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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찔하기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도서관 복도에 나간 길에 화장실에도 갔다 올 만큼 마음은(/만) 바쁘지만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나면 갤러리에 가서 사진을 본다.

 

*

이름을 불러 주면서 나의 꽃이 되어

'그 사람' '그것' '나'란 말만으로 충분히 통하다가도

언젠가 그것을 다시 냉정히 보고 객관화해야 할 때가 오면 괴로운 것이다

고유한 영역,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다른 배치에서 마주칠 때 움찔하고

더군다나 치우친 상황에서 원치 않는 배치에 나를 넣어야 할 때

- 나의 고유함과 주관을 어쨌거나 타인에게 평가 받아야 할 때 -  또 움찔한다.

 

관계에서 정체성을 다시 설정하는 일은 긴장을 준다

그 긴장이 가볍고 즐거운 전환일 때도 있겠지만

당장 감당하기에 너무 클 때 스트레스도 되고 슬픔도 되고 절망도 되는 기억은 크다

 

*

지하철에 앉았다가 고장났다고 모두 내리라는 바람에 모두 몰려 나온 날,

다시 어떤 조치가 되었는지 도로 타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내렸던 사람들은 대개 서 있던 그대로, 그러니까 내린 역순으로 들어가 탔다

 

그날 난 두 번 놀랐는데, 하나는 먼저 내려 뒷쪽에 서 있던 사람들 중에서

그 와중에 빈(그러니까 완전히 비어 '새것'이 되어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인파를 헤치고 먼저 들어가 자리를 맡는 몇몇 사람을 보고, 오 참 그렇지, 앉는 사람이 임자지, 그 생각을 못 했네, 한 것이고,

 

두 번째는, 결국 나는 서 있던 그대로 나중에 타 보니 내가 있던 자리쯤에 섰는데,

몇몇 아까처럼 발빠른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자신이 있던 자리로 가서 그대로 앉았다(또는 섰다)는 것이다.

 

나와 있던 순간이 짧아서도 그렇겠지만, 대개는 '아까(또는 원래)' 있던 자리를 존중했다는 것

서 있던 이들은 앉아 있던 이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을 쉽게 당연히 여기고, 앉아 있던 이들 역시 자신의 앉음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 물론 발빠른 몇은 앉고 싶은 마음이 그 마음을 앞질렀을 테지만.  

 

그 장면에서 기득권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그래서 무섭다는구나, 하고 느꼈다.

 

확실히 '먼저 있던 것'과의 싸움은 늘 뭔가 무리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안 싸우고도 무리해야 하는 세상에 싸우기 위해선 더더욱 무리해야 하는 것.

 

*

있던 것을 유지하려는 본능은 생존을 위해 필수겠지만

외면, 회피로 변화를 거부하면 많은 것을 잃게도 된다.

'늘 있는 사람', '낯익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같은 것.

그래서 아주 소중한 것이 변화해 가거나 떠났을 때, 뒷감당할 여유나 준비도.

 

*

나를 이루는 건 팔할이 그리움인 줄 알았는데,

실체가 없는 그리움이야 언젠가부턴 사라진 듯하다.

 

그보다 요즘 (여전히) 관심이 가는 건 '분노'.

떡져서 정체(막힘), 현실 외면, 무능 발휘(?), 관계 단절, 우울 같은 것으로 쉬어 버린 감정의 원료 같은.

 

*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계를 볼 때,

도서관 끝난다는 방송을 듣고 모두 우르르 가방 챙겨 나가는 대열에 낄 때. 이런...... (움찔, 혹 아뿔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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