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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4
    정의의 타자-사회적 병리현상 정리-
    냉커피
  2. 2010/03/14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철학사 참고
    냉커피

정의의 타자-사회적 병리현상 정리-

호네트 정의의 타자

 

논문 1-사회적 병리현상[사회철학의 전통과 현상황]

 

사회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역할이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잘못된 사회적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에서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요구와 과제를 밝히면서 이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인접학문분야와의 연관성을 명확하게 할 것임.

1. 사회철학의 과제를 사회적 병리로 판단하는 사유전통의 윤곽을 밝힘.

출발점은 문명비판을 수행한 장 자크 루소.

2. 이러한 전통이 풍부해진 것은 경험적 연구를 주도하는 사회학의 등장.

사회학 이후 사회철학의 구상이 파시즘과스탈린주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탐구할 정도로 거대한 구상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논의

3. 결론적으로 역사적 고찰의 성과를 통해 사회철학의 이론적 요구와 특수한 문제가 무엇인지 대략의 윤곽을 그려냄

사회철학은 사회적 삶의 성공적 형태에 대한 척도를 논의하는 반성의 차원으로 이해됨.

 

 

1. 루소에서 니체로 - 사회철학적 문제제기의 등장

루소는 홉스가 관심을 가졌던 시민사회의 존속 조건보다는 시민사회가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원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들이 확장되면서 등장한 사기, 기만, 등의 행위에 기반한 생활방식 전체가 과연 인간이 좋은 성공적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제반조건을 포함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

루소의 사회철학의 탐구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자기실현을 강요하는 사회적 제약요소.

 

루소는 초기에 개인적 자유와 공적 덕의 상태에 따라 사회적 삶의 윤리적 수준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비판의 준거틀로 작동할 이상사회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루소는 인간이 자족성에 따라 살았던 선사시대를 이상사회로 바라보는 듯 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불평등의 조건의 원인뿐 아니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생활방식 전체에 대한 비판까지 확장해서 탐구를 한다.

루소는 비판적 진단의 척도로 활용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끌어낸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자기보존의 충동과 동점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정심이 있는 인간은 자기보존이라는 재생산적 필요기능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도덕적 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즉 루소의 동정심은 이전 폴리스의 인륜적 삶이 수행했던 역할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공적인 덕은 자연적 사태가되고 만다. 즉 루소는 시민사회의 병리를 진단하며 자신 그대로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루소가 말하는 자신 그대로의 의미는 자연상태에서의 극단적 고립상태이다. 즉 인간은 상호작용없이 독립된 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이 상태야말로 루소가 문명비판을 수행하는 윤리적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1. 루소는 자연적 생활방식으로부터의 이탈이 어떤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지 묘사한다.

2. 이 이탈이야말로 인간의 자기소외의 과정이다.

 

루소에 의하면 욕구의 확실성에 따른 삶이라는 자연적 존재방식이 붕괴하면서 인간은 규율된 상호관계에 자신을 맡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그의 행위방향을 외부로 이전케 하는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외부로 이전된 삶의 구조에 의해서 자기표현의 불안도 생기고 동정심과 같은 근원적 덕성도 약해진 것이다.

 

루소를 근대 사회철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수행한 사회진단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 방식과 이에 대한 대답의 방법적 형태이다. 루소는 당시의 삶을 인간의 근원적 형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소외라는 철학적 이념을 창조했다.

루소의 방법론의 의의는 이제 사회적 삶의 형식을 더 이상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의 측면에서만 탐구하지 않고 사회적 삶이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부과한 구조적 제약에 대해서도 탐구해야 할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루소가 자유의 상실과 덕성의 붕괴로 왜곡과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 분리의 결과라고 본데 비해 헤겔은 결코 주관적 자유의 상실이 그 원인이 아니었다.

헤겔은 루소와 정반대로 개인적 특수주의가 무절제하게 강화됨에 따른 파괴적 결과가 사회병리의 원인이었다. 헤겔이 진단한 사회병리는 사회적 개별화, 정치적 무관심, 경제적 빈곤화등이었다.

