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조금 덜 건조한 원문

한겨레 신문사와 [한국 건강형평성 학회] 공동으로 한국 사회의 양극화, 그 중에서 건강 불평등 문제에 대한 연재 기획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야 학회에서 평가가 이루어질테니 나중으로 미루고.... 어쨌든 단지 미국에 체류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섹션을 맡아서 쓰게 되었는데... 원래도 건조하게 썼지만, 분량 조절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짐작은 한다만.... 지나치도록 건조하게 요약되었다는 느낌이.... ㅜ.ㅜ http://hani.co.kr/arti/society/rights/97314.html 인터뷰 원문을 올려둔다. (스크롤의 압박 심함)


지난 1월 5일, 보스턴에 자리한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연구실에서 가와치 (Ichiro Kawachi) 교수를 만났다. 그는 사진 찍는다고 해서 특별히 넥타이까지 준비했다며, 얼른 사진부터 찍고 이것 좀 풀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년 반 동안 강의실 바깥에서 넥타이를 맨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동안 자료 분석 진행이나 사변적인 개인사들을 주로 이야기하다가, 질문지에 녹음기까지 준비해서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하자니,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니 그런 어색한 분위기는 금방 사라졌다. * 우선, 근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건강 불공평 (health inequity) 문제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것이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건강 불공평은 단순히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 불공정(unfair)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것을 줄이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그러한 불공평이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은, 우리에게 일종의 의무 - 불공평을 감소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한다고 생각한다. * 건강 불공평과 관련해서는 ‘불평등은 나쁘다’는 직관에서부터, 공리주의나 평등주의 같은 윤리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거들이 존재한다. 이 분야의 연구자로서, 학문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당신을 움직이는 동기는 무엇인가? 우선 이론적으로는 롤즈(John Rawls)의 정의론 개념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알다시피, 차이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차이가 공정하지 못한 경우다.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고,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한에서만 불평등을 용납할 수 있다는 롤즈의 이론은 건강 형평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인 동기라면,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체험할 수 있었다. 사실 응급실에서 24시간만 당직을 서보면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나? * 그렇다고 모든 의사들이 이 분야에 헌신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 상대적으로 평등한 뉴질랜드 사회에서 여기 미국으로 옮겨오면서 그런 문제에 더욱 민감해진 것은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다. 물론 뉴질랜드가 미국보다 보다 평등한 사회인 것은 맞지만 그 곳에서도 불평등 문제는 심각하다. 이를테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과 소수 인종 마오리 원주민 사이의 평균 수명 격차는 9년에 이른다. 이는 미국 흑인/백인의 수명 격차보다도 훨씬 큰 것이다. 내가 진료한 환자들의 상당수가 마오리 원주민들이었고, 그들의 건강 문제는 당뇨, 천식, 심장병 등 전형적으로 이곳 미국의 흑인들의 질환과 비슷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내가 처음으로 공중보건 분야의 연구를 시작한 것은 담배 규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일하다보면, 이것이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흡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건교육이나 홍보 활동이 중요하지만, 문제의 핵심에 사회적 불평등이 놓여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이 내가 건강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들이다. *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절, 사람들은 빈곤층의 사망률이 더 높은 것을 직관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영양실조, 열악한 주거 환경이나 불결한 위생 상태가 문제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심장병이나 암 같은 만성 질환이 중요한 건강 문제가 되었고, 그 원인도 흡연, 운동 부족, 스트레스 같은 것들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중요한 질병도 바뀌고 그 위험 요인도 바뀌었는데 빈곤 계층의 사망률이 더 높다는 사실만은 바뀌지 않고 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그렇다. 지난 세기만 해도 비만은 부유층, 심장병은 사장님들한테나 생기는 병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나. 그러나 비만이 부유층의 질환이던 시절, 전염병 때문에 사망률은 빈곤층에서 훨씬 높았었다. 이제 이런 만성질환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는 시기에 이르자, 그 위험요인들이 또다시 낮은 사회계층에 집중되고 이들의 사망률이 여전히 높은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의 링크(Bruce Link)와 펠란(Jo Phelan)이 지적한 대로, 이것이야말로, 사회경제적 요인이 건강과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 이러한 주장이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 불평등은 꾸준히 있어왔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건강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동안 전혀 성과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건강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건 상대적 의미에서 그렇지, 절대적 격차는 사실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최 빈곤층에서도 평균 수명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 않나. 