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잡다구니한 나의 이야기

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26
    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사인(2)
    푸른들판
  2. 2006/12/07
    여성단체활동6년차, 안식년을 보내다(5)
    푸른들판

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사인

난 인간의 삶 속에 거대한 크기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물론 그렇게 쉽게 자신의 무의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의식의 세계에서만 산다고 생각할지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세계, 세상이 있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꿈 속의 세계가 도저히 납득이 안갈 때가 많다. 꿈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도 하고, 현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어렸을 때부터 반복되는 꿈의 패턴이 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쫓기거나 죽을 위험에 처해지는 꿈.

일주일 전에도 반복되는 유형의 꿈을 꾸었고, 생생히 기억이 난다.


하늘하고 맞닿아 있는  높은 곳에 내가 있다. 나는 성폭력관련(내가 일하는 곳과 연관된 자료였던 것 같다.) 자료, 기사를 받아서 줄사다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줄을 타고 내려간다. 중간에 홍진경을 만난다.

요새 어떻게 지내냐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홍진경이 나를 피하면서 먼저 가겠다고 한다. 나는 이상하게 느껴지나 알았다고 하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까 받았던 자료가 내 손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놓고 왔구나.’ 다시 올라간다. 그런데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힘이 빠지고, 줄사다리의 맨 꼭대기 줄 몇 개가 끊어져버려 한꺼번에 올라가기 매우 힘든 상태가 된다. 이제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거의 줄에 매달려있다.

그냥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면 힘이 덜 들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그 자료는 꼭 찾아야 하는 자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리를 높이 들어올려 그 곳에 가려하지만, 줄만 흔들거린다.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다. 한 번의 실수로도 나는 죽는다는 느낌이 더 땀을 흘리게 한다. 하지만 내려갈 수는 없다. 다시 힘을 회복하고, 올라가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다.


 

    

  




 

그렇게 삶이냐, 죽음이냐를 왔다갔다 하다 잠에서 깨었다. 그날 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내가 찾아야 할 자료는 없었음을 깨닫고 안도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이런 꿈을 어릴 때부터 자주 꾸었다. 뭔가 해낼 수 없을 듯한, 죽음으로서만이 가능한 일을 맡게 된다. 예를 들어 홍수 앞에서 그 물을 헤쳐나가는 꿈이라던가, 거대한 파도로 집과 건물이 무너지는 데 나만 꼭대기 층에 있어서 겨우 살아있는 상황, 그런데 계속 아슬아슬하게 파도가 친다. 아주 어렸을 때는 누군가 나를 자꾸만 쫓아와서 도망치면서 그 사람한테 붙잡히기 전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꿈이 많았다.


그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음. 사실 꿈속엔 통증은 없다. 다만 숨이 턱턱 막힐 뿐이다. 계속 되는 긴장감과의 싸움. 그리고 꿈에서 깨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건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사인일까? 어릴 때(고등학교 때까지) 꾸었던 것처럼 무언가 대상에게 쫓겨다니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연현상(파도, 홍수, 공중에서 끊어질듯 한 사다리 등등)과 마주쳐 그에 필사적으로 살아보려는 내 욕망이 더 강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걸까?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감상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난 항상 계획하고, 예상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예외나 갑작스런 전개를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대학 4학년 때 에니어그램을 한 적이 있는데 5유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했을 때도 5유형이 강하게 나왔다. 5유형은 관찰자형, 나서기보다는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으며, 감성보다는 사고가 발달한 유형이란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는 그런 이미지에 걸맞는 사람이다.

하지만 꿈은 나에게 넌지시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아무리 준비하고, 계획해도 사람의 삶이란 건 그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뜻하지 않는 곳에 복병이 숨어 있고, 우연하게 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걸. 또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척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넌 죽음에 대해 그렇게도 공포스러워한다는 걸.

근데 그걸 알아서 나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는 걸까? 음... 혹시 죽음에 대해, 죽음의 공포를 진정으로 만나라는 걸까? 지금까지의 나는 회피, 무시해왔기 때문에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없다는 걸까? 아니, 이겨낸다, 아니다의 의미가 아닌 공포를 공포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삶에 대해 그 그림자(죽음)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거만하게 내 의식의 흐름만을 쫓지 말라는 메시지인 듯...