헤겔에게 있어 핵심문제는 시민들이 단지 법적 규율이라는 협소한 결합을 통해서만 서로 관계하는 사회적 영역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로서 헤겔

헤겔은 인륜적 총체성이 형성된 사회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적 사회를 이상향으로 본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획득되고 교환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인륜성은 파괴된다. 즉 시민사회의 등장은 역사적 분열의 결과인 것이다. 즉 이상적인 보편적 사회(개인적 삶과 공적 덕성이 서로 교차되는, 보편속에서 자신을 구성적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회)는 시민의 자유증가와 더불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루소와 헤겔의 차이

이 둘은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을 다르게 본다.

루소에게는 가능한 극단적 자족상태가 성공적 삶의 조건이라면 헤겔에게는 공동선에 기초한 인간 상호간의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적 병리는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에 대립되는 사회적 발전과정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비판적 사회진단은 노동을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사회적 조건을 자본주의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소외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이후 정치경제학에 심취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 진행법칙속의 구조적 모순이 입증될 때만 적합하게 비판될 수 있다는 통찰이 성장하면서 과학적 모델에 경도된다. 따라서 맑스는 사회적 소외의 논의가 인간의 속성에 대한 사변적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신념을 갖게되면서 자신의 철학적 목표를 과학적 프로그램으로 전환한다.

맑스는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소외를 과학으로 전화했던 것처럼, 물화를 좋은 삶에 대한 장애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기실현구조, 즉 인간의 욕구본성에 대한 실체적 가정에 대한 증명도 포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맑스의 새로운 비판모델이 인간의 자기실현 구조에서 전제한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이나 의도가 아니라 그것의 필수적 실현조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단일한 그리고 포괄적 위기의 문화적 증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관점에 도달한 것은 니체였다.

니체는 당시의 사회를 전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보았다. 허무주의는 완전무결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병리현상의 증상적 표출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사회적 현상에 관심없음. 니체는 장애를 예증하기 위해 사회적 현상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기만할 뿐. 이 장애의 기원이나 쟁점은 단지 인간의 문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

이러한 관점전환을 통해 니체는 역사주의나 관념론과 단절할 수 있는 역사적 고찰방식을 얻어냈다. 왜냐면 니체는 과거에 대한 문화적 해석체계에서 바로 현재의 병리적 현상에 토대를 마련한 지적 내용들을 끄집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만든 문화사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프로그램은 푸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가 보여주듯이 오늘날에도 사회철학적 시대진단을 위한 방법적 모델로 남아있다.

 

니체의 시도에서 처음부터 불분명한 것은 근대 문화비판의 정당한 평가척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 좋은 삶의 조건

 

루소-고립적 자기관계

헤겔-공동체에 살아있는 인륜성

마르크스-노동을 통한 대상화

니체-삶을 긍정하는 가치지평이 실행력있게 존재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것은 특별한 재능덕에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특권적 능력을 가진 협소한 범위의 개인들

니체가 밝힌 것은 좋은 삶의 윤리적 이상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루소, 헤겔, 맑스에게도 적용된다. 즉, 윤리적 보편주의의 배후에는 특수한 세계관을 선호하는 가치관이 숨겨져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2. 인간학과 역사철학 사이에서-사회학 등장이후의 사회철학

 

사회학자들의 문제의식-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사회적 가치구조는 지금까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목적과 관련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윤리적 구성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회학의 과제-윤리적 위기를 실제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

이것은 헤겔의 문제의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점은 내용적 규정에서 발생한다. 즉 현재의 윤리적 위기를 출현케 한 사회적 과정은 더 이상 원자화와 분열의 증대가 아니라 도덕적 방향 상실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1세대 사회학의 영향지점

니체-객관적 가치질서가 붕괴됨에 따라 주체들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설정할 수 있는 목적 역시 붕괴되고 말았는가?