미국 흑인/백인의 영아 사망률이 훌륭한 사례가 예가 될 수 있는데, 상대적 격차는 벌어지고 있지만 절대 차이는 분명 감소하고 있다.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지만 상황은 꾸준히 나아지고 있으며, 무언가를 하는 이상, 건강 불평등이 영원히 이 상태로 지속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 흡연이나 운동 부족, 식이 같은 위험요인들은 대개 개인의 생활습관들이다. 따라서 건강하지 못한 것이 이런 잘못된 생활습관을 가진 개인들의 ‘도덕적 무책임’인 것처럼 비판 혹은 비난받기도 한다. 심지어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에도, 시의 대피 명령을 무시하고 남아 있다가 그렇게 된 건 본인들의 잘못이라는 주장까지 있지 않았나? 좋은 지적이다. 물론 그러한 비난의 내용은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빈곤층의 절반 이상이 자가용이 없었고 시정부에서는 이들의 대피를 위해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었다. 차가 있는 사람들도 몸이 불편해서 혼자 이동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게 전형적인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의 예라 할 수 있다. * 록펠러 재단의 전직 이사장인 노울즈(John Knowles)는 ‘한 사람이 건강에서 갖는 자유가 다른 사람의 세금과 보험료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조(自助)와 개인의 책임감이 특히 강조되는 미국 사회에서 건강에 대한 개인 책임론은 더 큰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건강 불평등과 관련하여 개인과 사회의 책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건강 형평성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개인과 사회의 책임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차이로서의 ‘불평등(inequality)’과 불공정(unfairness)으로서의 ‘불공평(inequity)’을 가르는 기본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에 책임이 있다. 누군가, 완전한 세상에서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도 단지 즐기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담배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흔히,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나쁜 걸 알면서도 계속 담배를 피우는 개인들에게 잘못이 있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역학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 흡연을 지속하는 이들의 90%는 담배의 해악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있기 전에 담배를 피우고 중독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담배 광고는 바로 이들 미성년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일단 담배에 중독이 되고 나면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지식 그 자체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운동이나 식이 습관 또한 사회적 제약의 산물이다. 동네에 신선한 과일이냐 야채를 판매하는 상점이 없고,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이나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지식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좋은 걸 사먹고, 운동을 할 수 있겠나? 이런 상황에서 운동 안하고 식습관 나쁜 것이 온전히 그 개인들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많은 건강 습관들은 어릴 적에 형성되고, 그 환경은 어린이들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 부모들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 부모들 또한 한정된 자원 속에서 똑같은 사회적 제약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이 사회 안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고, 온전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 (Homo Economicus)이라는 개념 - 인간이 완전히 이성적이고,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올바른 결정을 통해 비용을 절감한다는 가정은 모든 심리학 연구들이 보여주듯 틀린 모형이다. 경제학자들도 이를 인정하지 않나. 문제는, 일반 대중들이 이러한 잘못된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인데, 미국의 경우 미디어의 오도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미디어는 이러한 건강 행동이 순전히 개인의 책임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 이건 한국도 매우 비슷하다. 건강 관련 TV 프로그램들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그걸 못 하면 의지박약한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교육 수준이 높고, 돈과 시간을 비롯한 자원이 충분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몇 년 전 하버드 교수 중에 하나는 왜 시민들이 하루 30분 운동도 못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심지어 자기처럼 바쁜 사람도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는데 말이다. (웃음) 이 양반 같은 경우, 먹고 살기 위해 두세 가지 직업을 매일 전전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전혀 생각조차 않고 있는 것이다. 따로 점심시간이 없고, 마땅히 씻을 곳도 없는 일터에서 점심시간 30분 운동이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이나 한 일인가? *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보여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은 미국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특히나 미국의 경제적 번영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던 한국 사회에서 그 반향은 더욱 컸을 것이다.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건강 불평등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무엇을 들 수 있나? 인종 간 격차 문제? 물론 인종, 계급 간 건강 불평등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그 자체는 미국만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서, 다른 선진국들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보건의료 비용을 지출하고도 건강 수준은 선진국들 중 거의 바닥에 머물러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 때문이다. 