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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식의 재구축이라.....

  • 등록일
    2009/08/03 15:59
  • 수정일
    2009/08/03 15:59

[소비에트 건축 : 구성주의 건축운동].....아나톨 콥 지음.......발언

 

7월의 거의 끝자락에 읽게된 책이다.
건축 혹은 공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지 몇년이 흘렀는데

 

(한옥답사를 다니면서 가지게 된 건축에 대한 관심이

결국 한옥 만드는 목수 일을 배우게 되고
지금은 공간 혹은 건축을 가지고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싶은 욕구에 까지 다다랐다.
 

어찌보면 나의 집착일 수 도 있지만 그만큼 공간 혹은 건축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내가 꿈구는 어떤 삶들을 구현하는 데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인가를 던져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음...단순히 인문 혹은 철학관련 공부만으로 해소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꿈들을
건축 혹은 공간을 공부하면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어떤 시사점들을 발견하게 해준 달까..?

결국 [하비]가 이야기하는 지적 비관주의를 넘어서서 낙관주의로 나아가는 길에서
건축 혹은 공간 공부는 나에겐 새로운 에너지이다.)
 
그렇게 공간에 대한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서 혼자 공부한지 몇해동안

나름 잼나고 나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주던 책은 몇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소비에트건축이라는 책은

전혀 다른 식의 즐거움을 주는 책인것 같다.

뭐랄까 ...?...

건축관련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인문학 책처럼

내가 똑바로 던지지 못했던 궁극의 질문들을 던져주는 책이랄까 ?

가끔 술한자 하면서 던져보던 질문들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건축적으로 실현시키려 했던 그들... 19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가들의 삶에서

나름 아 !...하는 전율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는 책이었다. 

이렇게 재미난 책을 이제서야 읽다니 하는 반성을 무쟈게 하면서
책을 읽었다.

 

19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고민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다.
뭐 구성주의하면 미술에서의 칸딘스키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건축에서의 구성주의자들을
알진 못했었는데 새삼 나의 무지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고민들이 여전히 유의미함을 넘어서
지속적인 실천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미술에서의 한 조류로 평가받는 구성주의라는 전문적인 미술사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구성주의자라는 것으로 묶여 있던 당시의 새로운 활동가들의 이야기이다.

즉, 혁명이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고 재구축하여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현실화 작업을 고민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볼세비키 혁명이 있은 후 러시아에서
긴즈부르크를 필두로한 구성주의 건축가들이
사회주의의 삶으로써의 재구성을 위한 다양한 기획과 노력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단지 종이와 그들의 삶에 대한 에너지 뿐이라는 사실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어쩌면 구현될 수 없었던 꿈을 그렇게 치열하게 삶의 과정으로 구현하려는 건축의 힘들을

느끼도록 해주는 듯 싶다.

 

건축가는 더이상 자신이 삶을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조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긴즈부르크

 

이말처럼 그들은 결국
현실화된 혁명이후의 삶을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건축을 통하여 재조직하려 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러시아
이제 막 혁명이 성공했지만 그 혁명세력인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도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였던 계급평등사회를 구현할 어떤 물적 토대도 가지지 못했던 그 시절에
아니 다들 구시대의 삶으로의 회귀나 혹은 구시대적 삶의 형태들을 답습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들은 건축 혹은 예술을 통하여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
그것도 강제가 아닌 환경의 변화가 그런 삶들을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밀고 나가는

그들의 혁명에 대한 자세는
오늘날에도 많은 생각거리들을 주는 듯 했다.

 

특히 당시 구성주의자들이 가진 생각들 중에서
 

" 구성주의자들은 합리화의 분야에서 새로운 사회적 필요를 규정하는 것과 같은 어떤 선동도 조심스럽게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어떤 마력이나 계급적 자각을 통해서 내부의 지식을 유도해낼 수 있다고 보지않았고, 프롤레타리아의 자연발생적인 창조성을 믿지 않았다.

암암리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발표에 찬성하였다.
 

노동대중들은...합리화하는 것을 찬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합리화를 시작하는 의미와 중요성을 계속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이미 성취된 결과와 성공들을 노동대중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노동대중이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의 주체 혹은 창조적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은 환경의 변화 그리고 대안적인 삶의 구현 혹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노동대중의 혁명적 삶들이 가능하리라는 생각들을 한 것 처럼 보인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은 생각과 일종의 에너지 혹은 슬픔 등...
일종의 전율 같은 감응들을 가진 것은
그들이 가진 질문인듯 싶다.