마르크스-새로운 경제양식이 인격적 유대 대신에 목적합리적 사고에 따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가지 모델은 이후 혼융되면서 사회학적 시대진단을 지배했던 테제에 도달하기 위해 작은 사고의 진전이 필요하다. - 윤리적 방향상실. 즉 허무주의의 제도적 기원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관철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짐멜-인간관계의 물화지적

퇴니스-사회적 공동체 유대의 해체에 주목

베버-세계의 근본적 탈주술화에 관심

뒤르켐-유기적 연대 형태의 형성 탐구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사회화 과정은 새로운 경제질서의 정착이 사회적 생활세계의 도덕적 공동화를 초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회학자들의 시대규정이 갖는 이론적 문제는 헤겔이나 맑스보다 훨씬 분명한 문제지점이었다.

1. 사회철학이 사회학과 합체되면서 경험적 검증에 대한 압력이 등장하자마자 사회철학의 역사철학과의 연관성이 조명받게되었다. 그러나 목적론적 역사철학에서 소외진단이 갖는 가치평가적 의미는 역사철학의 서술적 의미 요소 뒤에서 은페된다.

그래서 여전히 병리현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신의 평가척도의 정당화를 논증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점에서 방법론적 장애에 부딪힌 사회학은 니체 문화진단의 연장선상에서 사회가 윤리적 임의성과 같은 허무주의에 놓이게 되었다고 가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될 경우 사회학은 자신의 가치평가 척도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화 가능성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철학은 자신의 근원적 탐구영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사회학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의 마련은 역시 철학적 틀 속에서 마련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입장은 크게 두가지이다.

1. 철학적 인간학-경험적 연구를 통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기되었던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

2. 역사철학적 사고유형에 대한 새로운 관심증대

 

대표적으로 루카치와 플래스너

헬무트 플래스너-공동체의 경계

사회적 병리현상은 자본주의적 산업화과정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촉발된 구조변동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조건과 화해불가능하다. 즉 공동체의 상호작용 유형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인간의 강제없는 자기실현을 가능케 하는 인간학적 전제는 훼손된다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

자본주의가 만든 근대의 병리가 공동체 형성의 사회적 기능을 파괴한다. 플래스너를 비판하면서 루카치는 맑스와 베버를 조합해 자본주의사회에서 물화는 직접적 현실이며 이는 이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 조건을 남김없이 파괴한다는 것이다.

 

루카치나 플래스너는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규정 척도를 설정함에 있어 모든 규범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윤리적 상대주의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플래스너는 경험과학연구를 통해 인간의 탈중심적 입장을 자신의 근거로 세우려 했고 루카치는 역사유물론을 객관적 필연성에 대한 예언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후의 사회학적 연구도 인간학과 역사철학이라는 두 가지 준거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플래스너와 같은 단독적 사상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간의 자기실현의 장애로서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의 일면적 합리화 압력을 분석의 사회적 준거점으로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후 등장한 파시즘도 그 배경을 형성한 원천은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연구라 할 지라도 사회철학적 방법론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계몽의 변증법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연구 역시 인간학과 역사철학의 근거 중의 하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전체주의의 압력,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압박속에서 진보에 대한 역사철학적 희망은 사라져갔고 문화비판적 회의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회철학의 분석과제가 전체주의의 형성을 전권적 주제로 만든 변화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전체주의적 상황의 원인을 찾기 위한 근거는 문명화 과정 전체의 잘못된 발전결과로 이해될 때만 적절히 해명될 수 있었다. 루소가 잘못된 문명발전의 시원을 인간간의 교류에서 찾았다면 아도르노는 노동에서 찾았다. 즉 마르크스의 인간노동의 긍정성을 전면부정하면서 노동은 단지 도구적 지배에 기여하는 요소로만 파악된다. 즉 주체는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형성하며, 역으로 노동활동을 통해 자연세계는 단지 인간의 목적달성을 위한 조작영역으로 축소된다. 최초의 도구적 지배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장할 알게 되었지만, 이제 이러한 행위는 단계적으로 자신의 본능적 삶을 훈육하고, 자신의 감각적 능력을 빈곤화시키고, 사회적 지배관계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루소에게서 타락과정의 끝이 위신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통제되지 않은 투쟁이라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서는 이는 결국 현대사회의 총체적 폭력지배로 흐른다.

