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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16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읽기
    냉커피
  2. 2010/04/16
    슬라보이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일부 발췌(2)
    냉커피
  3. 2010/04/16
    4월6일 수업
    냉커피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읽기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일부 발췌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생산과정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그래서 이 양자의 비율을 자본의 구성이라고 부른다. 자본의 구성을 표시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소재적 측면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량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

☆가치의 측면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가치 구성

☆기술적 구성을 가치량으로 표시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유기적 구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가변자본에 비해 불변자본의 비율이 더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자에 비해 기계의 비중이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은 정보혁명시대에는 불변자본의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자본이 축적되고 생산성이 상승하면서 이처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일반적 법칙이다. 이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축적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과잉인(즉 자본의 평균적인 자기증식욕에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노동인구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자기 스스로 축적하면서 지속적으로 과잉인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잉인구는 자본이 손쉽게 구할수 있는 노동인구가 된다. 즉 노동력에 대한 추가적 수요에 대비한 일종의 산업예비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과잉인구의 존재양상을 그 처지와 조건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유동적 과잉인구-산업부분에서 고용되었다가 해고되어 다시 고용되기를 기다리는 노동자

2. 잠재적 과잉인구-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라 도시로 나와 노동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자본주의 초기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과잉인구

3. 정체적 과잉인구- 불규칙하고 불완전한 고용, 임시 고용, 가내노동이나 날품팔이 노동등과 같이 현역노동자와 산업예비군에 동시에 속하는 하층민들

4. 과잉인구의 최저 침전층으로 부랑자나 극빈민, 고아, 불구자등 대부분 고용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상대적 과잉인구의 창출

 

여기서 맑스는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을 경제학적 법칙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구학적 법칙이라고 해야할 기이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법칙의 전제조건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축적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비상품화하는 방식으로 상품화하며, 노동을 탈가치화하는 방식으로만 노동을 가치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의 권력이란 노동하지 않는 삶을 죽음이란 극한값을 향해 수렴하게 하며 작동하는 권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에 스스로를 판매함으로써만 생산수단을 이용할수 있는, 반대로 그렇지 못하다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그런 조건 위에서만 작동한다.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조건과 동일한 이런 조건은 그대 서구의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창출된 것이다.

 

 

 

 

실업화의 압력

 

김수행 자본론 1권 873p

실업자들의 압력은 취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따라서 일정한 정도까지는 노동의 공급을 노동자의 공급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 및 공급의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ㅎ나다.

 

 

 

김수행 자본론 1권 881p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및 활력에 알맞도록 유지한다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도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자본론 1권 653p

자본주의적 착취의 욕구를 항상 충족시켜주기 위해 비참한 상태에 묶어두고 있는 산업예비군이라는 괴물은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개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즉 부분적으로만 발달한 개인[그는 다만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의 담지자일 뿐이다]은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그에게는 각종의 사회적 기능은 그가 차례차례로 행하는 각종의 활동방식에 불과하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노동하는 동물 homo faber

 

자본의 요구, 노동자의 욕망

 

 

자본론1권 883p

맑스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말을 인용한다

노예제에서는 사람들을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근면하게 하는 폭력적 방법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에 노동(즉,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무상노동)을 강요당한다.

노동의 판매는 인간의 자유의사다. 왜냐면 내가 아니어도 자본을 위해 충성할 ‘과잉인구’가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강제적 압제는 개인의 실존적 선택으로 그 양태를 변모시킨다. 자본의 요구는 노동자의 욕망이 되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노동자들간의 적대

 

사르트르- 지옥이란 바로 타인들이다.

 

 

정보혁명이후의 자본의 착취

새로운 양상의 결합노동을 만들어내고 있음.

가령 소비활동을 통해 대중의 감각과 취향을 착취하는 것은, 소비와 결부된 욕망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와 결부된 활동의 창조성이 크면 클수록 유리하다.

