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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같은 선거 이야기

1. 당 게시판에 심심찮게 올라오는것이 '선거 참패' 론 이다. 글쎄, 열린우리당이야 이번 선거에서 '참패'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민주노동당은 어떨까? 2002 년 지방선거와 비교하면 일부 약진한것도 분명히 사실이고, 선거 목표로 잡았던 당 지지율 15% 달성 - 300 명(?) 당선 에 못 미치는 것도 분명히 사실이다. 그렇다면 패배라는 평가도 승리라는 평가도 사실을 온전히 설명하는 단어가 될수 없는것 아닐까?


물론 기대에 못 미쳐서 안타깝고, 더 잘할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것이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층민중의 실망과 분노를 잘 이용해서 반사이익을 얻은 한나라당 으로의 표 몰림 현상과 또 한편으로 열린우리당 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이 주로 한나라당의 대항마 개념으로 민주당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선거막판 '민주당 바람' 이 미미하나마 불었던것을 감안한다면, 민주노동당은 좋지 않은 조건속에서 나름대로 선전했다고 말할수 있다. 선거결과에 실망할수는 있지만, 패배 라는 단어는 부적절하다.


2. 어쨌거나 이번 선거를 '패배' 라고 규정하는 입장에서 여러가지 이른바 '당 쇄신 대안' 들이 게시판에 난무하고 있다. 선거 결과를 계기로  어떤 방향으로 당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당원 각자가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문제는 이 '대안' 들이 진정 민주노동당을 민주노동당 답게 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수 있는 것들인가 하는 것일텐데,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발언들이 몇 가지 있는거 같아 조금 끄적여 보기로 했다. 


우선적으로, '선거패배' 론 을 전제로 '운동권 정당 탈피' 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선거 시즌을 전후해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중에 하나이긴 한데, 이번에는 여기에 다소 살이 붙었다. '사람들이 민주노동당 하면 데모하는 정당으로 안다' 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사람들이 민주노동당 하면 데모하는 정당 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이건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워 해야 할 일이다. '데모 하는 정당' 이라는 말은 곧 '투쟁하는 정당' 이라는 뜻이고, 그정도의 후한 평가를 받으려면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한결같이 함께하며 싸우지 않는 이상 얻어낼수 없는 인식일 것이다.  사실 민주노동당이 '데모하는 정당' 즉 '투쟁하는 당' 으로 인식될만큼 대중투쟁에 열성적으로 함께 했는가 하고 자문해보면 그다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만은 없을것이다. 절박한 처지에 내몰려 싸울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 단적인 예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 민주노동당이 투쟁하는 당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 했는지는 솔직히 다소 의문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경기도 남양주시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주공아파트가 밀집된 지역 인근에 쓰레기매립장을 지으려는 정부에 맞서 주민들이 반대행동에 나섰고 정부는 이를 용역깡패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민주노동당은 이에 맞서 주민들과 함께 대응했고, 투쟁이 선거 시즌까지 쭉 이어지면서 보수적인 지역 후보 11 명과 접전끝에 기초의원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투쟁하는 정당' 은 민주노동당에게 핸디캡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발전시켜야 할 '이미지' 로 만들어 내야할 무엇이다. 현재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지지받을수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더욱 착실히 성장의 폭을 넓혀 갈수 있다.


'운동권 정당 탈피' 와 같은 맥락으로, 민주노총과의 결별 내지 '당내 지분 축소' 를  주장하는 목소리들도 있다. 민주노동당의 노동계급정당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이른바 '대중정당' 이 되어야  선거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인데, ( 심지어 당명에서 '노동' 이라는 글자를 제외하자는 이야기도 있다 ) 사회변혁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두지 않거나 심지어 배제한채로 의미있는 사회적 변화를 끌어낼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 말로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 될 뿐이다.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노동계급 정당이 아니라 대중정당' 임을 내세우는 순간 열린우리당 몰락의 수순을 그대로 밟아나갈 따름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지난 당직선거때 박노자 교수는 '한국은 전체 인구 중에서 임금노동자가 65~70% 정도 된다. 이 각계각층의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해서 당을 꾸려 간다 해도 이미 시민 대다수의 이해 관계를 표방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굳이 그 성격을 훼손시킨다는 것은 극히 올바르지 못한 판단이다' 라고 말한바 있다. 정말이지,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이익에만 충실히 임한다면 충분히 집권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정당', '국민정당' 등의 몰계급적인 방향을 대안으로 제시하는것은 당의 존립이유 자체에 대한 부정임은 말할것도 없고 '선거승리' 조차 바라볼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울산에서의 선거패배를 내세우며 '더 이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당이 성공할수 없음' 을 역설할지도 모르겠으나, 울산에서 단체장 후보들이 탈락한 부분은 분명 뼈아픈 것이지만 한편으로 광역의원 후보 3 명 및 기초의원 다수의 당선, 또다른 노동자 밀집지역인 거제도 및 광주 광산구 등에서 광역, 기초 의원들이 다수 당선 되었음은 오히려 계급중심의 투표가 더욱 유효해 졌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3. 다른 한편으로 이번 지방선거가 한나라당의 '싹쓸이' 로 끝남에 따라, 이른바 '반 한나라', '진보개혁세력 연대' 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올수도 있다. 이미 선거직전에 진보진영 일부가 이와 같은 주장을 펼쳐서 논란이 붙은바 있지만 열린우리당 정권과의 공조, 연합, 타협 등등에 민주노동당이 주력한다면 보잘것 없는 성과만을 얻을 뿐이라는 점이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향후에도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은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옥죄는 정책들을 한나라당과 함께 진행할 것이며, 이는 다음 선거 역시 열린우리당 정권에 대한 심판론이 선거의 주요 이슈로 등장할 것으로 이어질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보다 확고하게 노무현 정권과 우익들에 대해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그 왼쪽에서 반대하는 포지션을 취할 필요가 절대적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당은 더욱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성장할수 있다. 만약 그러지 못하고 열린우리당 과의 정책공조나 '반 한나라 전선' 따위에 동참한다면 그야 말로 열린우리당과의 동반 몰락만이 민주노동당에게 남겨진 길이 될 것이다.


4. 기존 언론들은 끊임없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동반 몰락' 을 이야기 하며 기층민중들을 기만하고 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민주노동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나름대로 선전했으며 승리나 패배 어느 한가지로 규정할수 없는 결과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사실 - 목표치보다 밑도는 당선자수 및 지지율 - 만을 부각시키며 선거패배에 따른 당 지도부 책임론을 지속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선거결과가 나올때마다 일희일비 하며 지도부나 갈아치우는 것은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 같은 보수정당들의 전매특허요, 선거주의 정당들이나 할 짓이다. 


민주노동당이 지금 착수해야할 일은 '지도부 물갈이' 가 아니라 당면한 투쟁들에 최대한으로 함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월 임시국회 에서 다뤄질 비정규직 개악안 대응, 한미FTA 협상 대응,  하이닉스 매그나칩스 장기 농성 및 코오롱의 크레인 농성, KTX 여승무원의 단식 농성등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장기파업사업장 지원,  평택미군기지확장이전 대응 등에 주력하겠다는 문성현 대표의 말은 옳다. 단 그 말들이 말로만 끝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당원들이 당 지도부에 강력한 압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것이다.


선거평가는 냉정하고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 정당이어야 하고 투쟁하는 정당이어야 하지, 선거결과에 일희일비 하는 정당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야지만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로 바꾸어 낼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생길것이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준 12% 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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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장경제 라는 이념보다, 내 삶이 먼저다.

온라인 공간의 많은 부분들이 5.31 지방선거에 대한 것으로 메꿔지는걸 보니, 지방선거 국면이 막바지로 돌입하긴 했나보다. 그 와중에 한나라당 박근혜 총재께서는 커터칼 테러도 당하고, 테러사건이 일어나자 동정표가 그쪽으로 쏠릴까 노심초사한 열린우리당 은 선거운동마져 하루 정지하고 '몰표를 주지 맙시다' 며 대국민 호소도 하더라.


잠시 삼천포로 샌다면, '커터칼 테러' 라고 내 맘대로 이름 붙이고 보니 몇년전에 파업농성중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용역깡패들이 저질렀던 식칼테러 사건이 연상된다. 그 기업 회장님이 아마 그해 월드컵 광풍의 힘까지 받으사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셨던 것도 기억나고. 그러고보니 불과 몇일전인 지난 14일에는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450일도 넘게 투쟁중인 코오롱노동조합의 고압송전탑 고공농성장에 용역깡패들이 식칼을 들고 올라가서 위협했다지? 근데 이거, 주류언론에서 결코 다뤄주지 않을 노동자들과 호들갑을 떨며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 보도의 대상인 사람과 동일하게 비교하면 실례일지도 모르겠는걸. 대한민국에서 언제부터 그 두 대상이 동일한 인간으로 대접받았던가 말이지.


뭐 하여간 오늘은 그 지겨운 밥그릇 이야기로 토닥거려볼께. 대통령 선거건, 국회의원 선거건 지방선거건 이맘때쯤 꼭 한번씩 나오는 말들이 있더란 거지. '이념보다 밥이 먼저' 라는 이야기. 이거 예전에는 주로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진보 이데올로기와 삶이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그 무엇인것 처럼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정치성향을 정당화 시킬때 사용하던 구절인데, 노무현 정권 이후에는 열린우리당 지지자들도 그러고 민주당 지지자들도 그러고 하여튼 개나소나 다 써먹으면서 민주노동당 표 깍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더라구.


하기사,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이나 그 정치성향이 한나라당과 다르지 않으니 그동안 써먹지 않았던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지. 사실 비정규직 확대, 쌀개방 협상, 한-미 FTA,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 자신들의 중요한 지지세력이 얽힌 문제에 있어서 저 3 당이 다른 목소리 내는것 본적 있냔 말이지. 그나마 선거철 표심때문에 조금 신경쓰는척 하던 한나라당과의 사소한 '차이' 조차 가면 갈수록 자기손으로 지워나갈게 분명해.


그러고보니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2004 년 탄핵사태를 언급하던데, 그때는 차떼기당 이니 뭐니 하며 한나라당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인척 하더니 그 국면이 지나니까 이내 손잡고 한나라당과 정책공조 하며 탄핵반대의 촛불을 높이 들었던 바로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더만. 한나라당 살려준건 열린우리당 당신들인데, 이제와서 뭐가 몰표는 되니 안 되니 하며 징징거리나? 정 뭣하면 한나라당이랑 열린우리당이랑 당신들이 좋아하는 M&A 라도 하시면 될거 아닌가? 기업가의 마인드로 정치하려는 사람들이 그 정도도 못한단 말야?


하지만 어쨌거나, '이념보다 밥이 먼저' 라는 말 자체에는 나도 동의해. 특히 요즘처럼 장기적인 경제침체와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 보다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는게 당연하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말들이 내 주머니 사정과 무관한게 아니라는 거야.

 

자본주의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지만,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경향들 - 시장경제,자유무역,신자유주의 - 들 도 죄다 이념들인거지. 뭐 민주적 사회주의, 복지국가 이런것들만 이념인건 아니잖아? 결론적으로 따져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지들도 죄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책들을 꺼내놓고 있으면서 '이념보다 밥이 먼저' 라면서 - 마치 서민경제에 지대한 관심이라도 있는것처럼 - 민주노동당을 이데올로기나 이야기하는 정당이라고 몰아붙이면 이상하잖아?


그럼 '이념보다 밥이 먼저' 라는 열린우리당 이나 한나라당 애들은 왜 그렇게 이념에 기반한 정책들을 꺼내놓고 있는 걸까? 간단하게 말해서, 개네들이 딛고 서 있는 이념이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쥐고 흔들수 있는 자본가.지배 계급에게 철저하게 유리한 사회체제를 만들어가는 이념이기 때문이야. 사실 이들이야 말로 매우 충실하게 자신들의 밥그릇을 보존할 이념을 내세우는 정치세력들이지.


문제는 이자들이 내 밥그릇에 밥을 채워줄 생각은 단 1g 도 하고 있지 않다는 거야. 그것도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예를들어 비정규직 문제 같은 경우 기업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비정규직을 늘려서 노동시장을 유연화 시키고 인건비를 줄이는게 '밥그릇' 에 도움이 될것이지만 동시에 그건 노동자의 '밥그릇' 을 빼앗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거든. 

