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거밀리언 달러 호텔

몇 번을 보려 시도하다, 다 못보고 그만뒀던 영화.

마음 먹고 끝까지 봤다.

 

이럴 수가.

감독이,

감독이,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

....... 으음... 으음....

 

 

 

네, 아니오, 모르겠다고만 할 순 없어.

이유가 있을거야.

.... 기다려줄테니.

 

사랑은 표현될 수 없는 것

마치 나무, 바다, 미스테리와 같이

우리의 눈 같이

성자 안의 죄인 같이

그림 속의 빛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안식이었을 콘크리트를 바깥에서 부터 쪼기 시작했다.

 

마음은 숲속의 잠자는 공주

거부할 수 없는 키스를 원한다.

눈은 뜨고 있지만

마음은 잠들어 있다.

모든 마음이 꿈꾸는 곳으로 가야 한다.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TV보다 이게 훨씬, 훨씬, 훨씬 좋아. 내 생애 최고의 순간보다도.

너도 이렇게 나랑 있는 게 좋았으면 좋겠어.

 

삶은 완벽한 최상의 것임을

멋진 일과 아름다움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그런 것은 살아있을 땐 깨달을 수 없다. 

 

 

엘로이즈와 탐의 몸짓은 언제나 긴장해있고 과장된다.

아무런 보호막 없이, 발가벗겨져 있기 때문으로 느껴졌다.

상처를 막아줄 껍데기 하나 없어, 되려 상처입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

서로가 껍데기가 되어줄 수 있을까?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걸까?

탐은 엘로이즈를 만나고서, 자아가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벌어진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만, 되새기진 않는다.

-I don't care. -I care.

넌 소중하니까.

죽음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걸, 소중하다는 걸 보여준다.

엘로이즈에게 닿길 원했고, 그렇게 세상을 뒤집으로 닿았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게 진실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제3의 팔이 자라난 건, 단지 환상이었을까?

진실을 아닌 걸 믿고 있는 것일까? 환상으로 보이는 게 오히려 진실인걸까?

자아 때문에 진실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사랑 때문에 자아를 알게 됐다고.

역설적으로, 영화에서 자아를 가진 사람은 탐, 엘로이즈, 스키너 밖에 없던걸까?

 

OST는 참 좋다.

이 감독, 음, 뭐라 말 꺼내기 참 어렵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도 봐야겠다.

 

 

2010/06/05 14:12 2010/06/05 14:12

보는거

스포일러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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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게, 살아간다는 게 참 무거웠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데 그 무거움 때문에 쉽사리 일어서지지 않았다. 잦아드는 화면이 그 아이와 주인공, 혹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둔 검은 물결 같았다.

 

-시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 누구나 시를 마음에 담고 있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본다는 것. 그 대상을 샅샅이 느끼는 것. 새들이 무엇을 노래하는 지 궁금해 하는 그녀에게 삶은 어쨋든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시를 노래하는 입으로 음담패설을 뱉는 사람도 있고, 그녀의 삶도 평온하지는 않다. 시는, 삶은 그렇게 아름다움 보다 구질구질함이 더 눈에 띄는 곳이다.

-시를 쓰기 위해 대상을 본다는 것은, 내가 그 대상이 되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죽은 이의 삶을 반추하며 그 이의 마음을 짚어보는 것.

-왜 그랬냐며 손자를 뒤흔들지만 손자를 둘러싼 이불은 벗겨지지 않는다. 죄의식이 본성이라면, 본성에는 외투가 둘러쳐져 있어 그것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 껍질을 벗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진절미를 내며 음악이 흘러나오는 컴퓨터의 전원을 내려버린다. 요란한 껍데기들에 대한 혐오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껍데기 내면에 순수가 있으리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녀가 요구하는 속죄는 단호하고 가혹하다. 식탁위에 죽은 학생의 사진을 올려놓기까지 하지만 손자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텔레비젼을 보고, 밥을 먹고, 오락을 하고.. 마음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태연함이 위태롭다.