예)휴대폰을 쓰는 구세대와 아이폰을 쓰는 신세대

따라서 자본은 대중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확장되는 것을 이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일정한 한계안에 가두고 통제해야 하는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생산이 공장의 범위를 넘어 전사회적 범위로 확장되는 것, 생산이 노동없이 가능하게 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이제 노동없이 살수 있게 되었음을, 노동한다는 생각없이 진행되는 일상 자체가 생산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노동이다.!!!

 

 

 

S.Aronowitz 아르노비츠 = 과거에 생산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팽창은 좀더 많은 일자리의 증가와 임금의 상승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전지구적 고도기술경제에서는 노동자는 이른바 경제적 재구조화에 의해, 그리고 레이저, 로봇, 수치제어기계, 전자통신장비 및 워드프로세서 등과 같은 컴퓨터화된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post work, 42p)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

대다수 산업국가의 노동력이 75%이상이 단순반복작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런 작업은 자동기계나 로봇,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하면서 레온티예프(W.Leontief)의 말을 인용한다. “보다 정교한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해 마치 농경시대에 말의 역할이 트랙터에 의해 감소되고 제거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로서 인간의 역할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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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일부 발췌

 자신의 오빠를 예를 갖춰 매장하는 것이야말로 안티고네에게는 최고로 중요한 문제였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세속적 욕구는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포기한 것들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기는 안티고네는 숭고함의 정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물학적 생을 넘어서 존엄성 자체마저도(안티고네에게는 있었으나 여기서는 가질수 없는) 희생을 강요당할 때가 그러하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배반으로 모든 것이 무가치해져버린 인간은 세속적 쾌락조차 즐길수 없게 된다. 152p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행위가 이후 사태에서 반역으로 매도되고 그로 인해 자신은 제거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불가피한 타협을 실행한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공헌이자 안티고네를 넘어서는 비극인 것이다.

 

 

엘리엇의 시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Gathedral]

“모반의 최고형식, 그릇된 이유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것, -네가 올바른 일을 할때조차, 너는 그 반대의 것을 노리고, 그러니까 네 바탕의 사악함이라는 진정한 본성을 감추기 위해 그 일을 한다. ”

 

 

니콜라스 말브랑슈

나는 주관적으로 덕이 많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신의 시선아래서 나의 객관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는 결코 보장할 수 없다. 나의 구원을 결정할 하나님의 은총내리심은 전적으로 객관적인 법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물리적 자연법칙에 비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스탈린주의하의 공개재판도 이와 유사한 객관화의 또다른 판본이다.

나는 주관적으로 결백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의 은총의 손길을 받지 못한다면 내가 쌓은 모든 윤리적 고결함은 공산주의적 대의에 반하는 프티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의 그것에 지나지 않을것이므로 나는 주관적 결백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객관적인 죄인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전체주의의 참된 비극이 숨어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가 공산주의적 대의에 대한 냉혹하고 자기말소적인 헌신에 있으며 이것이 사람들을 괴물스런 윤리적 자동기계로 변모시켜 인간의 공통적 감정과 정서적 동감을 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정은 그런주장과 정반대이다.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 태도가 충분히 순수하지 못했다는데 있으며 그들이 도착적인 의무의 경제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나도 잘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의무인 것을.....’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

이는 윤리적 엄격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어이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반드시 해야하므로! Du kannst, denn du sollst!'

이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문장으로 귀결된다.

의무를 수행하는데 변명거리가 되어주는 의무의 참조근거는 위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제거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선생의 체벌-나라고 애들 패는게 좋은 줄 아쇼? 그게 내 의무인걸 어쩌겠소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자신의 큰 타자의 의지를 위한 순수한 도구로 자리매김하려는 도착적 태도 바로 그것이다.

그 일은 내책임이 아니오. 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책임으로부터 면죄되어야 하오.

책임은 내가 지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마음껏 고통을 가할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칸트 윤리학이 금지하는게 바로 이 것이다. 주체가 단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을, 즉 객관적인 필연성을 실현했을 뿐이라면 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은 객관적 필연성을 주관적으로 추측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 그에게 부과된 것으로부터 쾌락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는 유죄다.