 

민주노동당이 말하는 공공보육 공공의료, 그거 시행하면 평범한 사람들의 '밥그릇' 은 늘어나지만 동시에 지배계급의 몫을 줄이지 않고서는 현실화 되지 않을 방법이거든. 평택에 미군기지 만들면 미국 지배자들의 밥그릇이야 늘어나겠지만, 그리고 거기 편승해서 한국 지배자들의 밥그릇도 늘어나겠지만,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로 인해 야기될 평화체제 위협으로 인한 손실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거든.


그러니 결론적으로 말해,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의 지지세력들이 '이념보다 밥이 먼저' 라고 설레발 치고 나설때의 '밥' 은 결코 내 밥이 아니야. 그건 대통령 이하 지배자들, 그리고 기업가들의 밥그릇을 뜻하는 말이지, 거기에 몸이 아파도 병원 한번 들리기 겁나는 내 자신의 밥그릇은 없어.

 

물론 그들은 결코 그런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겠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국익' 이니 '국가경제' 니 하는 말로 포장하면서 마치 그 밥그릇이 나 한테도 돌아올수 있는것처럼 이야기 하겠지. 그런데 있잖아, 굳이 노동계급과 자본주의 국가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파고들지 않더라도 이거 말이 안되. 비정규직 확대 나 한-미 FTA 강행의 논리가 바로 '국가경제를 위해서' 거든. 결과적으로 내 밥그릇 줄이면서 나한테도 밥그릇이 돌아갈수 있을거다 고 말하는 거야. 말 되는거야?


위에서 말했지만, '이념보다 밥이 먼저' 라는 구절자체에 원칙적으로 동의해. 그런데 이념은 민주노동당 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 할거 없이 죄다 떠들어 대고 있는거야.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줄인 지배계급을 위한 밥그릇을 넓혀주기 위한 이념을 말이지. 그들이 나에게 밥그릇을 내민다면 그건 지배계급을 위해 너같은건 먹고 죽어버리라고 농약으로 지은 밥에 지나지 않는거지.


난 그자들을 위해서 내 밥그릇을 포기할만큼 삶이 여유롭지가 않아. 내 '밥' 을 위해서 , 일하는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과 '이념' 을 주장하고 실천할수 있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라는 이념보다, 내 삶이 먼저니까. 내 삶을 쥐고 죽어라고 흔들어 대는 자들에게 찍어줄 표 따위는 없어. 민주노동당은 국가를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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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에 투표하라

다함께 80 호
http://www.alltogether.or.kr/

 

 

관련링크 : 오세훈 - 이명박 줄기세포로 만든 복제 배아
관련링크 : 강금실에게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한정식 집에서 짜장면.."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라

 

이번 지방선거에서 열우당은 십중팔구 참패하고야 말 것이다. 그 당은 어떻게든 패배를 모면하기 위해 갖은 쇼를 다하고 있다. ‘운동권 새댁’이라는 한명숙을 총리로 임명하고, 강금실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시피 그 효과는 거의 제로다.

한나라당이 공천 비리와 성추행 사건 등 악재를 거듭하고 있는데도 열우당의 지지율이 정체이거나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고착되고 있는 지표이다.

상당수 사람들은 ‘여당이 무조건 싫다’고 한다. 한나라당이 온갖 부패 추문에도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총선에서 열우당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 당에 등을 돌렸다. 한국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총선 때 열우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서울시 유권자 중 강금실을 지지하는 사람은 고작 38.9퍼센트다. 강금실은 열우당의 후보가 되자마자 비극적 희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열우당은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과 반감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열우당의 반한나라당 슬로건은 노동자를 기만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 패배와 탄핵 반대 운동으로 그로기 상태가 된 한나라당을 소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열우당이었다.

그러므로 열우당의 반한나라당 슬로건은 노동자 대중이 투쟁과 삶의 경험을 통해 애써 가꾼 진보적 각성의 열매를 가로채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열우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높다는 것일 뿐, 한나라당의 절대 지지도가 상승한 것은 아니다. 열우당의 실패로부터 반사이익 챙기기, 이것이 한나라당이 살아가는 법이다.

오죽하면 <조선일보>의 김대중이 한나라당을 두고 “더 이상 국민이 기대하는 야당이 아니며 그런 요구를 수임할 능력이나 자질이 없다”고 했을까.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4월 중순에 9.4퍼센트였던 무응답층이 5월 초에는 오히려 18.5퍼센트로 늘어났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역대 지방선거 중 투표율이 가장 저조할 것 같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이 이들 샴 쌍둥이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대안을 제시한다면 상당한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

그러려면, 민주노동당은 무엇보다 열우당의 교활한 의회 술책에 말려서는 안 된다. ‘개혁적’ 언사를 사용해 반개혁적·반노동자적 본질을 은폐하고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대중을 속이려는 열우당의 책략을 가차없이 폭로해야 한다.

이렇게 봤을 때, 5월 2일에 열우당이 6개 법안을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통과시킬 때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이를 도운 일은 민주노동당 선거 도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법안들, 특히 주민소환제가 ‘진보적’이었을지라도 당시 맥락에서 그것이 판단의 핵심 고려 사항이 돼서는 안 됐다. 왜냐하면 선거 패배를 모면하기 위해 왼쪽 깜빡이를 켜 지지층을 결속시키려는 열우당의 책략이 그 개혁입법의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법안들이 ‘날치기’ 통과라는 인상을 줘 가면서까지 반드시 그 날 통과시켜야 할 만큼 급박한 것들도 아니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눈에 두 당(열우당과 민주노동당)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비칠 뿐이다. 이런 식의 의회 전술은 그렇잖아도 강하게 압력받는 양당 구도 속으로 민주노동당을 밀어넣을 수 있다.

지금 김종철 서울시장 후보도 양당 구도 압력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언론이 악의적으로 김종철 후보를 군소 후보로 제쳐 버리고, 민주노동당의 서울 지지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낮고, 열우·한나라당이 모두 개혁적 이미지(단지 이미지일 뿐이지만)를 지닌 후보를 내세웠다는 점이 김종철 후보의 선거 도전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객관적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번 선거는 매우 민감하고 전국적 초점을 이루는 투쟁들을 배경으로 치러진다 ― 평택 미군기지 확장, 한미FTA, 비정규직 등.

이 쟁점들은 예외 없이 우리 사회를 첨예하게 가르고 있다. 그리고 열우당과 한나라당은 이 쟁점들에서 근본으로 다르지 않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따라서 김종철 후보가 TV 토론 등을 활용해 정부와 열우당의 기만을 날카롭게 폭로하고 대중에게 투쟁을 호소한다면, 운동의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매우 효과적인 선거 운동이 될 것이다.

이 과정은 한나라당을 비판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운동과 투쟁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결정적 순간에는 한나라당에 달라붙는 열우당의 동요와 우유부단함을 대중에게 한껏 드러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김종철 후보는 TV 토론에서 KTX 여승무원 농성, 평택 미군기지 반대 운동 등의 당면 현안에 대해 수세적인 태도를 보였다. 선거운동 초기에 그는 “노학연대 투쟁을 선동하겠다”고 했는데, 이와도 모순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김종철 후보가 이른바 포지티브 선거, ‘정책’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부르주아적 명망성의 압력을 계속 수용한다면, 유력한 도전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보다는 자칫 양당 구도에 의해 잊혀진 도전자가 될 위험성이 있다.

물론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5월 31일 김종철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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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여성으로 살아남기 위해 - 노스컨츄리

착각하기 쉬운것 중에 하나로, 노동문제, 여성, 인권 등의 부분에 있어서 다른나라 - 예를 들면 서구유럽 - 의 사회들은 굉장히 진 일보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버리는 점이 있다. 확실히 대한민국의 경우를 비추어 생각해보면 제도적으로건 사회 전반적인 인식의 수준으로건 그쪽 사회가 보다 선진적인 색채를 띄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습들은 구성원들의 '문화' 적인 차이에서 비롯된것이 아니라 단지 억압받는 사람들의 강력하고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에 비로소 현실로 다가올수 있었던 부분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직장내 성희롱 문제가 최초로 법원에 제기된것은 1993 년, 서울대 우 모 조교가 그 담당인 신 모 교수를 상대로 제기한 것으로, 무려 6 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진바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직장내 성희롱 예방지침이 만들어지고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화 시키는등의 성과가 만들어 졌다. 여성문제에 있어서 보다 선진화 된 사회로 알려져 있는 미국이지만, 1984 년에야 비로소 직장 내 성폭력 문제가 '최초로' 법정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 '노스컨츄리' 는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으로 알려진 바로 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조시 에임스는 여성 노동자로 직장에서 당할수 있는 성폭력의 유형들을 거의 대부분 고스란히 겪게 된다. 남자 동료들은 그녀와 다른 여성 노동자들을 동등한 노동자로, 동료로 대우해 주지 않고 노골적으로 성적비하 발언을 일삼거나 성적코드로 당황하게 만드는가 하면, 욕설이나 신체의 일부를 만지는 행위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한다. 그녀가 일하는 광산에서 여성들은 동료가 아니라 '남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못된 여자' 일 따름이며, 동일하게 노동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성적인 대상일 따름으로 취급받는다.

 


조시는 이러한 상황들에 대해 처음에는 직장을 유지하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견디려고 하지만, '참는것' 은 상황을 전혀 나아지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되어만 간다. 견디다못한 그녀는 언젠가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서 '힘든일이 있으면 찾아오라' 고 말했던 광산의 사장을 찾아가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장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고 이후 여성노동자들을 향한 모욕적인 공격은 더욱 그 수위를 높여간다. 그녀의 옛 남자친구였던 작업반장은 폭력적으로 그녀를 몰아붙이고 남성노동자들은 마침내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뒤흔들어 테러를 가하기 까지 한다.


노동운동의 힘이 미약했던 초기에 남성 노동자들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문제에 맞서 여성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 내부에서조차도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무한 - 심지어 노조 총회에서 발언권이 남성 노동자에게만 인정되는 - 처지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져 그 모든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들을 참고 견디는 것 뿐이다. 조시가 함께 문제제기 하자고 그녀들을 설득하지만 당장 해고와 더 큰 폭력에 노출될수 있는 위험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그녀들은 쉽게 응할수 없다.


지금도 온라인,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문제를 이야기하고 바꾸려고 하는 사람, 특히 여성을 향해서 되려 '당신의 오버질이 문제' 라는 식의 뒤집어 씌우기와 이간질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노스컨츄리 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시' 가 특별히 시끄럽고 비협조적이라며 다른 여성노동자들과 그녀를 이간질 하고 있는 상황은 여성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만들어 간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속적으로 싸움을 이어나가면서 그녀들의 생각과 행동은 '참는' 것에서 '싸우는' 것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노스컨츄리' 에서 조시의 모습은 단순히 직장내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성이 사회적으로 겪게되는 모든 차별과 억압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폭력적인 남편, 그로부터 독립적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켜나가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가정 내부에서의 편견 등 이 다루어지면서 '노스컨츄리' 는 노동계급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끔찍할만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실화를 전제로 했음을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또 한가지 측면으로, '노스컨츄리' 는 1980 년대 당시 레이건의 집권시기에 노동운동이 처한 처지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조시' 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가뜩이나 일자리도 없는데' 여자들이 일자리를 잠식해 간다는 것으로, 이는 지금 남한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지배계급이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강도가 강한데 비해 이에 맞서는 노동운동의 역량이 약할경우, 노동자들의 불안은 이러한 방식으로 보다 약자에게 표현될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좌우지당간, 정말이지 매우 오랫만에 주위에 기분좋게 권할만한 영화라고 말할수 있다. 비록 극장에서는 이런 진지한 영화들이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한채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유사 헐리웃' 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 하고있는 이런 영화들은 소장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남성이 보기엔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글쎄, 구제불능의 마초씨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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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파래지는 강금실의 ‘보라색’ / 오세훈 - 한나라당판 강금실?

다함께 78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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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파래지는 강금실의 ‘보라색’

 

강금실의 ‘보라색 패션쇼’가 계속되고 있다. 이미지 선거 전략 때문에 ‘보라색’의 정체는 모호하다. 구체적인 공약과 정책은 “투 비 컨티뉴드(다음 번에 계속됨)” “기대하시라 개봉박두”라며 뜸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 것 없다’고 그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개선할 가망은 거의 없다.