내가 밝은 곳만을 향해 가는 듯 보이는 그런 위선을 벗어던지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워낙 빛과 어둠은 한 몸인 것을~~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난 꿈 속에서 죽음의 그늘 가까이는 가보지만, 죽지는 않았다. 겨우 겨우 숨을 헐떡이며 살아남는 것. 어쩌면 그만큼 나는 죽음을 피하고 싶고, 살고 싶나보다. 하지만,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선택하라고 무의식이 말해주는 것 같다.

가끔 꿈을 꾸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정말 꿈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면, 위로 오르려다가 공중에서 떨어져 죽었다면 어땠을까? 그래, 어쩌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신나고 혹은 음울한 세상이 펼쳐질지도 몰라. 죽음이 끝,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미지의 탐험인 것이다.

최근에 영화 ‘판의 미로’를 보았는데, 주인공이 죽음으로서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죽음은 혹은 현실적이지 않음은 또 다른 길을 위한 열쇠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식세계가 그걸 계속 막으려고 하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의식이 아닌 내 몸이 가는대로 내 욕구가 가는대로 나를 맡겨보는 시간을 늘이고 싶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현실의 나와 함께 그 여행을 기꺼이 하고 싶어 계속 나에게 꿈으로 나타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여성단체활동6년차, 안식년을 보내다

 

안식년, 내 안에 비워지는 것들. 그리고 쌓여가는 것들에 대해

 



누구에게나 돌아봄, 휴식, 여유가 필요하겠지만,

이번 휴식을 통해 단체활동가들에게 쉼은 정말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모 활동가가 말한 대로 3년을 일하면 1달 정도의 휴가는 꼭 마련해야 할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활동 공간 속에서의 일상적인 휴식과 여유가 자리 잡혀야 할 것이다. 더 멋진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마음과 몸에서 나오는데

그 몸과 마음이 피곤에 절어 있고, 원래 하던 일의 쉼 없는 반복이라면

그 안에서 나올 것은 뻔한 것 아닌가?

휴식의 당위성은 이 정도에서 멈추고, 이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제 어언 두 달이 되어간다. 충전을 했다고 하기엔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기간인가? 아니, 난 사실 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달여의 방학을 일 년에 두 번씩 경험한 것 외에 한 번도 과업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은 채 내 멋대로 지낸 적이 없다. 학교 공부를 마치자마자 일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5년을 상담소에서 보낸 나. 그간의 두 달은 내가 살아온 시간 중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를 제외하고 가장 긴 휴식이었다. 그래서인가? 나에게는 소리 없이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 몸과 마음 안에 비워지는 것과 그 비움을 통해 쌓여가는 것들이 생기고 있다.

 

첫 번째 변화. 상담소 식구를 비롯해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이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한다. 사실 난 상담소 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건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래서 난 쉬더라도 별 변화가 없을 줄 알았는데, 첫째 피부결이 달라졌다. 그리고 많이들 알고 있을 나의 탈모증상(^^)이 좀 기세가 수그러들고 있다. 쉼은 우선 몸이 말해준다. 쉼을 통해 몸에서 불필요한 것들이 비워지고 있기 때문에 깨끗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몸 안의 노폐물이 조금씩 비워져 간다면, 내 정신 안에 있었던 것들도 서서히 비워져가는 것들이 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무엇이든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생기는 불안감,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있다는 좌절감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 그것은 내가 갑자기 무엇을 새롭게 배우고 있거나 다른 활동을 시작해서는 아닌 것 같다. 워낙 내 안에 있었던 내 안의 힘을, 원함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활동을 쉬고 나서 바로는 주로 집에서 보냈다. 책을 읽고 밥을 해먹고 tv를 보면서. 왠지 이상했다. 지금 이 시간엔 상담소에서 뭘 하고 있었을텐데... 상담소에서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며칠씩 짬을 내어 간 남도 여행, 부산국제영화제, 몇몇 외부 토론회를 다녀오면서 조금씩 변모하고 있는 내 모습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에게 온 새로운 변화는 먼저 명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아니 명상은 좀 거창하고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일하면서는 멍하게 있으면 안된다는 약간 강박증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재빨리 판단해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바로 다음 일을 계획하는,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여 스스로를 질타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아마 나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리라.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사람들을 그렇게 조바심 나게 하며 재빠르게 변화에 적응하도록 이끌고 있고 이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멍하게 있으면 그 멍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것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저 마음이 말할 수 없이 평온해지기도 했다. 그런 경험은 묵당(그리스도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카톨릭 피정의 집입니다. 강원도 태기산 산 중턱에 있답니다)에서 열하루를 보내면서 더 깊게 다가오며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지금도 그 때의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 난 그곳을 가기 전에 지루할 것을 염려하는 친구들의 조언으로 책 여러 권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갔다. 물론 책들을 그렇게 차분하게 읽은 적도 없었지만, 읽은 책들보다 홀로 고요하게 자연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나에겐 감동이었고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그 안에서 느꼈던 많은 것들을 글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 때 썼던 일기 몇 구절을 옮겨 적는다.