 

 

레닌의 위대성

멘셰비키가 역사의 발전법칙이라는 실증적 논리가 만사를 포괄하는 근본적토대라고 여기며 객관적 법칙을 신봉한데 반해, 볼세비키는 ‘큰 타자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카치가 찰나포착이라 불렀던 기예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요구를 순화해 체제에 포섭하기 전에 그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예이다. 루카치 주장의 요점은 행동을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들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립적인 객관적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 판사 슈레버의 편집증에 대한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보통 광기(주체가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다고 편집증적으로 믿고 있는 음모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이미 일종의 회복의 시도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완전한 정신적 와해 이후에 나타나는 편집증적 구성은 주체가 자신의 세계에 모종의 질서를 재구축하려는 즉 인식적 지도그리기를 가능케 하는 어떤 준거의 틀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지적한 바 있듯이, 현실사회주의는 그것의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지배에 효과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적어도 지난 몇십년간 자본주의의 대변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게끔 만들었던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듯, 오늘날의 모든 공산진영은 그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해방된 영토이다.

 

 

 

203페이지부터

지젝의 노동에 대한 관점이 드러남

의미의 장 그 자체의 좌표를 변경시키는 개입, 즉 라캉이 누빔점이라 부른 것의 한 사례로서 노동의 개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노동(물질적이고 산업적인 생산)은 공동체와 연대성의 특권적 지점으로서의 노동인 것이다. 이러한 이상에서는 노동은 단지 그 자체로 만족을 가져다주는, 생산을 위한 집단적 노력에의 참여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적인 문제들까지도 소속된 노동 집합체 안에서 토론될 때 비로소 올바른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노동을 제의화된 공동체적 행동으로 보는 전근대적 일의 개념이나 과거의 산업적 생산방식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찬양과는 혼동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의 이상에서 생산 집단은 자신들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근대적 개인들의 집합체이지, 제의화된 고대적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각 방식속에서는 섹스가 아니라 노동 자체(상징적 행위들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육체노동)가 대중들의 눈앞에서 가려져 있어야 할 외설적 추잡함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노동과정을 지하나 어두운 동굴속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전통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혹은 브라질의 부품조립라인에 이르는 제3세계의 노동현장에서 땀흘리는 무수한 익명의 노동자들이 ‘비가시성’영역으로 가려져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구에서는 사라지는 노동계급이라는 헛소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서나 쉽사리 노동의 자취들을 찾아볼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이 노동을 죄와 등치시킨다는 점이며, 고된 일로서의 노동은 원래부터 대중들의 눈앞에서 감춰져야만 할 추잡스럽고 죄스런 행동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209페이지

이러한 조건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라는 맑스의 용어를 되살려 보자. 생산력의 변화가 우리의 사회적 존재 전체, 즉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우리의 실천과 경험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맑스는 생산과정의 혁명적 변화들을 곧잘 정치적 혁명과 대비시키곤 했다.

해체주의적 흐름들(생산에서 상징적 행위로의 이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즉 상징적 교환에의 참여와는 대립되는 것인 물질적 생산에로 초점을 되돌려 놓는일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적 재배치라는 과제를 앉고 있다.

 

정치적 전체주의란 아도르노가 주장했듯이 도구적 이성의 원리, 즉 기술에 의한 자연착취의 원리들이 사회로까지 확장되었을 때 사람을 신인류로 변형되어야 할 원자재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전체주의의 뿌리가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정치적 테러, 즉 전체주의가 정확히 말해 물질적 생산의 영역이 그 자율성을 부정당하고 정치논리에 종속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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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 수업

안드레스 아른트, 칼 맑스

제목 karl Marx 222p-226p

4.6 Andeutungen der Ökonomie des Sozialismus/Kommunismus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암시

 

 

