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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2/10
    한 친구의 독백을 들으며 시 한편
    푸른들판
  2. 2008/12/06
    현의 울음과 인권 사이
    푸른들판
  3. 2008/12/02
    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이라...
    푸른들판

한 친구의 독백을 들으며 시 한편

쓰린 마음 속에 촛불 하나 켠다
어둡다- 춥다-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
조용히 웅크려본다

 

 

쓰라린 마음 속에 촛불 밝힌 벗
그녀가 보인다
눈물이 난다
그리고...
조용히 웃어본다

 

 

온몸이 데인 채 촛불을 켜고 활짝 웃는 벗
그녀도 보인다
같이 웃기가 힘들다
미안하고 아프다
...


 

그녀들이 나를
나를...
내 촛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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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울음과 인권 사이

현(14개월된 아가^^)의 울음. 아침부터 자지러지게 우는...

그 이유를 차분히 생각할, 현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는 나.

(참고로 현재 남편은 시험공부때문에 집에 안들어오고 있는 상황...

 집에는 나와 현만이 ㅜㅜ)

내 할 일이 우선인 나...

 

나는 그렇게까지 급해야만 했나?

때는 새벽 6시 반

집을 나설 때까지는 1시간 반이 남은 상황.

현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지 않는 나.

(사실 들여다보려 몇 번 어줍잖은 노력을 했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이 아이의 마음)

내 위주로 생활질서가 잡힌 나.

그 흐름을 깨뜨리는 누구에게라도 나는 으르릉거린다.

하물며 약한 미물인 아이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현은 단순한 희생자, 나는 어른의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가해자인가?

 

 

 

 



인권의 지평을 넓힌다 할 때

고정된 '인권'이 아닌 가능성, 저항의 언어로서의 '인권'을 지향한다고 할 때

'보편 인권'이라는 틀을 넘어서고자 할 때

당사자 개개인의 '인권' 목소리를 넘어

개개인의 권리를 잠시 양보할 마음을 가진 자들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 만남에선 우선 나의 역구를 내려놓고

기꺼이 타자(주되게는 소수자)의 위치를 최우선으로 놓아야 한달 때

(인권재단 사람이 주최한 '인권이야기 두 마당'에서 나온 이야기들)

 

다 맞는 이야기고, 내 지향이기도 한 이 이야기들이

내 삶의 현실 속, 현과 나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사색에 빠진다.

 

나는

어제 아침 소리지르며 우는 현을 때린 나는

현에게

그 현장에서는 억압자, 소리를 막는 자였다. 부인할 수 없다.

그 시간, 그 현장에서 나는

울어대는 현과 만남의 자리를 갖기 위해

나 자신의 질서, 편안함, 욕구를 접지 못했다.

현의 공감받고자 하는 감정을 무시했다.

이 공간에선 난 가해자였다.... ㅜㅜㅜ

 

그런데 모두들 알겠지만,

인간사회는

이 둘만 사는 공간으로만 형성되어 있지 않다.

어제 아침의 그 순간에는 가해자였지만

나를 가해자인 그 상황으로 몰고간 것을 100% 내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현이를 혼자 돌봐야 하는 현재 상황...

퇴근하고 와도 여전히 남아있는 빨래, 청소, 현이 목욕시키기, 재우기,

자다 우는 아이 달래서 다시 재우기, 아침에 우유 먹이고, 옷입히기...

밤에 두 세번은 기본으로 뒤척이고 깨서 우는 현이와 살다보면

과연 쉼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떻게 존재하는지 묻게 된다.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감기를 달고 사는 나...

나를 지지해줄 체계는 가족밖에 없는 현실...

그나마 그 가족(남편, 시부모 등등)조차 각자의 이유로 바쁘고...

 

 

인권의 지평을 넓힌다는 이야기...

뭔가 동의는 되는데, 제대로 잡히지가 않는다...

우선 수면부족으로 머리가 제대로 안돌아간다...

졸린다... 그래도 글을 쓴다... 이게 살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우선 먹고, 자고, 입는 문제만이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제대로 해결되었음 한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한다, 요즘...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후원하는 일도 줄어들고 있다.

나 살기 힘들다고...

지구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속에서

그나마 한국의 삶은 풍요롭지 않았던가?

그 풍요로움을 조금 깎였다고 내 돈 아끼기에 급급한 건 아닐까?

나의 풍요로움 아니 현재의 적당함을 나눠서

내 주변 다른 이들의 배고픔을 함께 하는 일

그 일부터 나는 해야겠다.

 

잠이 부족하다, 지지체계가 없단 말

그 말도 수많은 다른 여성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너무나 풍요로운 수다에 지나지 않을지도...

 

허허허 오늘도 수다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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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이라...

양육, 육아의 고통을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한, 경험하고 있는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주제인 '입양'

 

'입양'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겠고,

많은 부분 '불임'이라는 상황 속에 피할 수 없는 대안이기도 하겠지만...

소위 혈연 중심의 가족을 당연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입양'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그 안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면서 당하는 고통들...

그러나 그 고통을 통과하면서(입양사실을 알리고, 입양 가족 안에서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가족제도와 문화에 균열을 내고 있는 그들.

 

그들은 특별히 더 선한 사람들도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필요와 이유에 따라

입양이라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단지 입양가족을 바라보는 사회 전체의 고정된 시선, 반응이 차별적이라 문제인 것이지...

 

그런데 그런 입양의 특수성과 대비해 나는 어떤가?

 

   

 




지난 주에 현이(아기 이름)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중에

두 분의 여성(60대 정도로 보이는)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저렇게 어린애를(현재 현이는 만으로 14개월) 어린이집에 보내다니.. 애도  불쌍하고 엄마도 불쌍하다

 엄마는 돈 벌러 일하러 가야되고, 애하고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입양이라는 상황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기가 어릴 때(통상 만 세 살 전)에는 엄마하고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는 주변의 시선으로

나는 죄많은, 그러면서도 불쌍한 엄마가 되고 만다.

나는 죄 많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당연히 어떤 상황에서도 사회적으로 일이 필요한 사람이다.

여자는 가정, 남자는 바깥일이라는 이분법은 나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억지로 떠밀려 일하는 불쌍한 사람 취급받고 싶지 않고,

엄마하고만 아이가 있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 깨닫기도 한 사람이다.

(지난 6개월 아이와 단 둘이 있으면서 우리는 서로 행복했던가? no!! 나는 나대로 내 일을 못해

스트레스 받았고, 아이는 나밖에 의존할 사람없어서 괴로웠다, 어떻게 아냐규? 엄청 많이 울어댔으니까!)

 

 

그날 그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바로바로 이야기 못하는 나의 한계여!)

지금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지금 우리 아기는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들 사귀면서 사회생활 잘 배우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거든요.

저도 일 시작하면서 더 행복하고, 아기에게도 짧은 시간이지만 둘만 있을 때보다 즐겁게 지내구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뭔가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고루한 관념으로

자신이 맞다는 고정된 시선으로

타인들의 상황을 재단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거다.

 

입양가족들에 대해서도, 일하는 엄마와 어린이집에서 낮시간을 보내는 영아에 대해서도

동성애 커플에 대해서도, 성폭력피해생존자에 대해서도,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기존에 가진 색안경으로

불쌍해하거나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그런 태도들...

 

그게 참 무섭단 생각이 든다....

 

권지성씨가 쓴 '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은 나에게 이렇게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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