-살구는 땅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다음 생을 위해. 추락은, 그렇다. 추락은 이 생이 아닌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노인의 성욕을 풀어주며, 뜸벅해지는 자신의 기억력을 보며, 삶의 구질구질함을 체화해가며, 그녀는 점점 시에 가까워진다.

-아름다움을 찾아 시를 쓰려는 행위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아름답지 못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깨닫고,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종이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형체없는 얼룩을 남긴다. 위자료를 건네는 건 속죄일 수 없다. 그녀는 손자를 경찰에 넘기며 배드민턴을 친다.

-그리고 그녀는 종국엔 자신이 그 아이가 되며, 시를 완성한다. 나를 뒤쫓던 것 모두를 사랑했지만, 검은물결 앞에 서게 된 그 아이. 아름답지 못한 삶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체화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박하사탕과는 달라진 것 같다.(밀양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들 말이 밀양과도 달라졌단다.) 그 땐 개인이 치르기엔 가혹한 죄값이라는 얘기를 던졌지만, 이번엔 오히려 치뤄지지 않는 죄값에 대해 얘기 던진다. 노무현의 죽음이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나, 대상을 바꾸면 용산, 쌍용자동차, 삼성반도체, 곳곳에 만연한 죽음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겠다.  전쟁지역에서 아이를 잃은 고통을 호소하는 부모의 영상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일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내것으로 삼지는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을 깊숙이 보는 것이고, 대상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고통들에 내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건, 속죄하며 괴로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려 너무 떳떳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죄의식 없는 그들을 대신해 내가 죽을 수 있어야지 않느냐고 질문 던지는 것 같다. 그 속죄를 우리는 종교적으로는 익숙하게 알고있다.-Jesus

그리고 시를 쓴다는 건, 그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단지 그 대상을 관찰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겪은 고통을 혹은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이건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 어쨋든 타인의 시선인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속죄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의 삶을 체득해야 한다. 그 사람의 고통을 모르는데, 나의 잣대로 재는 것은 대상화시키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아름답다는 건 삶의 풍진을 겪는 와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울 순간은 삶의 길이와 상관없이, 어느 때도 될 수 있다. 심지어 삶의 첫번째 기억일수도 있다. 그러고보면 아름답다는 것은 순간의 찬란함은 아니지 않을까?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도래하지 않은 찬란한 기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끝을 한정짓지 않고 지속되는 삶의 과정에 쌓여온 기억들을 다복다복 쓰다듬어 주는 속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건 구질구질한 내 삶을 외면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따뜻하게 되새김질 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겠다 싶기도 한데, 아무튼, 나이 든 여성의 몸이 그렇게 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정확히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나이든 여성을 중성적인 존재로 생각하는것? 그래서 뒤집어 여성 일반을 성적인 대상으로 전제하는 것?)

 

시 다른 리뷰

http://blog.naver.com/melt21?Redirect=Log&logNo=140106947176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394.html

2010/06/03 11:04 2010/06/03 11:04

보는거베를린 천사의 시

뭔가, 잔뜩 담긴 영화. 몇 번은 다시 봐야할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하지만, 보통 난 한 번 영화를 다시 보질 않으니..;

 

천사의 세상에는 색이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色이라는 건, 단지 color가 아니라 감각과 오욕칠정과 업을 의미한다. 色에 대한 인식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유되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色의 세계에 살고 있고, 그래서 많은 것을 욕망하고 소유하고 끄달리며 살아간다. 그 色이 기억을 만들고 삶을 구성한다.

 

인간이 된 천사는 맨처음 色을 묻고, 배운다. 감각의 세상은 천사 세계의 숭고함은 없을지 몰라도, 시원한 걸 만질 수 있고, 담배와 커피를 함께 할 수 있고 굵은 선과 가는 선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손을 비비면 따뜻해지는 좋은 일들이 가득 찬 곳이다. 色의 세계에 있지 않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천사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죽어가는 누군가를 도울수도, 누군가의 죽음을 말릴 수도 없다.