우리는 부유하지만,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보건의료에 지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민의 13-14%는 의료보험조차 없다. 미국을 모델로 쫓아가려는 어떤 사회도 이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결국 평균마저 까먹는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잠깐 다른 이야기이지만, 사실 카트리나 이후 황당했던 것 중 하나가, 이러한 비극이 그동안의 퍼주기 식 복지 정책의 실패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이라며 더 많은 감세를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공화당의 주장이었다. 세금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에는 무슨 이유든 다 가져다 붙일 수 있다. 감세야말로 저들의 만병통치약 아닌가? 심각하게 신경 쓰지 마라. (웃음) 카트리나가 보여준 것은,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진 구조적인 저투자와 저개발의 결과이다. 한 꺼풀만 벗기면 미국이 실제로 어떤 사회인지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생생하게 드러난 것이다. *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미국의 건강 불평등 수준은 여타의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서도 특히 심하다. 도대체, 무엇이 미국 사회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고 있는가? 우선 역사 그 자체에서 일부 답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심각한 인종 문제가 그렇다. 150년 동안의 노예제도, 그리고 이후 150년간 이어진 인종 분리의 역사는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인종간의 격차를 낳았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날 지속되는 흑/백인종 간 건강 격차의 상당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일부에서는 이질적인 인구 구성 자체가 불평등의 단초가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스웨덴의 경우, 가난한 이민자의 비율이 미국의 흑인 비율과 매우 비슷하지만 이 정도의 심각한 불평등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렇게 지속되는 건강 불평등의 이면에는 불평등에 대한 미국인들의 놀랄만한 너그러움을 중요한 이유를 들 수 있다. 미국 예외주의 (American Exceptionalism), 즉, 개인주의, 큰 정부를 싫어하는 반-국가주의, 심지어 세금을 통해 혜택을 얻고 있는 빈곤층에서도 뚜렷이 나타나는 세금 혐오, 그리고 도덕주의가 그 기반이 되고 있다. 미국은 매우 도덕주의적인 국가다. (웃음) 그래서 건강 문제도 바로 도덕의 문제로 치환되는 것 아니겠나? 역사학자가 아니라, 이러한 문화의 연원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미국 사회의 지배적 문화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전 나의 책에서 소개했지만, 미국의 경우, 소위 진보성향이라고 분류되어야 마땅할 노조 지도자들의 의견이, 유럽의 기업가들보다 더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 * 현실 정치에서 좌파의 힘이 약하다는 것도 한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동의한다. (진보/보수 간의) 힘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냉전 시대에 자행된 극도의 억압 - 상당 부분은 기업들의 음모로 알려져 있다 -은 모든 사회주의 형태의 노동운동이나 힘 있는 좌파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다고들 하지만, 만일 미국 사회에 강력한 좌파 정당이 존재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글쎄, 가정은 금물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공화/민주 양당 체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둘은 별로 다르지 않다. 논쟁의 범위는 협소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자체가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러나, 대선 후보였던 케리 (John Kerry)조차 극좌파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곳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좌파 정당이 출현하여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을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정치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어 급진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 역사를 보면, 모순이 심화되면 그 이후 과감한 개혁이 있었다. 20세기 초반 ‘진보의 시대(Progressive Era)’나 ‘뉴딜 (New Deal)’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이를테면, 현재 미국 달러화의 거품이 붕괴되고 이자율이 치솟는 상황에서 경제가 붕괴되고 실업률이 급상승하면 또다시 그런 급진적 개혁들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 그래도 그동안 미국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건강 불평등 해소 정책이 있으면 소개해주면 좋겠다.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는데, 존슨 (Johnson) 행정부 때 시작된 메디케어 (Medicare)와 메디케이드 (Medicaid) 사업은 건강 불평등과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빈곤층이나 노인에게 의료 이용의 접근성을 높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빈곤 예방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한 건강 불평등 감소에 기여했다. 잘 알려져 있듯, 의료비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가 미국에서는 상당히 흔하다. 또한 어린이들의 발달 교육 프로그램인 헤드 스타트(Head Start) 사업의 경우, 어린이 사망률의 전반적 감소는 물론 흑/백인 간 건강 격차를 줄이는 데에도 기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공중보건 활동 그 자체가, 의도적이던 아니던 간에 건강 불평등 감소에 큰 역할을 해왔다. 담뱃세 같은 경우 흡연율 자체는 물론 계층 간의 격차를 감소시킴으로써, 흡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의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 건강 불평등에 관한 연구로 치자면, 그 양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소개해준 프로그램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책 개발이나 실행은 연구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는 것 같다. 