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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위안에 대한 이야기들

지난 한 주는 참, 어두운 소식들이 끊이지 않는 이상한 한 주였다. 초현실적이었던 박상표 선생님 부고도 그랬고, 친한 지인들의 개인적 수난들도 참 그로테스크했다... 

정말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찬 망망대해인가 싶다.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이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을까? 

우연히도, 지난 2주 동안 삶에 대한 책과 영화를 읽고 감상했지만, 정작 이런 일들에 대처하는데 어떤 용기와 지혜를 주었는지는 잘모르겠네 그려.. ㅡ.ㅡ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행복의 건축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

 

지난 가을 무렵에 문을 연 동네 도서관에는 새 책이 그득했다. 읽고 싶었던 리차드 세넷의 책들, 사회과학 서적들은 찾아보기 힘든데 그대신 예술이나 문학, 소프트 버전의 인문학 서적들은 꽤나 갖춰져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모두 반딱거리는 새 책이라는 점이 장점....

보통의 이 책은 사실 제목을 '행복의 예술'이라도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작정하고 예술을 의도한 작품과 달리 건축물이란 일상 속에 존재하고 특히나 '실용성'이라는 목표가 있는만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고 감상할 지점이 있는 예술품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마음에 남는 문장들은 이것들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투사를 견딜만한 내적 자산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도모른다. 그런 작품은 좋은 특질을 단지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현한다."

(나같은 경우) 예술작품이 감상 당시의 맥락이나 감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비해, 돌이켜보면 정말 위대한 작품들에서는 그런 감정과 맥락 없이 그 자체로 경이와 감동을 느꼈던 것 같다. 

"사회는 무엇이든 자기 내부에 충분하지 않은 것을 예술에서 찾고 사랑한다...."

그러게나, 각박한 기술문명사회는 자연을 동경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된 사회는 '첨단'의 이미지를 선호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독특하다. 이제는 기술/첨단/규모에의 집착을 버릴 때도 되었다 싶은데 말이다.   

노발리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술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서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 정말 탁월한 진단이 아닐 수 없다. 

 

 

#.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2

 

그야말로 다양한 '위안'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위안을 얻으려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일 위안이 필요해서 읽었더라면 대실망했을 것 같다. 절박하게 위안이 필요한 급성기 환자보다는, 만성적으로 인생에 회의하는 이들에게 살짝 고개를 돌려보라고 제안하는 일종의 nudge? 정도로 생각하면 충분할 듯하다. 

책은 크게 여섯 가지의 위안이 필요한 사람 혹은 상황에 대해서, 여섯 명의 철학자들의 입과 생활을 빌어 '그렇지 않아' 라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기없는 존재 - 소크라테스 / 가난한 존재 - 에피쿠로스 / 좌절한 존재  - 세네카 / 부적절한 존재 - 몽테뉴 / 상심한 존재 - 쇼펜하우어 / 어려움에 처한 존재 - 니체" 가 그것이다. 

 

문제는, 스스로 저런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감히 언급된 철학자들의 처지와 가르침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을 것 같지는 않더란 말씀.... 

이를테면 모든 통념에 대한 질문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온통 불편하게 만들었던 인기없는 존재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며,  "소크라테스의 예를 따라서, 늘 이성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고 이야기하는데, 글쎄다. 많은 사람들이 인기가 없는 이유가 그들이 세상과 불화하는 소크라테스, 혹은 랭보나 보들레르이기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ㅡ.ㅡ  

 

또한 정상과 비정상성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고 현학을 멀리했던 몽테뉴의 가르침을 따라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이라면, 비록 지혜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우둔함에서 결코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성취를 이룬 삶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얻을만큼 우리가 순진하지는 않다.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에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정신승리와 현실 굴종의 내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한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책 혹은 이런 종류의 위안/힐링 강연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는 것일까? 보통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거듭 이야기했듯,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사람들은 도통 알지 못하고, 수학이나 문학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치는 학교가 필요하다는 진단과 무관하지 않겠지...

 

 

#. 벤 스틸러 감독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너무 전형적이긴 한데, 순간순간 빵 터지는 코미디와 아름다운 풍광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뺏겨버린 영화라고나 할까.... 사실 아무 데도 가본 곳이 없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는 월터의 일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왔기에 딱히 로망을 가질 만한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모험을 떠나는 소심남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응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린란드 항구 마을, 아이슬란드 화산 도시, 아프가니스탄 산자락이 모두 사실은 아이슬란드 였단다. 시규어 로스의 뮤직비디오에서 마주쳤던 풍광을 떠올렸었는데 역시나....

 

누군가 '현재' 우울한 사람이 있다면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 보다는 이영화를 추천해주겠다.

 

 

#. 연상호 감독 <사이비>  

 

사이비

 

이 영화는 '위안'이라는 단어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말종이 진실을 말하고, 신을 참칭한 사이비들이 그 인간말종으로부터 응징을 당한다.

 

하지만, 이런 인생의 아이러니는 이 영화가 던지는 불편한 질문의 일부에 불과하다.

터무니 없는 사이비로부터 진정한 위안을 얻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진심어린 표정이야말로 이 세상이 얼마나 난해한 곳이며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었던 것 같다. 보상금을 모조리 기도원 건립기금으로 갖다 바친 마을 주민들, 치료약이 아니라 반석 샘물을 마시며 병을 키워나가는 마을 주민의 모습에서 우리가 본 것은 광신자들의 기괴함이나 어리석음이 아니었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지만, 어쩐지 그 평화를 깨뜨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또한 세월이 흐른 후, 신을 비웃으며 사이비들을 응징했던 인간 말종이 자신만의 '진정한' 신앙으로 귀의해 있었다는 사실도 맘을 착잡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이비가 아니라 '진짜'라면 괜찮은 거였던 것일까? 진짜와 사이비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영화가 너무나 리얼해서, 실사가 아닌 굳이 애니메이션으로서 갖는 장점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저 끔찍한 상황이 실사가 아니라서 조금 덜 부담스럽게 직면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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