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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지 - 공동체주의가 가지는 한계.

 

 

주의 : 이거보고 영화 보시면 재미 무쟈게 없습니다. 만약 '난 핵심결론을 알아도 영화를 볼수 있다' 거나, '짐승이 하는 영화감상 따위는 구라라는것을 입증해주마' 라는 사명감(^^) 이 없으시다면 안 보시는게 좋을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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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나는 유난히 잘 울고, 떼를 많이 부리던 아이였던거 같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얼르기위해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망태 할아범' 이라는 가공의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유년기의 나를 공포로 몰아갔던 그 '망태 할아범' 이란것은, 말안듣는 아이를 잡아서 등에 지고있는 망태기에 담아 데려가서는 잡아먹는다는 설정이었다. 물론 그런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꽤나 설득력있게 들렸던 이야기였다.


인간의 무의식중에 가장 오래 남아있는 감정은 공포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서 한 인간, 혹은 하나의 집단을 통제하는데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 공포를 이용한 수단이 될수 있음을 말해줄수 있는것이다. 말 안듣는 아이를 어르는데 효과적인것이 어찌 망태 할아범 뿐이겠는가. 사실 그런식의 협박은 아주 오래전 '호랑이가 잡아간다' 에서 비롯된 것이며, 작게는 가정에서 부터 크게는 국가의 통치수단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온것이다.


개중에는 선의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들면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싼다' 는 격언역시 아이들로 하여금 일종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경구로 사용되는데, 사실 불장난과 이불에 소변을 지리는것과는 아무련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의 실수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고자 하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수있다. '식스센스' 로 유명한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빌리지' 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포를 이용한 금기사항 역시 어떻게보면 선의로 인한 거짓말이라고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들간에 큰 증오도 없고 자잘한 이해관계 때문에 다투는 일도 없는, 말 그대로 '평화로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비록 작지만 그 구성원들은 슬픈일이나 기쁜일이나 모두 함께 나누며 조화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근심거리가 있다면 단 하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숲에서 괴물들이 공격해오지 않을까, 하는것일 뿐이다. 이들은 그 괴물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마을 외곽에 망루를 세우고 집집마다 지하 피난처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괴물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영역, 즉 숲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마을을 공격해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살고있는 마을과 괴물들이 살고있는 숲, 그 경계선만 어기지 않는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도 없는것이다.


문제는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숲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의 '숲속 괴물들' 에 대한 공포는 절대적이다. 마을구성원들은 누구나 숲속에 살고 있는 괴물을 무서워하며, 따라서 아무도 숲으로 들어가보려는, 그러니까 마을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실 굳이 마을을 벗어나야 할 필요도 없었다. 급하게 옆 마을에서 의약품을 구해와야할 필요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괴물들' 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생물들임이 밝혀진다. 마을을 다스리는 원로회의의 구성원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벗어날까봐 만들어둔, '공포' 를 이용한 금기사항 이었던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면, 즉 마을을 벗어나면 괴물들이 쫓아와서 죽인다는 이야기는 사실 그 마을의 원로들이 가지고있는 최대의 비밀이며 그들 권력의 핵심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포' 를 이용한 가장 효과적인 통제의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현재도 지배자들은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을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테러리스트들이 더 많은 민간인들을 죽일것' 이라고 협박하거나, '이라크 침략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곤두박질 칠것이며 한반도 안보에도 악영향이 있을것' 이라고 협박하거나, '귀족 노동자들의 파업때문에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 고 하면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공포감을 심어준다. 그러한 공포를 이용한 통제수단의 확립은 '빌리지' 의 그것과 전혀 다를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빌리지의 지도자들이 행하는 그 거짓말이, '선의로 인한 거짓말' 로 보일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단지 방송국의 이익을 위해 한 인간의 인생을 철저하게 짓밟았던 '트루먼 쇼' 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기존의 사회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이룩한 '빌리지' 는 그들만의 이상적인 공동체였고 그러한 삶을 지키기 위해 마을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원로들의 거짓말은 선의로 인한 것이었다고 강변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마을주민들에게는 공포심을 이용한 기만적인 술책이었음은 부정할수 없다.


문제는 원로들이 택한 그 방식이,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기만은 시일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깨어지기 마련이고, 비록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깨어지는날 공동체의 가치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도자들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도피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로인해 자신들만의 조그마한 이상적인 마을은 만들수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그 마을에서 결코 벗어날수 없는 고립을 스스로 자초해 버린것이다. 그들이 '도피와 고립' 의 전술을 택한순간, 이미 그 공동체안의 권력과 기만적인 정책이 싹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자들의 의도가 어떠했든, 그러한 전술은 올바른것이 될수없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과 모순에 대항해서 맞서 싸우고, 모든 인간사회에 그러한 문제점들이 해결될수 있도록 하는것만이 그들이 택할수 있었던, 또 택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분명히 말해둘 필요성을 느낀다. '빌리지' 에서 나왔던 공동체주의적 사고방식과 구별되는 그런 부분들이 바로 우리가 추구할 '사회주의' 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비록 샤말란 감독이 그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고는 믿기 힘들지만 어차피 영화는 때로는 작가가 하려던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져다 주기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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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뒹굴다가 깨졌습니다. ㅜ_ㅜ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활동하고 있는 다함께 회원분들과 함께 신촌에서 캠페인 및 신문판매를 하고는 뒷풀이 겸 추석맞이 ( 이거 말 되나? )겸 해서 근처의 호프집으로 이동했다지요. 거기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나누고, 오랫만에 뵙는 분들도 보고 새로 가입하신 분도 뵙고 해서 잼나게 이야기 했던거 까지는 참 괜찮은 전개였는데...


