로 한다고 할 때, 자기가 어떻게든 마음대로 다뤄도 되는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가슴이 뛰지 않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할 여자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뚜껑이 열려 버리는 거죠.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범인이 '여자가 나를 무시했다'고 이야기했죠. 여러분들 지금 하나씩 갖고 있을 텐데요, 프린트에 제가 최근에 쓴 오키나와의 신문기사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오키나와 사건도 있었고, 한 젊은 아이돌 여성이 팬이라고 자처하는 스토커에게 "내 선의를 무시했다"며 공격을 당해 중태에 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죠. 이건 자기가 지배해야 마땅한 여자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데서 오는 분노입니다. 오키나와에서는 미국 군무원이 집으로 돌아가는 스무 살짜리 여대생을 납치해서 성폭력을 행하고 죽였어요.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원래 해병대 출신이라고 합니다. 해병대라는 건 살인의 프로인 거죠. 한국에는 일본엔 없는 징병제가 있죠. 여러분 동년배의 남성들이 군대에 가서 폭력의 훈련을 받고 오죠. 이런 것을 군사화된 남성다움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이렇게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가정폭력을 휘두르기 쉽게 된다고도 합니다.
 
저는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요. 남자가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여자를 죽이는 것, 이런 일은 옛날부터 정말 수도 없이 있어왔죠. 혹시 여러분 중에 강남역에 가서 추모에 함께 하셨던 분들 계신가요? 그런 살인사건은 옛날부터 있어왔는데, 이번에는 여성들이 못 참는다며 몰려가 분노를 표명하는 파도를 만들어냈죠. 이건 매우 큰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혐오의 수수께끼
여성 혐오, 사회를 보는 좋은 도구인 이 말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는, 여성들이 이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어차피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야, 나는 그래봤자 여자야, 이런 식으로 자기를 낮추고 있다는 거죠. 남자가 여자에게, 남성 사회 속에서 할당해주는 지정석이 있습니다. 그건 남자에게 매우 편리하고 편안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 엄마, 주부. 이런 자리죠. 그런데 여자가 자기비하를 하지 않고서는 이 지정석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걸 향유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 자리가 싫다고 한다면 여성들은, 여성혐오가 공기나 다름 없기 때문에, 매 번 매 순간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가 부여해주는 지정석에 대해, '더 이상 나는 못 참아', '여기 있을 수 없어', 하는 게 페미니즘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여성혐오라는 말로 풀리는 수수께끼가 여럿 있습니다. 
 
남자가 고르는 여자들에 대해서입니다. 일본에서는 '남자가 고르는 여자들'이라고 3K로 말합니다. 귀엽고(카와이이), 똑똑하지 못하고, 가벼운(카루이) 여자입니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럭비 선수 다노마루는, TV에서 좋아하는 여자 타입을 묻는 질문에 "한두 걸음 내 뒤에 물러나 걸어오는 여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번역하겠습니다. 이건 자기가 컨트롤하기 쉬운 여자가 좋다는 겁니다. 저는 굉장히 화가 났어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말하길, "옛날엔 여자가 남자의 세 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게 한두 걸음으로 줄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더군요. (웃음) 그러니까 다노마루처럼 일본에서 영웅화되어 있는 이런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면 컨트롤하기 쉬운 여자라고 자기를 연출해야 하는 거죠.
 
또 일본에서는 아내가 남편보다 수입이 좋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부부사이가 잘 풀리질 않습니다. 여성이 너무 세면 꺾인다고 합니다. 어디가 꺾이는 걸까요. (웃음) 일본에서는 남성이 아내나 연인을 때리는데요. 왜 그렇게 때리냐 하면, 그것도 역시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한 거겠죠. 또 직접 폭력을 쓰는 가정폭력 말고도, 말에 의한 폭력이 굉장히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매도를 하는 거죠. 너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느냐 하는 식으로 아내를 끊임없이 매도하는데요. 그렇게 매도할 수 있는 건 결국 자기가 그런 여자를 아내로 골랐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맥이 빠지고 그렇죠.
 