 

닭털로 만든 날개를 달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그녀는 언제나 혼자라고 느낀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그는 타인일 뿐. 특히나 베를린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더더욱. 사랑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 앞에서 천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날개를 버리고 인간이 된 천사는 커피를 맛보고, 담배를 태우고, 음악을 들으며 느끼고, 그 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만난다. 숭고함은 더이상 천상의 세계에 있지 않다.  서로가 완전히 합일되는 순간, 그들은 더이상 타인이 아니게 된다. 새로운 조상이 되어, 그곳으로부터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된다. 애초에 타인인 존재인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건 가슴벅찬 일이다. 사랑은 그런 기적같은 일이다. 그 둘의 결단은 둘 사이를 초월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건이다. 우주가 새로 만들어지는. 너를 만나기 위해 만년을 기다렸다는, 엘하자드의 대사처럼.

 

'전후' 독일이 배경이다. 독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영화를 봤더니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많았다. 포츠담 광장에 대한 장면이랄지, 곳곳에 무너진 건물이라든지, 등등. 그리고 영화를 지루하게 느낀 건 나만이 아닌 듯 하다. 영화를 돌려가며 다시 보니 처음 볼 때 이해되지 않았던 장면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다른 걸 떠나서 色이란 건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어인 것 같다. 이 영화 후속작품(in weiter ferne, so nah)이 있다는데, 한글 자막이 있으려나?

또 떠오르는 건, 그래도 삶은 구질구질하다는 거 -_-;

2010/05/22 14:08 2010/05/22 14:08

보는거당신과 나의 전쟁

학교에서 상영회를 했고,

예상한대로 우리끼리 봤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격해진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강탈할 권한을 갖는 다는 게,

여전히 생경스럽다.

 

계속 마음에 맺혀있던 게 있다.

영상을 보면서, 더 뚜렷해졌다.

난 그곳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싸움만 좇아 다녔다. 그래서 협상이 타결된 날, 쉬어버렸었다. 며칠이 지나고서, 그날 경찰서 앞에라도 갔었어야 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번번이, 사람을 시선에서 놓치곤 한다. 용산에서도, 그 전에도, 그 전에도, 죽.

내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그 전쟁터는 내 감정을 배설하는 곳이 아닌데, 공을 쌓기 위한 곳이 아닌데.

끊임없이 경계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언제나 부끄러운 반성만 뒤따른다.

 

 

 

 

/

내 속병의 원인 하나를 알았다!

요즘 설사가 좀 멎고 살만했었는데

영상을 보다 감정이 격해지니

얼마 안 있어, 바로 증상이 도지기 시작했다.

용산에, 평택에.. 한여름의 반절을 그곳에서 보낸 뒤 시작된 속병은

그러했었나보다.

감정을 쉽게 터트리지 말고 다스려야 할텐데

나이가 들수록 절제가 쉽지 않다.

특히 분노보다는 슬픔을 참아내지 못하고

자주, 격하게 토해낸다.

건강한 토로는 아닌 것 같아 걱정이다.

내 감정을 다루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2010/04/29 23:27 2010/04/29 23:27

보는거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시놉시스를 안보고 영화를 봤는데, 꽤 난감했다.

다 보고 나서 시놉시스를 읽으니, 대략의 줄거리만 이해가 됐다.

 

아이들의 꿈을 뺏는 사람이 있고,

아이들의 노동을 뺏는 사람이 있고,

아이들은 이래저래 빼앗기는 건가..;

도저히 전체 내용을 파악 못하겠다..

외눈박이들은 아이들을 납치하러 다니고,

납치해온 아이들과 눈을 바꾸고.....

그리고 몸은 어려도, 생각은 어리지 않은 아이들..

비에뜨에게 렛미인의 이엘리가 겹쳐졌다.