강금실은 출마 선언 당시 자신의 보라색이 “기존의 빨간색(진보)과 파란색(보수)의 대립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강금실은 “저소득층 산모에게는 20만 원을, 나머지 산모에게는 10만 원을 상품권으로 지급하겠다”며 꾀죄죄한 생색내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무현과 ‘거리두기’를 한답시고 오히려 기득권에 아부하고 있다.

그는 “강남에 사는 분들이 왜 자기들을 죄인 취급하냐고 말한다”며 “강남 시민들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래서 “강남을 아름다운 부촌으로” 만들자고 한다.

강금실은 조·중·동 같은 우익들에게도 비위를 맞추려 한다. 그는 “내가 시장이 되면 현 정부처럼 일부 언론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출마선언 쇼’를 하면서 전태일 동상을 찾은 것은 역겨운 위선이다. 강금실은 “지입차주는 노동자가 아니”라며 화물연대 노동자를 탄압하고, 철도 파업에 경찰을 투입하고, 살인적인 강제 추방으로 이주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강금실의 지지율 역시 떨어지고 있다. 선거가 시작하기도 전에 기득권 세력과 우파에 타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일관되게 한나라당에 맞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오히려 타협 때문에 한나라당의 입지를 강화시켜 줄 뿐이다. 한나라당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김종철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

 

오세훈 - 한나라당판 강금실?

 

김덕룡·박성범의 공천 비리는 차떼기와 최연희 성추행에 이어 한나라당이 구제불능의 쓰레기임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영남 지역만 해도 “기초의원 1억∼3억 원, 광역의원 3억∼5억 원, 기초단체장 10억∼15억 원의 ‘공천 공정가’ 소문이 돌고 있다.”

오세훈은 2000년 이회창의 ‘젊은 피 수혈’로 입당한 자답게 이런 썩은 내 풀풀 나는 한나라당의 치부를 가리는 구실을 한다. 강금실의 보라색 패션쇼에 오세훈은 녹색 패션쇼로 맞서고 있다. 자신이 “오랫동안 환경운동을 해오며 녹색이 뼛속까지 박혀 있다”는 것이다.

이 자가 새만금 공사 반대 삼보일배나 북한산 관통도로 통과 반대 성명에 한두 번 얼굴을 비추거나 이름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자가 새만금 공사 등을 저지하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흔적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오세훈은 “뉴타운 50개 건설”, “강북 상권 부활 프로젝트”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김종철 후보가 지적하듯이 환경을 파괴하는 “한나라당다운 전형적인 개발론”일 뿐이다.

이런 자를 중앙집행위원으로 받아들인 환경운동연합 지도부의 명망 추구 정치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오세훈은 이런 경력을 자신의 이미지 관리용으로 써먹을 뿐이다.

강남 부유층 주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자는 민중운동과 전혀 관계가 없던 ‘웰빙 오렌지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의 자유주의적 이미지는 짝퉁일 뿐이다. 그는 민변에 이름을 올려놨지만 지금까지도 “탄핵은 올바랐다”고 우기며 한나라당의 노무현 탄핵을 옹호하고 있다.

오세훈은 이라크 파병안에 찬성했고 노동권과 환경을 파괴하는 경제특구법안에 적극 찬성했다. 이 자는 “21세기 업그레이드된 개방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유무역협정으로 나타날 것”이라며 신자유주의를 찬양한다. 또, “내가 힘들고 뒤처지는 것은 내 탓이지,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내가 가난한 것은 남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며 경쟁을 고무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집단이기주의”를 버리라며 “자신들의 월급을 깎더라도 실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와 일자리를 나누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비아냥거린다.

이 자가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경쟁 후보인 맹형규는 “영입 인사는 백설공주이고, 나나 홍준표 의원은 일곱 난쟁이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고 신경질을 냈다. 맹형규와 홍준표 같은 ‘늙은 난쟁이’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오세훈의 인기가 강금실을 능가하는 것은 노무현에 대한 사람들의 환멸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노무현을 심판하기 위해 오세훈 같은 자를 지지하는 것은 갈증난다고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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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처럼 싸우고 승리하자

다함께 78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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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처럼 싸우고 승리하자

 

 

노무현 정부는 틈만 나면 비정규직 개악안을 통과시키겠다며 노동자들을 우롱했다.

이번에도 노동부 장관 이상수는 “이번에는 미룰 수 없다. 4월 임시국회가 데드라인”이라고 협박했다. 또 진만 빼고 미룰지, 정말 강행 처리할지는 알 수 없다.

고교생들도 57퍼센트가 비정규직 개악안을 반대(한길리서치 조사 결과)할 정도이지만 노무현 정부에게 중요한 것은 기업주들의 요구다.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 확대라는 기업주들의 요구에 따라 노동부 보고서를 은폐· 조작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우당과 한나라당의 싸움판에서 흙탕물이 튀고 있지만, 비정규직 개악안 앞에서 이 모든 갈등은 봄눈 녹듯 사라진다. 

따라서 개악안 처리 여부는 결국 기층 대중이 얼마나 강력하게 투쟁하느냐에 달려 있다. 노동자와 학생이 프랑스처럼 대규모 파업과 점거 투쟁을 벌인다면 개악안을 저지할 수도 있다.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도 “프랑스처럼 싸우고 승리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4월 10일부터 벌인 닷새 간의 민주노총 순환 파업은 결코 ‘프랑스처럼’이 아니었다. 사실, 마지막 날 진행된 금속연맹의 4시간 파업을 제외하곤 파업도 아니었다.

조준호 위원장도 “이번 투쟁은 산업을 마비시키는 파업이 아니라 우리의 요구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빌팽을 물러서게 한 것은 바로 산업과 사회기반시설을 마비시키는 파업이었다.

순환 파업마저 ‘순환 홍보’로 전락시킨 민주노총 지도부는 지난 몇 년 간 ‘사회적 교섭’에 연연하거나 국회 일정에 종속된 하루 파업을 되풀이하면서 투쟁 동력을 갉아먹어 왔다.

더는 지배자들에게 끌려다니며 현장조합원들의 진을 빼서는 안 된다. 국회 일정에 따라 파업을 결정했다 철회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개악안을 완전히 폐기시켜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프랑스처럼 개악안을 폐기하지 않으면 무기한 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그러한 파업 건설에 온 힘을 모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아직도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김태일 사무총장은 “비정규직법안이 4월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면 … 노사관계로드맵 논의를 위한 대화 구조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또 다른 악순환에 말려들겠다는 것이다. 교섭 테이블에서 투쟁의 발목이 잡힌 채 정부안의 부분 수정을 추구하다 뒤통수를 맞고, 결국 뒤늦게 국회 일정에 맞춰 파업을 결정했다 철회하기를 반복하는 악순환 말이다.

노무현 정부는 민주노총 지도부를 교섭 테이블로 끌어들여 실컷 이용해 먹은 다음 뒤통수를 칠 게 뻔하다. 사회적 교섭을 지지하는 민주노총 이수봉 대변인마저 “[노무현 정부에게] 민주노총이 씹다버린 껌 취급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최근 타결된 일부 ‘장기 투쟁 사업장’들의 성과도 “정부의 노력” 덕분이 아니다. 1년 넘게 처절하고 끈질기게 노동자들이 투쟁한 성과인 것이다.

더구나 여전히 세종병원, 코오롱, 오리온전기, 하이닉스매그나칩, 현대하이스코 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철도공사는 끝내 KTX 여성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GM대우 사측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장을 철조망과 콘테이너로 용접해서 ‘포로수용소‘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고공 농성자들이 단식에 들어가자 물과 소금도 주지 못하게 막고 있다.

노동부 장관 이상수는 “이제는 소수가 반대하더라도 다수의 힘에 의해서 [비정규직 개악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소수 지배자들에게 다수 노동자들의 힘을 보여 줘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파업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기차, 지하철, 비행기, 버스가 운행을 멈추었다. 우체국과 병원도 파업에 가세”했고 결국 “프랑스 정부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중앙일보>). <동아일보>는 “프랑스의 사례는 ‘강 건너 불’이 아니다”라고 걱정했다.

프랑스 지배자들처럼 비정규직을 확대하려는 노무현 정부에 맞서 프랑스 노동자와 학생들처럼 대중 파업과 시위를 건설하자. 그래서 노무현을 빌팽처럼 물러서게 만들고 프랑스처럼 우리도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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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투기자본의 천국인가?

 

 

 

 

서부사회포럼은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다함께'가 주최합니다.
포럼에서는 사회 연대와 공익을 위한 캠페인과 주장을 소개하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포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서로의 경험과 주장을 함께 나누는 토론 광장입니다.

 

지난 4월 1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외환은행 노동자 5천여 명이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을 박탈해 외환은행 독자 생존을 보장할 것을 촉구하며 2004년에 외환은행에 합병된 외환카드노동자 들과 함께 종묘공원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론스타는 2003년에 외환은행을 헐값에 사들인다음 조기매각 하는 방식으로 예상 시세 차익이 4조 5천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이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과세추징을 거부함으로서 투기자본의 진 면목을 보여준바 있습니다.

 

3 년이 안되는 사이에 이와 같이 막대한 차익을 만들어낸 비법은 기업합병과 정리해고로 주가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론스타는 외환카드 합병 때 감원을 비롯해 총 1천2백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한바 있습니다. 거기에 정부의 막대한 공적자금 지원도 주가를 올리는데 한몫을 담당했습니다.

외환은행 노동자들의 저항을 비롯하여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자 뒤늦게 감사원의 감사가 시작되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다고 나서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된 수사가 이루어 질지는 회의적 입니다. 론스타는 매각을 위해 외환은행의 BIS비율을 조작해 부실은행으로 둔갑시켰고 여기에는 청와대는 물론, 전직 부총리 3인, 재경부 관료, 정치인들이 대거 연루돼 있습니다. 이 거래를 최초로 주선한 자 는 '역대 최고의 로비스트' 라 불리는 김재록 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근 외환은행의 대주주 론스타펀드는 860 만 달러 를 해외로 밀반출한 사실이 적발됐는데도 벌금 한푼 물지 않았습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이 지적했듯이, “재경부-투기자본-여야정당-검찰 등은 한통속” 일 뿐입니다. 

 

론스타의 경우는 외자유치라는 그럴싸한 구실로 추진된 투기자본이 추진하는 구조조정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가장 최근의 사례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미 에서는 오리온전기 노동자들이 미국계 사모투자펀드 매틀린패터슨에 의한 전형적인 투기자본식의 기업청산에 맞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작년 6월 오리온전기를 인수할때만 하더라도 정부는 '성공적인 외자유치' 라며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네 달 뒤에 단 두 명의 대주주가 밀실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회사를 청산하고 1천3백 명의 노동자 전원을 일시에 해고한다음 매각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제일은행을 사들였다가 스탠다드차터스은행에 넘겨 1조1510억 원을 벌어들인 뉴브리지, 한미은행을 샀다가 씨티은행에 팔아넘겨 7017억 원을 벌어들인 칼라일 등의 투기자본의 사례들도 있습니다.

 

이번주 목요일, 한겨례 문화센터 에서 대한민국은 투기자본의 천국인가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립니다. 토론회에서는 투기자본의 사례, 그들이 출몰하는 배경, 투기자본에 대한 대안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논의될 것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희망합니다.

 

○ 일시 : 2006년 4월 20일(목) 오후7시30분
 
○ 장소 : 지하철 2 호선 신촌역 6번 출구 (서강대 방향), 한겨례신문사 문화센터 303 호
 
○ 문의 : 011-9997-9084, 011-9888-5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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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강연 - 종교란 무엇인가?

다함께 77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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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이 글은 지난 3월 18일 연세대에서 열린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강연회의 발제를 녹취해 정리한 것이다.


