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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 서경식...

요사이 전공책이나 논문들은 통 읽을 시간이 없는데 틈틈이 읽는 다른 분야 책들이 훨씬 압도적인듯하다. 책상에 정좌하고 읽는 것보다 오가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게 더 효율적이란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공부도 길바닥을 오가면서? ㅡ.ㅡ

 

#1.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정혜용 옮김 [에콜로지카] 생각의 나무 2008

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생각의나무, 2008

 

데이비드 하비의 책을 읽는 동안 해미가 적극 추천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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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처럼 쓰여진 인터뷰글에서 '사회주의가 만약 도구를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 결국 고르의 핵심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노동의 재구성, 성장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즉, "탈성장은 살아남으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탈성장에는 다른 경제, 다른 생활 방식,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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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생산만이 부가 되고 (자발적인 물물교환이나 생태적 노력들은 국민총생산에 포함되지 못함)과 파괴가 부의 원천으로 나타나는 현실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지적에는 백퍼센트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에콜로지카'를 상상하지 않고는 이 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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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의 '생계수당' 요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것이다. 즉, '인간의 활동을 고용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이고, 이러한 무조건적 사회수당은 오늘날 한국 사회 '기본소득' 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생계수당을 재분배 논리안에 위치시켜서는 안 되고, 자본과 노동에 바탕을 부를 급진적으로 넘어셔야 한다는 지적에 매우 공감... 하지만, (내가 현재 '기본소득' 의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사회의 기본소득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들이 있다. 그 논의의 적절성을 떠나, 일단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는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게 어떤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어질지 백만볼트의 걱정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나 '근로윤리'에 깊이 천착해서일 수도 있다. 일이라는게 과연 생계만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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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노동과 성장 담론을 '어떻게' 재구성 하느냐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자본주의가 가속화될수록 그리고 기술진보와 지식정보 사회의 도래에 따라 노동의 필요는 점차 줄어들고,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최소노동을 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유의지에 따라 우아하게 보낼 수 있는 물질적 토대로 작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동의 가치가 하락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적대적 공존의 토대 - 노동자는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필요로 하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는 - 에서 노동의 힘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일자리가 이제 사라져가는 종"이 되고 있다는 지적은 긍정적으로 본다면 인간해방과 새로운 노동 구성의 토대임이 분명하지만 (노역으로부터의 해방...), 분명 현실의 전선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힘의 약화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책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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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생산의 주요한 힘과 지대에서 취하는 이익의 주요한 힘이 차츰 공공영역으로 떨어지고 무상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 생산수단의 사유화, 공급의 독점이 차츰 불가능해진다는 지적은 동의하기 어렵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퇴장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바는, 자본이 소비에 대해 행사하는 장악력으로부터, 또 생산수단의 독점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된다' 는 지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한 해석이다. 일부 해커들의 활동이 나, 소규모 자치생산의 경험들이 너무 과도하게 해석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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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를 반박한다는 것이 가구단위나 마을 단위의 자급자족 경제로의 회귀도,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통합적이며 계획적인 사회화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 일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해야만 하는 것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자유의 영역을,그러니까 집단의 활동이든 개인의 활동이든 간에 그 자체로 목적인 독자적 활동들의 영역을 '최대로 확장하기 위해서'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아... 근데 이것도 잘 모르겠다. 통찰력으로 가득 찼던 Le Guin 의 'Dispossessed'에 보면 이상으로 건설했던 계획경제 사회가 어떤 비극을 가져왔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생산력의 발전수준으로 볼 때,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Anarres의 그 척박함과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수요와 필요'를 조정하고 충당하기 위한 중앙기구의 설립이 그닥 효율적이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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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과 고민거리를 잔뜩 던져준 채, 뭔가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 것 같아서 다른 책을 읽어볼까했더니 국내에 번역된 다른 글이 아직 없다 (D에게 보낸 편지 말고). 어쨌든 이 글들이 쓰여진 것은 1970년대부터였으니, 하여간 할배의 통찰력은 대단한 것 같다. 어여 다른 책들도 나왔으면 좋겠네.. 답을 주셔야죠!!!



#2. 서경식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철수와 영희 2009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서경식
철수와영희, 2009

 

 

가끔씩 언론에 실린 짧은 글만 읽다가 처음으로 그의 '책'을 읽어보았다.

 

* 이 분 까칠하시다... 그리고 내공이... 이건, 삶의 신산함과 뿌리뽑힘을 당해본 사람만이, 그리고 그로부터 분노와 원한만이 아닌 통찰력을 얻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내공이 아닌가 싶다.

 

* 민족과 국가, 그리고 소수자, 디아스포라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에 대해 저자는 예리하고도 냉정하며, '민감'하다. 국가의 국민이 '스스로 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여러가지 권리만 누리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악행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지적에 많이 공감한다. 물론 그것이 책임있는 분명한 행위자에 대한 면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누구인가?" 그렇다. 나도 항상 궁금했던 것... 논문이고 신문기사고, 칼럼이고, '우리'라고 표현된 글을 읽을 때마다 항상 궁금했었다. ㅎㅎ

 

* '생명이 선이고 죽음이 악이다'라는 장은 특히 많이 공감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살한다. 이를테면 프리모 레비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이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 자신이 부조리하게 얻게 된 생명의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물론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관찰되는 자살의 사회적 불평등을 '용인'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 또, 루쉰을 이야기하며 무조건적인 '희망' 고문보다는 차라리 현실을 대면하는 비관이 더 적절할 수 있다는 지적이 참 인상적이었다. 루쉰의 이야기 "그렇다. 나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도 희망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희망은 앞날에 속하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는 내 증명으로 희망이 있다는 그를 설복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저자는 마지막 인터뷰 글에서 한국판 '시라케'를 무척이나 걱정하며 비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진정성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소위 진보주의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적극적 반동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시라케... 저자가 걱정하는 방향으로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는 것같다. 워낙 다이나믹 코리아니까 사실,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만, 그렇다고 대책없는 낙관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솔직한 비관주의자'가 되어 고통과 기억에 기반한 연대를 구축해나가는게 어떨까 싶기도 하다...

 

#3.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청춘의 사신] 창작과 비평사 2002

 

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창비(창작과비평사), 2002

 

저자의 두번째 서양 미술 기행이다. 아마도 신문에 연재했던 것이라 그렇겠지만, 각 편마다 분량이 지나치게 짧아 많이 아쉽다. 더구나 소개된 그림에 대한 도판이 모두 실린게 아니라, 충분히 저자와 '공감'하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라는 특정 시점에서 시대와 혹은 자아와 온몸으로 싸웠던 미술가들의 이야기는 일부 새롭기도 하고, 혹은 알고있었지만 여전히 숙연해지기도 하고... 오래된 책이지만 윤범모의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를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고민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듯... (물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노버트 린튼의 [20세기의 미술]도 매우 훌륭했지만, 감흥의 영역은 약간 다른 듯...)

이 책에서 표지그림이자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에곤 쉴레의 [소녀와 죽음]은 나도 액자로 가지고 있는 애장품이다. 악착같이 죽음을 붙들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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