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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의 시대.. 흑....

앙드레 고르 할배께서는 일찍이,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하니 이제 기본소득 받으면서 최소한의 억지 노동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뭔가 보람찬 일을 하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아름다운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제레미 리프킨은 천만의 말씀,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하니 이제 인간 노동력 필요없음, 노동의 종말 시대가 올 것이로다... 인간들 불쌍해서 어쩌나.... 대안 에너지 산업 같은 다른 일자리 만들어야지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충고하셨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심정적으로 앙드레 할배를 지지하지만 제레미 할배가 현실에 더 잘 부합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주에 읽은 미국 정치학자 크렌슨과 긴스버그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비단 생산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도 잉여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후마니타스, 2013

 

오호 통재라... ㅜ.ㅜ

노동시장에서도, 정치의 장에서도 이제 인간들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니... 우리는 이제 매트릭스에 에너지나 공급하면 되는 존재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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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참여의 '기술적' 기회는 증진되고 있는데, 그깟 '사람'쯤은 필요도 없는 정치라니.... 이 책에서는 정치엘리트들이 더이상 대중을 동원하지 않고, 그들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진단한다. 

 

자들은 이를 '대중민주주의'와 구분해 '개인민주주의'라고 지칭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에피소드라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료 시민들을 돕기 위해 뭐라도 하려 했던 애국적 시민들한테 부시 대통령이 했던 말 - 뒷수습은 정부가 알아서 할테니 시민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하던 대로 열심히 쇼핑을 하면 된다고 했던 것이다. 이건 미국 건국 이래 전쟁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징병을 하고, 또 집권을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고 소수인종 지역사회를 조직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바야흐로, 시민들의 참여나 지원, 적극적 의지의 표명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국정운영이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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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의지를 대표한다는 좋은 뜻이든, 대중을 이용해먹었다는 나쁜 뜻이든, 정치엘리트들은 그렇게 '대중'으로부터 권력의 기초를 확보했고 그들이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소위 '개인 민주주의' 시대에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권력에 접근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예측하기도 어렵고 조직화에 노력이 필요한 대중들은 없어도 그만이다.  엘리트간 갈등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고 따라서 대중 참여도 증가할 것이라는 고전적 대중 동원이론은 이제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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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노동현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던 수고로움을 이제는 시장, 법원, 행정절차가 '덜어주고' 있다. 

 

정당들은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더이상 기울이지 않으며 막대한 선거기금을 활용한 공중전에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한 '정쟁'이 격화되고 일반 시민들의 정치의욕은 더욱 약해진다. 예비경선, 정당 공천 없는 선거는 정당정체성이나 평소의 정당 조직화 수준보다는 이슈나 이념, 정책 선호에 따라 향배가 결정된다. 교육받은 중상계급의 관심과 선호, 참여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 정치 또한 대중을 탈동원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강한 주장을 갖는 의견과 조직화에 드는 비용을 대신해주며, 그 결과는 '집단'의 의견이라기보다 '개인의 합'으로서의 의견일 뿐으로 간주되며, 무엇이 의제가 될지를 사전에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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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 생각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전문적 기술역량을 갖춘 (심지어 한국에서는 댓글달기 능력까지 있어야 하잖아.. ㅜ.ㅜ) 관료체계는 행정과 정치를 분리시켰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되면 행정은 대중을 '동원'하는 일 따위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질 필요도 없다. 시민은 이제 주권자가 아니라 행정서비스의 소비자가 된다. 

 

이러한 흐름의 본격화된 것은 소위 '혁신의 시대 (Progressive era)'였다고 저자들은 진단한다. 당시 혁신주의 흐름은, 기존의 정치/경제/사회 체제가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진단하고 이를 '깨끗하고 효율적인' 체계로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정당제도, 선거제도, 관료제의 부패와 비효율이 주된 개혁 대상이었고, 당연히 이를 통해 '정치의 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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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시민단체들도 풀뿌리에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힘으로 정치권과 기득권 세력을 압박하기보다 워싱턴에서 로비를 하고 씽크탱크를 운영하고 소송을 통해서 원하는 것은 얻는다.

메일링리스트로만 존재하는 회원들은 회비만 내주면 그만인데, 그나마 소송이나 정부 기금을 통해서 재원을 마련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개미회원들의 회비도 그리 절박한 것은 아니다.  

 

노조도 조직률은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중앙무대에서의 로비를 통한 정치활동은 더 활발해지는 역설적 상황이 낯설지 않게 된다. 

