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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0
    장모님과 함께 매실을 따며...(1)
    풀소리

장모님과 함께 매실을 따며...

장모님과 함께 매실을 따며…

지난 연휴 기간동안 아내의 고향에 가 매실을 땄습니다.
아내의 고향은 경남 하동 섬진강 근처에 있는 궁항(弓港) 이라는 마을입니다.
처갓집은 지금 진주 시내로 이사하여 살고 있지만, 부지런한 장인 어른은 이곳 마을 뒷산에 과수원을 가꾸었습니다.
이곳 산은 우리 고양시에 있는 펑퍼짐한 산들하고 매우 다릅니다.
대개 평야와 산이 곧바로 만나는데, 경사가 급한 게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들과 비슷합니다.
처갓집 산도 그렇게 마을 뒤에 가파르게 붙어 있습니다.

작년까지 나는 이곳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철이 되면 매실이 올라오고, 알밤이 올라오고, 단감이 올라왔습니다.
부지런하신 장인께서 가꾸고, 거두어 정성껏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 해는 한 달 전부터 장모님이 아내를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5월 말이나 6월 초에 꼭 좀 내려오라고. 매실 좀 따 가라고.
장인 어른이 지난해 연말 위암 수술을 해서 이제 매실을 딸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려 있을 매실이 너무 아까워 우리라도 와서 따갔으면 한 것이지요.

아내와 나 그리고 성연이는 지난 6일 진주로 출발했습니다.
연휴(?)의 시작이어서인지 고속도로는 무척 막혔습니다.
5시간이면 충분할 터인데 7시간 걸려 진주 처갓집에 도착했습니다.
피곤하였지만 처남과 동서부부의 거나한(?) 접대술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다음날 장모님은 새벽부터 서둘렀습니다.
자루도 챙기고, 모자, 수건, 도시락에 생수까지 챙겼습니다.
그래도 게으른(?) 아내 덕분에 7시 30분쯤 느지막이(?) 하동으로 출발했습니다.
처남과 동서는 출근하였고, 처갓집 산이 험해 아이들과 아이 엄마들은 집에 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모님과 나 단 둘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남도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색다릅니다.
특히 빽빽한 대숲은 추운 중부 내륙에서 자란 나에게는 언제나 이국적입니다.
국도를 이용해 하동방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나는 초여름 남도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갔으면 했는데, 아침 출근이 바뿐 차들은 편도 일차선 60km 제한속도 도로를 80-90km로 질주합니다.
마음 약한 나도 이 차들을 따라 80-90km로 달렸습니다.
덕분에 일찍 도착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처갓집 산은 동네 바로 뒤에 있었습니다.
차를 산 밑 끝집 앞에 세워두고 짐을 챙겨 올라갔습니다.
장모님은 벌써 걱정이 많습니다.
사랑스런(?) 막내 사위가 험한(?) 산에 오른다는 게 영 안타까웠나 봅니다.
그래도 산타기는 한 때 빨치산 소리를 들은 난데 말입니다.

산 입구에 대밭이 있습니다.
맹종죽이라 불리는 아주 굵은 대나무입니다.
굵은 대나무 사이로 이제 막 솟는 죽순, 몇일 전까지 죽순 소리를 들었을, 이제는 하늘로 찌를 듯 커가는 새 대나무.
남도에 단합대회 갔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새벽 일찍 대나무밭에 들어가 한 참을 돌아다니다가 아침시간에 맞춰 돌아 왔더니 그 곳이 고향인 사람들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척 걱정들을 했습니다. 대숲에는 뱀들이 많이 산다나요.
그래도 나는 지금도 대숲이 좋습니다.
대숲 옆으로 뻥 뚤린 공간이 나옵니다.
밤나무가 군데군데 서있고, 바닥을 보니 키 작은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습기 머금은 남도의 검은 산 흙은 보기만 해도 비옥해 보였습니다.
어떤 나무, 어떤 식물도 건강하게 키울 것만 같은데 제일 먼저 눈에 거술리는 건 귀화식물인 자리공이었습니다.
비옥한 토양 탓인지 나무처럼 굵고, 어떤 놈들은 사람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키 크게 자란 게 징그럽게 까지 보였습니다.
이제 지난해 태풍에 쓰러져 길을 막고 있는 커다란 밤나무를 자를 차례입니다.
이 촌놈을 샌님으로 알고 계시는 장모님은 톱을 빼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봅니다.
많이 해봤습니다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십니다.
쑥싹 쑥싹 다행이 톱은 아주 잘 들었습니다.
굵은 밤나무 토막을 내 길 한쪽으로 치웠습니다.
그제서야 믿음이 가는지 장모님은 뿌리 쪽으로 한 토막 더 자르라고 합니다.