 

 

도구적 이성의 발전논리에 대한 두 가지 단점

1. 기술적 합리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모든 작용요소들이 전체주의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공백으로 남는다.

2. 전체주의적 지배는 인류의 초기 역사로까지 소급되는 합리화과정의 정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지배의 문명적 특수위치는 근본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현실 자체가 아니라 문명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병리현상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에 의하자면 법적 자유의 확장이나, 정치적 결정의 민주화, 개인적 행위영역의 개방과 같은 진보들은 더 이상 전면에 등장할 수 없다.

 

비판의 준거를 헤겔과 같이 역사적 이상론에서 찾는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아도르노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체주의적 폭력지배의 등장이 바로 근대사회 내부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던 사회적 병리의 결과로 규정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근거마련을 위해 경험적 증거들을 제시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학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강화하는 대신 항상 고대 폴리스에 대한 이상적 서술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렌트의 역사철학적 입장을 제거하면 그녀의 사회철학적 진단을 뒷받침하는 인간학적 주장이 드러난다. 즉 인간주체는 그 본성상 공적 영역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인간주체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실존적 문제들과 위험성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심리적 안정성과 자기의식의 척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자유와 공적 실천은 인간에게 서로 얽혀있는 것이므로 정치적 공공성이라는 사회적 영역의 존재만이 인간에게 성공적 삶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이런 테제로부터 도출된 아렌트의 사회적 이상은 이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지배체제를 사회적 병리로 규정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우선 근대 산업사회에세 세계소외Weltentfremdung라는 일반적 경향이 지배하고 있음이 주장되고, 두 번째 단계로 이러한 소외의 특수한 형성과 완성이 전체주의적 지배체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근대적 세계소외의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회적 행동방식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은 독일에서 비타 악티바Vita activa 라는 제목을 단 연구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테제에 의하면 발전하는 산업화조건아래서 생산과 노동의 기술적 활동이 강한 사회지배력을 획득하면서 공적 협의나 의사소통과 같이 자유를 신장하는 실천들이 배제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보편적 소외.

그녀의 저작인 전체주의 연구에서 나오듯이 개인들은 공적 공간이 쇠약해지면서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부여 활동에서 단절되고, 홀로 고립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면서 단지 전체주의적 운동 속에서만 자기 이익의 적절한 형식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조직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위기감과 책임감을 형성하기 위해 모든 공격성을 외부로 향햐게 하고 외부의 적에 집중하게 만드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발전을 통해서만 안정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순환과정이 등장한다. 즉 전체주의 운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점차적으로 대량학살 행위로 변형시킴으로써만 자신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분석은 이성비판 요구에 있어 약소하고 심리학적 차별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근대적 대중매체의 영향 방식과 관련해서는 소박성마저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등장을 사회적 병리현상의 맥락속에서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아렌트의 주장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설명력을 갖는다.

즉 기술적 활동의 확장을 통해 자유를 보장하는 행위영역이 제한된다는 것이나, 이를 통해 동시에 정치적 공공성의 붕괴가 동반된다는 것이나,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계가 아렌트에게서는 발견되며 이는 실제 역사과정에 대한 큰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3. 사회적 병리현상 진단에 대한 근거설정 방식들-사회철학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60-70년대 아렌트에 영향받아 하버마스, 테일러, 카스토리아디스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철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어분석철학의 발전으로 인해 철학적 진술의 근거지움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을 통해 사회철학내에서도 방법론적 정당화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 종합을 통해 오늘날 사회철학의 근거설정을 둘러싼 문제가 어디 있는지가 가늠될 필요가 있었다.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소급되는 정치철학의 전통과 단절했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좋은 삶과 정의로운 삶을 어떻게 동시에 보장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편적 동의가 가능한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겠는가가 홉스가 다룬 유일한 문제이다. 이렇게 문제를 제한함으로써 칸트는 이후 정치철학에서 도덕철학의 정립을 위해 도덕과 윤리를 분리한다. 즉 사회적 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만이 철학에 의해 대답될 수 있으며, 좋은 삶의 조건에 관한 문제들은 거의 일반적 규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학의 틀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윤리적 문제가 사회적 공동생활에서 간단히 제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루소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루소는 사회적 생활조직을 과연 그것이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또 그조건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고찰하려고 했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상태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 비판적 지향은 그 이전에 발전한 형식적 윤리관점과 연관되어 있듯이 이제 사회철학은 시작부터 직간접적으로 어떤 개념과 결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자기실현조건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가정들이 존재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적 삶의 병리에 대해 적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상성의 표상이 필요.