 

뭔가 많은 상상력이 담겨 있다.

고동이 껍질을 벗고, 나팔을 불고

기린이 구름을 따 먹고

음음.

전체적인 분위기는 칙칙한데, 발랄한 상상력이 여기저기 스며있다.

 

인상에 가장 많이 남은 건 미에뜨 역을 맡은 judith vittet.

1984년 생이라니, 저 영화 찍을 때면 11살? 놀라워라...

후속작이 없네..

파리8대학 영화과에 진학했다고도 하고

경제학으로 바깔로레아를 통과했다고도 하고..

바갈로레아 ES를 통과한 뒤, 파리8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고 한다.

 

여기저기 재밌는 장면들이 많았지만, 내 나쁜 기억력으로, 얼마동안이나 기억하려나...

2010/04/24 23:46 2010/04/24 23:46

보는거경계도시2

길게 썼는데 두번이나 날아갔다.

더 쓸 의욕이 안생긴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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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두율씨는 한국사회에 무엇을 바란걸까?

비전향 장기수가 30년 감옥에 갇혀 있는 사회에서 비전향 경계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한걸까? 바꾸겠다고 생각한걸까?

 

- 송두율씨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은 무엇을 바란걸까?

애초 어떤 판단을 했던 걸까? 그 판단이 어떻게 변한걸까? 그 판단들을 송두율씨와 공유했을까?

 

- 개인의 실존적 비극에서 운동이 연유한다. 송두율씨는 자신의 행동이 실존적 요구에서 비롯한 것임을 헤아려 달라고 항변하는 것 같다. 그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데 나도 송두율씨를 헤아릴 수 없는게, 그는 한국사회에 대해 알고 있었고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식인이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부딪히는 이들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 수 없다. 그가 쥐고 있고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옳고/그름을 아는 게 운동은 아니다. 그 입장이 어떤 효과를 남기는지 보는거지.

 

- 대법원의 판결이 한국사회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송두율씨 주변 사람들은 여론을 읽고, 여론을 바꾸기 위해 궁리한다. 법원의 판결까지 통틀어, 조선일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운동과 조선일보는 같은 편에 있다.(BG철학을 공유한다.) 화면을 가득 메운 진보/보수 프레임이 답답했다. 그들은 서로 적인가? 공생관계이지 않은가? 송두율씨 주변으로 조선일보, 한나라당 치들이 달려들었고, 역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민족주의 세력들이 모이는 건 당연하다. 그 운동이 자신의 적과 닮는 것도 당연하다. 잘 모르겠지만, 이데올로기에서의 계급투쟁은 그런 식으로 벌여내서는 안될 것 같다. 동떨어져 보이지만 스티브 제이 굴드의 작업처럼 목적론적인 진화론과 싸우는 게 훨씬 더 계급적이지 않은가?

2010/04/06 01:15 2010/04/06 01:15

보는거작은연못

결론을 알고 있는 평화로움이 숨막혔다.

영화는 설명이 적고 불친절하다. 위기감은 뜸을 들이지 않고,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역사를 화면에 담는 데에는 어떤 게 필요할까?

어떻게 담아야 잘 담은 걸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 떠올라 격해졌다.

 

 

근데,

왜 연못에 고래가 뛰노는걸까?

2010/04/01 00:20 2010/04/01 00:20

보는거파주

포스터에서 풍기는 느낌이 좋아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다 보고 나니 조금은 밍숭거리기도 하고.. 하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다.

 

여러 글 들에서 미리 보아 이미 알고 있던 대사, 처음엔 멋져보여 시작했고... 자꾸 해야할 게 생긴다는..

누구는 강박에 빠진 좌파의 자화상이라고 얘기하지만, 강박없이 자유로운 삶이란 애초에 존재할까? 무슨 이상을 대는 것 보다 차라리 솔직하지 않을까. - 정말, 자꾸 해야할 게 생기는 걸.

 

영상을 보는 내내 두근거렸다.