 맑스의 방법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형태와 목적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소멸시킨다는 구체적 서술을 포기하도록 이끈다. 사회주의 체계를 정립하는데 어떠한 의견도 명확하게 정립된 것은 없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발전과 사회적 생산의 자연법칙적 발전에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데,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의 발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파리코뮌의 경험에 중점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추론을 할 수 있다. 맑스 논의의 불충분함은 그 양쪽을 분리해서 함께 고찰해야 그 의미가 고정이 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더 많은 예시들이 나타나는 절들이 있는 『자본』에서 어떤 경제적 발전인지와 어떻게 시민사회의 계급투쟁의 요소가 나타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맑스의 서로 다른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통치관계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안에서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대립에서 알수 있으며, 따라서 정치영역을 통한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이 직면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정치영역의 계급투쟁은 경제관계에서 초래한 혁명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관계의 조건은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이론의 결함이 맑스 이론안에서 해명되는 것을 통해 유지된다. 경제관계의 재생산과 발전이 정치형태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처음부터 유효하다. 경제적 관계가 사회적 개인의 의식적 연관을 표명하는 사회안에서, 정치에 대한 고려는 유효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사회적 노동력으로서 개인의 노동력이 지출되고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는 것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자본3권에 상응하는데, 눈먼 권력이 자연을 규제하는 것 대신에 공동의 통제아래 자신의 신진대사를 자연을 이용해 합리적으로 규제할 때 인간적 자연을 가치있고 적합한 조건아래서 최소한의 수고로 보전하게 된다.

이성과 공동의 통제로서 자기의식은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정치권력을 확정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고 어떤 형식안에서 공동의 통제가 실천되는가의 문제를 설명한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경제학의 문제를 풀지 않고도 정치의 적절한 형식의 전제를 경제적 영역의 문제 내부에서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은 사회적 생산을 지향하는 욕구위에서 욕구의 총량과 그 본성을 넘어서는 논의를 하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욕구 자체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욕구에 따라서 사용가치로서 부를 생산하는 것은 생산의 목표이다. 목적 그 자체로서 객관적인 부의 생산의 확대가 무절제함으로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명백한 판단위에서 생산의 확대를 구체적으로 단념하는것으로 생산의 지배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을 위한 결말에서 기술의 포기는 산정할 수 없거나 부정적으로 산정될 것이 명백하다; 자유로운 여가를 위한 필연적 부로서 일반적인 생산의 제한이다. 그것을 위한 전제조건은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역사적 권력을 넘어서서 욕구의 발전을 제한하는 것은 객관적 부의 방향으로 노동원칙을 세밀하게 형상화하는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참된 부가 실현되는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의 자유의 왕국에서는 개인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부이며, 그것은 필요 노동이 최소한으로 할당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욕구의 양을 넘어서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노동은 항상 있어야한다. 노동하는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기 전에, 사회적 총생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첫째 생산수단의 대체, 둘째, 확대재생산의 수단, 셋째 자연재해등과 같은 상황에 대한 예비 기금이나 보험 기금의 마련, 그 외에도 넷째로 생산에 있어 관리비용의 절감, 다섯째 욕구의 사회적 만족에 대한 규정, 여섯 번째 노동무능력자 등을 위한 기금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과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적 생산을 하는 개인들의 욕구가 공동체적 필요노동을 규정해야 하며, 맹목적 생존을 보장하는 필요의 만족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필연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그것은 공동체적인 필요로 인식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항상 상대적 욕구이다.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고, 필요노동의 단축 수단으로서 생산력의 증가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유의 왕국은, 항상 필연의 왕국에 머무르는 물질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처음 시작된다. 그것이 자유를 위한 물질적 기초이며 전제조건이다; 이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이 지향되어야 하고, 공동의 통제아래로 도달되어야 한다. 경제적 과정 안에서는 자본주의 이후 공동체로의 이행도, 역동적 구조로서 내부의 기능연관도 사유할 수 없다. 필연과 자유는 절대적 필연안에서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긴장관계안에 머물러야 한다. 공산주의는 선형적 역사진행의 종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창조하고 책임지는 최고의 단계에서 인간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 때문에 그러한 구조가 가능함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의 조건은 아니다. 보편적 필연성이 단번에 건너뛸 수 있는게 아닌한, 필연의 왕국안에서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실천적으로 실행되고 통제되는 사회적 실험이라는 조건하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제조건은 우선 공산주의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즉 적절한 토대위에서 서서히 진전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자본주의적 사회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사회의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 면들과의 연관속에서, 즉 그러한 모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전체노동의 구성요소로서 개인의 노동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경제적 지속의 토대로 존재한다. 다시말해, 의식에 의해, 계획에 따라 분배된다. 개인에게 분배되기 전에, 전체생산물의 일부를 분배할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개인적 소비를 위한 생산물의 분배는 노동시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즉 가치법칙이다.