연구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데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를테면, 지난 해 막바지에도 메디케이드와 메디케어를 비롯한 사회보장 예산이 대폭 감축되지 않았나? 맞다. 연구 결과가 실제 정책으로 연결되기까지 현실적으로 여러 걸림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논하기에 앞서 한 가지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모든 연구와 정책 실행 사이에는 시간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 말이다. 거주 지역의 건강 효과를 예로 들어보자.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빈곤 지역의 사망률이 높은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살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주민들의 특성뿐 아니라 지역의 환경이나 정책 그 자체가 주민들의 건강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지역 자체를 바꾸기 위한 정책들이 개발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불가피한 시간적 격차를 인정한 가운데에서, 몇 가지 중요한 걸림돌들을 지적하자면, 우선 기업의 이해(vested interest)를 들 수 있다. 많은 기업들, 특히 대표적으로 담배 산업은 건강 불평등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다. 이들은 교육 수준이 낮거나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펼친다. (광고판들은 빈곤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건강 불평등을 감소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에 대해 이러한 기업들은 반격을 거듭해왔다. 예를 들면, 여기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1993년 주민 투표를 통해 담뱃세를 40센트 인상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후 담배 소비가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약 5개월 후, 담배 회사들은 정확히 40센트 가격을 인하함으로써 그 효과를 무위로 만들고 말았다. 두 번째 문제는 건강 효과와 정치의 시간적 불균형을 들 수 있다. 대개 정책의 효과들, 특히 건강과 관련된 효과들을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헤드 스타트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한 세대가 지나서야 그 건강 편익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4년, 혹은 7년을 주기로 선출된다. 눈에 보이는 단기적 효과로 승부하는 정치에서, 이러한 장기적 건강 편익을 도모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세 번째로, 건강 불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낮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건강 불평등 자체는 무척 오래된 현상이지만,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 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낮다. 몇 년 전 하버드 교수인 블렌던 (Bob Blendon)이 건강 불평등에 대한 전국 수준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당시 50% 이상의 미국인이 건강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흑인의 52%는 백인과 흑인들의 평균 수명이 같다고 믿고 있었다. 사람들이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를 바꿀 수 있겠나? 최소한의 민주주의 사회라면 대중의 의견이 선거로 반영되어 정치를 움직여야 하는데, 대중이 이 문제를 알지 못한다면 설령 정치인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굳이 어떤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지적한 세 가지가 건강 불평등에 대한 정책들을 만들고 실행하는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아닌가 싶다. 추가한다면, 문제에 대한 잘못된 진단과 처방을 지적할 수 있다. 건강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보건의료비에 대한 지출을 늘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설령 예산을 획기적으로 확충하여 현재 보험이 없는 사람들한테 모두 의료보험을 제공한다고 해도, 사회경제적 불평등 자체를 줄일 수 있는 사회정책, 이를테면 누진적 조세 제도나 최저임금의 인상 같은 것이 병행되지 않는 한 건강 불평등은 해결될 수 없다. * 보건의료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국 상황을 조금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 한국 정부는 보건의료와 생명공학 산업을 차세대 경제 성장의 주요 동력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세상을 들썩이게 한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 정부는 대통령 산하에 의료산업 선진화 위원회를 구성하고, 의료기관의 영리법인과 민간 의료보험 도입을 중요한 의제로 다루고 있다. 이 분야의 선험자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보건의료의 상품화가 미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나? 그러한 주장이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국식 보건의료 제도가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심지어 경제학자들조차, 민간 의료보험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 상황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천문학적인 액수가 환자 치료가 아닌, 환자를 거부하고 행정 처리를 하는데 낭비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미국을 따라 하려는 그 어떠한 시스템도 미국과 같은 대재앙을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단일 보험자 체계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데...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 이야기를 좀 확대해보자. 곧 출간될 당신의 책이 세계화와 건강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들었다. 세계화는 말 그대로 전 세계 모든 이들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건강, 그리고 건강 형평성과 관련하여 세계화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계화는 한편으로 건강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장점을 먼저 말한다면, 세계화는 우리에게 가능성, 지구촌에서 긴밀하게 통합되면서 서로에게서 편익을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열어주고 있다. 