 

박노자 종교 강연회


 

"짓밟힌 자의 신음소리"


 

하필이면 왜 이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일종의 변명 같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1∼2년 전에 민중 신학과 가까운 한 기독교 계통의 잡지로부터 현대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죄송합니다. 못쓰겠습니다'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제 학술 분야가 원래 기독교보다 고대사였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좀더 많이 한 부분도 있었고, 또 신자가 아닌 신분으로 비판하기에는 뭔가가 쉽게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사실 그때 제가 거절의 말씀을 드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이건 굳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결국 불교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만   '기업 활동에 대해서 이념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기업 활동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얼핏 보면 신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은 신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 현존하는 종교 조직에 대한 발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외국의 사회인류학이라든가 사회학 같은 부문에서는, 특히 종교사회학에서는 요즘  '종교 시장'이라는 용어를 거의 별 거부감 없이 쓰다 보니까 저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 한국의 경우 사찰이든 교회든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일종의 기업 활동으로 보이는 신앙 활동의 형태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이념적 입장에서 비판하기가 왠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활동이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아는 소위 기복 장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회를 찾을 때는 마음 속에 일종의 거래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찾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말씀이지요. 예컨대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기도하면 내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하겠지" 하고 생각할 때 여기서 신의 축복이란 게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기도를 잘 하면, 대학교 입학뿐 아니라 예컨대 직장에서도 인간 관계가 원만해져서 안 짤리겠죠. 그러니까, 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결국에는 여유있는 생활하고 잘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 신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거래할 수 있다"는 조직에 가입해서, 헌금이라는 이름이든 성금이란 이름이든 불전이란 이름이든, 어떤 명목으로 거기에다 일종의 물질적 대가를 바치고 그 대신에 상당히 현실적인 성격의 축복을 돌려 받는, 성격의 신앙 생활이 우리한테는 아주 익숙해진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기복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복 신앙은 꼭 구체적으로 '자녀 입학하게 해 달라',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 하는 것뿐만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현실 생활이 원만하고, '현실적인 잣대'로 봤을 때 행복한 생활을 초자연적 힘에 의해서 돌려받으려는 것이 기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이든 교회든 수많은 종교단체에서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기복을 제공함으로써 상당한 대가를 받고, 또 그 대가로 사찰의 경우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대형 불상을 짓고, 교회 같으면 단일 교회로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말하자면 기복 장사를 잘 한다는 것을 건물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결국 그런 거래나 장사에 대해서 이념적 입장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기복 장사, 종교를 신통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와 거래하는 곳으로 이해한다는 것, 또는 종교의 대상으로 신이나 초자연적 힘, 또는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제그제 생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때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이차돈이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신라 법흥왕 때의 순교자 이차돈을 잘 기억하시겠지만, 왕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도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시킨 거죠. 대신들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이차돈을 죽였는데, 결국 대신들의 반대가 무로 돌아가고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이야기인데, 혹시 여러분은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삼국유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동기가 됐는데, 이차돈이 참수당하기 직전에 '만약 부처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부처님에게 기적을 일으킬 권세가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참수당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 대신에 하얀 물, 그러니까 우유와 같은 색깔의 하얀 물이 갑자기 목에서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부처가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무서운 신인 줄 알고 거기에 감복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이고, 불교를 믿는 수행자의 목을 칠 때 하얀색의 액체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붓다의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에서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설화로서는 유래가 깊은 설화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신라에서 생긴 설화도 전혀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신라 사람들한테 초기의 붓다, 초기의 부처가 바로 기적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그런 신통한 존재였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 승려나 순교자 이차돈 같은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킬 만한 신통력의 소유자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백제가 불교를 일본에 전달했다는 것을 상당한 민족적 긍지로 삼는데, 만약  일본서기 , 일본의 공식 역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수했을 때, '부처를 믿으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이고 붓다가 나라를 지켜줄 수 있다'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붓다라는 신이 힘이 세고 무서운 신통력을 갖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초자연적 존재였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종교에다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고,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섭고도 신비한 도사로 생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 역사 속에 상당히 깊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기가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기복과 오늘날의 기복은 상당히 다릅니다. 기복은 복을 빈다는 이야기인데, 복을 누구를 위해서 비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자녀가 수능시험을 볼 때 어머님이 사찰에 가서 대입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입 기도라는 게 결국 내 옆에서 기도를 하는 다른 아줌마의 아들보다 내 아들을 먼저 입학시켜 달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청중 웃음), 기도는 같이 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상당한 경쟁 관념이 내재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대의 기복은 완전히 장삿속이 되기도 하지만, 아주 원자화된 개인, 말하자면 옆의 아줌마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만을 입학시켜 달라는, 개인·개체 위주의 장사인데, 전통적인 기복이 이것보다는 약간 차원이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때 미륵상이나 아미타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어떤 명을 새겼는가 하면, 나의 부모를 비롯한 칠세(七世) 친척들을 극락왕생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국토가 태평하고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게끔 하소서 하는 명을 새겼습니다. 결국 나뿐만 아니고 국가 전체가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뭔가를 받도록 비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기복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이미 문화 속에 얽히고설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 때는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왠지 참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 때 제게 어떤 생각이 들었냐하면,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 삼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복 장사에는 사찰이나 교회라는 공급자가 있는가 하면, 그 장사를 제발 해 달라고 하는 수요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사찰들이 갑자기 없어지고 수요만 그대로 남는다면, 예를 들어 무당이나 점쟁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요자로 하여금 이런 기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급자나 수요자만을 인격적으로 탓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삼을 순 없다 하더라도 소위 '상도덕'은 문제삼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상도덕' 아시죠? 장사할 때 그래도 어기면 안 되는 일종의 '상도'가 있는데, 기복 장사하는 과정에선 이것이 너무도 많이 어겨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 재벌들끼리 장사를 해도, 만약 LG 휴대폰 쪽에서 '삼성 휴대폰이 곧 고장날 것이니 삼성 휴대폰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행복하게 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악성 흑색 광고를 낸다면 이것은 아마 당장 재판을 받아 상당한 돈을 물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불신지옥'이라고 외친다면 이건 사실 LG 휴대폰만이 진리고 삼성 휴대폰이 거짓이라는 말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그걸 또 '불신지옥'이라고 외칠 때에는 꼭 '불신(佛信)지옥', 그러니까 '불교를 믿는다면 지옥이다' 라고 들리기 때문에... (청중 웃음)

이것은 상도덕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도 장사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청중 웃음)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기업체에서는 고용자를 막 다루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한다고 해서 삼성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성말고 무노조 경영하는 곳이 '종교 재벌'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혹시 대형 교회나 대형 사찰에서 노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죠?(청중 웃음)

사실은, 삼성보다 대형 교회에서 주인이 아닌 '밑에 사람'으로 일하기가 훨씬 불안합니다. 대형 교회의 부목이나 전도사, 운전사 정도면   뭐 월급이 박한 건 그렇다 치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상황이죠. 주목의 마음에 안 들고 노선을 달리 하면 자르는 데 별 절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노조를 만드는 시도를 2년 전부터 한 것 같은데, 아직 대다수 대형 교회들에 노조가 없습니다. 고용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대형 교회도 그렇지만 최근 부산의 삼광사라는 대형 사찰에서 노조 탄압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정규직 사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다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매일노동뉴스>에서 알게 됐습니다. 결국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장사를 해서는 무노조 삼성보다 더 못된 장사가 될 것 같아서 좀 문제가 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아무리 장사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업체가 정치에 부당하게 압박을 주면 안 된다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FTA 투자 협정을 맺고자 하는데 실제로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가장 혜택을 볼 기업체가 어느 기업체인지 뻔하거든요. 삼성입니다. 삼성에서는 아마도 FTA가 맺어지기를 대단히 바라고 있겠지만, 만약에 삼성이 이를 위해 정치권에 상당히 노골적인 로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미군을 찬양한다든가 'We Love America!'를 부른다면 이것도 결국엔 일종의 기업체의 정치적 압박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역사적 관계도 있고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의 정치를 한 집단 위주로 하려고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또, [그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올 때 드는 생각은, 미국의 정치인들이나 주류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 중 하나, 즉 미국을 '새로운 로마제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로마제국'처럼 미국이 전 세계를 다스리면서 사람들한테 라틴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 주고 공동 문화를 만들어 주고 문명의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것은 미 제국의 주류 지식인들이 제국을 옹호하는 입장의 골자 중 하나인데, 그러면 미 제국의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에는 새로운 로마제국의 깃발을 들고 다니는 꼴이 되는데, 예수를 못 박아 죽인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 아닙니까? (청중 웃음) 그러니까, 그런 역사적 관계까지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로마제국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숭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무한의 힘의 상징인 성조기를 숭배하는 것인지 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업체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 삼는 부분이 '탈세'인데, 종교단체 같은 경우엔 탈세도 아니고 '무세'입니다. 세금을 아예 안 냅니다(청중 웃음). 만약, 주요 종교단체들의 수익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많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예컨대 대형 교회에서 세금을 내서 그 세금 전액이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의 실천에 쓰인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선에 쓰인다든가 이런 조건을 내세워 세금을 낸다면 이것은 교리에 반대되는 부분이 전혀 없을 텐데, 어쨌든 탈세도 아닌 '무세'라니 이건 참 '상도덕'상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청중웃음).

또, 제가 늘 한국 종교에 관해 문제 삼고자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상품 강매'입니다. 일반 회사가 그렇게 하면 당장 걸리겠지만, 예를 들어 종교 재단이 세운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예배시키는 것은 결국 '상품 강매'와 다른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들이 신앙 시장에서 본인들의 상품을 열심히 마케팅하고 추진하는 것까진 좋은데, 본인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한테까지 그 상품을 사게끔 강제한다면 이건 헌법상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상도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주류 종교를 얘기할 때, 이것은 단순히 기복 장사로만 얘기할 수 없는 성질의 훨씬 더 복합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한인 사회에 왜 하필이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가 물어보면 그것은 신앙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교회가 일종의 네트워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 사회나 유럽의 한인 사회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돼 있습니다. 교회들이 일부러 왕따 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당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그것이 좀더 극명하게 나타날 뿐이지만, 한국 안에서도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교연, 즉 교회와 교맥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흔히 '관계 자본'이라고 말하는 3연, 즉 학연·혈연·지연말고도 '교연'을 분명히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나 사찰의 경우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사회나 기존 질서에 뭔가 신성한 듯한 외피를 덮어 주고 기존 질서를 합리화하는 데 신의 도움을 받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 평생 살면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공인(public figure)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일찍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주의적인 주입을 받아 국가를 대단한 숭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국가를 존경하기가 좀 힘들어요.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다들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추상적인 국가'를 숭배해도 '구체적인 국가'를 존경하기란 좀 힘듭니다. 존경하고 싶어도 곧잘 무슨 최연희 의원의 성파문이든 무슨 파문이든 (청중 웃음)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추상적으로 운동 경기에서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든가 태극기로 상징되는 추상적인 대한민국이 숭배 대상이 돼도 구체적인 대통령, 국회의원, 고급관료들이 존경 대상이 되기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학교 의식이라든가 어떤 공적인 의식에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아마 참석자들이 대단히 좋아할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노무현 씨라는 한 개인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대통령직에 추상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대통령도 왔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위계 서열에서는 대단히 높은 사람이 온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노사모 빼고는 인격적으로 노무현 씨를 아주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청중 웃음)
그러니까, '추상적인 권위 인정'과 '구체적인 인격적 존경,' 이 두 가지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가 제도적으로도 존경하게끔 돼 있지만, 좀 신비한 옷을 입고 신비한 말씀을 하고 뭔가 신성한 듯한 아우라(청중 웃음), [즉] 후광을 갖고 나타날 추기경님이나 큰스님이다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제도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존경까지도 하게 돼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이 이 체제가 나쁘다든가, 이 체제를 우리가 빨리 바꿔야 한다든가, 이 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말씀을 잘 안 하시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청중 웃음), 사실 맞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도 잘하시기 때문에, 이 분들의 존재 자체는 체제를 상당 부분 합리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높으신 스님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에 인터뷰하시고 법문다운 좋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별 문제가 없어도   어차피 그 말씀 상당 부분이 당나라 후기나 송나라 때 선사들의 책에서 다 베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말씀이라 별 문제는 없는데   주류 언론에다가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는 대한민국 제도권의 권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이 체제가 인간이 살 만하고 이 체제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라는 환상을 피지배자들한테 상당히 효과적으로 덮어씌우는 면이 있는 건데 이것은 굳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작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주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피임을 종교적 죄악으로 본 겁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맞다 틀리다 하는 건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특히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에이즈가 지금 대단히 치성(熾盛)을 부리고 있어서 예컨대 잠비아나 나미비아의 경우에는 에이즈에 전염된 사람이 이미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입니다. 이미 나라가 멸종으로 치닫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보호 없는 섹스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대단히 위협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교시에 피임하지 않을 경우 곧잘 에이즈가 전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황의 말씀을 듣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에이즈에 걸려 죽은 사람이 과연 몇 만 명이 되는지 대단히 궁금할 따름입니다.