 
결혼 = 자격 부여
이런 걸 이야기하다 보면 여성들의 결혼하고 싶어하는 마음, 결혼 소망이 다시 보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결혼을 바라고, 자기보다 나은 남자를 찾고 그러잖아요. 결혼이 호모소셜한 이 사회에서 여성이 그나마 더 나아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여자에게 호모소셜한 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므로 그 길에서 내려올 수 없는 거죠.
 
저는 일본에서 독신, 싱글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오히토리사마"라는 책을 썼는데요. (*원제 [오히토리사마노 사이고(독신의 최후)]) 일본에서 독신이라고 하면 루저라고 이야기됩니다. 일본에서는 마케이노, 루저라고 표현하는데, 싸움에 져서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개를 말합니다. 한국에는 [남아도는 여자]라고 번역이 됐습니다. (*한국어판 제목 [화려한 싱글, 돌아온 싱글, 언젠간 싱글]) 포기된 여자라는 의미인데요. 이건 호모소셜한 사회에서 자기가 있을 구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혼자 살거나 싱글로 되돌아온 여성이 많죠. 일본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현재의 이런 상황에서도, 호모소셜 안에서의 파워게임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 자리에서(여자에게 지정석을 주는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겠다, 나는 파워게임 안 해, 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는 아주 드뭅니다. 여성이 그런 구조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상황인 거죠. 그러니까 '남자는 돈과 권력을 좋아한다'는데, '여자는 돈과 권력이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보는 겁니다. 여자는 (돈과 권력에 부수되는) 일종의 보수인 거죠. 여러분도 그러신가요? (웃음) 
 
이런 관계가 남자들 사이에 있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여성 혐오라는 것이 남자에게는 여성 멸시인데 여자에게는 자기혐오가 되거든요. 여자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멸시하는 거면 되는데 여자 입장에서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미워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버리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렇게 여자들이 취하는 전략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여자들을 많이 만나왔는데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자로 차별받은 적이 한번도 없어", "무슨 일 있으면 여자야 여자야 하는데 그거 정말 싫어" 하는 겁니다. 이걸 출세전략, 위로 올라가는 전략이라고 합니다.
 
저는 또 하나의 전략이 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이걸 낙오 전략이라고 하는데요. 남자에게 인정받고 선택받는 그 경쟁 사이에 여성들의 파워게임이 일어나는데요. 거기서 "못생긴 나는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어" 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슬라이드:
나는 달라 = 예외 전략
출세 전략 - 예외 전략.
엘리트 전략 - 추녀 전략.
명예남성화 - 아줌마화.
 
겪은 적 없어 = 부인 전략
여자다 남자다 얽매인 적 없어 = 무시 전략)
 
그러나 개인은 "나는 상관 없어"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성 혐오는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현실에 있는 걸 인정하고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일본의 페미니스트인데요. 이런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에노는 미소지니다. 여성혐오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답은 "네" 입니다. 왜냐면 저는 해방된 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스트란 뭐냐 하면, 자기의 안과 밖에 있는 여성혐오와 싸워온 사람입니다. 만약 내가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라면 페미니스트라고 나를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죠? 여성혐오와 싸우는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남성의 여성 혐오, 여성의 여성 혐오
제 친구 중에 [여자(사람)친구]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친구와 '왜 우리는 여자끼리는 우정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배워왔을까'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여자가 여자를 존중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존중할 수 없는 여자와 우정을 맺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여자끼리 서로 존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남자는 여자를 존중하는가.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젊은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상담을 받으러 오고는 합니다. 그녀들에게 저는 늘 묻습니다. "당신 소중하게 대우받고 있어?" 그건 '상대는 당신을 조금도 소중히 여기지 않아', 라는 말입니다. 그럼 젊은 여자들은 웁니다. 사실을 인정하는 게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한국 사정은 구체적으로 모릅니다만, 이번에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면, 여성에 대한 범죄가 일어났고 그걸 여성들이 추도를 하는데 그 모습을 두고 매도하잖아요. 그걸 보며 매우 극심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게 역시 한국의 군사화된 남성다움(militarized masculinity), 군대에서 폭력을 배워오는 데 기반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럼 한국 여성은 어떨까요. 여성 혐오는 남자만이 가해자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여자도 그 대리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로 대리인이 되는 사람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어머니입니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아쉬워하고요. 생리를 처음 시작한다거나 할 때 엄마가 "아유 너도 이렇게 힘든 길을 가는구나" 하며, 반가워하지 않고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다든가요. 자신이 여성이라는 걸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않는 엄마의 태도가 그대로 딸에게 전달이 되는 거죠. 아까 제가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보다는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거죠. 그게 세대를 거치며 전수되어갑니다.
 
