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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적 비관과 장기적 낙관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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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포스팅 하나 해볼까 하던 차에,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의 필요와 삶의 길이는 정말 아무런 연관성이 없나보다. 

선생님 부디 영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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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우리 세대 혹은 나에게 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한 시절을 공유한 기억이 많았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잦아졌다. 아마도, 재미난 농담이 창궐할 것만 같았던 어느 만우절 아침, 메신저를 통해 들불처럼 번졌던 장국영의 죽음 소식이 그 결정적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세계의 어느 부분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야 항상 있어왔던 일이고, 아마도 정보 공유가 쉬워진 오늘날 그 체감 수준이 부쩍 높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과 나의 세대적 간극이 점차 줄어들고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이들의 떠남이 점차 빈번해졌다는 것이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죽음에 익숙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이야말로 나이듦의 뚜렷한 징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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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소위 '생계형' 알바 청년들의 실태조사 결과를 보고하는 토론회에 다녀왔다.

정말 '아유, 애기들이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20대 초중반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참 설명하기 어려운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많은 노동자와 소위 사회적 약자들을 직접 만났고, 또 글로 영화로 무수히 간접경험했지만, 유독 심사가 복잡했다. 

평생 불안정 고용, 성차별, 빈곤의 나락과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지탱해왔던 고령의 여성 노동자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 삶의 신산함과 '성실함'에 대해서 나즈막한 한숨과 경의를 내뱉었지만, 이 젊은이들에 대한 감정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 지나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그들은 너무나 씩씩하게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고 있는데, 나 혼자 비관의 늪에 빠져서 '괜찮아, 좋아질거야'라고는 결코 말해줄 수 없음을 괴로워했다. 저렇게 똘똘하고 씩씩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온 대견한 청년들, 하지만 '가난'이라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굴레에 묶여 있는 이들의 앞길에 펼쳐질 길이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뭐,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나의 10대, 20대도 생계와의 고분군투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학력 자본이라는 당대의 희소 자원이 있었고, 무엇보다, 앞으로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시대적 낙관이 있었다. 내가 극도로 싫어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소위 청년/학생들이 엘리트 계층으로서 분에 넘치는 발언권을 가졌던 시절이기도 했다. 아마도 소위 '386 세대'는 더했겠지만,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의 대학생들이 남한 사회를 (최소한 말로는) 들었다놨다 했던 것이다. 내일 당장이라도 세상을, 학교를, 공장을 뒤집어 엎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대학생들의 객기란, 지금 돌아보면 황당하기 그지 없다. 정말 국제 정세 한 톨도 모르면서, 용감하기는 무지하게 용감했었다. 

그랬는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청년 세대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물론 88만원 세대론이 제기한 것같은 연령/세대 중심의 분할론에는 지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장학금 지급에 필요한 소득 상한 기준을 만족시키는 가난한 학생이 도무지 없어서 기금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의대 교수의 이야기가 새롭지도 않고, 또 중고령의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청년 계층 내부에 자리한 이러한 간극을 뛰어넘을 방법이 (앞으로도) 좀처럼 없다는 점이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데, 인생 경로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면, 이보다 슬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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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주고, 조언을 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줄 '어른'이 절실하다고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소에 가져왔던 '스무살 넘으면 다 어른'이라는 지론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그 어떤 '어른'보다 용감하게 살아왔지만, 그걸 너무 혼자, 어렵게 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부정하고 있었지만,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들어버린 데 일조해버린 '기성세대'라는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지난 세월호 사건 이후에도 경험한 감정이다.

아마도, 죽음의 빈번함과 익숙해짐만큼이나, 이런 '세대적 미안함'이야말로 나이듦의 중요한 징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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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우주적 시간 프레임에 기대서, 단기적으로 비관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낙관해왔는데, 이제 그러한 낙관에 자신감이 사그라든다.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도저한 낙관을 상상해본다. 30년이 넘는 세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식민지배의 영구성을 의심치 않았던 상황에서, 그들을 지탱한 낙관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말이다. 지리산에서 스러져간 혁명 빨치산들, 광주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던 시민군의 낙관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바닥 없는 비관이 휘몰아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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