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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토요일 오후

덕양산 행주산성에 오르다.


1.

비오는 토요일 오후, 난 행주산성에 갔다.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토요일이라 노조 사무실도 한적하고, 전화도 뜸하다. 모처럼 연락을 해온 이는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한다. 일정이 빈다. 비는 내리고, 머리는 흐리다. 뭘 할까? 고민하다 결심한 게 행주산성에 가기였다.


버스를 타고 행주산성 밑에서 내렸다. 산성으로 오르는 정확한 길은 몰랐지만 대략 가늠하여 음식점들 사이로 길을 잡았다. 다행이 지름길이었다. 표를 끊고 출입 대문을 들어섰다.

 


> 행주산성 위에서 내려다본 한강과 방화대교




2.

덕양산 또는 행주산성. 나는 매일 출근길에 스쳐지나가는 곳이다.

난 출근길에 책을 보다가도 이곳 행주산성을 지날 때쯤이면 책을 덮는다. 행주산성, 덕양산의 풍광을 보기 위해서다. 행주산성은 시내의 혼잡한 구간이 끝나는 곳에 있고, 나무가 울창하여 계절의 미세한 변화도 하루가 다르게 느낄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나무들은 봄을 준비한다. 멀리서 보면 나뭇가지 끝으로 물이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물이 오르면서 겨울 나목의 짙은 갈색이 점점 연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새 연두색 빛이 돋아나고, 점점 짙어진다. 갑자기 큰 나무 사이로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핀다. 그러면 완연한 봄날이다. 아카시아 필 즈음이면 여름의 숲 모양을 제법 갖춰, 흔들거리고 뒷면이 드러나는 이파리 덕에 바람의 흐름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아카시아도 거의 끝물이다. 이제 곧 밤꽃이 피겠지...


3.

이곳을 지나면서 ‘저곳을 한 번 들려봐야지’ 늘 그렇게 마음먹어도 한 번도 오르지 못했었다. 고양시에 이사 온 지도 어언 7년차, 이 길을 매일 출퇴근한지도 만 3년이 되었건만 한 번도 들르지 못했다는 건 나의 방랑벽에 비추어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기도 하다.


출입문을 지나면 권율 장군의 높다란 동상이 나온다. 불편하다. 권율 장군이 때문이 아니라 위압적인 동상 때문에 불편하다. 물론 난 이곳을 오르기 전에 결심했었다.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그런 건 최소로만 보자고 말이다. 군사정권 시절 개발의 한 형태인 이른바 사적지 정화(淨化)라는 게 어떤 것인지 봐왔고, 특히 전쟁 관련 유적지야 그 정도가 더 심했으니 말이다. 이른바 정권 도둑놈들의 짙은 꽃단장이라고나 할까. 행주산성도 대부분 박정희 정권시절에 개발된 곳이다. 물론 전두환 정권이 뒷손질을 한 곳도 있지만 말이다.

 


> 행주산성 꼭대기에 있는 영상교육관/ 아마 육영수가 저런 색을 좋아했댔지. 건물은 물론 시멘트고...

 

4.

행주산성은 숲이 울창하다. 숲이 울창한 만큼 길이 좋다. 특히 마음 풀고 산책하는 데 그만이다. 평지와  이 만나는 곳에 124m의 높이로 홀로 솟은 산이니 전망도 그만이다. 한 바퀴 도는데 2Km 정도로 거리도 적당하다. 나처럼 숫기가 없는 사람이 혼자 와서도 1시간 이상 마음 편히 산책할 수 있고, 만약 50Cm 미만의 거리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의 사람과 함께라면 2-3시간은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지만 비가 내려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다. 호젓하다. 1990년대 복원해놓은 토성을 끼고 난 산책길은 유일하게 비포장이다. 맨흙이 드러난 길이다. 좋다. 경사가 별로 없는 토성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구간은 비탈이 가파르다. 그렇지만 숨을 한번 헐떡일 정도 오르면 이미 정상이다. 정상에는 기념탑이 있고, 기념관이 있다. 이딴 건 그냥 지나치자.


눈을 들어 바라보니 구름 사이로 북한산이 보인다. 서울과 고양시 경계로 난 야트막한 산맥에는 비가 들어가고 있다. 비가 움직이는 걸 본 게 얼마만인가. 산책로에서 약간 벗어난 절벽위에 위치한 진강정에는 사람도 없고 더 한적하다.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인가, 정자 앞 마당과 길목에는 끝물 아카시아꽃이 잔뜩 떨어져 눈처럼 쌓여있다.

 


> 산책로를 벗어나 강가 절벽 위에 있는 진강정/ 바닥에 온통 하얗게 덮인 게 아카시아 꽃잎이다.

 

5.

행주산성을 가려고 검색을 해보니 함석헌 선생이 1968년도에 이곳에 다녀와서 쓴 「행주산성 가는 길」이란 제목의 기행문이 있다. 당시 박정희가 이곳에 이른바 정화작업을 막 시작할 즈음인데, 선생이 이곳을 가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해도 길을 아는 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찌어찌 하여 서울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능곡역에 내리면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고 한다.


68년이라. 그땐 초가집이 대부분이었겠지. 포장 안 된 맑은 신작로에는 포플러 가로수가 있었겠지. 어쩌다 차가 지나가면 먼지구름이 일었을 테고...


아래는 선생의 기행 부분이다. 선생이 왜 이곳을 굳이 가려고 했는지 마음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어쩜 지금도 유효하겠다.


<중략> 지금 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진흙탕에 빠졌습니다. 말에다 채찍을 더해도 더해도 말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득이 탔던 내가 자리에서 내려와 바퀴살에 어깨를 대고 밀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는 한 이 수레는 사람째 말째 실은 보물째 이 속에 빠져들어 한가지로 다 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수렁은 밑을 모르는, 멍청하고만 있으면 점점 빠져드는 무관심의 수렁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어디 벋디디고 기를 쓸 수 있는 돌부리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  돌부리가 남한산성이요 행주산성입니다. 그것은 벌써 여러 백 년 전에 비슷했던 경우에 우리보다 전의 사람들이 거기다 발을 벋디디고, 역사를 건졌던 일이 있는 이름이 있는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6.

전쟁 얘기는 생략. 하지만 10배가 넘는 적군을 물리쳤지만, 이름조차 전해오지 않는 2,300여 병사와 민중들에게 대한 존경의 마음은 잊지 않고 간직하겠다.



7. 길

 


 

 




 

 

8. 정자와 풍경

 

 

 



 



9. 꽃과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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