아무래도 술도 약한놈이 맥주에 소주를 같이 마셔버린게 치명타 였나 봅니다. -_-;


정신을 차려보니 신도림 역이더군요. ( 그 술자리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안남. 실수한거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 고향에는 내려가야겠고 해서 역에서 나와서 택시를 타려고 움직이다가 술김에 계단에서 자빠져 버렸습니다. -_-;;


아무래도 자빠질때 우측 뒷다리를 '제대로' 삐어버린듯 하여요. 고향집에 내려갈때도 절뚝거리며 들어갔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퉁퉁 붓고 서있지도 못할정도로 아프더라구요 ㅜ.ㅜ


덕분에 약과 더불어 '술 먹고 돌아다니다가 사고쳤다' 고 욕도 먹고, 끝내 압박붕대 신세까지 지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어디 돌아다니기도 힘들다는.
메리 추석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흑흑 ㅠ_ㅠ


짐승의 추석은 이모양 입니다만, 다른 분들은 맛난거 많이 드시고 즐겁고 행복한 추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답니다. 어느 멍청한 짐승의 사례를 참고하셔서 다들 안전사고 및 교통사고 조심하시고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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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버그 방한 반전강연 - 무엇이 내 아들 닉 버그를 죽였는가?

지난 5월 11일 우리는 충격적인 영상을 접했습니다.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된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학대행위에 대한 보복' 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인 통신사업자 닉 버그를 참수하는 이라크 저항세력들의 모습이 뉴스 화면에 나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심지어 '참수 동영상은 조작된 가짜다' 라는 말이 꽤나 신빙성있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서 이번에는 한국인 김선일씨가 같은 일을 당하고 말았고, 그와같은 사건들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닉 버그씨의 부친인 마이클 버그씨는 닉 버그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부터 아들의 죽음이 무엇때문이었는지 분명하게 주장해 왔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닉 버그 살해사건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며 유가족들에게 형식적인 조의를 표했지만 마이클 버그는 5월 13일 라디오방송 KYW-AM과의 인터뷰에서 '내 아들은 조지 부시와 도널드 럼즈펠드의 죄 때문에 죽었다.' 고 말해 부시 정권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김선일씨의 죽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한국군은) 제발 여기서 나가달라' 는 절규에 돌아온 답변은 '파병방침 변함없다' 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었습니다. 김선일씨가 끝내 살해되자 정부는 '우리 정부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  하고 저항세력들이 그를 살해했다며 분노의 초점을 이라크 저항세력들에게 돌리려고 했지만 사실 김선일씨를 살해한것은 침략전쟁에 끼어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정권 본인이었음은 닉 버그를 살해한것이 부시 행정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지난 12 일에도 바그다드 도심 하이파 거리에서 미군 헬기가 민간인들을 향해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해서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바그다드뿐만 아니라 팔루자, 라마디, 사드르 시, 탈 아파르, 모술 등과 같은 도시에서 미군은 공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막가파식 공격은 한편으로 미국 지배자들이 이라크가 베트남화 되어가고 있는것에 대한 불안감의 증폭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만적인 '주권이양' 이후 이라크에서 미군에 대한 공격은 한달평균 60 여건으로 그전 3달과 비교하면 20% 가 증가한 것입니다. 이라크에 파병되었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많은 미군들이 반전시위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으며, 때문에 다른 나라들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라크 저항세력들에 대한 반감, 혹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에 대해서 다소 무관심 해지고 있는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양비론에 빠져서도 곤란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모든 저항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하는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울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지지해야 합니다. 거기에, 현재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의 구심점은 이라크에 있습니다. 이라크에서 미국이 수렁에 빠져있는동안 그들은 한반도를 비롯한 타 지역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미국을 이라크에서 패퇴시킨다면 미국의 지배자들에 대한 더 큰 타격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마이클 버그는 닉 버그의 죽음 이후로 세계 여러곳에서 자신의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야 하고 어떻게 싸울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왔습니다. 이번 방한에서도 그는 '이라크 전쟁의 진정한 동기를 폭로하고 반박할 것이며, 한국인들도 반전 운동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반대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마이클 버그씨의 방한 반전강연에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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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버그 방한 반전 강연


무엇이 내 아들 닉 버그를 죽였는가?


● 서울 강연회                  

일시 : 10월 9일(토) 3시          장소 : 중구 구민회관(동대문 밀리오레 뒤)


● 부산 강연회                  

일시 : 10월 10일(일) 3시       장소 : 부산대학교 본관 대회의실


주최 : 다함께


후원 : 파병반대국민행동,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프레시안, 반전평화기독인연대, 보건의료단체연합


참가비 : 2,000원


문의 : 02-2271-2395  atgmail@nate.com  http://www.alltogether.or.kr/berg

 

* 10 월 9 일 오후 3 시의 서울강연회에 오시는 분들은 018-503-7858 (하이에나새끼) 한테 연락주세요. 강연 이야기 함께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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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코포타리즘?

사회적 코포타리즘?

 

프레시안에 실린 최병천씨의 주장 링크 -

"노동운동, '네덜란드-스웨덴 모델'에서 대안 찾자"


지난번 박승욱씨의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후로 프레시안 에서는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부장인 최병천 씨가 '거시적 코포타리즘' 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가 말하는 거시적 코포타리즘이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하향조정하는 결과만을 불러올것이라 판단하며 그가 제시한 네덜란드와 스웨덴 모델을 통해 그러한 '합의' 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하려고 한다.


최병천씨는 현재의 노동운동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100인 미만 사업장' 의 노동자, 다시 말해서 조직되지 못한 89% 의 노동자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들이 참여하고 그 이해관계를 반영할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해법으로 거시적 코포타리즘, 즉 개별 사업장이나 연맹 단위가 아니라 '포괄적인 협상', 즉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 를 대안으로 말하고있다.


그러나 그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하향평준화 시켜 '노동자들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 을 완화시키는 역활만을 수행할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수 없다. 계급적 대표성은 다같이 못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얻어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주장하는 사회적 코포타리즘은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스웨덴식 , 혹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양보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복지정책의 향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환상으로 바라보는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상황은 '모든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웨덴에서 배우자고 한다. 스웨덴이 낮은 실업률,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좋은 복지제도 등을 성취했었던 것은 사실이며, 사민당이 매우 오랫동안 스웨덴의 지배정권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사민당은 1938년에 노동조합과 사용자 연합이 파업 금지등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살쯔요바덴' 협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1947년에 사민당은 '연대임금정책' 을 추진하는데, 금속노조의 숙련 노동자들이 양보해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으' 라는 것이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 의 골자였다.
당연히 금속노조의 노조원들은 이에 맞서 싸웠고 금속노조가 탈퇴하면서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도 파행을 겪었다.