 

제도적 차원에서 적극적 차별 시정 정책을 강화하고 소송을 통해서 그 범위를 확장하고 지키는 것 또한 집단 동원과 투쟁을 약화시키고 소수인종 중상계급을 분리하여 불평등 강화로 이어졌을 뿐이다.   

 

시민단체들의 의제 또한 탈동원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날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생태주의, 삶의 질을 표방하는 탈물질주의적 지향은 중산계급의 담론이다. 즉 물질적 복지보다는 안락함과 지위, 심미적 만족이라는 부유한 엘리트들의 협소한 욕망이 운동의 초점이 되면서 삶의 조건 개선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버렸다. 저자들은 극단적으로 "탈물질주의는 가난을 비껴간 시민들의 신념"이라고까지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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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공립학교를 개혁하기 위해 학부모가 지역사회가 조직화를 하고 항의를 했지만, 이제는 바우처를 이용해 더 나은 학교로 이동해버리면 그만이다. 바우처 제도야말로 공공정책을 '사적 결정'으로 순치한 어마어마한 수단이다. 민영화의 어떤 메커니즘보다 확실하게 시민을 '고객'으로 바꾼 것이 바로 이 바우처 제도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는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뒤집혔다. 그래서 바우처 제도 반대쪽에서, 집단적 저항운동은 개인의 '봉사활동'으로 순치되었다. 정치활동은 혼란이나 모호함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취와 역량 강화가 동반되는 개인들의 그 무엇이 되었다. 여기에서 자발적 행동주의는 집단적 반대를 사회봉사와 치유 노력이라는 풍경 속에 은닉'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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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문제의식과 진단에 동의하면서 장탄식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탈동원화의 문제가 한국사회만큼 극적으로 진전된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국민경선제니,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같은 정당 자해적 개혁조치가 정당으로부터 나오고, 또 시민사회에서 수용되는 현상을 보면 그야말로 곡소리가 절로 날 지경이다.  아주 꼴도 보기 싫은 바우처 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봉사' 문화에 대한 지적,  소위 '정부혁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탈정치/탈동원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100%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책을 읽는 내내, 결국 저자들은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과거' - "대중민주주의가 펄펄 살아 숨쉬던 그때가 좋았지" 라며 실재하지 않았던 ideal 에 사로잡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암묵적으로 저자들이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란 것이 도대체 뭔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행진을 하는 것, 노동조합에 정당에 등록을 하는 것, 투표장에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것. 이런 것이 대중 민주주의의 전부인가??? 

게다가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의심', 활동에 대한 '의심'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타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연대나 헌신은 과거 그 어느 시기에 존재했다던 전설 속의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시민단체라는 것들은 다 자기 조직 보전하려고 활동하는 거다, 소위 '직업적 사회운동'은 소수의 상근 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며 오로지 상상된 이해 당사자들을 대표한다, 집단 소송이라는 게 결국은 변호사들이 돈벌이하려고 조직하는 거다, 담배 소송처럼 정부나 시민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면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배상이 돌아가기보다 결국 타협과 야합으로 끝나서 해악은 계속되고 정부나 시민단체, 변호사들만 돈번다, 넷스케이프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부당독점으로 기소한 것은 시장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시장과 광범위한 대중이 아닌 '판사만 설득하면 되는' 법정으로 가져간 것이다, 더많은 의료보장을 위해 지출하라는 '이익단체'는 절대로 저절로 생겨나는게 아니라 기업가적 정치인들이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건, 사실 한국사회에 굉장히 익숙한 레토릭이다. 시민단체 명망가들이 다들 나중에 자기 출세하려고 이용해먹는 거다.... 그런데 결국 이런 논리가 가져온 것은 엄청난 탈동원화와 무력화 아닌가 말이다.

저자들이 생각하듯 세상에 선의, 연대의 진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중 민주주의란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세상에는 충돌하는 '이해관계'만이 존재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권력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것만이 정치이고 대중민주주의인가???

 

이를테면 환경이슈가 반드시 중산층의 탈물질주의적 지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 빈곤지역에 환경피해가 집중되는 환경 부정의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국민건강보험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공룡 마이크로소프트의 부당행위에 맞서기 위해 넷스케이프가 법정이 아니라 시장에서 정정당당하게 (?) 싸워야 했단 말인가? 소비자들을 조직해서 불매운동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이 저자들의 밑도 끝도 없는 인간 불신에 기분이 나쁘다.. ㅜ.ㅜ

이렇게 인간을 못 믿으면 대중민주주의 절대 못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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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자들이 지적한 요소들 - 시장, 관료제, 여론조사, 로비와 씽크탱크 같은 - 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대중민주주의를 저해하고 있는가,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같다. 한국은 진보고 보수고 간에, 미제라면 다들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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