호모소셜인 사회에서, 집단으로서의 남성들이 파워게임을 하잖아요. 그에 준하는 여성들의 파워게임은 미모로 하는 파워게임이 되겠죠. 여기 이 자리에서 제가 봤을 때는 앞에 정말 아름다운 분만 계신데요. 일본에서는 한국의 미인은 성형미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럼 이 미모라는 건 대체 누구를 위한 걸까요. 한국 화장품은 정말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건 누굴 위한 걸까요. 그걸 생각해봤습니다. 여성이 아름다운 걸 좋아하거나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버릴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너를 위한 게 아냐, 나를 위한 거야" 라고만 말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 점에서도 그렇고 여성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의 징후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마음이 무거워지는데, 그럼 앞으로 변화될 징후는 있는가. 요즘 일본에는 신종 남성이 등장했어요. 초식남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어떤 여성이 일본에 와서 한 이야기인데요, 한국 남성은 발기해서 걸어다니는 것 같은데 일본 남성들은 부드러워서 좋다고 했습니다. 한편 이렇게 초식남이라고 불리는 남자들에 대해서, '강간하지 못하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초조함을 보이는 동년배 남자들이 있습니다.
 
초식남 같은 남자가 나타나는 게 과연 여성들에게 바람직한 일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이건 그냥 남자들이 여성과의 관게에서 뒤로 물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남성들을 앞에 두고 여성들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저는 "역시 남자다운 남자가 좋아?" 라고 묻는 겁니다. 이는 여성학 개념으로 보면, '권력의 에로스화'라고 합니다. (권력차가 에로스로 작용하는) 이런 비대칭적 권력관계, 낙차가 큰 관계여야 남자들이 상대에게 마음이 동하고 여자들이 상대에게 끌리는 상태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케어, 비폭력을 배우는 실천
마지막으로 슬라이드를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이는 늦게 추가하는 바람에 번역이 안 되어 있는데요. '케어, 비폭력을 배우는 실천'이라고 합니다. 제 최신의 연구 테마는 개호입니다. 일본에서는 개호, 한국에서는 요양보호(옛말로는 수발)라고 합니다. 여기에선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에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개호를 받는 사람, 여기에선 폭이 넒어서 노인만이 아니라 어린이, 장애인 등인데, 이런 사람들은 어떤 힘도 없습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반격할 수 없습니다. '생사여탈의 권리를 내가 쥐고 있다',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 없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죠. 일본 말 중에 아주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애기 손목 비튼다'고 표현하는 관용어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서 힘을 안 쓴다는 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죠. 저는 남녀가 평등해지기 위해서 여자가 남자만큼 완력이 세진다든가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다든가 경제력이 좋아지는 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싸우면 지죠. 그리고 맞서면 얻어맞습니다. 그걸 더 싸우려고 달려들면 더 많이 맞습니다. 그럼 약하다는 건 악일까요? 그러니까 저는 페미니즘이 여자가 남자만큼 강해지는 것,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약한 사람이 약한 그대로 존중받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슬라이드를 마지막에 추가한 이유는요. 폭력이 배우고 학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폭력도 학습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입니다. 여자들은 육아나 수발을 통해서 비폭력을 배우죠. 상대가 자기 뜻대로 안 되는데도 잘 해줘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애가 말을 안 들어서 '너 여기 두고 갈 거야' 하고 두고 가면 애들이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러면 엄마들이 만족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힘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자기가 쓸 수 있는 힘이지만 그걸 쓰지 않고 상황을 더 낫게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행동은 하나의 학습이고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 폭력을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남자들에게 정말 의존적인 존재, 노인이나 아이나 장애인을 돌보는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한 생명체로 태어나서 또 얼마나 약한 생명체로 죽어가는가를 남성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 기회를 독점하지 마시고, 남성에게서 빼앗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로 돕고 존중하는 관계를 이성 간에도 만들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동성간에도요. 미소지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 한가지입니다. 이것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수)
 
 
질의응답
- <여성과 소녀> 시사회 초청 이벤트. 여성 할례를 경험한 14살 소녀와 17세 여자의 이야기. 질문해주시는 분 5분께 표를 드립니다.
 