스웨덴 모델이 높이 평가받는 것에는 시장을 규제하고 인간의 복지나 사회적 가치·연대 등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모델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하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웨덴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것은 전후 호황기에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조건, 당시 서유럽보다 더 큰 규모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 즉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을 때만 가능했었던 일이며 일시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세계적 호황과,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의 길을 택하면서 세계 대전의 피해와 전후 군사비 지출 부담을 줄여, 경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도 1970년대 오일 쇼크에 이은 세계 경제 위기를 벗어날 순 없었다. 경제가 불항에 빠지고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그동안 이루어두었던 성과들도 다시 빼앗기고 있다. 스웨덴의 공식 실업률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9퍼센트를 넘고 있다. 특히, 유럽과 세계 시장의 통합도가 증가하면서 증대된 경쟁 압력에 사민당은 우경화하며 노골적으로 자본가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1985년에 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다. 지금 스웨덴에는 다양한 사회세력 간의 조화가 아니라, 계급투쟁과 높아진 실업률과 복지 축소를 둘러싼 사회 갈등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것은 국가 경제력에 의존해 이리저리 표류할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틀 내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 기획이 본질적으로 내재한 한계라고 할수 있다.


또다른 사회적 코포타리즘의 예로서 최병천씨가 거론한 '네덜란드' 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유럽에서 가장 짧은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100으로 놓을 때 미국 노동자들은 140이다. 주5일 근무제는 1960년대부터 시행됐고, 보통 제조업 노동자들은 한 달간 여름 휴가를 즐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용돈을 벌기 위한 대학생들이 메운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노동자들이 해고될 때는 그들의 재취업과 당장의 생계 보장을 위한 계획을 노조와 사용자가 함께 마련한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무상교육(고등학교까지), 무상의료가 거의 완전하게 실시되고 있고,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역시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경쟁과 경기불황 속에서 혼자만 평화로울수 있는 '섬' 은 아니다. 네덜란드는 2001년부터 미국과 독일, 이 두 주요 교역국가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1990년대 중반 3퍼센트대의 견실한 성장을 보이며 서유럽에서 가장 부러움을 많이 샀던 것은 옛날 얘기가 돼 버렸고, 2001년 1퍼센트 이하의 성장을 보인 후 하강곡선을 그려 작년에는 마이너스 0.8퍼센트 성장에 머물렀고, 올해와 내년에도 1퍼센트대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초 출범한 네덜란드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재정 삭감을 감행하고(약 25조 원),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을 요구하고, 연금제도 변경 등 사회복지 부문의 재정 지출을 낮추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삭감된 재정은 대부분이 사회복지에 관계된 예산이었고, 이에 노조들은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담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정부에 대한 전면 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평 조합원 노동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한채 곧 손쉽게 항복해 버렸다.


사회적 코포타리즘, 사회적 합의주의에 순응해온 노동조합은 투쟁을 지속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정권과 보수언론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고용안정과 임금동결을 맞바꾸는 사회적 합의, 즉 1982 년의 바르세나르 협약이후 노동조합들은 20 년 만에 투쟁에 나서려 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바르세나르 협약으로 노동자들이 더 좋은 조건을 가지게 된것도 아니었다. 1982년 이후 노동자들은 복지비 삭감, 임금 억제, 노동시장 유연화 등으로 생활 수준이 더욱 나빠졌다. 이 때부터 전후 가장 인상 깊은 성과를 거둔 네덜란드의 복지 체계가 뒤흔들리게 됐다. 노동당과 보수당의 좌우 연정 '자줏빛 동맹' 이 노조의 협조를 얻어 복지 제도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결과, 경제산출에서 보건과 교육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미국보다 더 낮아졌다. 의료비 삭감으로 병원 환자 대기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중환자실이 부족해 중환자들이 죽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이 찾아왔지만 빈부격차는 증대했다. 이 때부터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백만장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대한 반면,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잡지 못했다. 임금 억제 대신 고용이 증가했다는 얘기도 과장이다. 1982년 이후 늘어난 고용의 75퍼센트가 시간제나 임시직 고용이었다. 2001년 현재 네덜란드의 시간제 노동자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33퍼센트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네덜란드의 고용안정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림으로 얻어낸 고용안정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 실업률은 10% 를 상회한다. 네덜란드의 '사회적 코포타리즘' 은 노동운동을 저하시켰을뿐 아니라 복지제도마져 파괴한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노동자들의 약점을 알게되었고 이제 정부는 노동시간을 하루 최대 12시간, 주당 60시간으로 연장하는 충격적인 계획을 들고 나왔고, 실업과 산업재해 기금 수혜자 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하고있다.


최병천씨는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 '사회적 합의' 를 배제하려고 하는 이유가 '98년 노사정대타협의 패배에 대한 경험적 학습효과' 인것처럼 말하면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마치 대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줄뿐 아니라 사회 복지에도 기여할수 있을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고있는 서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복지체제는 국제적 경기의 호황, 또는 불황에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는 경제사정에 따라 그 동안 얻어 낸 양보도 도로 빼앗기기 마련이며 그것은 사민주의의 근본적 모순이기도 하다.


사회적 합의에 따르는 방식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성과를 가져올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제한된 임기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필요성을 느끼는 관료나 제도정치인들에게는 환영받을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부분을 '현실적' 이라고 선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일반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대안으로 자리잡을수 없으며 네덜란드의 예에서 보듯이 오히려 그것은 운동을 파괴하고 길들이는, '체제내화' 의 역활을 수행하기 마련이다.


