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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 2007. 7. 26

 

감은사지

빈 절터. 돌덩이들과 탑이나 비석이 남아 옛날의 화려했던 시절을 증언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텅 빈 옛 절터는 쓸쓸함 못지않게 낭만적이기도 하고, 풍성한 상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은사지는 유홍준이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쓴 이후 너무나 유명해 기대치가 높아져서인지 몰라도, 절터 자체에 대해서 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만, 석탑의 굉장히 크면서도 간결한 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문무대왕릉이라는 대왕암을 지나 경주방향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연무는 점점 더 짙어져갔다. 서쪽 산 꼭대기에 걸린 저녁 태양은 붉은 빛만 아니라면 달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빛을 잃고 있었다.

 

       감은사지 입구에서 본 일몰

 

국도에 인접해서인지, 아님 워낙 유명해서인지 이곳을 들르는 차들이 제법 있다. 멋진 카메라를 가지고 온 분들부터 그냥 산책하듯 들르는 분들까지 다양하다.


이곳 감은사지에 오기까지 꽤 긴 길을 돌아왔다. 이틀에 걸친 울산 조합원 교육으로 서울 - 대구 - 울산 - 대구 - 울산 -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이곳으로 왔다. 특히 둘째 날 대구에서 울산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영천부터는 국도를 타고  갔다. 지나는 곳곳마나 눈이 휘둥그레질 유적이 널려 있는 경주를 지나, 고목이 된 벚꽃 가로수 아름다운 국도를 지나 울산에 닿았다. 교육이 끝나고는 방어진으로 해서 울창한 숲길과 바닷길이 이어지는 해변도로를 따라 올라왔고, 대왕암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정신적으로도 꽤 긴 길을 돌아온 것 같다.

울산 교육이 이틀임에도 대구를 잠자리로 택했다. 조합원과 협의회 동지들, 산보련의 김은미 국장 등 여러 동지들과 술자리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염원으로 둘러싸인 곳에 사는 반딧불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줄 이 드물고, 그런 이를 만나는 건 더 어려운 게 요즘인 것 같다. 그러니 보석 같은 벗들과 모처럼의 술자리는 ‘행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고, 말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부담 없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벗을 부르고, 가려는 이 굳이 붙들고, 마지막으로는 술병을 들고 여관으로... 그것으로도 모자라 기회만 되면 일탈하려고 국도로 해변도로로 접어들었다.


교육.

교육자의 능력이나 피교육자의 의지에 의해 교육효과의 차이는 많겠지만, 교육효과라는 차원에서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호흡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울산 조합원 교육은 버스 교대제 탓에 첫날과 둘째 날의 조합원들이 달랐고, 분위기 또한 매우 달랐다. 첫날 교육에 참가한 조합원들은 오랫동안 민주노조를 사수해온 열성분자들이 많았고, 그만큼 열의가 높았고, 교육하는 나도 뿌듯했다. 그러나 둘째 날은 회사와 협조적인 핵심부류들이 있는 교대조로 교육이 어려웠다. 교육 도중에 전화를 받는 이, 떠드는 이, 진동으로 바꿔달라는 여러 차례의 사전 주문을 했음에도 여전히 울리는 전화벨소리... 피해의식인지 몰라도 어쩜 일부러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육이 끝나고, 우리 조직국장이 지회장과 함께 점심으로 이곳 명물 물회를 먹자고 했음에도 난 교섭 설명회를 가질 때 슬며시 자리를 떴다. 머리도 식히고, 웬만하면 그냥 떠나고 싶어서였다. 연락이 왔다. 조합원들 중에 내게 질문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투쟁 상황에서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뭐냐’는 게 그들의 질문 요지라고 한다. 불쾌하다. 그러면 안 되지만 불쾌하다. 지도부로써 인정을 하지도 않으면서 ‘네가 내게 해줄 수 있는 네가 가진 도깨비 방망이가 뭐냐?’고 묻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끈거리는 골머리를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 경우 일체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쉽게 그럴 수 없으니 끝없이 일과 관계없는 농담을 섞어 헛소리를 지껄이고, 풍경에 몰입하고, 또 술을 마신다.

 

     감은사지 석탑(동)

 

감은사지에 들렸을 땐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짙어지는 안개 사이로 넘어가는 태양처럼 그냥 포근하게 누워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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