낙태 수술에 대한 교황의 입장도 아주 단호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어차피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가는 결국 사회적 살인처럼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종교 입장을 따라서 많은 여인들이 결국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빠뜨렸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을 적에 한국 언론들도 그렇지만 외국 언론에서도 그것을 언급하는 언론이 몇 군데밖에 안 됐고, 대다수는 요한 바오로를 거의 새로운 성인으로 모시고 그랬습니다. 요한 바오로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여러 언론 중에서도 한두 군데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의 권위는 세계 지배계급에게 그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굳이 한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성하다 싶은 지도자로 상징되는 종교가 원자화·개체화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여러분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나 인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여러분의 불행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언제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신과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거래하면 일단 개인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죠.

그런데, 이 메시지는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 예수님이나 부처님하고는 별 관계가 없고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비자이자 노동자들한테 모든 사회적 문제를 인격이나 수양 문제로 돌리기를 원하는 게 아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기복 장사하는 기업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기업체의 정체는 체제 전체를 합리화하고 공고화하고 아주 당연할 뿐만 아니라 거의 신성하다 싶은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맑스가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제일 유명해졌는데, 그 문장에서는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종교는 맑스가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이자 민중을 위한 아편'이라고 이야기한 건데, 그런 면에서 맑스는 신음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게 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맑스는 종교가 단순히 위에서 강요하는 '아편'이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을 사람들이 바꾸지 않는 한은  결국 민중이 저절로 찾게 돼 있는 불가피한 것, 또는 일부분이나마 민중의 현실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종교 이단들이 바로 민중의 반항 의지, 저항 의지를 대변했고, 말 그대로 민중의 신음소리를 담았다는 것이 맑스의 종교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의 한국 현실을 중심으로 본다면 종교는 과연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에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민중을 위한 아편'에 더 가깝습니까? 둘 다 종교의 기능을 묘사하는 얘기인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보다 그 신음 소리를 진통시켜 주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처가 아프지 않게 진통시키는 일종의 마취제에 더 가까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아주 아플 때 마취제를 먹게 돼 있지만, 마취제·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당분간 아프지는 않겠지만 상처는 그래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무엇이냐면, 지금의 종교가 기존 체제를 옹립하고 합리화하고 체제로 인한 개인의 불행을 개인적인, 상당히 자기 기만적인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들의 원래 모습이 과연 맞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교가 정말 민중을 위한 아편 정도라면 하필이면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왜 그렇게 오래도록 존재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기만이라면 상당히 빨리 깨우칠 수 있는 부분인데, 또 실제로는 신음하는 소리, 짓밟힌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담지 않은 종교는 지금 봤을 때는 그렇게 오래 안 가요.

예컨대, 최근에 만들어진 소위 신흥종교들 중에는 상당히 빨리 쇠퇴하는 종교들이 꽤 있는데, 통일교만 해도 1960∼70년대에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교세 확장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실제로 교세가 상당히 쇠미해졌습니다. 기존의 신자도 많이 탈락하고 새로운 신자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실제 통일교 교리에서는 이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를 거의 들어볼 수 없다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선명한테 카리스마가 있지만 문선명이 미국의 지도층·지배층하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무래도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 듣기에는 조금 어려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신흥종교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대개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를 담아 주지 않는 종교는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이 때까지 장수해 온 비밀이 있다면,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분명히 민중 편에 섰던 것이고, 민중의 그 신음 소리를 많이 담고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쪽으로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나 붓다, 무하마드의 카리스마를 이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용하려면 일단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붓다나 예수님, 무하마드에게 그 카리스마를 만들어 준 것이 아마도 종교 속에 담겨 있는, 그러니까 초기 불교나 초기 기독교, 초기 이슬람에 담겨 있는 상당히 강력한 평등 정신이나 저항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저항 정신이란 말이 아마 지금의 불교를 보면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제도 불교는 저항과 전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데, 실제로 붓다라는 사람   원래 상류계급에 속했다가 진리를 찾겠다고 혼자 뛰쳐나와 6년 동안 고생해 결국 뭔가를 깨달았다는 그 붓다   은 그 깨달은 것이 공(空)과 연기(緣起)라는 진리였는데, 이 진리대로라면 당시 인도 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나 남녀차별이 사실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불경을 통해서는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대다수 불경들이 붓다가 죽은 뒤 4∼5백 년 뒤에 만들어진 글들입니다. 거기에 붓다가 그렇게 말했다고 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관계 없습니다. 실제 붓다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초기 경전들 중에서도 붓다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마  숫타니파타 라든가 그 정도 경전 몇 개이고요, '니카야',  아함경(阿含經) 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기 경전도 붓다가 죽은 지 훨씬 뒤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실제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마  숫타니파타 를 보면 대충 알 수가 있겠지만   윤색된 부분도 있고 가미된 부분도 있습니다만   붓다는 처음에 깨닫고 나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평등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진정한 바라문이 무엇이냐? 바라문은 인도의 성직자 계급입니다. 당시에는 계급 질서 맨 위에 있었다는 성직자 계급인데, 이 바라문에게 붓다가 얘기한 것은 사람 귀하다는 것이 결국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 절대 차별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내 종이다, 내 종이 아니다. 동류다, 이류다' 이렇게 서로 차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다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이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만들어지는 이유와 결과의 순환이다" 이런 것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영구한 계급 차별이라는 부분이 개입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만든 것입니다.

붓다는 만인 평등을 외치기도 하고, 동물 죽여서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원칙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또, 붓다의 생활 방식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탁발 아니었습니까? 탁발이라 하면 동냥을 구하는 것인데, 실제 붓다가 탁발하면서 뭘 했었냐면 요즘 말로 아마 심리정신과의 상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이 밥을 줄 때는 뭘 물어보지 않습니까? 붓다가 그 대답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생활 문제 풀어 주고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얘기해 주고, 말하자면 상담을 해 주고 식량을 받는 그런 거래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민중과 아주 가까운 생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붓다는 기적을 절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통력이나 기적이라는 부분은 붓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한 여자한테 붓다는 '그래요? 한 번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에서 친척 중에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사람을 한 번 찾아 주면 제가 당신 아들도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하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무슨 얘기냐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신통력, 초자연적 힘, 신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붓다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민중한테 붓다는 존경받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에게 한 가지 좀 아쉬운 점은, 붓다는 일종의 초기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인 승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제자, 수행자들과 함께 숲 속에서 살기로 한 것인데요. 그것은 어찌 보면 민중과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그런 저항의 태도, 아주 소극적인 저항의 태도에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붓다는 자기 부인 야쇼타라와 아들 라후라를 내버려두어도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훨씬 더 부담이 큽니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대개 수행 생활을 해도 되는 상당한 재력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결국 그 사람들이 붓다가 죽자마자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편한 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붓다의 제자 중에는 노예 출신들도 있었는데, 붓다가 죽고 나서는 노비는 스님이 될 수 없다는 계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노비나 왕의 고용자한테는 스님이 되는 기회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가 했는지 아니면 그 제자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초기 불교의 주류 승단에서 한 것 같은데  , 처음부터 여성이 승려가 되는 데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팔경법'[尼八敬戒]이라는 건데, 여덟 가지로 여승이 남자 승려를 공경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 어린 남자스님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여자 스님이 먼저 꼭 절해야 한다든가 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붓다에게 가탁(假託)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자들이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불교는 상당 부분 아주 초기부터 왜곡되기 시작했고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는데, 인도를 통일했다는 아쇼카왕 때는 불교가 왕의 국교가 돼서 거의 원래 정신을 이미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으로 유입된 불교는 이미 절대평등주의적이고 남녀평등주의적인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계 없다 싶은, 이미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붓다라는 스승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후기의 승단, 후기의 승려들이 그것을 계속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고, 바로 그런 붓다의 카리스마는 불교가 그래도 죽지 않고 계속 민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한 묘사는 기독교에 대한 묘사와 놀랍게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복음서를 읽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특히 누가복음에는 계급투쟁적이라 할까요. 상류 계급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이 담겨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리라' 하고 돼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은 체제에 편입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도 그렇지만 그런 체제 반대적인 발언들이 가장 많은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으로 기술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 로마제국이 망할 것이고, 로마제국에 협력했던 부자들이 결국 벌을 받을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최종 편집되는 것은 180년대라고들 추정하고 있습니다. 180년대에 이미 기독교는 거의 체제에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체제에 협력하고 있던 교단 지도자들이 '부자들이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없다'는 예수의 진짜 말씀을 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예수의 카리스마가 그 사람들한테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만약에 부자들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2세기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화됐는데, 그래도 예수의 원래 정신은 상징적으로라도 복음서에 담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예수의 정신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짓밟힌 사람들한테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편집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4복음서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   에는 재미있게도 노예의 존재나 노예제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겁니다. 예수가 살았다고 믿어지는 1세기 초반에는 노예제가 경제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노예들이 대단히 많았고, 예수가 부자 보고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다면 분명히 노예 문제에 대해 발언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노예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 그러니까 기독교 보수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 하고 말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대로 신약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 편집 과정에서는 말하자면 대중한테 어필할 수 있는 미끼 밥을 남겨 두기는 했는데, 상당 부분은 바울 사도와 그 제자들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메워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또 아주 재미있는 예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라는 사람은 메카라는 상업 도시에서 '거지가 왜 이렇게 많은가. 왜 부자들은 이렇게 잘 살고 못사는 사람은 왜 이렇게 못사는가' 이런 불만이 출발점이 돼서 새로운 종교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무하마드와 그 공동체가 메디나에서 망명중이었을 때, 당시에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무하마드의 집뿐이었는데, 그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봤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가 죽고 나서 무하마드의 계승자 우마르가 거의 맨 먼저 개악을 한 것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는 예배를 따로 봐야 한다'는 법률을 정한 겁니다. 무하마드의 원래 육성을 담은 코란의 기록을 보면 여성의 권리를 상당 부분 주장했습니다. 이혼권이나 피임권리나 유산상속권이나, 여자와 남자는 원래 알라신에 의해서 평등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등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중의 이슬람 율법을 보면 이게 상당 부분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슬람권의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상당 부분 서구의 페미니즘에서도 영감을 받지만, '무하마드의 진짜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을 페미니즘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보든, 기독교를 보든, 불교를 보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계급 사회에서 고등 종교의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 제가 뭔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기존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 그것을 결론 삼아 끝내겠습니다.

결국 지금 성직자 집단이 대표하는 기존의 제도권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그 종교를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사실, 옛날에 한용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약 붓다의 가르침이 맞다면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해야 하는가. 나 자신에게 절해도 되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또는 "명부전에 가서 부모님들이나 내 자신이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재판관한테 뇌물 주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냐. 결국에는 내가 죄가 없으면 왕생할 거고 죄가 있다면 아무리 빌어도 안 될 텐데, 뇌물 주듯이 비는 게 다 뭐냐"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살려서 우리가 기존 종교가 분명히 그 원래 정신과 다른 부분을 당연히 비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맑스주의자가 된다 하더라도 속류 맑시스트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종교, 그 정체는 무용지물이다. 마약이다' 하고 버리기보다는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의 진짜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 많은 민중이 모였는지, 왜 그 사람들이 지금도 민중한테 이렇게 귀중한 이름들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빈민들의 집에 딱 두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차베스 대통령이죠. 그러니까 양쪽을 상당히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여튼 왜 하필이면 수많은 빈민들한테 예수는 지금도 이렇게 영감을 주는지, 우리가 진정한 맑시스트라면 스탈린주의 식으로 종교를 무조건 팽개치기보다는 종교를 비판함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원래 종교의 모습에 대해 나름으로 애착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자와의 대담


 

김하영 :
무릇 모든 종교에는 보수파와 진보파가 있습니다. 가령 불교의 경우, 일본제국주의와 박정희의 "호국불교"가 있었는가 하면, 암베드카르를 지지한 인도 불가촉 천민(달리트)의 불교가 있었고, 또 1980년대 한국의 "민중불교"가 있었습니다. 박노자 동지의 경우 민중불교와 흡사한 데가 적잖이 있는 듯합니다. 민중불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
한국에서 민중불교의 창시자는 바로 만해 한용운 스님입니다. 민중불교는 일본과 한국에서 1920∼30년대에 상당히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민중불교의 주장이 결국 이거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사찰들이 산송장,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시체에 불과한 것이고요, 붓다의 원래 정신이 초기에 수행자 공동체, 즉 승가의 무소유 공산주의적인 생활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원래 승가에서는 한 승려가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옷 한 벌과 밥 그릇 하나 정도였고요, 민중한테 상담을 해 주고 민중한테 여러 가지 살고 죽는 일에 대해서 생각을 심어 주고 식량을 받아 살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원래 불교에서 모든 고뇌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게 '탐진치(貪瞋痴)'라는 건데, '탐진치'가 뭐냐 하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한용운 스님도 그렇고, 일본의 민중불교도 그렇고, 성냄이나 어리석음보다 가장 무서운 게 탐욕이라고 생각했고, 탐욕을 그 기반으로 삼으면서 늘 재생산시키는 자본주의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자본축적과 확대재생산이라는 것이 심리적으로 분석하자면 결국 탐욕과 공포 심리 없이 개인 차원에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내고 낙오자가 될까 봐서 늘 겁에 질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세계는 만약 축적이 안 되고 확대재생산이 안 되면 죽게 돼 있는 세계인데, 공포와 탐욕의 이중주입니다.