그는 박승옥과는 다른 방식의 '대안적 해법' 을 제출하고자 하려 한다고 했지만, 체제와 권력에 도전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에 의존하는 그런식의 해법은 결과적으로 박승옥씨의 해법과 맞다아 있다. 그것은 또 어차피 진정한 대안이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대체밖에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있을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중심이되어 일어날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 현시점에서 해야할일은 노동운동이 이러한 체제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보다 더 공공성을 가지는, 결과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직접 권력을 쟁취할 있도록 노동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함께하는 것이 될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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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말, WTO 쌀 수입 개방 반대 투쟁에 함께합시다.


'WTO가 농민을 죽인다.' 작년 멕시코 칸쿤에서 자신의 배를 자르며 이경해 씨가 했던 말입니다. 이경해 씨의 죽음은 WTO 등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농민을, 그리고 피억압민중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일입니다. 그리고 WTO는 여전히 전 세계의 가난한 농민들을 체계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WTO 는 '자유로운 농산물의 교역 및 전 세계의 소비자들이 좀더 값싼 농산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 를 내세우며 농업 보조금을 더 줄이고 시장 규제 장치들을 계속 없앨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WTO 등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이끄는 강대국들의 농업 보조금은 WTO가 출범한 1995년 1천8백20억 달러에서 1997년 2천8백억 달러, 1998년에는 3천6백20억 달러로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2002년 유럽연합의 농업 보조금은 부유한 나라 전체가 가난한 나라에 지원해 준 원조 총액의 6배에 이릅니다.
지난 7월 말 WTO 일반이사회에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은 개도국들에게 보조금 감축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블루박스라는 항목의 농업 보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러한 농업보조금으로 이익을 보는 곳이 바로 전 세계 곡물 수출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카길, 컨티넨탈, 루이드레퓌스, 분게, 아드레 같은 곡물 다국적기업 들입니다. 카길이 WTO 농업 협상 막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WTO를 카길 위원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국적기업과 극소수의 대농장주들이 관세 감축 같은 시장 규제 조치 해제 덕분에 더 많은 농산물들을 팔아 이득을 챙길때, 대다수 가난한 농민들은 도산하고 파산하고 있습니다.


'가디언' 지의 기자인 그레그 팔라스트는 '나는 스티글리츠와의 대화를 통해 세계의 빈곤과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비교적 간단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즉, 그 해결책은 피를 빠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8억 명이 굶주리고 있고 해마다 3천6백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으며 한 시간에 4천 명꼴로 굶고 있는가하면, 선진국 내에서는 과잉생산된 농산물이 넘쳐 나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피를 빠는 자들, 팔라스트가 말하듯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전세계의 농민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먹고사는 자본주의 기업들을 제거하는 일이 될것입니다.


노무현 정권의 농업 정책에 대해서도 기대할수 없습니다. 현 정권의 농업정책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6핵타르 이상을 소유한 농민들만 남고 나머지는 알아서 땅을 버리고 무대에서 사라져야 하며, 추곡수매 같은것도 기대하지 마라' 는 것입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모두 없어지라는 것과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노무현은 농민들한테 119조나 주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달랬지만 실제로 대부분은 농림부 예산이고 그조차 그 대부분은 유전자 조작과 다국적 기업들의 유전자 해적질을 위한 연구에 쓰일 예산이지, 농민들을 위한 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쌀 수입이 개방되면 값싼 쌀을 구입할 수 있는데 쌀 시장 개방반대 투쟁에 지지를 보낼 이유가 없지 없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개별산업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것이 아니라 연관되어서 움직입니다. 쌀 시장 개방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금융,교육,제조업 등 각종 산업의 개방역시 함께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방들이 진행될수록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소수의 부자들만 더 많은 부를 축척하게 될것입니다.


전세계 대다수 농민의 삶을 위협하고 다국적 곡물 기업들의 이윤만을 채워줄 이러한 쌀수입 개방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번주 토요일 오후 3시에 대학로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지키기위한 행동에 보다 많은 분들과 함께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래쪽에 오시는 길과 연락처, 올려두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또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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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4 년 9 월 11 일 (토요일) 오후 3 시


장소 : 서울 대학로


오시는 길 : 지하철 4 호선 2번 출구


연락처 : 018-503-7858 - 하이에나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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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월 5 일 고용허가제 중단을 위한 투쟁에 함께합시다.



겨울을 거치고 봄을 지나서 이제 여름마져도 끝났습니다.
명동성당에서 4 번째 계절을 맞이하는 이주노동자 농성단의 투쟁은 어느새 300일째 라고 합니다.
우습게도 예전의 '사계' 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계절은 바뀌어도 미싱은 잘도 돈다던 그 가사처럼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정권의 이주노동자 탄압은 끝날줄을 모르는것 같습니다.


게다가 지난달 17일 부터는 고용허가제를 강행 실시하고 말았지요.
웃기더군요. 어제였던가, 고용허가제 실시후 처음 '합법적' 으로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 라며
TV 뉴스에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것은
뉴스가 아니라 마치 무슨 고용허가제 정당성 입증용 광고 같았습니다.
그리고 서글펐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입국하던 그 이주노동자들의 얼굴이 대한민국에선 곧 딱딱하게 굳어버릴것이라는것을 알기 때문에 말입니다.
세상 말세라더니, 요즘은 살인정권을 위한 광고도 정규 뉴스시간을 할애해서 하는 모양이죠?


출입국 관리소 사람들은 '인간사냥꾼' 이라는 말만큼은 피해달라고 그런다고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고용허가제가 시행 되자마자 막무가내로 단속하는, 그것도 작업장이건 어디건 무단으로 침입해 각목들고 집단폭행.불법체포 일삼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런말 할수 있습니까?
오죽하면 한겨례같은 친정권 언론이 그러겠어요, '각목들고 시작하는 고용허가제' 라고.
오죽하면 중소기업 사장들도 단속에 반발하고 나서겠어요.
덕분에 노동자와 사장들이 손 잡을지도 모르게 생겼어요. 이거 기뻐해야 합니까?


