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 논란 정리 겸 복기
난장판이 되어버린 비례명부제때문에 그동안 관련하여 포스팅한 걸 죽 보면서 정리를 좀 하려고 했더니만, 아유, 걍 내가 그동안 하승수 위원장을 끔찍이도 생각했구나. 사람 보는 눈 참 없지. 하긴 뭐 사람 속을 어찌 다 알겠나? 내가 무슨 궁예도 아니고 남의 속마음이나 그 국량을 어찌 다 한 눈에 가늠하겠나? 믿었다가 등뙈리에 칼도 맞고 그런 거지.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거다. 애초에 선거법 패스트트랙 태우는 거 자체가 문제였다. 내용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개정안인데다가 이게 오로지 더민당이 무슨 생각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과정이었고, 게다가 가장 중요하게는 이걸 패스트트랙에 올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주권자들의 논의구조를 봉쇄해버리는 부정적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1년도 전에, 하 위원장이 제기한 주장에 대해 이러한 취지로 비판을 했더랬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선거법 개정안은 더민당이 4+1에서 합의한 바를 초지일관 지킨다는 어떤 전제가 있었다면 어차피 패스트트랙이고 쥐랄이고 할 필요가 없이 그냥 올려서 밀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더민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였던 거다. 하지만 더민은 기왕에 선거법 자체의 개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고, 당장 정권의 면목이 걸린 검찰과의 한 판 승부에 이걸 이용할 필요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검찰을 잡겠다는 건 개혁의 명분도 되지만 미통당 세력과의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더민은 여기서 이기고 싶었던 거고, 4+1의 4는 그냥 장기판 졸로 필요했을 뿐이고.
그 와중에 하 위원장은 참 많은 '노력'을 했다. 언제나 계산기를 두드려 숫자로 뭔가를 설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패스트트랙 통과를 위해 얼마나 많은 표가 필요한가라든가, 날 추워지는 때에 국회 앞에서 천막치고 드러눕는다든가, 그 와중에도 부지런해 계산기 두드려 선거제 개혁하면 예산을 얼마나 줄일 수 있다고 소개하든가, 최근에는 비례정당 만들겠다고 나서면서 여론조사 결과를 계산기로 두드려 21대 의석예상을 제시하든가 아주 그냥 바쁘다.
난 선거법이나 검찰개혁과 관련해서 언제나 하 위원장과는 세부사항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상으로는 많이 달랐고, 나는 그걸 '견해의 차이'라고 선의로 해석하고자 했다. 우선 선거법은 위의 이유로 패스트트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계속해서 여론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정치관계법은 당장 선거법 수정해서 비례 몇 석 늘리는 것으로는 전체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난 언제나 선거법보다도 정당법을 먼저 치고 나가자고 했던 거고.
특히 이번 정권처럼, 선거법이 아니라 검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정권에서 여당이 왜 굳이 선거법 논란에 끼어드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야 했다. 그냥 둬도 되는 선거법을 괜히 여당이 들쑤시는 이유, 현 상태라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선거법에 대해 야당들 비위맞춰가며 뭔가 도움을 줄 듯 수선을 떠는 속내가 뭔지 그냥 눈에 보이지 않는가? 결국 선거법도 그렇고 검찰개혁도 그렇고 그냥 난장판이 되는 와중에 검찰개혁에 있어서는 미통당이 표정관리를 하는 수준에서 끝나버렸고, 선거법은 미통당에게 휘둘리는 상황으로 흘러버렸다.
이제와서 더민당이 수선을 피우기는 하는데, 이건 볼 수록 웃기기도 하려니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다. 아니 이 문제가 이미 지난 해 하반기에 선거법 통과되기 전에 이미 예상되고 있었으면, 얼른 관련 선거법 개정안을 만들어서 그거부터 통과를 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든 뭔 수를 냈어야지 그 땐 그냥 아이구 이걸 어쩌나 이러면서 입으로만 오만 방정을 떨다가 이제 와 똥줄이 타니까 뭐? 위성정당을 만들어? 하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렇게 진작부터 이야기가 있었으면 지난 11월에 천막농성할 때 바로 개정안이라도 만들어서 들쑤시고 다녔어야지, 이건 뭐 이제와서 무슨 전국회읜지 뭔지 하는 노인네들하고 뭘 어쩐다고 저 난리부르스를...
그런데 이제와서 지난 시간 있었던 일들을 복기해보니 뭔가 묘한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하 위원장의 행보가 더민의 그것과 심상찮게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거법을 패스트트랙 태우자고 주장한 이래 하 위원장은 더민과 척을 짓는 것보다는 일정하게 보조를 맞추면서 더민을 끌고 오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물론 더민이 선거법 개정에 미적거릴 때 하 위원장이 많은 비판을 했고, 국회앞 농성도 실은 더민을 추동하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결국 하 위원장의 태도는 더민이 일정하게 도와주기만 한다면 더민이 가는 방향에 대해 다른 부분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다거나 내지는 도와주는만큼 도움을 주겠다는 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꺼림칙한 건 있었지만, 이 흐름을 주시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난 사람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지금 주권자국민회읜지 뭔지 노익장 과시하는 어르신들과 하 위원장이 함께 하는 비례정당 만들자는 저 조직의 주장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다른 게 없다. 더민당이 비례후보를 내지 않는 것. 깔끔하게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더민은 비례후보를 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례 한 번 하려고 부나비처럼 달려든 자들이 있고, 필요에 의해 이들을 환대하며 받아들였는데, 이제와서 더민이 이들에게 지역구 나가라고 등 떠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비례라도 안 주면 난리나고 이런 상황이다. 결국 더민이 할 수 있는 건 만일 전국회읜지 뭔지가 당을 만들어 비례후보를 낸다고 하면 여기에 자당의 원래 비례후보들을 슬몃 밀어 넣어서 당선시키는 것 뿐이다.
정의당이나 민중당, 녹색당이 여기서 변수가 될 수 있다. 정의당은 지역구 후보를 내게 될텐데, 이들이 더민과 붙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민이 비례를 내지 않는다면 지역에서는 정의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그래서 그 지역의 정의당 지지자들은 지역구에서는 더민을 찍고, 그 지역의 더민당 지지자들은 비례에서 정의당을 찍는다는 아름다운 시나리오가 작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가능할 수 있다. 정의당에서 지역구 당선 가능성 있는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역구에서, 특히 정의당 지역구 후보가 출마할 경우 더민당 지역구 후보 당선이 간당간당한 지역에서 정의당 지역구 후보가 완전 철수하는 거다. 할까? 정의당이 이걸 받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민중당이나 녹색당은 애초에 이 과정에서 고려될 가능성이 없다. 그만큼 존재감이 떨어지는 정당들이니. 그러니 하 위원장이 당원들의 뜻도 묻지 않고 지 멋대로 저짓을 하지. 산술적으로는, 공학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런데 정치라는 게 그렇게 시나리오대로 흐르지도 않을 뿐더러, 선거는 당장의 표 몇 장에 목을 거는 것이 아니라 대의와 이념과 지향을 가지고 다투는 미래권력의 전초전이다.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세력이 이런 시나리오를 덜컥 받는다면,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이 정당을 통해 정치세력화하는 건 당분간 궤멸의 과정을 밟게 될 거다. 그 결과는? 그냥 미통세력과 더민세력이 다 말아먹는거지 뭐.
하 위원장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도 열심히 싸우다가 결국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버린 지도 모르겠고. 좋게 말하면 이제 많이 지쳤을 수도 있겠다싶다. 어떤 것이든 간에,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논의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진보는 물론 녹색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