그래서 민중불교는 거기에 주목을 해 "자본주의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중생들이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불교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의 삶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겁니다. 그래서 일본 민중불교 같은 경우 전후에 소수자로나마 남아 있고, 비판불교라는 이름으로 1970∼80년대에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는데, 한국 같은 경우 잘 아시겠지만 1950∼7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얘기를 꺼낼 수 없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민족 지도자로 상당히 우상화됐는데, 그렇다고 해도 만해 한용운의 진짜 사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하영 :
불교가 초기 단계를 벗어날 때 보인 모습은 그리스도교의 수도원 운동과 닮은 데가 많은 듯합니다. 초기 불교의 승가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 기반은 도시의 상인과 금융업자, 장인 들이었습니다. 이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기부금으로 부유해져, 노예를 부리게까지 됐습니다. 중세 스리스도교 수도원들이 농노를 부린 것처럼 말입니다. 비폭력 교리도 7세기 왕 하르샤 실라디티야의 경우처럼 아주 간단히 무시되곤 했습니다.

이런 모순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종교적 모순 때문에 또한 각 종교는 부패와 쇄신 운동이 충돌하곤 합니다. 또, 다양한 사회 계급들이 같은 종교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충돌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박노자 :
노예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원래 불교에서는 스님이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돼 있습니다. 구족계를 받아야 자격을 갖춘 스님이 되는 것이고, 이 구족계는 남자 승려의 경우에는 2백50 가지 계율이나 됩니다. 그런데 구족계 내용을 보시면   불교 서점에 가셔서  사분율 이라는 책을 보시면 거기에 내용이 나오는데   그 계율 중에 "금전을 취급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제정한 계율이죠. 또, "노예를 소유하거나 부리면 절대 안 된다"는 계율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계율을 진짜 계율답게 하자면, 노예 내지 농노를 부린다든가 [하는 것은] 불교 공동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아쇼카왕 때 불교가 주류 종교가 된 뒤에는 인도에서도 불교 사찰에서 노예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고요.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사찰이 노비를 부리는 데 별다른 제한이 없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에서 사대부들이 더 이상 가만두면 안 된다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서 그렇지, 빼앗기 전까지 사찰들은 주요 노비주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불교가 중국에 들어서면서부터 초기 계율을 원천적으로 무시해 왔다고 봐야 하는데, 불교의 경우에도 이것에 대한 쇄신 운동이 몇 번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에는 많이 안 들어왔지만, 중국에는 삼계교(三階敎)라는 중세의 민중불교 교단이 있었습니다. 6세기, 7세기에 수나라와 초기의 당나라에서 많이 유행했는데, '다 불성(佛性: 부처로서의 성격)을 갖춘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곧 평등하게 사는 것이 종교의 진짜 교리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운동인데, 당나라 중기 때 탄압을 받아 무산됐습니다.

수많은 쇄신 운동이 있었다는 것은 맞습니다. 기독교만 해도 예를 들어,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주로 루터 교회라든가 칼뱅 교회에서도 출발했지만, 또 한편으로 수많은 소수자 교회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소수자 교회 중에는 예를 들어서 퀘이커라는 종파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다들 아시죠? 박정희 때 곧은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이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신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한국 종교인이 함석헌 선생이죠. 한국에서 함석헌 선생님이 한국 퀘이커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퀘이커라는 종파가 영국에서 17세기에 만들어졌는데, 퀘이커 교도들이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였고요. 국가권력을 부정했고요, 또 제일 중요한 것으로 노예제를 부정했습니다. 미국에서 퀘이커 교도들이 흑인 노예 해방운동에서 늘 선두에 섰습니다. 수많은 다른 소수 종파들이 미국에서 노예제와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지금의 퀘이커는 그 모습이 전혀 아니지만, 18세기 이전에는 계급 타파 운동, 계급 전복적인 운동을 봐도 종교적이지 않은 운동이 거의 없습니다. 종교적이지 않은 속세적인 반계급 운동은 18세기 이후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종교를 좀더 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양면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김하영 :
이라크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충돌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부시 일당은 미국의 보수우익 기독교인 집단입니다. 미국의 보수 우익 기독교는 어떤 성격입니까?


 

박노자 :
이런 얘기를 들으면 듣자마자 무엇이 생각났느냐 하면,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바티칸의 교황청이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합니까? 절대 반대하는 거죠.

그것은 교황청이 꼭 착해서 그런 것이기보다는 만약 전쟁에 찬성한다고 하면 지금 카톨릭 신도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빈민들이 과연 가만히 두겠습니까? 아마 신자들 대다수가 탈락할 것입니다. 어쨌든 교황청은 공식적으로 이번 이라크 전쟁뿐 아니고 1991년 제2차 걸프전쟁도 교황청이 반대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기독교는 전쟁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중에서 다수파라 할 수 있는 가톨릭은 전쟁하면 안 된다고 하니 종교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데, 아까 말씀하신 미국의 일부 기본주의[근본주의]적인 신학자들, 부시와 상당히 가까운 기본주의적인 교파들은 대충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냐면, 인류의 최후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그 인류의 최후는 바로 아마겟돈이라고 할 만한 악과 선의 마지막 전투에서 결정될 것이고, 선은 물론 미국이고, 악은 물론 이슬람 세계입니다. 그래서 최종 전투에서는 결국 핵폭탄도 사용될 수가 있는데, 그 최종 전투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고, 인류가 멸망함과 동시에 선택받은 자들만이 "휴거"(携擧: "들어올림", "이끌어 올림"의 뜻)되어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인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끔찍한 이야기인데, 어쨌든 이 얘기가 미국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배경 중 하나는 지금 미국의 중산층이   한국도 그렇지만   해체 중에 있다는 겁니다. 상당 부분의 중산층의 위치가 하락하고 있는데, 기본주의적인 신앙은 위치가 하락되는 중산층의 불만을 체제가 아닌 종교적인 관심으로 돌리는 데 상당히 사용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의 경우 전체 노동인구 중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8퍼센트도 안 됩니다. 제조업은 그 비중이 지난 50년 동안 거의 3∼4배 정도 줄어든 것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돼 지금은 아주 불안정한 서비스 직종을 찾아 헤매야 되는 것이고, 미국은 지금 의료보험이 안 돼 있는 사람들만 해도 4천만 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적 불만을 종교적인 관심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아까 말씀하신 부시와 같은 종류의 기본주의적인 신학이죠.


 

김하영 :
최근 덴마크 일간지 <율란트 포스텐>이 예언자 무하마드를 모욕적으로 묘사한 만평을 실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 혐오가 인종차별의 가장 뚜렷하고 또 유력한 형태가 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이슬람 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인터넷을 통해 무하마드 만평을 직접 보신 분들 계십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독후감이라도 있습니까? 이따가 저도 제 독후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만평을 보면 무하마드는 모자 대신 커다란 폭탄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났느냐 하면, 코란에는 '만약에 이슬람교인 여러분들 중에서 기독교인이나 유대인한테 누군가 악을 끼치면 나(즉, 무하마드) 자신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당신의 죄악을 증거할 것이다' 하고 써 있습니다. 무하마드의 부인들 중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한 명 있었고요. 무하마드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한테 배운 바도 있고 해서요.

그리고 실제로 유대인들에게는 중세 이슬람 국가야말로 제일 살기 좋았던 곳입니다. 그들은 중세 유럽에서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박해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래 이슬람이야말로 다른 종교, 특히 같은 계통의 기독교나 유대교에 대해 대단한 똘레랑스를 갖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자살 공격이라든가 하는 것은 종교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무력감의 발로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율란트 포스텐>이라는 신문이 무하마드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괴롭힌 사람을 내가 최후 심판 때 고발하겠다고 한 무하마드   를 마치 기독교도나 유대인을 죽이겠다고 폭탄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무하다드 만평이야말로 종교 왜곡일 뿐이죠.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 만평 중에는 또 어떤 것이 있었던가 하면, 자살 테러로 숨진 사람들이 낙원에 들어서자 무하마드가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처녀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더 이상 여러분들한테 붙일 처녀가 없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데, 코란은 자살 공격은 물론이거니와 자살 자체를 아주 안 좋게 보고 있습니다. 자살 공격은 이슬람에서 주장된 적이 없습니다.

유럽인들이 요즘은 이슬람에 대한 혐오, 이슬람에 대한 공격의 근거로 삼는 것이 이슬람의 지하드인데, 이 지하드라는 말이 유럽에서는 가끔 '신성한 전쟁', '성전'이라고 번역되는데, 원래 지하드가 무슨 뜻이냐 하면 불교의 용맹정진(勇猛精進)과 똑같은 뜻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이에요. 다만 알라신을 받드는 공동체를 외적이 괴롭힌다면 지하드는 방어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용맹정진을 뜻하는 이 말이 유럽에서 갑자기 신성한 전쟁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니, 이것은 왜곡 중에서도 아주 심한 왜곡에 속합니다. 유럽인들이 이슬람에 대해서 왜곡하고 일종의 위협으로 꾸미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식을 넘는 이야기죠. 뭐 히틀러의 반유태주의 공포하고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김하영 :
그리스도교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개신교의 경우 1980년대에 민중신학에 근거한 민중교회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이나 그 주의주장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박노자 :
안병무 선생이나 서남동 선생 등 몇 분의 저서를 읽었는데, 이분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존 교회라는 매개체를 넘어서 예수라는 사건, 예수가 나타났다는 그 사건을 직접 체험하고, 우리와 그 사건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는 역사 속의 예수도 있는데 역사 속의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 말로는 '오흘로스'(ochlos), 즉 민중이죠. 그러니까 민중에게 둘러싸여 있고, 민중을 위해서 부자들은 축복받을 수 없다고 말한 예수라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우리들 사이에도 예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주장이었습니다.

민중신학자들 중 몇 사람은 전태일 분신 사건 때 대단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분신하고 있는 전태일을 보면서 예수를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예수와 같은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을 위해 이렇게 자기를 아끼지 않는, 그리고 민중편에 서서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고, 평등한 세계가 오게끔 노력하는 것이 예수를 재현하는 하나의 체험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원래 기독교 정신을 회복하자면,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민중신학이 하나의 첩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쉽게도 한국에서 1970∼80년대 민중신학의 열기가 높았다가 결국 그것이 주류 교회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화되지 못했습니다. 대단히 아쉬운 일이죠.

함석헌 선생님 같으면 민중신학자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실제로 함석헌의 기독교 이해는 주류 신학하고 너무 달랐습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아마 20세기가 낳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비주류" 신학은 귀중한 문화적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김하영 :
천주교는 최근에 교황이 바뀌었습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못지 않은 보수파, 전통파인데요. 최근 우리 나라에서 새로 추기경이 된 정진석 추기경도 사회 문제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분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더는 1980년대의 진보 인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제는 진부한 얘기가 됐죠. 반면에, 천주교 고위 성직자층의 이런 보수화에 저항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목소리는 들릴까 말할 할 정도로 미약한 듯합니다. 왜 이런지 설명해 주십시오.


 

박노자 :
한국 천주교는 재미있는 부분인데요. 1970년대 천주교는 반독재 운동의 대명사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외국 학자들이 많이 지적한 부분입니다만, 사실 1970년대 한국의 천주교는 정치적으로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학적으로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오로지 개신교 속에서, 그것도 기독교장로회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것인데, 천주교 같은 경우 신학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천주교가 군사독재에 반대했던 것은 군사독재가 그만큼 부르주아적인 사회질서를 위협한다는 의식이 있어서였기도 했습니다.