사실 스스로가 별로 한것이 없기 때문에 부끄럽습니다만
우리의 경제와 우리의 복지에 엄청난 기여를 해왔으며 지금도 하고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우리가 충분히 보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것입니다.
불법 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인 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이 탄압을 받는것을 방치한다면
'합법적인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과 생활수준이 상승됩니까?
노동자를 정규직,비정규직 또는 한국인,외국인 또는 합법,불법으로 나눠서 차별하고 탄압하는것은
오로지 자본가 와 자본주의정권에만 유리하게 작용할뿐 이라는 말씀을 또 드려봅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들이, 한국 노동자들이 함께 싸워줄때 가장 큰 힘이되고 가장 큰 희망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한국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힘껏 싸워왔습니다. 노동하는것이 죽음의 이유가 되는 세상을 끝내고 어디서나 자유롭게 일하며 생활하는 세상은 우리가 나서서 외칠때, 좀더 앞당겨져 올것입니다.

 

아래쪽에 오시는 길과 연락처, 올려두겠습니다. 오시면 연락좀 주세요. 인사나 드리게 ^^; 

항상 건강하시고, 또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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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4 년 9 월 5 일 (일요일) 오후 3 시

 

장소 : 서울 종묘공원

 

오시는 길 : 지하철 1 호선, 3호선, 5 호선 종로3가역

 

연락처 : 018-503-7858 - 하이에나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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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에 실린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대한 반론

프레시안 에 실린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대한 반론

 

프레시안에 실린 박승욱씨의 원문 링크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
[쟁점]선배 노동운동가가 본 현 노동운동의 위기, 원인, 해법

 

프레시안 9 월 2 일자에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관한 기사를 봤다. 그는 원본의 글이실린 '당대비평' (2004 년 가을호) 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는 그 내부적인 것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하며 몇가지의 주장을 하고 있기에 이에대해 반론을 하고자 한다.


주장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의 주장 전반과 그가 대안으로 세우는것을 통해서 봤을때 그는 노동자들이 정치투쟁을 포기하고 시민운동과의 협조하에 소규모 공동체 위주의 자기헌신적 운동에 매진하기를 바라는듯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바라는듯한 그 자신의 앞선 주장들과 모순되며, 권력에 대한 도전을 포기함으로서 현재 정치.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게 '안전망' 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이후 진행될 글중에서 왜 그의 주장이 그러한 결과만을 초래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그가 말하듯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 는 현상 자체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 그는 침묵함으로서 전체 글의 맥락과 서로 모순된다. 그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낮아지는 가운데서도 민주노총의 조합원수는 1995년 406,748명에서 2002년 685,147명으로 무려 28만 명 정도 늘어난반면 같은 기간 한국노총의 조합원수가 1,208,052명에서 876,889명으로 줄어들었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것처럼 '대기업 노동자 위주의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위기' 를 불러왔다면, 어떻게 '대기업 노동운동' 위주의 민주노총 조합원의 숫자는 늘어날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단순히 상급단체를 바꾸었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왜 노동자들이 상급단체를 ( 스스로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오고있는 ) 민주노총으로 바꾸길 원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것이다.  


조합율이 낮아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임시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임시직,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노동의 특성상 조직화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한국에서 불안정 고용이 본격화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였으며, 1987년에 임시일용직 비중은 전체 노동자의 45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러던것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노동운동이 힘을 얻게 되면서 크게 줄어들었다. 임시일용직 비중은 1994년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IMF 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통과되면서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다시말해 노동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고 힘을 얻을때에는 기존의 임시직, 비정규직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수 있으나 투쟁이 어려운 상황이 되거나 노동자들 스스로 포기할때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되며, 그에따라 조직율도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때 떠들석하게 거론되었던 스웨덴식 노사관계에서도 스웨덴의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때는 비정규직이 감소했으며 힘을 잃었을때는 증가하는 모습을 볼수있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프랑스,영국 등 세계 모든나라에서 비정규직의 증가는 노사간의 힘의 균형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노동자가 '자기희생' 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을때 전체 사회가 '아, 노동자들 참 멋지다.' 하며 감동받아서 배풀어주는것이 아니며, 사회적 합의에 충실하거나 국가경제발전에 매진할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노사간의 힘의 균형에서 우위를 차지했을때만이 정규직화를 쟁취할수 있다는것은 이미 국내외의 노사관계에 대한 진행사항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것이다.


다만 현상에서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들은 아쉬운 부분들이긴 하다. 하청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자고 하는 박승욱씨의 주장에대해 반론없이 찬성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제안하고, 몇몇 노동조합에서 보여주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강력한 연대투쟁을 통해 함께승리하는 노동운동을 건설할때 가능한 것이지, 그가 말하듯 '권력지향형 노동운동의 포기' 일수는 없는것이다.


그는 또 임단협 이외의 사안들, "노동자 생활조건,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대안의 정책 부재" 가 전투적인 임단협 투쟁의 성과를 역으로 상쇄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노동자들의 대학' 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자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기위해 싸우는 한계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해 싸워나갈 '정치조직' 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비록 맹아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인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박승욱씨는 참교육, 참의료는 어디로 갔느냐고 비아냥 거리지만 전교조가 학교안의 문제를 넘어서 교육환경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가스,전기,통신,철도 등 공공서비스 영역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의 문제를 넘어 사유화 자체에 반대하고 환경문제에 대한 제기 ( 금번 LG 칼텍스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보여지듯이 ) 까지 나서고 있으며, 지난 보건의료노조의 파업시 ( 서울대병원 등 ) 과도한 입원료의 시정등을 비롯해 사회 전반적인 의료공공성을 앞세웠던점, 지하철노동조합 파업시 승객에 대한 안전과 과도한 요금인상의 철회요구등 공공성과 관련된 투쟁들은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박승욱씨는 또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고 극단적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는 말하자면 '세상이 왜 이따위야!' 하고 허공에 대고 주먹한번 휘두르고는 집에가서 발닦고 자는 행태와 다르지 않다. 세상이 이따위가 되어버린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것이 이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본주의체제가 아직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나는 그 해답이 노동자들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자신과 사회의 모든 억압받는 이들을 함께 해방하는 사회주의적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박승욱씨는 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것이다.