특히 기술적 진보가 그런데, 이를테면, 엊그제 신문에 보도된 대로 설사로 인해 일 년에 60만 명의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로타 바이러스 (Rotavirus)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나? 이런 기술적 진보가 이를 가장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에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잠재적인 장점이 아닐 수 없다. *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능성이다. 현실을 보자. 백신이 개발되는 것과,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 쓰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맞다. 세계무역기구 (WTO)로 상징되는 현재의 무역 체제는 이러한 잠재적 편익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 중요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지적재산권 (TRIPS) 문제는 대표적인 걸림돌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로타 바이러스 백신도 이 때문에 저개발 국가에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될 수 없을지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무언가 분명히 다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현재 전 지구적으로 자원 분포의 불평등은 매우 극심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잘 사는 나라의 작은 희생과 기여가 다른 국가의 시민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것이 일종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방식은 오히려 재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나는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수의 선진국들이, 물론 미국의 경우 좀 다르지만, ODA 규모를 늘려가고 있고, 심지어 민간 부문의 기여 또한 급진전하고 있다. 게이츠-멜린다 (Gates-Melinda) 재단이 저개발국의 백신 공급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다른 방향에서 볼 때, 에이즈 치료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에서 드러나듯, 대중의 광범위한 저항이 다국적 제약 산업을 한 걸음 물러나게 한 경우도 있었다. 현재의 불안정한 WTO 질서가 오래 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 이를테면 에이즈 약제 문제만 해도, 실제로 엄청난 희생과 투쟁들이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맞다. 하지만 컵에 반 남아 있는 물을 보고,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 이제 겨우 반밖에 안 남았네 하는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싶다. 세계보건기구가 주도한 에이즈 프로그램인 ‘3 by 5’의 경우 2005년까지 3백만 명에게 치료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계획했지만, 실제로는 목표 수치의 1/3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백만 명에게 새로운 치료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화에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기보다, 보다 세계화된 질서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세계화가 건강에 100% 해만 끼친다고 말할 수는 분명 없다.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사회 정의의 문제로 돌아간다. 미국 사회에서,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흑인 남성의 평균 수명이 57세 밖에 안 된다고 할 때 그것이 불공정한 것처럼, 분명히 우리가, 혹은 선진국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방글라데시의 평균 수명이 56세 밖에 안 된다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정의야말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 마지막으로, 건강 불공평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낙관주의라고 본다. * 하워드 진(Howard Zinn)을 비롯하여,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변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낙관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가장 낙관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에서 말이다. 약속이라도 한 것 아닌가? (웃음) 흥미로운 현상이다. (웃음) 낙관주의와 함께 우리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갖춰져 있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과 자원도 가지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불멸 지속하는 것은 없다. 미국 역사가 보여주듯, 어려움 뒤에 혁신적인 기회가 찾아왔고,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가 최고조에 이르면 그것의 변화 가능성 또한 높아지는 법이다. 다만 낙관과 열정을 가지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결국 신념의 문제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답변해주어서 고맙다. --------------------------------------------------------------------------- * Ichiro Kawachi 소개 가와치 교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낸 후 그 곳에서 의과대학을 졸업, 임상의사로 일하다 지난 92년부터 하버드 보건대학원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과 관련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해오고 있다. 280여 편의 관련 논문과 저서를 출판하였으며, 사회역학(社會疫學) 분야 최초의 교과서인 『사회역학』의 공동 편집자를 맡은 바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은행 (World Bank에서 건강 불평등 이슈와 관련한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저명한 국제 학술지인 Social Science and Medicine과 American Journal of Epidemiology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03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당시 한국 건강형평성 학회 창립 학술대회에 특강을 했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