대개 부르주아 질서로는, 소위 제도적인 민주주의 이상으로는 안정적인 것이 없거든요. '박정희가 결국 나라를 파멸로 끌고간다, 박정희의 무제한 종신 집권 같은 성격의 군사독재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잘못하면 사회적인 급진적 변동의 가능성까지 열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하자면, 1970년대부터 이분들은 박정희를 일종의 불안 요소로 간주해서, 정상적으로 부르주아 국가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물러나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에는 사실 더 이상 한국 천주교가 바랄만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신학적으로 한국 천주교는 사실 중남미의 해방신학 같은 진보적 흐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질서가 회복됐다면 이 질서를 옹호하는 데 그냥 사력을 다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면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라든가 하는 분의 보수화는 어찌 보면 합법칙적인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밖에 될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중 질문에 대한 박노자의 답변


 

1.
수행 단체가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인데요. 문제는, 불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생 모두가 수행자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수행 단체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이 세계를 어떻게 바꿔 보자는, 일종의 전위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모든 속인들을 포함하는 한 제도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아까 언급하신 도법 스님처럼 탁발 수행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본인들의 수행의 의미를 알린다면,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는 못해도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도전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
'만약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눈에 그림이 선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서에서 읽으셨겠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와서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막 내쫓아버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지금 예수님이 한국 대형교회 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테러리스트 명단에 오르실 겁니다. 그것은 거의 안 봐도 그림이 선합니다. 예수님 같으신 분이 만약 지금 다시 오신다면 대충 지금의 교회를 어떻게 보실 것인지, 또는 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그것은 보지 않아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붓다만 하더라도 사회적인 발언을 꽤 많이 했습니다. 붓다의 사회적인 발언을 종합해 보면,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악법을 남발해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고, 전쟁을 하고, 지배계급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그런 국가는 악이라고 봤습니다. 국가의 긍정적인 기능으로 붓다가 딱 두 가지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재분배 기능입니다.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는데, 부자한테서 재물을 거두고 그것을 평등하게 나눠 주는 것이 국가의 긍정적인 기능이라고 본 것이고요. 또 하나는 갈등의 조절자라는 부분입니다. 꼭 폭력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들 사이에서는 평화를 찾아 줘야 한다.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라 그 중간에서 국가라는 조절자가 필요하다'는 점도 본 거죠.

아마 붓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국가, 아마도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국가로부터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일단 분쟁에 대한 비폭력적인 조절과 재물에 대한 세계적 분배를 요구하실 겁니다. 초기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그런 요구를 하실 것 같습니다.


 

3.
정의구현사제단이나 도법 스님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요. 아마 한국에서 지금 만나볼 수 있는 종교인 중에서는 가장 올바른 길로 가시는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일단은 본인들의 종교적인 수행도 하시고 도법 스님은 화엄학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불교 교리에 대해서 많은 논문도 쓰시는 분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본인의 불교적인 이상을 사람들과 나눌 줄 알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참여할 줄 아시는 분이시라서, 지금 종교인으로서 가야 할 길로 가시는 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불교 승려들의 정치에서 약간 아쉬운 점은 불교 교리   그런데 불교 교리는 대단히 난삽합니다. 공부하기가 아주 쉽지 않은 교리입니다   를 많이 배우신 분들이 예컨대 사회과학이라든가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 제기 방법을 많이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배울 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현 사회에 대해서 발언할 때 꼭 2천 년 전의 말씀으로 해도 되지만 조금 더 사회과학적으로 정리를 해서 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이 있습니다.


 

4.
'종교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지금 같은 시절에 진정한 종교인이 있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으냐'는 질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매일노동뉴스> 같은 매체에서 여승무원들이 파업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파업 투쟁한 지 거의 2주가 다 돼 가는데 성과는 없고, 공사나 국가 쪽에서는 절대 양보할 생각도 없고, 결국에는 다 해고하겠다는 방침을 만들어 놓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 매체에서는 동정 여론이 많이 없다 보니 국가에서는 막 나가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일단 여론 조작에서는 공사와 국가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싶은 겁니다.

만약 진정한 종교인이 그런 상황을 본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 아마도 조금 성격이 강인하신 종교인이라면 부산과 서울 사이의 철로에 누워서 '승무원 문제가 풀릴 때까지는 기차가 안 다니게 하겠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에서 민중한테 아주 강력하게 호소하는 부분 하나는 정의감 표출입니다. 종교는 정의가 구조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이고요. 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구할 수 없는 그 정의를 종교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적인 호소력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진정한 종교인이 나타난다면 종교의 정의라는 본질을 행동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승무원 문제는 지금 질질 끈 지 거의 2∼3주가 다 돼 가는데, 종교인들이 아직 말 한 마디 안한 것 같습니다. 진정한 종교인들이 많이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5.
'초기 기독교 같은 경우 아무리 민중적이라 하더라도 현실화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 없듯이 부자가 하늘나라로 못 간다는 것이 물론 계급 질서에 대한 비판이지만, 구체적인 행동 방법이 제시돼 있지 않은 것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의 사회 인식 수준과 우리의 인식 수준이 당연히 조금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당시로서는 계급 질서를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체념적인 생각이 거의 모든 고대·중세 사회에 아주 만연해 있었습니다. 예컨대 붓다도 사회개혁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수행자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들끼리 국가를 벗어나서 공산주의적인 생활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에서도 '최후의 날에 부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요한계시록 같은 곳에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 손으로 부자들을 심판해서 부자들도 빈민들도 없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그 당시로서는 제시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소농들과 노예, 그리고 장인들의 사회인데, 생산력의 발달 수준이 미미하고 분산되다 보니까 서로 힘을 결합하는 데 한계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종족·부족·도시국가로 나뉘어 있는 그 당시의 세상에서는 민중이라는 종합적인 개념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당시의 사회적 한계가 있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는데, 초기 기독교의 정신을 오늘날에 와서 살리자면 분명히 오늘날의 우리 수준에 맞는 그런 현실화 방안을 고민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정의를 구할 수 없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를 타파하자면, 일단 그 질서 속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행동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일 테고, 지금에는 생산력의 발달 수준과 교육의 발달 수준 등으로 봐서 이것은 꼭 폭력적인 행동이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생산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한다면 그 다음에 자본주의를 폐기한다는 게 지배계급의 저항만 끈질기지 않다면 굳이 폭력을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제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물으셨는데요, 저한테는 사실 제일 고통스러운 질문입니다. 예컨대 불자라 하더라도 제가 사찰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조계종 신도증도 없고, 그러니까 가짜 신자라고 해야죠. 그리고 '신자'에서 '신' 할 때 '믿을 신(信)' 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기 불교에서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실제 초기 불교에서 가장 많이 썼던 용어가 뭐였냐면 '냐나'(이해), '브라즈냐'(般若: 지혜) 같은 용어였습니다. 초기 불교에서 가르침은 무조건 믿으라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고요. 이해해서 실천하라는 소리였죠. 만약 진짜 불교를 가지고 뭔가를 한다면, 믿을 신 자는 웬만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불교를 종합적으로는 공부를 많이 해서 그쪽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7.
'우리가 그렇게 기복신앙에 열중하는데 왜 하필이면 삼신할머니라든가 하는 민속신앙이 기독교와 맞물릴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느냐' 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 민속신앙의 하나의 큰 문제는 뭐였냐 하면,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자로부터 천시를 많이 받았던 거구요, 근현대에 와서는 성리학자를 대신한 기독교인으로부터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한 멸시라든가 악마시하는 그런 것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속신앙인이 지배자들로부터는 천대를 많이 받아온 것입니다. 시장화하는 데에는 지배자들이 늘 낮은 것으로 취급해온 민속신앙보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고급 신앙'이 상품화하는 데서는 훨씬 쉬운 거죠. 이것은 한국의 사회·문화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요.


 

8.
단군 이야기를 하자면, 하도 폭발력 있는 주제라 간단하게 [답변]하겠는데요. 조선 시대에는 민중 생활이라든가 민중의 신화를 보면, 단군이 민중에게 신앙의 대상이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왕조실록에서나 "단군묘가 있다"는 기록은 있는데, 민중들이 단군을 찾고 신앙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개화기에 와서 단군이 민족주의적인 신앙의 대상이 됐는데, 단군 신앙, 즉 대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호남의 유림들이었습니다. 민중이 아니라 유림들. 나철 선생 같은 사람들이 대종교를 만든 동기는 일본에 가서 일본의 국가 신도(神道)의 주된 신격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보고 '한국에서도 부국강병을 이루자면 그런 국가 신도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저쪽에 아마테라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단군이 있다'는 얘기를 해서, 1909∼10년에 초기 대종교를 만든 겁니다.

거기에 상당히 동조한 사람들이 일부 개화주의자였습니다. 박은식 선생 같은 사람이 많이 동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단군 신앙이 당시 민중적이라기보다는 사회 상류층 일부의 일종의 반대모방, 일본과 정치적으로 싸우면서도 일본의 신도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이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때는 수많은 반일적·항일적인 저항적 지식인이 단군 신앙을 갖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일제 말기에 대종교는 일제와 협력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미군정기에 들어서 대종교뿐만 아니고 천도교라든가 동학을 이은 기타의 신앙 단체들이라든가 거의 모든 토착적인 신앙 단체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미군정이나 초기 한국 정부를 등에 업고 기독교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종교 시장이 아주 급격하게 기독교 위주로 재편됐습니다. 그것이 미군정이나 이승만 시절의 일인데, 그 뒤로는 교회가 고성장을 계속 거듭해 온 겁니다. 한국 종교시장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9.
제가 질문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의 논리가 결국 신앙을 지배하는 게 아니냐' 하는 질문인 것 같은데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앙을 표방하는 단체들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일종의 기업의 형태로 꾸려져 있는 것이고, 기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금을 안 낸다는 것 빼고는 [다른 점이] 거의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기업 형태로 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구체적인 신앙 행위는 결국 말 그대로 장사 가까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한계를 갖고 있는데, 물론 모든 교회들이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향린교회라든가 몇 군데의 민중신학 계통의 교회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의 신앙과 신학을 볼 수는 있으나 아쉽게도 그것은 소수 아닌가 싶습니다.


 

10.
'전태일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 같은데, 전태일이라는 분의 수기 등을 보면 한 사람이 어떻게 계속 변해 갔는지, 어떻게 사람의 사상·이념 세계가 계속 바뀌어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초기에 전태일은 대통령한테 "상소"를 하면, 즉 대통령한테 노동자의 생활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편지를 쓰고 얘기한다면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말하자면 기존의 권력 체제를 이용해서 노동자 생활을 개조하고자 했는데, 결국 그 미련을 버리고 전투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노동자 투쟁 과정에서 한 사람의 사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아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은 그 당시 한국 사회, 아마 1960∼70년대에 가장 큰 충격이 아니었나 싶고 민중신학을 만드는 데 기폭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라든가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신 자살합니다. 최근 몇 년 만해도 자살한 노동자들이 벌써 수십 명이 되는 것 같은데, 그 중에서 분신하신 분들만 해도 적어도 열 명 안팎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노동자가 그냥 자살하면 신문에서 보도도 없고요. 분신자살한다 하더라도 신문에는 짤막한 보도 하나 나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자본주의에는 확실히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유리한 겁니다. 소프트한[연성] 독재죠. 그런 체제 안에서는 노동자의 죽음은 별다른 충격이 될 수 없습니다. 여론 형성 과정이 철저하게 통제받기 때문에 결국 전태일처럼 요즘 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해도 결국 사회에서는 아주 외로운 위치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박노자의 전체 강연회 요약 발언

종교라는 게 우리 사회에서 비판할 수 없는 아마 유일하다 싶은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국가나 대자본은 물론이거니와, 예를 들어서 군이라든가 여태까지 거의 비밀로 싸여져 있던 그런 분야에 대한 비판도 거의 다 가능해진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안기부 내지 국정원의 최고 비밀 중 하나라고 여겨지고 있는 1987년 KAL기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그것이 거짓이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라면 더 이상 이 얘기도 성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에 딱 하나 남은 성역이 있다면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해서는 뭔가 깊이 있는 해부 작업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우리 서적 시장을 봐도 여러 가지 책들이 많아 거의 홍수인데, 한국 대형 교회 사회경제학은 한 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터부시되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도 너무 이야기한 게 없다는 거죠.

