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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 슬픈 소설 [민지네 펌]

번호 5114 작성자 유니 작성일 2005-07-04 14:39:36 조회수 190
제목 박민규, 개판 5분 후  추천수 0


소설가 박민규의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어떤 책에 들어간 원고이긴 한데, 그게 워낙에 팔리는 책도 아니고
솔직히 별로 팔 생각도 없는 책인지라..-O-;;
아까운 원고가 사장되는게 영 필자에게 미안해서 민지네에 올려봅니다.

책에 들어있는 원고를 인터넷으로 돌리는 건 여러모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뭐..필자에게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발행인이 알면 화낼지도 모르지만...-O-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하는게 또한 제 본분인 듯하야 ..

즐...^^

PS. 음..너무 돌아다니면 필자가 화낼지도 모르니.--;;;
퍼가진 마세요..에헤헤..^^:

 

개판 5분 후

 

기호 4번 : 무소속 테리우스.

처음에 그것은 장난이었다. 개주인은 무엇보다 돈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신문에나 한 번 나볼까란 생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 일은 쉬웠다. 늘 그랬듯 담당 공무원에게 적당량의 뇌물을 찔러주고선 자신의 개를 입후보시켰다. “왜 그랬나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전임자의 책임인데다, 지금은 담당자가 자릴 비웠어요”라고 담당 공무원은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했다.

확실히, 그래서 개주인은 방송을 탔다. <9시 뉴스>와 <생방송 아침마당>, <손석희의 시선집중>에까지 출연했으니 이젠 죽어도 좋아가 절로 터져 나왔다. 여한이 없습니까? 여한이 없습니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었다. 유권자 여러분, 우리 테리우스를 국회로 보내주셈! 마냥 기분이 삼삼하기도 해서, 오십줄의 개주인은 그런 깜찍을 떨기도 했다. 욱. 화가 치미는 일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었다. 정치에 관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일도 숱하게 보아온 터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과연 개판이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별 말씀을. 오히려 찬성을 하고 나선 건 정치인들이었다. 진보적 이미지 창출에 개를 사랑하는 유권자들의 표까지 흡수한다는 알뜰하고 다부진 계산이었다. 개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당은 이 땅의 모든 권리를 수호할 것입니다. 낼름, 5분 32초 만에 집권당은 개도 입후보가 가능한 정식 법안을, 쌩으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늘 그랬듯. 늘 그랬던 일이라 국민들도 하나 놀라지 않았다. 반세기 국회의 활약상을 미뤄본다 하더라도 하나 놀랄 일이 아니었다. 불가능이 없는 정치, 우리 정치 좋은 정치.

간과한 사실 하나는, 그러나 정말이지 자신의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국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였다. 속속, 전국 곳곳에서 기호 5번, 기호 7번, 기호 8번의 이를테면 쫑에서 갸름이, 밍키, 청산에 살으리랏다, 코, 나비, 금강산호 등이 잇달아 출마를 선언했다. 나름대로 또 그것은 22대 국회의원 선거의 신선한 양념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포스터가 붙었다.

귀, 귀엽다!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테리우스를 예로 들자면, 우선 기호 1번의 집권당 후보(이대팔 포마드 가르마, 검버섯, 똥집 입술, 기름기, 범죄형), 기호 2번의 야당 후보(금테 안경, 매부리코, 포토샵 뺀질 피부, 하하 보시렵니까 환희 미소), 기호 3번의 무소속(사우나 방금 했음, 그래도 기미, 널 보면 내 마음 습도 80프로, 몽고 진간장 피부, 사시, 그렇게 보시니 쑥스럽지만 실은 저도 웃을 줄 안답니다 미소)에 이어 테리우스가, 품종이 요크셔테리어인 테리우스가 고개를 갸우뚱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귀, 귀엽다. 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른 지역의 선거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정치인이란 추물(醜物)에 비해, 개들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런 존재들이었다.

급격히, 민심은 개들에게 기울어졌다. 켈럽의 조사에서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 너무 귀여워요! 김영선(가명 대학생 22세)양은 인터뷰를 하면서도 깡총 뛰었고, 이성호(가명 자영업 39세)씨는 개라면 믿을 수 있어요라고 했으며, 조병호(가명 무직 82세) 옹은 그저 허허 웃으셨다. 이해합니다. 일시적인 반응이죠. 정당의 대표들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정치는 그러나, 정책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그들의 한 목소리에 일순 국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치열한 정책대결이 시작되었다. 집권당은 ‘22세기 초일류 국가 네오 한국 건설의 초석을 다지는 국책 사업과, 전국 시도 단위에 빠짐없이 동양 최대, 국내 최초의 실버 타운을 건설함은 물론, 여성 지위 명왕성까지 향상과 전 국민 100% 대학 합격 입시 제도, 사백 만에 달하는 미취업자 전원에게! 초일류 우량 기업의 정규직을 약속한다’를 골자로 한 어머나 마스터 공약을 펼쳤으며, 질세라 야당은 여당의 모든 정책에 플러스! 야당이 당선된 모든 선거구에 잭 필드 4색 3종 선택 면바지 세트를 특별! 특별 할인가에 공급하고, Top 10 연예인 누드 포탈을 3개월! 무려 3개월 간 무료 개방한다는 필승 플랜을 내걸었다.