 

 

맑스는 여기서 분배의 올바른 통제기능만 생각해서, 상이한 사회적 관점과 개인욕구의 상이한 측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권리는 추상적,일반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시민의 동등한 권리이며, 각 개인들의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그러한 이유로 불평등하다. 따라서 가치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분배는 구체적 사회적 욕구, 다시 말해 차이가 인정되는 개인들간의 욕구를 지향하는게 아니라 욕구의 보편적 기준과 욕구충족의 수단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개인적 욕구의 총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시민의 권리지평은 생산과 분배의 연관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통치학으로서)독립적인 지식이 직접적인 생산자사이를 분리시키는 조건아래에서 처음 위배된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정립이 사라진, 노동의 분리아래서 개인의 노예적 종속을 넘어서서 자신의 신진대사를 연합된 생산자들이 공동으로 통제하면서 그 조건은 폐지된다. 맑스가 말한 코뮨사회의 고차국면의 전제라고 불리는 이러한 측면은, 사회적 통제와 생산과 분배의 규제는 판단과정에서 생산자의 참가가 아니라 오히려 지적 통찰을 토대로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서 생산자의 통치가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언급된 맑스의 인식은 어느정도 불명확한데, 한쪽 측면이 물질적 생산의 규정안에머무르는 필연의 피안으로서 자유의 왕국이라면, 다른 측면은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의 실현에서 삶의 욕구 자체로 노동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공산주의에서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지는 정치기구의 이론을 위한 공간을 만들게 하고, 두 번째 부분은 개인이 직접적으로 보편화의 준거로서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판단이 합치하는 물질적 인륜성의 범주안에서, 사회를 사유하게 한다. 실제로 맑스의 이러한 성찰은 경제적 해방의 전제로서 미규정된 정치의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러한 이론으로부터 공통의 양식으로 공산주의의 직접적인 경제적 조건이 추론되어지는게 아니라면 그것은 물질적 생산에 연관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개인적 욕구에 상응하는 생산력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윤곽인데, 거기는 욕구를 넘어서는 지배가 지양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본3권 48장

Ⅶ. Abschnitt·Die Revenuen und ihre Quellen

48. Kapital·Die trinitarische Formel(828p)

 

 

 사회의 현실적 부나 재생산과정의 끊임없는 확대의 가능성은 잉여노동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잉여노동의 생산성과 그 생산조건의 풍부함이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 이루어진다. 자유의 왕국은 외부적 편의와 총합이 규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의 행위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그 본성상 진정한 물질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자유는 오로지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가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며, 그 신진대사가 장님을 인도하는 권능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 대신에 그 신진대사를 사회적 통제 아래로 가져온다. 그 신진대사를 최소한의 수고로 그리고 인간적 자연에 알맞고 적합한 조건아래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필연의 왕국에 머문다. 그것을 넘어서야만 자기목적 자체로서 인간적 능력, 즉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필연의 왕국을 자신의 토대로 해야만 꽃피울수 있다. 노동일의 단축은 그 기본전제이다.

 

 

 

 

 

고타강령비판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20-21p

 

 

 

공산주의 사회는 스스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하여 등장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의 초기모습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낡은 잔재들이 여전히 들러붙어 있다. 공산주의사회에서 개별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제공한 노동량에 따라 자신의 몫을 제공받는다. 상품교환이 같은 가치물의 교환인 한, 여기에는 상품교환을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가 지배한다.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변하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소비수단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이러한 평등한 권리는 내용과 형식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르주아적 평등의 권리이다. 여기서 평등의 요체는, 평등한 척도인 노동으로 측정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동안 노동할 수 있다. 그런한에서 노동이 척도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불평등한 노동에 대해서 불평등한 권리로서 평등한 권리이다. 즉 그것은 내용상으로는 불평등한 권리인 것이다.