종교라는 게 사람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고요,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종교가 있을 수 없는 것 같고요. 기독교 내지 불교를 가진다, 종교를 가진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마다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 내지 불교는 어차피 개체적으로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 없이 '남과 다른 형태의 신앙과 실천을 한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내지 불교를 생각하고 실천한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종교, 특히 불교에서 영감을 많이 얻고 있다 해도 가장 귀중한 한 가지 교본이 있다면,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철학은 회의(懷疑)로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종교를 가진다 하더라도 회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 결국에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이것이 꼭 마약이 되는 겁니다. 종교가 마약이냐 아니냐 하는 해묵은 논쟁이 있지만, 결국 제가 보기에 회의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종교는 마약이 아닐 것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종교는 그야말로 "민중의 아편"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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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양극화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 강금실 - 노무현 정부의 분식회계 장부

다함께 77 호
http://www.alltogether.or.kr/

 

 

“사회 양극화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김종철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가 3월 28일 '다함께' 중부지역사회포럼에서 연설한 '노무현 정부와 사회 양극화 논쟁: 좌파적 대안은?'을 옮긴 것이다. 지면 제약상 연설 내용을 축약했다. 김종철 후보는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운영 원리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은 사회 양극화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임노동 소득 외에도 사회와 국가가 제공해야 하는 공공서비스들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회적 소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임금이라는 형태로 지급하진 않지만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실질적으로] 올려주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파는 사회적 소득을 향상시켜 사회적 양극화를 해결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개인들이 알아서 개인적 소득으로 해결하라고 합니다.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임노동 소득의 증진뿐 아니라 사회적 소득의 증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합니다.

왜냐면, 현재 양극화 양상은 [개인적] 소득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육·보육·의료·주거·여가 등 삶의 모든 면에서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교육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서울대 입학생들의 통계를 보면, 부모의 직업과 소득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살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70만 원을 내고 다니는 아이들을 노동자, 서민의 아이들이 공부 실력으로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게 쌓여서 나중에 대학입시 수능 점수에서 차이가 나게 되고 사회적 서열로 드러나는 것이죠.

지금은 대학을 나와야 지위가 보장되는 현실입니다. 취업에서든, 결혼에서든 말입니다. 여기는 결혼하지 않으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현실에서 결혼하려고 양가에 인사하러 갔을 때 고졸이라면 상대 집안에서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대학 등록금이 1천만 원에 달하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학비를 20년까지 장기저리 대출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추세대로라면 최소 4년의 등록금만 3천만 원 정도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취직을 해도 미래를 위한 저축이나 결혼자금 저축은 고사하고 이 학비 대출 갚느라고 허덕이게 됩니다.

따라서 사립대학들의 이윤 추구 행태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대학 운영을 민주화해서 마음대로 돈을 못 쓰게, 마음대로 등록금을 못 올리게 해야 합니다. 교육의 공공성에 역행하는 대학들은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물론, 이에 호응하는 대학들에는 인센티브를 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음으로 주거 문제를 봅시다. 강남을 가 보면 도로도 널찍하고 거리들이 아주 깨끗합니다. 반면, 강북에 올라와 보면, [도로가] 비좁고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시장이 강북 주거 환경을 강남 수준으로 만든다면서 뉴타운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생기는 아파트들은 강남 수준의 소득과 재산이 있어야 들어가 살 수 있습니다.

길음 뉴타운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거기에 원래 살던 사람들 중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한 비율은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반면, 강남과 분당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다주택 보유자들이 새로 분양된 아파트들의 3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거 환경의 강남화가 아니라 강남의 잘 사는 사람들의 영토 확장인 것입니다. 양극화 해법이 아니라 양극화를 더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의료 문제에서도 저는 사회주의 의료 정책이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공 의료가 강화돼야 합니다. 그러나 전체 의료 기관 중 공공기관 비율은 1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민간의료기관은 90퍼센트에 달합니다.

이 90퍼센트의 민간의료기관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계속 아파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 의료는 다 죽을 때 찾아가면 몇 개월 더 살게 해 주는 의학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고, 돈벌이 되는 의료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습니다. 애초에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예방의학이 발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민간의료기관들을 공공 부문으로 흡수하는 것이 의료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적 대안

노무현 정권은 이런 것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안이 없는 정권입니다. 한나라당과 다르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사회적 소득 보장만 실패한 게 아닙니다. 임노동 소득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총체적으로 실패했습니다. 가망 없는 정권입니다.

그렇다면 좌파적 대안은 무엇입니까?

저는 교육·의료·주거·보육·에너지 등의 분야에 기본권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든 국민에게 기본적 권리로 제공돼야 합니다. 즉, 사회주의 정책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개인 부유층에 대한 소득세와 재산세를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대기업의 법인세를 높여야 합니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법인세를 27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낮췄습니다. OECD 평균은 35퍼센트입니다. 깎아 준 법인세를 원상 회복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올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지난 2004년에 세금을 떼고 10조 원의 순이익을 거뒀습니다. 역으로 계산하면, 세전 이익이 16∼17조 원이었다는 것입니다. 2퍼센트 [인하했다]면 3천2백억 원이나 깎아 줬다는 얘기입니다. 3천2백억 원이면 웬만한 중소도시 예산입니다.

물론, 제가 제시하는 대안들은 서울시장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장이 되면 정치투쟁하는 시장이 되겠습니다. 반은 시장 집무실에서 일하고 반은 거리에서 싸우겠습니다.

저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미지가 강해 저는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표현합니다. 상당한 저항이 있을 것입니다. 선본 내에서도 이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투쟁할 것입니다.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은 말로는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하자고 얘기해 왔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연대라는 이름으로 이미 벌어진 투쟁에 가서 얼굴 내밀고는 사실은 말리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장애인이동권 관련 투쟁 같은 게 그런 경우입니다. 국회에서 장애인들이 들어가서 쇠사슬 묶고 죽어도 안 나간다고 하니까 국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 우리 의원들은, 물론 현애자 의원님이 수고하셨지만, 기본적으로 저 사람들 달래려면, 투쟁을 멈추게 하려면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중재하고 투쟁을 말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바꿔야 합니다. 저는 우리 당이 민중 투쟁을 주도하는 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보다 좀더 좋은 사회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회를 원해야 한다’고 제기하고 싸울 때에만 대중이 조직되고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주체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금실 - 노무현 정부의 분식회계 장부

 

강금실의 선거 전략은 ‘춤을 즐기는 자유로운 개인’ 등의 ‘참신한 이미지’이다. 이 때문에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강금실을 선호한다. <내일신문> 보도를 보면, 민주노동당 지지층 가운데 38.1퍼센트가 강금실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김종철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가 지적했듯이 강금실은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가리는 포장지 역할밖에 안 될 것”이다. “시민들이 막상 포장지를 뜯어 보면 안에 반품했던 제품이 들어 있는 게 문제”다.

강금실이 법무장관 때 한 일이 바로 노무현 개혁의 본질을 보여 준다.

그는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개혁하는 데 한 일이 아무것도 없거나 오히려 개악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문제는 변죽만 울리다 결국 그대로 남았다. 심지어 송두율 교수 마녀사냥 때는 공안 검찰과 자신이 “다를 게 뭐 있나” 하며 송두율 교수 구속에 손을 들어 줬다.

한총련 학생들의 수배 문제에 대해서는 “전면 해제는 있을 수 없”다고 했고 집시법은 개악됐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에 대해서는 “법규 위반까지는 안 가야” 한다고 했다.

강금실의 진정한 얼굴은 노동자 투쟁 때 드러났다. 노무현의 ‘강효리’였던 그는 단지 춤만 잘 추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지입차주들은 … 노동자는 아니”라며 노동자들을 “업무방해죄”로 처벌했다.

철도파업에는 경찰을 투입해 당시 한나라당 대표 최병렬한테서 “남자 장관 다 합친 것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손배·가압류와 비정규직 탄압에 절망해 분신자살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그는 냉소를 보냈다. 그가 포함된 3개 부처 장관 공동성명은 이렇게 말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근로자의 자살을 정부나 사용자의 탓으로 돌리고 … 집단행동을 계획하는 것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강금실은 고용허가제를 도입해 이주노동자들 인간사냥에 앞장섰다. 그가 법무장관을 하는 동안 이주노동자들은 강제추방과 죽음으로 내몰렸다. 십수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자살을 했고, 길거리에서 얼어죽었다.

강금실은 중간계급 자유주의가 개혁을 쟁취하는 데 얼마나 무능한지, 노동계급 투쟁에는 얼마나 반동적인지를 입증했다. 

사회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강금실 판 개혁 사기극에 미련 갖지 말고, 김종철 민주노동당 후보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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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반란이 중대한 승리를 거두다 / 프랑스 반란의 진정한 교훈

다함께 77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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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반란이 중대한 승리를 거두다

 

프랑스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정부를 굴복시켰다. 10일 오전[한국 시간으로 10일 저녁]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는 "최초고용계약(CPE) 조항을 폐기하고 … 다른 조처들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두 달 동안 지속된 광범하고 단호한 대규모 운동의 결과다.

 

시라크와 드 빌팽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26세 미만 청년들의 자유로운 해고를 가능케 하는 CPE 법안을 추진해 왔다. 이것은 '청년 실업 해결'을 빌미 삼아 불안정 고용을 더욱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CPE에 맞선 프랑스의 반란은 수천 명의 지방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정부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광범한 불만 덕분에 투쟁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됐다.

고등학생들이 시위와 점거에 가세했고, 노동자들은 두 차례 파업을 벌였다. 하루 파업이 벌어진 지난 3월 28일과 4월 4일에는 3백만 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교외 빈민가 청년들을 비난함으로써 운동을 분열시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 반란의 승리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는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준다. 또,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저항과 운동이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지금 유럽의 노동자들은 거듭되는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격 ― 연금 개악과 노동시간 연장 시도 등 ― 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다른 곳 ―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 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맞선 저항이 벌어지고 있고, 프랑스 반란의 승리는 이러한 저항을 더욱 고무할 것이다.

한국에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 비정규직 개악 법안, 노사관계 로드맵, 한·미FTA 추진 등 ― 에 맞서 싸우는 우리도 저항의 고삐를 더욱 조여야 한다.

 

프랑스처럼, 다 함께 단호하게 저항한다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프랑스 반란의 진정한 교훈

 

프랑스의 청년 반란을 두고 주류 언론들의 ‘제 논에 물대기’ 식 해석이 많다.


“프랑스의 청년 실업률이 높은 것은 … 이미 취업한 철밥통들이 신규 채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 문제를 놓고 몇 년째 씨름하고 있는 우리도 프랑스의 때늦은 진통을 눈여겨봐야 한다”(<조선일보> 3월 21일치 사설)는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궤변이다. 먼저, 프랑스의 단기고용계약자(비정규직) 비율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결코 낮지 않다. 2005년 현재 프랑스 전체 노동자 가운데 단기고용계약자의 비율이 14.2퍼센트인데, 유럽연합 15개국의 평균이 14퍼센트다(출처: 유럽통계청).

 

16∼24세 청년들의 단기고용계약 비율은 무려 53.5퍼센트로 유럽연합 평균인 40.3퍼센트에 비해 훨씬 높다. 이것은 20여 년 전의 25퍼센트 수준에서 갑절 이상 증가한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에 실업률은 줄어들지 않았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파견근로와 계약직 등 비정규직이 급증했지만 실업률은 낮아지지 않고 있는 한국과 꼭 마찬가지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선임연구원은 “고용 유연화가 순고용을 창출한다는 경험적 증가가 많지 않다”고 말한다. 일찍이 ‘급진적’ 고용 유연화를 추진한 스페인도 비정규직만 엄청 늘어나고 실업률은 결국 줄지 않았다.

 

한국의 기업주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기업주들이 원하는 것은 “계약 기간이 2년이 되기 바로 직전에 노동자를 해고하고 다른 청년 노동자를 동법[CPE]에 따라 신규고용하는 것”(이상헌)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규직 확대를 통해 결국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 조건을 공격하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프랑스 반란에서 정말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정부와 사용자들의 공격에 맞서는 광범하고 단호한 대중 투쟁이다.
그것만이 “몇 년째 씨름하고 있는” 비정규직 개악 법안을 끝장내고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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