무려 수십 조항의 세부 항목이 포함된 이들의 공약에 비해, 개들의 공약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멍. 그리고 끝이었다. 시, 신선해. 또 그것이 의외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거짓이라곤 요만큼도 느껴지지가 않아. 아아, 저건 왠지 반드시 지켜질 것 같아. 그리고 그 느낌이 그만 대세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럴수 럴수. 정치인들의 피가 마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추격해도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유세현장의 막판 뒤집기 공세는 그래서 뜨겁고 가열찬 것이었다. 여러분, 저 새끼는 사실 개새낍니다! 비방(글쎄 그게 비방인지는 모르겠으나)과 책략과 음해가 줄줄이 이어졌지만, 개들은 누구 하나 맞불을 놓지 않았다. 왈. 역시나 묵묵히 할 말만 하고 단상을 내려간 것이었다. 러, 럭셔리해. 그만 또 그것이, 부동표의 표심까지 흔들어 버렸다. 결국, 전국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개들이 당선된 그해의 선거는 우리 역사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개판 5분 전입니다. 이를테면 조갑자씨는 자신의 홈피에 울분의 혈서를 올린 후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으며, 패배한 여야 정치인 연합이 선거 자체의 무효 소송을 청구하기도 했으나, 또 아무튼 국회는 예정대로 돛을 올렸다. 새 국회의장에는 신임, 마리오군(君)이 선출되었다. 세인트버나드 품종의 마리오군은, 그저 척 보기에도 의장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충견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결과였기에, 국민들도 숨죽여 새 국회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조마조마하고 두근두근하게. 그리고 개들의 국회가 시작되었다. 째각째각. 새 역사의 시간이 바투 흐르고 있었다.

개들은 짖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졸거나, 배회하거나 했다. 하지만 어떤 개도 거짓말을 하거나 편을 지어 패싸움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5분 후, 국회의장인 마리오군이 큰 몸집을 일으켜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똑바로, 의사봉 바로 위에, 한 무더기의 똥을 쌌다. 세인트 버나드가 아니고선 불가능한-역대 국회의장 모두의 똥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거대한 지름의 똥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지 그때부터 대한민국은 좋아졌다. 국민들은 국회가 있는지 없는지 잊어 버린지 오래였고, 개뿔 당략과 당정에 국민의 혈세가 쓰이지도 않았으며, 전국 보신탕집 연합이 우려한 어떤 정치적 보복도 없었고, 뇌물수수, 직권남용, 청탁인사, 이권개입, 투기의혹, 비리연루, 부정부패, 비자금갈취, 정치공작, 인권유린, 조삼모사, 정경유착, 로비파문, 룸살롱 파문, 골프관광, 삼삼오오, 철새정치, 면피정치, 학벌정치, 파벌정치, 날치기통과, 실력저지, 지역감정조장, 지역패권, 영남단합, 호남단합, 충청연합, 보수결집, 진보마찰, 개혁찬반 등이 일시에 사라지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였다.

이럴 수가! 단지 국회가 정지했을 뿐인데 이렇게 좋아질 수가! 일각에서는 변화의 쟁점에 대해 토론이 한창이었다. 속속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 우리에게 국회는 무엇이었나?> 등의 프로가 제작되었으며, 선거의 패인에 대한 각종 학술 단체와 리서치 기관, 외국의 석학들이 참가한 대규모 분석과 토론이 개최되었다. 외국의 석학들이 내린 간단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개가 아니라 돼지였어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그랬군. 국민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쨌거나 그날도 조갑자씨의 단식은 계속되었다. 스스로 100일 단식임을 알뜰하게 주장하긴 했지만, 뭐 그러니까 직접 본 것도 아니고 해서.

Tip : 실은, <개판>은 6.25 동란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지배적이다. 전쟁터에서 큰 가마솥에 수십 명이 먹을 수 있는 밥과 국을 끓였는데 가마솥 뚜껑을 <판>이라고 했다. 그 판을 열기 5분 전에 개(開)판 5분 전! 하고 구호를 외쳤는데 이때 모두가 술렁이고 질서가 안 잡혔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음 그렇군. 만사가 그렇듯, 진실을 알고 나면 왜 이토록 허전하고 반감이 생겨나는 걸까.

약력: 1968년生. 소설가. 디자인을 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특별한 계획이 없으시다면 제 인생을 좀 디자인 해주세요. 그렇게, 프로프즈를 했다. 아름답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 그녀의 디자인대로 살아왔다. 문득 회사를 관두고, 소설가가 된 것도 그녀의 디자인이었다. 출신학교나 지은 책 같은 것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않다. 디자인(Design) 저서에 사인(Sign)을 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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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길
(05-07-04, 16:57) 흐흐흐... 블로그로 퍼가는 건 괜찮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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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나무
(05-07-05, 01:38) 이 사람이 혹시 "삼미 슈퍼스타스..." 쓴 소설가 인가요?
재미있군요..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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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팬
(05-07-05, 08:27) 프랑스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개가 있었다죠? 인기가 굉장했었다던데......당선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다면서요. 불행히?? 떨어졌지만...

아주 황당한 얘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하나...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난 어떻게 중심을 잡나..하는 걱정 하나......
복잡한 생각..우수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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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나
(05-07-05, 08:29) 사과/ 마즈 ㅋㅋㅋ 박민규 단편중엔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 라는것도 있어 ㅡㅡ;; 박민규소설의 전형이지 아죠. 그나마 덜 박민규다운 (?) 갑을고시원체류기 를 좋아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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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이애비
(05-07-05, 09:17)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참 슬프네요.
어쩜 22대 국회보다 휠씬 빨리 올 것 같다는 예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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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
(05-07-05, 10:02) 새벽길/ 흐흐흐...인터넷에 올려놓고 '퍼가지마시오'라는 것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ㅋㅋㅋ 퍼가셈 퍼가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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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풍노도★
(05-07-05, 13:21) '개들의 공약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멍. 그리고 끝이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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