다양한 해석들이 행하고 있는 이상적 상태의 특성이 아니라 그 목적을 준거틀로 끌어들이면 일종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비판개념은 간단히 말해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한다는 특징을 지닌 사회적 조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실현의 가능조건에 적합한 사회적 정상성에 대한 윤리적 표상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이러한 윤리적 배경개념이 형식적인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자체가 아니라 그 사회적 전제들만이 규범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정상적 사회적 관계의 척도를 획득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의 준거틀은 개인적 주체의 사회생활 조건이다. 공동체주의이든 개인주의이든 사회철학의 비판적 척도가 되는 좋음에 대한 형식적 개념은 개인의 행복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회적 삶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각 사회철학적 시도들이 겨냥하는 이상적 상태는 개인주의적이거나 공동체주의 둘 중에 하나로 귀결된다. 나머지 차이는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구체적 조건을 무엇으로 보느냐이다. 사회적 삶에서 개인의 성공적 삶의 조건이 공동체적 인륜성인지, 개인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공공성인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인지, 자연과의 미메시스적 관계인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사회철학이 정상적 사회적 삶에 대한 보편적 척도에 의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학을 통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철학의 존속여부는 형식적 윤리학의 정당화 가능성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점에서 사회철학의 미래는 과연 인간의 삶의 필수적 조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설득력있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사회철학이 필요로 하는 윤리적 판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안은 윤리를 절차화하는 시도이다. 하버마스는 윤리적 문제를 실천적 담론의 과제로 보려는 사고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나 가능했던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즉 정상적 혹은 이상적으로 간주되어야 할 사회적 삶은 사회구성원이 민주적으로 조직된 의사형성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발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안의 단점은 사회철학의 해석권한이 남김없이 해당구성원들에게 넘겨지고 만다는 것이다.-사회철학이 할일이 엄서..

 

두 번째 대안, 이러한 사회철학의 무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사회이론 자체가 비판적 경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갖게되며, 이 경계를 넘어서 체제의 명령이 사회적 생활세계로 침투할 때 이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정상과 병리의 구별을 정당화시키는 논거는 인간의 담론행위를 사회적 재생산의 필수 전제로 증명하려고 하는 보편화용론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약한 의미의 그리고 단지 형식적 의미의 인간학에 기원한다.

 

세 번째 대안, 사회철학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푸코와 일치한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장애를 진단하고 설명할 수 있는 평가척도는 역사적으로 제한된 타당성만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척도는 단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자아의 근원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적으로 상대화된 근거를 윤리학의 토대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문화적 자기이해가 기원하는 윤리적 가치를 해석학적으로 되돌아 보는 것은 어떤 사회적 발전과정이 병리로 이해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철학은 장차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와 이에 상응하는 삶의 이상에 근거하여 사회적 장애를 논의할 수 있는 반성적 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성공여부는 약하고 형식적인 의미의 인간학적 요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당화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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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철학사 참고

스피노자의 실체개념-그 자체가 원인이 되는 일자이자 무한자.

하지만 모든 개별자들은 그 안에 신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

능산적 자연=신, 소산적 자연=개별자

신과 개별자를 매개해주는 중간항은 만물

실체가 드러나는 양상이 바로 양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적 실체를 비판하며 둘은 신의 사유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을 서로 다른면에서 바라봄으로 발생하는 차이라고 주장

 

 

라이프니츠의 실체

데카르트의 물체적이고 연장적인 실체 비판. 데카르트는 모든 자연현상을 운동과 연장의 개념으로 설명하며 운동보존의 법칙을 제시.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며 운동을 연장으로만 파악하면 운동은 물체들의 위치이동에 불과해진다고 파악. 그럴 경우 운동의 일반의 객관적 확인은 불가능하며 상대적 관찰에 불과해질것이다.