불평등한 개인들(만일 불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개인이 아닐 것이다.)이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동일한 관점아래 놓이는 한에서, 즉 특정한 측면에서 파악되는 경우이고, 그것은 바로 그들이 노동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도외시된다. 어떤 이는 결혼을 했고, 어떤 이는 자식이 많다...이러한 다양한 경우에 동일한 노동을 하고 동일한 몫을 분배받아도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부유해지거나 가난해진다. 이러한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권리는 불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폐단은 코뮨주의 저차단계에서는 불가피하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코뮨주의 고차국면에 이르르면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사라지며, 노동이 생활수단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생활의 욕구가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사회적 부가 흘러 넘치면 그 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단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는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사회가 실행될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그린비출판사 김호균 옮김

자본에 관한장-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 373-383p

 

 

생산과정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은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가치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별이었다. 하지만 가치의 증식은 자본의 발전단계에서 보자면 단지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자본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생산과 유통의 교대를 통한 통일’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자 과정이며, 이 운동의 주체가 자본이다. 모든 자본은 원래 유통하고 있는 자본이며, 유통의 산물임과 동시에 유통을 생산한다. 유통과정 자체가 자본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가치증식과정 자체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유통하는데, 여기서 ‘유통’은 단순히 ‘상품의 순환과정’으로서 유통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전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고정자본은 유통하고 있지 않은, 즉 생산과정에 머무르는 자본이다. 그런 한에서 고정자본은 자본의 진행에 있어 하나의 과정, 하나의 단계이다. 자본이 생산과정에 머무르는 한, 그 자본은 유통할 수 없다. 자본이 유통 중에 머무르는 한, 그 자본은 생산할 수 없으며, 잉여가치를 낳을 수 없고, 자본으로서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 자본이 시장에 던져 넣어지지 않는 한, 그 자본은 생산물로서 고정되어 있다. 자본이 시장에 머물러야만 하는 한, 그 자본은 상품으로서 고정되어 있다.

 

생산과 상품의 순환 자체가 자본이며, 이 단계중 하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고정자본이다. 자본은 항상 고정되거나 유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유통단계에 머물러 아직 회수되지 않은 부분은 그런 의미에서 ‘고정 자본’이다. 생산 수단이 고정자본인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생산과 유통의 두 규정으로의 자본의 분해는 자본의 가치증식경향에 모순되므로, 자본은 고정 상태에 있는 국면을 줄이기 위해 애쓰게 된다. 이렇듯 자본의 가치증식 경향에 위배되는 자본의 고정성이야말로 자본을 더 많은 생산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자본과 ‘유통’자본의 구별은 구체적인 운동의 과정, 즉 본래의 유통과정인 생산국면 외부의 자본운동을 취급할 때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본의 교대되는 형태는 이제 생산수단(고정자본)과 가변자본과 원료와 보조재료(유동자본)이라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존재양식으로 드러난다.

 

 

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을 살펴볼 때,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 수단으로서 기계장치 또는 기계체제의 발달이다. 노동수단이 기계화되면 대상화된 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며, 현실적 생산과정에서도 살아있는 노동을 자기 아래로 포섭하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대상화된 노동은 직접 생산물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는 생산물의 형태로 그리고 생산력 그 자체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사회적 생산력인 지식과 숙력의 축적은 노동에 대립해 자본에 흡수되며, 따라서 자본의 속성으로서, 고정 자본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기계 장치는 고정 자본의 가장 적합한 형태로 나타나며, 또 고정자본은 자본 그 자체의 가장 적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고정자본의 발전으로 기계장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정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원래 생산물은 사용가치를 지니면서 동시에 교환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생산수단으로서 기계는 직접적으로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즉, 생산 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 시간의 증가는, 상품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이 생산시간 중 일부에 의해서도 충분하다는 것이 입증해 주는 것이다. 잉여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고정자본의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시간은 생산물의 직접적인 생산 시간에 좌우된다. 즉, 생산과정에 사용된 노동시간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더 커서 이제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직접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상대적 잉여인구와 잉여생산이라는 것이다.