그는 '생태' 와 '시민' 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소중히 여겨야함은 더이상 말할것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생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녹색운동의 방향이, '자연은 순수한 이미지로 보존되어야 한다' 는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류와 함께 진화하는것이며 상호 연관되어 존재하는것이지 독립적인 절대 순수의 이미지로 존재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은 상호간에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관계이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닌것이다. 그런점에서 볼때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 라고 주장하는 박승욱씨의 관점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가장 바람직한 운동의 방향은 인간에게 금욕을 강요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환경과 자연에 대한 대규모적인 공격및 파괴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찾아온 것이다. 오로지 이윤만을 고려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환경에 대한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파괴를 불러온것이며,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양식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인류가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결국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자본주의의 극복이 선행되어야 하며, '민주적 계획경제' 에 의거하는 사회주의적 경제체제가 그 진정한 대안이 될수있을것이다.


노동운동이 시민운동과 연대하는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연대의 형태가 시민단체의 관점과 정치를 따라야 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 문제다. 그는 맑스주의는 지나치게 계급을 중시하고 때문에 배타적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달려있다. 운동에 있어 왜 노동계급이 중요한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소외받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결코 자유로워 지거나 소외에서 벗어날수 없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뿌리부터 무너뜨릴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는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서 다른 이들을 해방시키는' 역활을 수행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노동계급의 그러한 역활때문에 사회변혁에 있어 노동자들은 중심에 있을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민단체들과 연대할때도 마찬가지다. 연대의 정치적 방향과 운동에 대한 관점은 노동계급의 그것이 되어야 한다.


시민단체들의 운동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박승욱씨가 지적하듯이 매우 열성적이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시민운동은 계급통합적이며, 그 때문에 운동의 관점과 방향을 잡는데있어 때때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시민운동을 형성하는 인자들이 비록 '부르조아' 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중간계급들이 다수 참여하기 마련이며 그때문에 체제에 안주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참여연대등 시민운동의 주요한 단체들이  '개혁적인 이미지' 를 이유로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는것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언급할만한 것은 지난 대구 시내버스 파업시에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보여준 태도다.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버스의 공공성은 현실성이 없다' 고 주장하던 그들의 보수성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에 있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폭력시위에 대한 입장도 짚어볼만한 문제다. 한마디로 박승욱씨가 말하는 폭력시위에 대한 입장은 시위에 있어서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원인과 과정을 무시한 도덕적 강박증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평화적으로 행진한다면 저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작년의 노동자대회 이전에 벌어졌던 수많은 폭력사태에서 집회 참가자들은 그가 그렇게도 혐오하는 쇠파이프, 화염병을 사용하기는 커녕 휴대하지도 않았다. 박승욱씨가 문제삼는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시위의 폭력사태가 일어나는것을 문제로 하는것인가, 아니면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하는것을 문제로 삼는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나는 '시위참가자가 경찰의 진압봉에 두들겨맞아 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여론의 동정표를  얻어내려는' 위험한 의도와 전술을 그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맨 앞에서 말했지만 박승욱씨의 주장은 내용 곳곳에서 사회 전체의 변혁과 공공성을 위한 투쟁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회 전체의 변혁이 아닌 일부 논점이 되는 정책 (  환경문제 라든가 )에 있어서의 변화, 그것도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도전을 회피함으로서 지배층의 도덕성과 아량에 의존하는 제한적인 변화만을 얻어낼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그 자신의 관점이 모순적인것을 보여준다.


공공성을 띈 사회전체의 변혁은 극히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극복과 그 대안이 될수있는 사회주의체제의 수립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있을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중심이되어 일어날때 가능한 일이다. 비록 우리 노동운동이 아직은 완전하게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의 공세를 겪으면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라는 관점을 가지고 운동에 나서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가 해야할일은 노동운동이 이러한 체제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보다 더 공공성을 가진 강력한 투쟁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보수우파들의 공격으로부터 이 운동을 보호해야 하는것이지, 그들의 말장난에 입맞추어 대기업 노조가 문제라는둥, 정치권력에 도전하는것이 부질 없다는둥, 폭력시위가 문제라는둥 의 이야기를 하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을 성장시키는것이 아니라 운동을 죽이는 것이며, 그러한 입장으로 사회변혁은 아득한 꿈으로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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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포인트 - 죄책감과 공포가 부른 광기

 

정말로 오랫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본것 같다. 그런데 따져보면 지난 휴가때 대구에서 시실리 2km 를 본지 겨우 보름남짓한 기간이니까, 올해 극장에 들린 절대 편수는 적을지 몰라도 그리 오랫만인것은 아니다. 난 왜 보름만에 간 극장이 그리 낫설었을까? 그건 어쩌면 '혼자' 극장 나들이 한것이 반년도 더 전의 일이어서가 아니었을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건 진짜 미스테리다. 난 혼자들어간 극장의 상영작이 아니면 '영화봤다' 는 기분을 못 느끼는 불감증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거기다 이번엔 혼자 들어간 극장이 어색함마져 주었다. 다들 끼리끼리 앉아있는 좌석들을 보노라니 어쩐지 왕따된 느낌이다. 이건 정말 생소한 감정이다. 여지껏 괘 많이 독수공방식 영화감상을 즐겼건만 단 한번도 이런적은 없었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게는 알 포인트의 미스테리를 푸는것보다 이 미스테리를 푸는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알 포인트란 로미오 포인트를 줄인 말이다. ( R 이 로미오 할때 R 이란다 ) 로미오 하면 생각나는거 없는가? 그렇다, 로미오와 줄리엣. 바로 그거다. '로미오가 몰래 줄리엣을 만나러 간다' 는 문학구절에서 파생된 군대 작전 용어로, 비밀리에 수행되는 구출작전이 벌어지는 지역을 로미오 포인트, 즉 알 포인트 라고 한단다. 참고로, 영화속에는 이런 설명 안나온다. 영화 광고가 실린 신문에 실린 친절한 설명이다.