운동은 힘의개념과 분리될 수 없음. 운동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힘보존 즉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주장

라이프니츠는 연장적 실체에 대한 데카르트의견해를 연속성과 분할가능성이란 관점에서도 비판. 물리학적 물질은 기하학적 공간과 다르다. 수학적의미의 연속은 관념적 표상일 뿐이며 실재하는 부분들로 이뤄지지 않음.-현실은 실재하는 부분들로 이뤄지며 분할되지 않음.고대원자론적 사고.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옹호하면서도 넘어서려함.

라이프니츠는 기계론적 원자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 즉 형상과 영혼을 부여하는 힘의 개념과 결부시키며 이로부터 특유한 개념인 모나드를 이끌어냄.

 

예정조화설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를 상정했으나 인간에게서 이 양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밝히지 못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실체는 무한히 많은 모나드다. 그런데 개별적 표상은 각자의 모나드가 발생시킴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명되는가?

모나드들은 서로 조화될수 없는 속성이어서 다양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현실이 되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물음은 모나드를 발생시킨 근본모나드, 즉 신성으로부터만 해명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체계

 

초월적 요소론/초월적 감성학

                            초월적 논리학/초월적 분석학

                                                      초월적 변증학

초월적 방법론

 

 

모든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시간적으로 경험은 모든 인식에 선행한다.

하지만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어떤 복합체, 즉 외부에서 주어진 인상과 우리 자신이 덧붙인 무엇에 의해 합성된 복합체일 수 있다. 이 두요소는 분리되어야 한다.

즉 선험적a priori인 것과 후험적a posteriori인 것은 분리되는 것이다.

그 구별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필연성과 보편성이다.

이것은 경험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선험적 근원이 있어야 한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별

분석판단은 주어가 술어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판단은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형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이 명제는 종합명제이다.

하지만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존재

1. 수학적 판단은 종합판단. 7+5=12

2. 자연과학적 명제

3. 형이상학적 명제

 

문제.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에 의하면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다루는 모든 인식은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 불린다. 이 개념은 경험을 넘어서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초월적 감성학

감성적 인식능력에 관한 초월적 연구

감성이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작용을 가해오는 무엇에 의해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이다.

오직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직관이란 개별 대상들에 관한 직접적 표상이다.

비판적 탐구에 의하면 개별표상의 생성에는 이미 두가지가 관여해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 즉 감관은 단지 감각을 제공할 뿐이며 우리안에는 감각을 정리하는 무엇인가 있다. 감각을 정리하는 특정한 방식은 공간적 시간적 통일의 방식이다.

 

 

공간

우리가 경험적인 것을 배제한다고 해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물체의 연장성이다.

장미에서 후각, 시각을 배제한다고 해도 연장은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표상은 선험적 감성 형식이다.

 

 

시간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감관의 순수형식이다. 즉 우리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에 대한 직관의 순수형식이다.

우리 내부의 감정상태는 시간상으로 진행된다. 시간은 이러한 마음 상태중의 어떤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조건이다

시간과 공간이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에서부터 수학이 가능해진다

기하학은 공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산술학은 시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렇게 해서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대답된다.

 

 

초월적 분석학

문제

인식은 어떻게 생성하는가?

로크는 감성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은 지성에도 없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그 말이 맞으나 지성은 예외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대답

우리의 모든 사유, 즉 개념은 감각에 의해 획득된 직관을 통해 대상들에 결부될 수 있다.

따라서 지성은 직관적 재료를 제공하는 감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러나 감성도 마찬가지로 지성에 의존한다.

감성은 우리에게 직관, 즉 감성의 선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정리된 감각을 제공한다.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고로 인식의 작용을 위해서는 감성과 지성이 서로 협력한다.