- 강의 잘 들었습니다. 저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궁금했던 점이. 혹시 제일 마지막에 있는 <역자의 말> 읽어보셨나요? '보슬아치'에 대한 말. (*본문 생략) 출판사는 이에 대해 아무 입장 표명을 안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번역자는 젊은 남자입니다. 역자의 말을 뭐라고 썼는지는 안 가르쳐줬어요. 이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남자가 괴로우면 남자가 아니기로 하면 됩니다. 남자에게 측은하다고 동정하는 걸 반대하시는 거잖아요. 저는 거기에 동감합니다. 여자들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경험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그런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여성운동을 하게 된 거죠. 이건 자기 스스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남자들이 그렇게 괴롭다고 해서 남자의 문제를 여자들이 해결해줄 책임이 있는 건 아니죠. 남자들의 문제는 남자들이 해결하면 됩니다. 네.
 
- 인터넷 상에서 선생님 프로필에 마르크스적 페미니스트라고 설명하는 걸 봤는데요. 오늘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계급 이런 것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성차에 기반한 여성혐오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할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2016년 현재 계급의 문제를 제외한 채 성차별이나 여성혐오를 이야기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요. / 또 하나, 마지막에 요양보호사 이야기를 하셨는데 마치 돌봄이 하나의 대안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러나 진짜로 현장에서 요양보호사들이 권력자이고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무력하냐에 대해서,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있고, 유치원에서는 씨씨티비와 원장과 국가의 통제가 있습니다. 돌봄노동 뒤에는 자본이 있고, 돌봄노동자들은 아주 싸구려, 최저임금 혹은 최저임금 이하의 돈을 받으며 아주 힘들고 '천한' 일을 하는데요. 이걸 '돌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대안처럼 제시하는 데 이견이 있고요. / 또 하나 더 저도 의문이 있는 게, (엄마가 자기 자식이 딸이면 아쉬워한다는 부분에 대해) 남자아이를 낳으면 좋다고들 하는데 지금도 그런가 하면 저는 아니라고 봐요. 주위를 보면 하나만 낳는다면 딸을 낳고 싶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왜 그렇게 딸을 원하는지. 그만큼 사회가 성평등이 이루어졌나? 왜 그런지.
: 질문이 세 개인데요. 처음 두 가지 질문은, 제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책을 썼는데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마르크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불충분한 점이 있다고 깨닫고 거기서부터 시작이 된 겁니다. 마르크스는 물질의 재생산을 이야기했지만 생명의 재생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언급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책인데요. 미소지니와 자본주의는 거기서 가져온 개념입니다. 질문자가 말씀하신 대로 가부장제만으로는 현대사회를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점점 더 복잡함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젠더, 계급, 민족, 국적, 성적 취향 등. 거기서 젠더는 절대로 뺄 수 없는 거죠.
그 책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지금 말씀하신 것과 딱 일치합니다. 인간사회는 생명을 낳아 키우지 않으면 계속될 수 없는데, 그 마지막에 도달하는 개호 부분이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천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죠. 육아도 마찬가지고요. 전세계적으로 요양보호사, 케어워커, 라는 분들이 노동시장에서 가장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가장 어려운 노동을 담당하고 계신 거죠. 그럼 케어를 하는 노동은 왜 이렇게 싼가. 그것은 여자가 집에서 공짜로 일해왔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거기에 돈을 낼 마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는 남성이 만든 사회가 아이를 낳고 키우고 노인을 돌보고 간병을 하고, 이런 일들을 아주 낮게 본다는 증거입니다. 
마지막 질문. 일본에서는 아들이냐 딸이냐 하는 질문에 1982년부터 딸이 더 좋다는 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이라는 유교 국가에서는 압도적으로 남아 선호가 계속되고 있었잖아요. 그 중에서도 일본은 일찌감치 여아 선호로 돌아섰습니다. 그게 여성 지위가 올라가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 이유는 저출산이고, 한 이유는 고령화입니다. 점점 아이를 적게 낳게 되어 하나를 낳는 경향으로 변했는데요. 자식을 하나만 낳을 때 부모가 느끼는 압박감은 굉장합니다. 특히 아이의 교육과 관련해서요. 남자아이의 교육의 실패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는 "에이 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한 육아를 즐기기 위한 여자아이인 거죠.
또 하나는 고령화입니다. 부모가 오래 살게 됐는데요. 그럴 때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들보다는 딸인 거죠. 일본에서 여아 선호가 많아진 건,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서가 아니라 여성의 지위가 낮은 것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해석이 한국에도 해당이 될까요? 
 
