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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1/28
    새 희망의 정수박이(2)
    푸른들판
  2. 2008/11/17
    마음 깊이
    푸른들판
  3. 2008/11/14
    말하지 못하는 자의 괴로움
    푸른들판
  4. 2008/11/13
    시어머니와의 미묘한 며칠간(2)
    푸른들판

새 희망의 정수박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내가 가끔 찾아가는 조이여울 기자의 블로그에 한용운 님의 시를 보고,

문득 가슴 뭉클하여 글을 쓴다.

 

최근 상담소의 한 회원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사람을 다루는 업을 하다보니 인간에 대한 절망, 좌절, 운동 혹은 변화가능성의 부질없음을

토로하는 회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이 느끼는 절망의 수위는 어디까지 일까?

절망이 아닌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는 과연 절망을 알고 있을까?

그 때는 내가 가진 희망들은 과연 어떤 희망일지, 회원의 절망감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그런데, 한용운시인의 '님의 침묵'을 다시 읽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란 구절을 깊이 음미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눈물로 쏟아내버리지 않고,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붇는다는 말...

 

그것은 또 얼마나 고되고, 고통스럽고, 쓰라린 일일까?

 

있는 표현, 없는 표현 하는데 익숙해버린 나의 운동, 나의 일상적 삶과는 사뭇 다른

시인의 삶이 자꾸만 내 마음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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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이

누군가를 마음 깊이 안아본 적이 많았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안아달아 팔을 흔드는 아기를 안아주는 경험을

1년 넘게 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렇게 오랫동안 안겨있을 기간은

어쩜 짧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안아달라고 무턱대고 요구하다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몸으로 만나기를 꺼려하게 되기까지...

 

나에게 안겨

요염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는 아기를 보면

그리고 그런 안김에 자신을 내맡기는 아기를 보면

 

문득 안기고, 안는 것에

이유를 찾고, 이내 포기하고, 언어로 대신 표현하려는 나 자신의

지금 모습에 아픔이 밀려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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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하는 자의 괴로움

아기를 보면(이제 돐이 조금 지난)

말하지 못하는 자의 괴로움이 느껴진다.

 

자신의 욕구를 남을 통해서 이뤄야하고(대.소변, 밥먹기, 목욕하기, 심지어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

자기가 싫은 것을 몸을 통해서(요새는 거부의 표시를 뒤로 움직이는 방식을 통해서 한다.)

울음을 통해서 밖에 표현할 수 없는대서 오는 괴로움, 답답함, 짜증...

 

아파도 어디가 아프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그래서 상대방(엄마, 아빠, 등등)은 더더욱 답답하고

답답해서 화가 나고 짜증나고....

 

악순환의 고리를 풀 방법은

어른들이 언어 외의 다른 공감방법을 더 배워야 하는 걸까?

어린 시절의 그 때를, 그 소통방식을 잊어서 그런걸까?

 

<오늘도 이 생각 저생각에 머리가 아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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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의 미묘한 며칠간

여성운동하면서 고민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가족들과의 관계.

사실 운동한답시고 본격적으로 나섰던 대학시절 이후 부모님을 비롯한

소위 가족, 친척들과는 일정부분 담을 쌓다시피 살아온 나다.

그런 나였기에 결혼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고, 홀로 사는 게 상책이라 믿었는데...

인생은 자기가 바라는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결국 결혼과 출산이라는 대다수 사람들이 일상이라 믿으며 사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나.

그러면서도 반성폭력운동과 여성억압적 성문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놓지 않는 나.

그 안에서 갈팡질팡

 



 괴로운 나... ^^;;;;

 

이번 시어머니의 서울상경은 이렇게 모호하게 살고 있는 나의 삶에

미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험험...

아기에게 엄마의 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신 어머니.

그리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를 존중하면서도

은근 슬쩍 그런 삶을 강요당한단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난 아기에게 아침마다 밥을 먹일 수도 없고(어머니는 아침마다 밥과 국을 떠먹이신다 ㅜㅜ)

저녁에 일하고 들어오면 열심히 놀아줄 수도 없고(어머니는 간식을 챙기고 아기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아기 목욕시키면서 빨래를 동시에 하고 있으며(어머니는 아기가 그 사이 감기들까 걱정하신다)

애가 울고 짜증내면 같이 화내고 소리친다(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아기를 안고 달래시는 어머니 ㅠㅠ)

 

괄호 안의 행동들, 사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그 행동들을 보면서 지치는 나는 무엇인가?

시어머니는 결코 나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행동을 너도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위축되고, 괴로울까?

 

운동에도 올인하지 못하고, 육아에도 정성쏟지 못하는 내 상황...

음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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