기계의 발전이 인간 자신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이나 인간이 노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에 독자적인 일반적 생산력의 전유가 생산과 부의 커다란 기초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사회는 가치법칙이 소멸해야 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자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인간 노동의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때문에 노동해방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고정자본의 비율확장은 유동자본이 자신의 상이한 국면들을 통과해 잉여가치의 감소를 초래하면서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요컨대 대공업의 생산력 발전에 비례해서 증가하자마자, 생산과정의 중단-고정자본의 미작동-은 자본 가치의 감소로 작용한다. 고정 자본은 대규모로 발전하자마자 생산과정의 연속성의 외적 강제조건이 된다.

여기에서는 노동자의 노동능력이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살아있는 노동의 활동이 기계의 활동이 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노동을 흡수하던 자본은 이제 노동자에게 맞서게 된다.

 

 

살아있는 노동과 대상화된 노동의 교환, 즉 자본과 임노동의 대립형태로의 사회적 노동의 정립은 가치관계와 가치에 입각한 생산의 마지막 발전이다. 이것의 전제는 부의 생산의 결정적 요소로서 직접적인 노동시간의 양이다. 하지만 대공업의 발전으로 실제적 부의 창조는 직접적인 노동시간과 비례관계에 있지 않은 작동체들의 권능에 의존하고, 오히려 과학의 일반적 상태와 기술 진보 또는 과학의 생산에 의존한다. 노동은 더 이상 생산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생산 과정 자체에 감시자와 규율자로 관계한다.

 

수정된 자연 대상을 대상과 자신 사이에 매개고리로 삽입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는 그가 산업적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자연과정을 자신의 제어하에 놓여 있는 무기적 자연과 자신 사이에 수단으로 삽입한다. 그는 생산과정의 주행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 옆에 선다. 이러한 변환에서 생산과 부를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은 노동량도 아니고, 노동시간도 아니며,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해야 한다. 따라서 교환가치에 입각한 생산은 붕괴하고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과정 자체는 불가피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는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의 조건이 등장하고 여기에는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개인들의 예술적 과학적 교양등이 조응한다.

 

 

자본의 운동은 노동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정립하면서 동시에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모순의 진행이다. 따라서 자본은 필요노동의 형태를 감소시켜 잉여노동을 증대시키려 한다.

 

자본은 한 측면에서는 부의 창출을 노동시간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온갖 과학과 자연의 힘을 이용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렇게 창출된 방대한 사회력들을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고자 하며, 이미 창출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한계 안에 이 사회력들을 묶어두고자 한다.

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상이한 측면인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는 자본에게서 수단으로만 나타나지만, 실상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고정 자본의 발전은 부 일체의 발전 정도 또는 자본의 발전정도를 가리킨다. 고정자본, 즉 생산수단을 생산하려는 생산은 직접적으로 실현가능한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따라서 갈수록 더 큰 부분이 생산 수단의 생산에 사용되는 것은 이미 달성된 생산성의 정도에 좌우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고정자본으로서 기계의 발전이 가지는 자본의 자기파괴적 지양성이다.

유동자본의 경우 재생산은 유통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고정 자본의 경우 유통은 고정자본이 생산에서 사용가치로 소모되는 시간에 의해서, 즉 고정 자본이 재생산되어야 하는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기계장치가 발전하면 할수록(내구성이 좋아지면 질수록) 고정자본의 회수율은 점점 더 오래 걸리게 되고, 이것은 유동자본의 회전수를 더 빨리 필요로 함을 알게된다. 유동자본이 회전되지 않는 것은 잉여가치의 창조가 잠시 중단됨에 불과하지만, 고정자본의 중단은 사용가치의 단순한 중단이 아니라 고정자본의 원래적 가치의 파괴이다. 따라서 고정자본의 발전에 따라 자본개념에 조응한 생산 과정의 연속성이 자본의 보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정립되고, 따라서 소비의 연속성과 지속적인 성장도 마찬가지로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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