 

- 인간은 경제적인 일에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존재하기 위해 경제와 노동을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경제적 과업은 우리의 최종 목적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루나챠르스키

 

- 공동체의 과업은 사회주의의 적극적인 옹호자이면서 사회주의의 창조자인 새로은 집단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의 과업 중 하나는 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일상생활, 활동, 노동은 새로운 사회주의 삶의 방식에 대한 건설을 추구하기 위해 더욱 바람직한 조건을 지향한다.
  경제의 급격한 변동, 사회적 관계의 격변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을 도입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을 통하여 그것을 선전해 나가는 수단이다.....

               .................소르킨과 마르코비치

 

-우리는 가끔 명령을 부여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 명령들은 읽혀지고 받아들여지고 얘기될 것이다. "삶의 방식의 재구축에 대하여"라는 말은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것은 몇 개의 단어로 구성된 전체적인 혁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이 확고한 기반에 근거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겁은 주지만 작동하지 않는 총에 불과하다. 
그리고 "삶의 방식의 집단화를 위한" 명령은 진지하게 계획을 세우고 공동체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위와같은 총임을 입증할 것이다

                                   .....붉은청년학생

 

-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삶의 방식의 재구축을 추구하는 건물의 새로운 형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거주지를 창조해나가야 할 필요성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지역계획에 관한 마르크스적 기본원리에도 동의하고 있었다.
도시 거주자들과 농촌거주자들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관점에서 동등한 생활조건을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논제는 앵겔스의 주장 그자체이다.
"도시와 농촌 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농업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것처럼 공업생산에도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아울러 공공위생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간의 융합만이 현존하는 대기, 토질, 그리고 수질오염을 제거할 수 있다.
오직 이 방법만으로 우리는 도시의 나약한 대중을 일으켜서 더 이상 그들의 오물이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농업생산에 기여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반듀링론  "

 

- 모스크바 지하철과 같이 공공복지를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가 계획되었다. 우리는 수많은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개인주택과 조합주택의 건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과연 계속 진행시켜 나가야 하는가 ?'
'과연 우리는 자본주의 도시가 이미 걸었던 길을 통해서 발전과정을 따라잡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
'아니면 우리는 몇 년 후에 우리가 파괴해야만 하는 건물을 짓고 있지는 않은 가 ?'
'우리는 우리 경제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들고 값비싼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 가 ?'
...............사브소비치

 

- 개인주의적이고 쁘띠부르주아적인 삶의 방식을 혁파하기위해서 우리는 욕구충족을 집단화시켜야 한다..... 쁘띠부르주아의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은 집산화의 결과로 차츰 소멸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유형의 도시 중심부가 삶의 방식의 집단화를 그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기존의 도시, 촌락, 마을을 대체하게 될 새로운 도시 중심부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사브소비치

 

- 긴즈부르크는 기존의 풍습과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것이고,
삶의 방식의 집단화는 격려되어야 하는 것이지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론적으로 반도시주의자들이 공동체 속의 개인을 강조하고 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옳으나 현실적으로 그들은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역할을 자신들의 계획에서 잊고 있다.
반도시론자들에 의해서 제안된 인간주거에는 개별주택의 급증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공동체를 해체하며 인위적으로 개인을 소외시키며 사회적 본능을 질식시킨다.
우리는 소위 반도시주의자들의 역사적 전망에 반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적 미래는 현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미래를 계획하나 명쾌하고 경제적이며 정당화될 수 있으며 지금 적용가능한 현실적 상황과 가능성은 전혀 의식하지않고 있기 때문이다....하이거   
 
==========

이들 1920년대 러시아구성주의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것은 

혁명이라는 현실이었다.

 

모든 것들이 주어지지 않은 

최소한의 생필품도 부족한

따라서 건축이라는 것을 시도해 볼만한 어떠한 경제적 기반도 없었던

그러면서도 그런 것을 받아들여서 건축을 해야하는 

종이와 연필만 가진 건축가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지금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권력의 강요나 명령이 아닌

우리들 각자의 격려와 삶의 에너지로 실현하려는 방식은 무엇이고

그것이 일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

 

나는 이 문제에 답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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