‘볼펜 한 자루, 촛불 하나, 맛있는 식사, 깨끗한 방.. 새가 지저귄다.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이 흐린 날이다. 새들은 뭐라고 하는 걸까? 이곳에 있는 것이 이렇게 감사하고 고맙고 경이롭고 행복할 줄 몰랐다. 그러나 내가 가야할 곳은 더 오래 있어야 할 곳은 여기 이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나가서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살아야 할 지 고민한다. ...

이 곳에 오면서 느끼는 것이 많다. 무엇보다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인간위주의 생활에 내가 익숙해있었다는 것. 여기는 산 정상과 가까워 낮에도 추운데 난방은 하루 3시간만 되고, 따뜻한 물은 밤에 한 번만 나온다. 매번 필요할 때마다 따뜻한 곳에서 산 나로서는 고역이지만, 그동안의 풍족하다 못해 낭비였던 삶을 돌아보게 된다. ... 지난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은 진보는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이상을 이루기 위한 끈질긴 시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둘째 날 낮에 쓴 일기


‘... 그동안 나는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열정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다. 정해진 수순을 따라야 망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진정 내가 추구할 바, 가야할 바가 놓쳐지는대도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느끼며 견뎌오기도 했다. 나의 무능력함을 탓했고 바쁨을 핑계로 주변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외면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여성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진심으로 함께하기 위해 내가 많이 애썼다는 것을. 많이 애썼기에 더 실망하고, 더 많이 좌절했음을. 

   나의 방황, 고뇌, 좌절은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이제는 가슴으로 안다. 그런 상황이 나에게 잠시 쉼을 선택하게 했고, 나의 활동, 이상, 욕구를 되돌아볼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고통을 통해, 방황을 통해, 되돌아봄을 통해 삶의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음을 믿는다.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고 명상하는 것, 나와 상생하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 그러기 위해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과감히 버리는 것.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나 자신 항상 깨어있기를 바란다.’

- 셋째 날 밤에 쓴 일기


‘새벽 5시. 밤하늘을 빛내는 수없이 빛나는 별! 이렇게 많은 별을 방에서 보긴 처음이다. 감동!!! 밤하늘에 이렇게 많은 별들이 있다니! 창문을 열고 나가 손을 들어 올리면 바로 잡힐 것 같다. 산이 높아서 그런지 정말 금방 잡힐 것 같다. 새벽에도 내가 모르는 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일곱째 날 새벽에 쓴 일기 


사실 내가 휴가 기간 동안 느끼고 있는 이런 감정들과 깨달음은 심오한 것도, 뭔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내 안에 오랫동안 숨 쉬고 있었던 중요한 것들을 다시 기억해내는 건지도 모른다. 지난 일요일에는 우연하게 중학교 때 쓴 일기를 꺼내보았는데, 한참을 쳐다보고 웃음을 머금다가 이내 숙연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여러 활동을 통해 깨달았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사실 중학교 때부터 꿈꿔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그 전부터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안식년은 그동안 채워오기만 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꺼내보고 비워내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중요하게 마음에 담아갈 것들을 다시 찾아가고 쌓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참 귀한 기회를 갖게 해준 상담소를 거쳐 간 많은 선배들, 그리고 지금도 일하는 활동가들, 회원님들, 모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참으로 감사하다.

 

나.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