- 저는 두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요. 하나는, 저 역시 역자 후기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을 해서 은행나무에서 역자 후기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선생님께 드리고, 선생님께서 이에 대한 피드백을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요. SNS든 출판사를 통해서든요. 오늘 처음 들으셨다고 해서.
마지막에 비폭력의 학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태어날 때부터 약자가 아닌 자가 비폭력을 학습하려면 공감능력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남성들의 공감능력이... 본인에게 필요하지 않으면 공감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발휘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어요. 그러면 직접 약자 입장을 체험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요. 
여자들이 화법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는데요. 같은 여자끼리도 손가락질을 많이 했었어요. 그럼 과연 여자는 어디까지 부드럽게 말해야 하는지. 이를 개선하기 위해선 우리가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지.
: 처음 제안에 대해서 저는 오늘 처음 알게 됐어요. 그래서 번역하신 본인에게 후기 번역을 부탁해볼까 합니다. (웃음) 그 번역자는 아주 센스가 좋은 젊은 남성인데, 미소지니라는 건 공기처럼 충만해 있기 때문에 남성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말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습니다. 남성들은 말을 해도 잘 안 통하는데, 그러니까 꼭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당신 지금 지뢰 밟았어' 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지뢰가 폭발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이게 두번째에 대한 답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을 해도 안 통할 수 있는데,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겠냐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정말 이해력이 부족한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뢰를 밟고, 여자들이 '너 지금 지뢰 밟았어' 라고 알려주고, 그게 폭발하고. 이런 경험을 함으로써 겨우겨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성희롱이 문제화된 것도, 가정폭력이 문제화된 것도, 여자들이 일일이 알려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지긋지긋하지만 이 외에 방법은 없습니다.
처음 비폭력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것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질문자는 상당히 남성불신이신 것 같습니다. (웃음) 남자도 아기일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완전한 약자입니다. 그리고 또 남자도 비실비실해지고 치매도 걸립니다. 인생에 처음 시작과 마지막을 수동적인, 철저한 약자로 지낼 수밖에 없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케이스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젊은 엄마들에게 제가 자주 하는 말인데요. 남편이 육아에 전혀 도움을 안 준다고 호소를 하면. 아이를 맡겨놓고 일주일이라도 집을 비워봐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엄마들은 무서워서 그렇게 못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럼 아이를 맡기지 못할 정도로 신뢰하지 못할 사람을 남편으로 골랐냐고 말합니다.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인 게 아니잖아요. 엄마도 아기를 눈앞에서 보고 배워가면서 엄마가 되는 거죠.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워서 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과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아이가 눈앞에 있어서 그걸 돌봐야 하고, 더군다나 그게 자기 아이일 때. 그렇게 닥치면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도 못 맡기는 사람을 왜 자기 남편으로 선택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초고령화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죽지 않습니다. 전에는 뻗대던 남자들이 아무 힘이 없어지는 걸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에전에 나를 억압하던 그 동성의 아버지가 어떻게 약자가 되어가는가 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경험을 남성들에게서 빼앗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는 죽으려고 해도 좀처럼 죽어지지 않는 초고령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왜냐하면 그 누구나 다 예외없이 약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주 훌륭한 질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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