둘은 서로 도망가고 있던걸까.

 

중식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할 때, 다른 누구를 다치게 했고, 그 죄책감 부채감을 이고 살아간다.

결혼은 욕망을 부정하려는 도피처였을까. 하지만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다는)욕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또 누구를 다치게 했다. 그 사람은 그것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지지 않아도 될 부채일까? 그래서 그것은 골방에 갇혀 세상의 정의를 고민하는 활동가들의 폐쇄적인 자의식일까? 되려 보지 않으려고 눈감아버린 인과의 끈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감독은 어느 쪽의 말을 하고 싶었던걸까.

 

은모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가? 그 의도는 명확하지만 언제나 꺼풀은 씌여있다. 자신이 그 의도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을 분명히 의식했을 때는, 오히려 도망치는 걸 선택한다. 둘 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지만, 어느 쪽도 그것을 그대로 내보이지 못한다. 감독은 그것을 인정하고 내보이는 것 또한 해피엔딩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고 영화 첫머리에서 잘라말한다.

 

개인의 욕망을 삭제하고 이상을 박제화 시킨 운동(유령들의 운동..)에 상대적으로, 욕망을 긍정하라는 류의 담론이 유행한다. 감독은 둘 사이에서 답을 고르는 것 같지는 않다. 인과의 끈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꼬여있는 실타래 속에서 개개인의 노력은 무력한가? 노력하면 만날 수 있는걸까. 애초 만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모든 걸, 자신이 떠안는 중식은 가엾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안타깝다. 그가 노력한 만큼, 그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그만큼 받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모두에게 솔직하면, 세상이 좀 나아질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결코 감당할 수 없을 일이 있을까.. 서로 기대면 어느 것이든 조금은 수월치 않을까..

 

2010/03/15 03:35 2010/03/15 03:35

보는거8인 : 최후의 결사단

별 생각 없이, 시간 때우기 정도로 쓸만한 영화.

이왕 시간 떄우는 거면, 좀 덜불편한 영화면 좋았을 것을..

 

부자연스러운 액션장면들도 거슬렸지만,

혁명에는 영웅이 있어야하고, 혁명은 희생이 필요한 거라는 따위의 전제가 거북했다.

 

어떤 영웅을 지키는 게 혁명이 아닐진대, 영웅을 지키는 또다른 영웅들을 꾸며내며 혁명에 비장함을 입히고, 그래서 희화화 시킨다. 누구도 영화 속 이야기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혁명은 판타지가 되었다. 판타지로 가공하더라도, 얼마든지 현실의 관계를 반영시킬 수 있다(시트콤 봐봐). 그러고보면, 배경이 현실이냐 판타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추상해 담았는지가 중요하다. 이 영화는 애초 배경도, 군상들도 판타지였고, 현실의 그 무엇도 담지 못한채, 내내 과대망상에 빠진 의미없는 말과 장면들이 떠다녔다. 뭔가, 역사는 이름만 남기고 간, 때로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이 바꿔온 것이라는 얘기를 하려했나 싶은데, 그 이름 없는 이들이 이름 있는 누군가에게 복무하는 걸로 역사를 바꿨다고 생각한거면, 참 한심하다. 이런 설정은 '영웅'에도 있고, 정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여러 중국 영화들에 담겨있는 것 같다. 물론, 헐리우드 영화에도.

 

무엇을 위한 혁명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혁명'이라는 공수사만 셀 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 짜증났다. 인민을 위한 다는 건 이명박도 할 수 있는 얘기다. 추상적인 '중국'과 '혁명' 앞에서 주인도 인력거꾼도 모두 동지가 된다. 어찌보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한나라당 심판 앞에 민주당도, 국민참여당도, 누구도 만날테니..

 

수십번 칼을 맞고도 걸어다니는 사람이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움직이는 인력거나.. 장소가 지구 어디쯤이라면, 기본적인 물리법칙 정도는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2010/02/04 01:40 2010/02/04 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