불과 몇 걸음 더 가니 매실나무가 나왔습니다.
와. 이렇게 커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매화나무가 커 봐야 사람 키 정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5-6m도 넘어 보였습니다.
우리는 높은 곳부터 내려오면서 매실을 따기로 했습니다.
얕은 가지는 장모님이 따시고, 나는 높은 가지를 갈고리로 휘어잡고 땄습니다.
혼자 안 되는 건 힘을 합하고 그래도 안 되는 건 톱으로 잘라 땄습니다.
두 개 따면 하나를 흘리네 하고 장모님은 당신의 늙으심을 한탄하셨지만, 나도 10에 하나 둘은 흘렸습니다.
가지에 매실이 주렁주렁 열렸어도 흘린 매실이 아까워 가지를 놓고 주우러 갑니다.
99마리의 양떼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더 생각한 것이 예수님의 편애인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실과 다르더라도 기독교인 여러분들의 넓은 이해 있으시길)
모두를 아끼고 사랑하면 자연 그렇게 되겠지요. 그게 또 농부의 마음이기도 하고요.

오후 1시 30분이 넘어서야 점심을 먹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따야겠다는 욕심에 시간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지요.
매화나무 가시에 긁힌 상처마다 길게 피자국이 남았는데도 아픈 줄 모릅니다.
장모님과 나는 장인어른이 만들어 놓은 샘물 옆 그늘이 시원한 통나무 평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장모님은 반찬이 부실하다고 연신 미안해 했지만 나는 맛있기만 했습니다.
도시락을 후딱 비우고, 주먹만한 토마토 하나를 다 먹고, 큼지막한 매실자루 하나를 메어 밑으로 내려 놨습니다. 그리고 길도 없는 비탈을 타고 산을 올랐습니다.
장인 어른이 가꾸어 놓은 산을 온전히 보고도 싶었고, 등성이에 올라 사방을 조망해보고도 싶었습니다.
한 해 동안 손길을 타지 않은 산은 이미 풀들로 우거져 있었습니다.
없는 길을 헤치며 산으로 올라가니 그곳은 조그마한 밭도 있고, 한결 평평했습니다.
커다란 밤나무 사이 사이에는 조그마한 차나무들이 잔뜩 심어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부지런한 장인이십니다.

내려와 다시 매실을 따기 시작했습니다.
군말 없이 매실을 따고, 아버님이 가꾸어 놓으신 산을 돌아보는 막내사위를 보면서 아음이 편해지셨는지 장모님 말씀이 한결 늘었습니다.
둘째 아들 속썩이는 얘기부터, 큰 아들 고생하는 얘기. 큰아들 집 산 장한 얘기. 앞으로 재산은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면 어떻게 사시겠다는 얘기. 너희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얘기. 얘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하니 시원하시다고 하십니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이 병에 걸린다고 난 알지도 못하지만 그럴듯한 얘기를 하십니다.
아버님이 매사 속으로만 삭이시니까 암에 걸렸다는 얘기도 덧붙이십니다.
이제 내려가자 하시는데 시계를 보니 4시 30분 경이었습니다.
매실을 메고 내려가기 좋을 크기로 자루에 담아 메고 내려왔습니다.
앞서 가지고 내려간 것 빼고도 네 자루. 네 번을 져 날랐습니다.
차 대논 끝집 마당에서 자리를 펴고 매실을 골라 다시 자루에 담고 무게를 재어보았습니다.
20kg짜리 자루가 세 개, 22kg짜리 자루가 한 개, 도합 82kg입니다.
속으로 대견했습니다.
장모님도 흐뭇해 했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장모님 말씀이 갑자기 없어졌습니다.
돌아 보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젊은 나도 피곤한데 오죽하시겠습니까.
말씀 안 하신다고 맨날 그냥 넘어가는 게 우리들이지요.

올라오는 차에 장인어른이 매실을 잔뜩 실어 보내셨습니다.
달라고 미리 맞춰 놓은 곳에 나눠 주고, 나머지는 모두 술을 담그고, 진액을 만들겠다고 아내는 말합니다.
사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데도 팔지 않겠다고 합니다.

비록 농장에서 나온 것처럼 굵고 매끈하진 않아도 생전 소독 한 번 하지 않은 무공해 매실입니다.
술독에 술이 익을 때 한 번 모여 술 한 잔 합시다.
<2003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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