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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와 루소

바쁘더라도 저녁나절 30분은 좀 차분히 앉아 '재미있는' 책을 읽어보자는 결심을, 나름 잘 지켜나갔던 3월이었다. #1.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 2006

크나큰 가르침을 얻기는 커녕, 현재의 업을 접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폭풍같은 회의감이 밀려왔던 책이다. 학문, 혹은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소명도 없이 어쩌다보니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 또 딱히 다른 것을 잘 하는게 없어서 어영부영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았다. 번역하신 분도 괴로워하신 걸 보니, 나만의 고민이 아님은 분명하다. *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 내적 조건 이미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학자가 된다는 것의 금권적 기반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은 다소 놀라웠다. 또 요행이 이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직업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장탄식,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라는 지적에서 나도 모르게 깊은 공감의 한숨을 ㅡ.ㅡ 외적 조건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내적 조건 - 열정과 소명의식이다. "..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치고 자기 일에, 그리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한 예술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결국 나보구 공부 그만두라는 소리다 ㅜ.ㅜ * 합리화 과정과 학문의 발전 "...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버리지도 않습니다....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능가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보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계속됩니다." 베버는 오늘날 특허와 지적 재산권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과학계의 비밀주의와 배타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주지주의화와 합리화, 즉 현실세계의 탈주술화가 학문의 소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나 원래 계몽주의자?) *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베버는 강단과 정치의 분리, 가치판단과 사실 판단의 분리, 교수와 지도자의 엄밀한 분리를 극도로 강조한다. (미국과는 달리) 권력관계가 두드러진 (독일의)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적 성실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나도 학부의 정규수업시간에는 팩트 이외에 사회적 발언을 절대 하지 않는다.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은 좀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든다. 요즘같은 세상에 선생이 이야기한다고 그대로 믿고 따라오는 학생들이 있기나 할까? 선생의 영향력을 오히려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주류집단의 지속적인 이념세례 속에서 한마디 정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가 강의실에서 보여준 태도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원칙에서 베버의 의견에 절대 공감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의 교수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이 강단을 저급한 선동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종합하고 전달하는 것 또한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결과가 보수적 온정주의가 되든 급진적 공동체주의가 되든 학생들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정작 어려운 것은, 더이상 성찰과 진지함이 사라져버린 강의실에 어떻게 진정성을 불어넣느냐 하는 것... 학교, 교육제도, 선생을 모두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보내왔던 지난 시절의 개인적 경험들로 핑게삼아, 좋은 학자, 좋은 선생의 자질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지난 수년을 보냈다는 게 좀 한심스럽다. 다른 거 마땅히 할 것도 없으면서... (어릴 적에, 돈 벌어서 만화가게 차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 ㅜ.ㅜ)


# 2.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해미와의 첫 책모임 이후 도대체 '사회' '공공'이 무엇이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옛 민주노동당 시절 진보정치연구소에서 펴낸 "사회국가'를 살펴보았다가 잔뜩 실망하고, 고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둘 다 루소 할배의 팬이 되었다. 이 분 엄청 발랄하셔!!! 이 텍스트는 평소의 내 지론대로 컨텍스트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가 얼마나 미워했을지 이해가 충분히 된다. 중세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겨우 탈주술화/계몽의 가치가 성장해나가기 시작한 그 시점에서, 기술과 학문의 발전이 불평등과 패악의 원인이라 주장하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계몽주의자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ㅎㅎㅎ (현실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회귀하자는 그의 발상이 목가적 낭만주의를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불평등이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사회와 정신'이 낳은 인위적 상황이라는 예리한 통찰, 법과 제도로 고착화된 추악한 전제군주제에 대한 비판은, 왜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자양분이라 일컬어지는지 잘 말해준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 앞서간 (!) 사상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논문의 헌사에서 제네바공화국 의원들에게 "... 그들 (시민들)은 교육뿐만 아니라 타고난 자연의 권리에서도 당신들과 대등하며, 자신들이 당신들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르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자진해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그들에게 일종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시민의 절반인 '여성'에 대한 언급, 그것이 비록 오늘날의 페미니스트적 관점과는 전혀 다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여성을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사랑과 정념의 기원에 대한 나름 냉철한(?) 추론 또한 흥미진진 ㅎㅎㅎ 인간의 이성보다 앞서는 두개의 원리로 자기애와 더불어 '연민'을 꼽고, 이를 확장하여 동물이 불필요하게 인간으로부터 학대받지않을 권리가 있다고까지 언급한 것은 더욱 충격... 연민이라... 루소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선한 존재로 바라보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본능적으로 함께 아파하는 이 마음.... 오늘날, 특히 한국사회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쩌면 연민이 사라져가는 사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현은 이것이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읽은지 오래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이렇게 재치있는 말투로 쓰여지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전이라면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 한편으로 한심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임무를 완수했다는 자부심 이외에, 얼마나 이 내용과 맥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이를 먹고, 경험과 지혜(??? 그냥 지식이라고 하자 ㅡ.ㅡ)가 쌓이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참, 이 책이나 베버의 책 모두 보기 드물게 번역글이 아주 매끄럽고, 참고문헌과 해제도 충실하다. 문고판이라 부담도 없으니 주변인들께 널리널리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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