 

베트남 어느지역인가에 신기한 땅이 있단다. 뭐 이것도 제작사측의 설명이라 그리 믿을것은 못되지만, 그 지역으로 작전하러 들어간 부대는 실종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처음에 프랑스 식민지군이 한날 한시에 그곳에서 몰살당했고, 그 이후로 그 지역에 들어가는 병력은 죽거나 실종 되어버린다고 한다. 영화속에는 '손에 피 묻힌자, 돌아가지 못한다' 는 비석마져 보인다. 상당히 흥미진진 하면서도 무서운 설정이 아닐수 없다.

 

알 포인트를 보려고 마음먹은것은 휴가를 맞아 대구로 내려가는 버스안에서 본 씨네21 에 실린 공수창 감독의 인터뷰를 본 이후다. 공수창 감독은 인터뷰에서 알 포인트를 공포영화가 아니라 반전 영화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컨셉으로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찍었다' 가 아니라 '찍고 싶었다' 라는 표현은 '그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감독의 역량이 모자라서 그러지 못한것과, 흥행을 중시하는 제작사의 입김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수 있기에 나는 두가지 경우중에 어느쪽인지 궁금해져 버린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둘 다다. 맑스는 국가간의 전쟁이란 항상 해당국가의 하층 노동계급들끼리 적으로 만들어 죽고 죽이며 적대감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었다. 알포인트는 거기까지는 나름대로 잘 묘사하고 있다. 고향에 있는 홀어머니에게 사드릴 송아지를 위해 작전에 자원하는 어린 병사는 마치 취업과 경제난을 걱정하며 월 200 ~ 300 정도의 월급을 바라보고 이라크로 지원하는 사병들같다. 그리고 이라크 저항세력이 그러하듯, 베트남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한 가난한 사병들에 대항해서 서로간에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나는 숨바꼭질을 펼칠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 포인트는 예전의 '플래툰' 이나 '하얀전쟁' 들이 가졌던 반전의식에서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전쟁의 잔인함, 부도덕성, 비인간성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비판하고 있으나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과 모순에 대한 비판은 빠져있다. 송아지를 사기위해서 작전에 나서는 군인은 보여주지만 베트남의 우리 군대가 그곳에 파병된 진정한 이유, 박정희가 보다 많은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기 위해서 침략전쟁에 팔아치운 용병단에 불과했다는 부분은 빠져있다. 자본주의 제국열강들이 무엇때문에 그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성장할수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알 포인트를 온전한 반전영화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이유다.

 

호러? '그토록 기다려온 품격높은 호러무비' 라는 식의 카피가 아직도 눈앞에 어른어른 하는데, 사실 한국의 호러영화들중 '고품격' 을 꼽으라면 당연 '소름' 이다. 형체없이 밑바닥부터 스물스물 올라오는 그 소름끼치는 경험을 다시 느끼게해줄 '고품격 호러무비' 는 아직 나온적 없다. 그건 알 포인트도 마찬가지다. 알 포인트가 주는 공포감은 어느정도 예견된 것들이고, 가시적인 부분들이다. '순수 호러' 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덤벼드는 영화들과의 경쟁에서 '퓨전 호러' 가 더 큰 말초적 충격을 주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이 '호러' 가 무서움으로 승부하려면 '소름' 을 겨냥하고 극복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종합적으로 알 포인트는 명작의 반열에 올라서기는 내공도 부족했고, 거기에 제작사측이 자꾸 무서운 장면을 넣으라고 강요한것처럼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흔들린다. 마지막 부분의 귀신은 안 나왔어도 될뻔했고, 감독도 굳이 그것을 넣으려고 한것은 아닌거 같다. 심리적으로 충분히 압박감을 줄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이전까지의 장면들에서 실제로 군인들을 해친것은 굳이 '귀신' 이라기 보다는 죄책감과 공포감으로 인해 스스로 미쳐가고 서로 죽이는 모습들이었다는 점에서 볼때 후반부의 그 귀신은 아무래도 좀 생뚱맞을수 밖에.

 

이런저런 악재들은 있지만, 그래도 알 포인트는 나름대로 봐줄만한 영화다. 지나치게 평가절하한것 같지만, 사실 전쟁의 상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잘 묘사되었고 감독의 의도대로 일정부분 '반전' 의 메시지도 충분히 담고있다. 소재도 참신했고, 배우들의 연기나 극중 구성도 무난한 편이다. '그토록 기다려오지'는 않았지만 블록버스터와 액션과 코미디가 판치는 여름 영화판에 그나마 봐줄만한 영화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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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에 초대합니다 - 한국경제 왜 위기인가

 

최근 한나라당 의원들의 책임 전가식, 웃기지도 않는 퍼포먼스 때문에 말들이 많습니다만
경제위기가 전혀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않고 있는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있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수많은 평범한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삶들이 좀체로 나아지지않는 상황은 '경제위기' 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 진지하게 모색해야할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번주 수요일에 있을 지역포럼은 우리삶의 목줄을 죄어오고 있는 경제위기가
무엇에 연유한 것이며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수있는 기회가 될것입니다.

 

마포사회포럼은 열린 포럼을 지향하고 있으며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함께 풍부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발제를 맡아주실 연사는 다함께 신문에 경제기사를 꾸준히 기고하고 있는 이정구 씨 입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희망합니다.