 

지성의 두 번째 활동, 즉 결합활동은 지성이 감성으로부터 받은 원료를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또 개념들을 결합하여 판단을 이루어낸다.

지성의 이러한 활동은 논리학의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이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개념들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였다면 칸트의 논리학의 문제는 우리 지성은 어떻게 개념들에 도달하는가? 즉 특정한 대상과 결부되고 그 대상과 일치하는 개념들을 우리 지성이 어떻게 해서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범주

모든 개념의 형성에는 직관이 제공한 경험적 요소와 지성의 형식부여활동이 결합되어있다.

그렇다면 개념을 탐구할 때 이 두가지를 분리하는 것을 통해 개념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더 나은 방법.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의 발전=개념을 결합시키는 지성활동과 관련해 이미 기본형식을 발견했음.

개념형성=판단

사유에서 통일성을 유지하려면 개념형성의 형식들을 판단형성의 형식들과 일치시켜야 한다.

 

 

 

 

 

 

판단형식의 표

1.판단의 양

-판단의 타당성 범위

2. 판단의 질

=관계의 타당성 여부

3. 판단의 관계

=관계의 종류

4. 판단의 양태

=관계의 타당성 종류

전칭

긍정

정언

미정

특칭

부정

가언

확정

단칭

무한

선언

명증

12가지 형식의 예

1. 전칭판단-모든 인간은 죽는다

2. 특칭판단-어떤 별은 행성이다.

3. 단칭판단-칸트는 철학자이다.

4. 긍정판단-이 장미는 노랗다

5. 부정판단-이 장미는 노랗지 않다.

6. 무한판단-이 장미는 향기가 없다.(향기를 제외한 한에서는 무한히 많은 가능성이 있음)

7. 정언판단-이 삼각형은 하나의 직각을 포함한다.

8. 가언판단-삼각형에서 하나의 각이 직각이면 다른 두 각은 예각이다.

9. 선언판단-삼각형의 각은 직각이거나 예각이거나 둔각이다.

10. 개연판단-오늘은 비가올지도 모른다

11. 실연판단-오늘은 비가 올 것이다.

12. 필연판단-오늘은 반드시 비가온다.

 

이러한 판단형식은 우리 사유의 기본형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 판단형식들의 이면에서그에 상응하는 개념들을 찾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개념형성의 기본 형식들을 얻는 셈이다. 개념형성의 이러한 기본형식을 칸트는 범주라고 한다.

 

범주표

1.판단의 양

-판단의 타당성 범위

2. 판단의 질

=관계의 타당성 여부

3. 판단의 관계

=관계의 종류

4. 판단의 양태

=관계의 타당성 종류

전칭

전체성

긍정

실재성

정언

실체와

우유성

미정

가능성과

불가능성

특칭

다수성

부정

부정성

가언

원인과

결과

확정

현존성과

비현존성

단칭

단일성

무한

제한성

선언

상호작용

공통성

명증

필연성과

우연성

 

 

대상 개념의 형성과정

1. 감성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감각으로부터 공간과 시간에 의해 직관이 형성

2. 이 직관들을 지성이 열두 범주의 관점에 따라 결합하며 이렇게 해서 경험적 개념이 획득

경험적 개념=직관적 재료를 갖고 형성한 개념

 

 

순수지성개념의 연역

선험적으로 지성에 주어져있는 범주들이 어떻게 경험의 대상들과 결부될 수 있는가?

달리 말해 이런 선험적 형식들의 도움으로 어떻게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답을 칸트는 순수 지성개념의 초월적 연역에서 도출한다.

인과성의 예

로크는 우리가 두 현상의 인과적 관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에 작용하는 하나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다.

흄: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지각할 수 없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계기(繼起)현상 뿐이다.

흄이 옳다. 즉 인과율은 지성에서 유래한다. 그럼에도 인과성은 모든 경험에 대해 보편적이고 타당성을 갖는다. 이런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경험은 감성에 의해 제공된 원료에 지성이 자신의 사유형식들을 각인함으로써 성립된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경험에서 이 형식들과 재차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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