그럼 수요일날 뵐수 있기를 바라며, 짐승은 이만 사라집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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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 교고쿠 나즈히코 항설백물어

짐승은 원래 놀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논다고 해서 나이트 클럽이나 헌팅이나 그런걸 하는것은 아니고 -_-; 주로 영화, 혹은 만화나 소설책 따위를 뒤적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프라모델 따위를 주물럭 거리고 있는걸 좋아한다. 말하자면 '혼자놀기' 에 능숙한 타입이다. -,-;

 

어쨌거나 이놈의 놀기를 좋아하는 버릇때문에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 게임을 하고 있거나 봐야할 신문, 책 대신에 소설이나 만화를 보고있는 모습이 꽤 자주 발견된다. 그런 모습이 발견되면 가차없이 '사냥' 해 버리는것이 사회나 개인에게나 여러모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 거기, 진담으로 받으면 곤란하다구 -_- )

 

아무튼 그런고로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편인데, 주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요즘은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적은 그 '어둠의 루트' 를 애용한다.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어떤 취향을 좋아하냐면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 기왕이면 좀 심각한 ( 혹은 심각해 보이는 ) 스토리들을 좋아한다. 반면에 선과 악이 나뉘는 작품이나 ( 건담 seed 를 싫어하는 이유중 하나 )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들이 나와서 착하고 이쁜짓 하는 애니들은 끔찍히 싫어한다. -,-;

 

작년에는 '키노의 여행' 이 날 즐겁게 해주었고, 작년에 출시된건 아니지만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도 좋았다. 게다가 새롭게 발견한 '레인' 은 정말 최고의 작품이었다. 그런것들을 보며 흐뭇하게 지낸 작년에비해 올해는 이렇다하게 건질만한게 그다지 눈에 띄이지 않아 따분해 하던차에, 드디어 멋진 녀석이 내 레이더에 감지되었으니 바로 요놈이다.

 

교고쿠 나즈히코 '항설백물어'

 

  

괴담을 모아 출판하려는 주인공 '모모스케' 가  좌측 하단의 부적술사 '마타이치' 를 중심으로, 그 옆의 인형술사 '오긴' 그 위쪽에 있는 변신의 대가 '나카미미' 이렇게 3 인조로 이루어진 퇴마 (?) 집단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항설백물어 의 중심 스토리를 이루고 있다.

 

우선 작화가 독특하다. 특히 색상은, 마치 수묵화를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킬정도로 명암의 효과가 뚜렷해서 전반적으로 대략 암울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거기에 가끔씩 보이는 3D 타입의 거리들과, 무엇보다도 각 회마다 중심적인 인물을 제외하고 나오는 이른바 엑스트라들은 정말 인간같지 않게 대충 대충 그려져있다는것 또한 특이점이다.

 

보통 엑스트라는 이런식으로 그려진다.

 

항설백물어의 캐릭터성도 독특한데, 주인공 모모스케는 전형적인 '나약한 지식인' 그 자체다. 그는 이것저것 잡다하게 아는것은 많지만 혼자서는 무엇하나 해결할수 없으며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성격이라 심지어 마타이치들과 함께할때조차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기가 일수다. ( 4화 던가 에서 나온 귀마鬼馬 하야테에 관한 이야기는 예외지만 ) 애니사상 가장 주인공 답지않은 주인공이라 할수 있으며, 능력으로만 따져본다면 마타이치가 주인공에 어울린다 할것이다.

 

그러나 마타이치역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잔인하다 할만큼 인정사정이 없고 자신이 없애버리고자 하는 목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없애버리기 때문에 역시 주인공으로서는 실격이라 할수있다. ( 그런면에서는 역시 모모스케가 전통적인 주연에 걸맞는다 ) 게다가 마타이치는, ( 마타이치와 같이 다니는 오긴이나 나카미미도 마찬가지지만 ) 그 자체가 요괴아니면 귀신으로 보인다. -,-;

 

중심 스토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에 대한 독설' 쯤 될것이다. 그들은 명색이 퇴마 집단이지만, 그들이 퇴치하는건 요괴나 악귀가 아니라 요괴만큼이나 더러운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인간군상들이다. 마타이치는 언제나 '악령 이 아래 멸하라' 하며 부적을 던짐으로서 매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그때 부적아래 들어가는것은 인간들의 시체다. 즉, 마타이치의 '악령퇴치' 라는것은 사실은 악령같은 인간들을 퇴치하는 ( 없애버리는 ) 행위이다. 이때문에 모모스케는 초반부에 '당신들도 단순히 살인을 저지르는거 아니냐' 면서 마타이치들에 대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인간세상은 더러워. 다 없어져야해' 같은 것은 아니다. 총 13 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마타이치는 다소 순화된 모습으로 등장해서 세상을 정화시키려는 ( 다 없애버리려는 ) 절대자 격의 상대와 대결한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허무주의로 빠지지는 않는다는것 역시 항설백물어의 매력중 하나다.

 

제목중 교고쿠 나즈히코는 이 작품의 원작이 된 소설을 쓴 작가의 이름이다. 그는 스스로를 제67548 성운의 알파 혹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소설가로, 괴기물이나 미스테리물에 뛰어나다고 하는데 아직 한번도 그의 작품을 보지는 못해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 소설 '항설백물어' 도 40 만부 이상이 팔렸다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수입이 안된듯해서 더 아쉽다. 13 화로 비교적 짧게 끝나버린 ( 그러고보니 키노의 여행도, 부기팝도, 레인 도 모두 13 화 짜리다. 질질 끌지않는건 좋지만 방송국에서 작품성을 위해서 짧게 자른것은 아닐거라는것을 고려해보면, 역시 이런 작품들은 일본에서도 장사가 안되나보다. 원피스나 코난 등이 100 화를 넘긴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 것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아무튼 항설백물어는 여러가지로 독특하고 볼만한 작품이다. 어떤 작품군들은 자주 접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특정 작품이 일찍 끝나버리면 아쉽고 2기가 언제쯤 시작되려나... 하면서 기다리기 마련인데 이 항설백물어도 그중 하나다. 아, 정말이지 2기 안나오려나... ( 참, 키노의 여행은 2 기가 곧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 ) 

 

마지막으로 마타이치의 성격 ( 더럽다 -_- ) 을 잘 나타내주는 컷을 넣으려고 했는데 없어서, 아래의 두컷으로 대신한다.

 

부적술사 마타이치
인형술사 오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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