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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어릴 때 시골에 산 경험 때문인지 금석문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골집에 가는 차를 갈아타려면 3시간 정도 기다리는 게 보통이었는데, 너무나 지루해 인근 동산을 누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는 주로 고적 답사나 답사기로 채울 예정입니다.

1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1/21
    강매동 돌다리(2)
    풀소리
  2. 2009/11/21
    네 번째 올레길 사전답사 다녀왔어요(5)
    풀소리
  3. 2009/05/15
    장희빈 친정 묘역(5)
    풀소리

강매동 돌다리

강매동 돌다리

 

 

어제 강매동 돌다리에 다녀왔다.

주변엔 여러 번 가보았지만, 다리를 발견한 건 처음이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가을 새벽처럼 짙은 안개가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사람들 발길이 거의 없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면 더 큰 냇물이 나온다.

이 정도 규모의 돌다리를 만드는 일은 당시에는 큰 일이었을 터인데,

이런 궁벽진 곳에 있다니 뜸금 없다.

 

그런데 예전엔 이곳 냇물 모양이 지금과 달랐고,

강물도 이곳까지 들어와 작은 배들이 정박하는 포구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양시 평야지대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였고...

그러니 다리는 있을 만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돌다리를 건너보았다.

 

 

돌다리 입구에는 '건너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무시해도 될 만한 푯말이다.

 

다리 건너는 모래톱이다.

처음 이곳을 복구했을 땐 공원으로 조성하려 했는 듯 한데, 지금은 그저 잡풀이 자라나는 황무지다.

 

아래에서 본 강매동 돌다리

 

 

강매동 돌다리는 육중한 돌을 거칠게 다음어서 교각과 밑돌을 세우고 얹어 만들었다.

그 거친 다듬이 오히려 힘 있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강매동 돌다리는 강매동 창릉천에 있다.

현재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릉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행주산성 옆으로 흐르는 냇물이다.

 

- 사진 : 붉은색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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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올레길 사전답사 다녀왔어요

11월 18일(수요일) 고양올레길 네 번째길을 개척하기 위해 심학산과 파주 출판도시 일원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개척길에는 채송화님, 이녀비님, 기냥초이님이 함께 했습니다.

 

당초에는 대화역에서 9707번이나 9701번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습니다.

출발지가 그 버스들 종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녀비님이 승용차를 가져와서 그냥 차로 이동하였습니다.

 

9707번 종점에서 심학산 오르는 길목에는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고,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먼지가 나고 좀 어수선했습니다.

 

산에 오르자 하늘이 화창한 게 느낌이 좋았습니다.

기온이 영하5도로 떨어져 춥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바람이 없어서인지 햇살은 따뜻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심학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배수지 정자에서 채송화님이 싸오신 고구마랑 간단한 간식을 먹었습니다.

  

심학산 등산로

 

심학산 등산로는 넓고 평탄했습니다.

원래 군사도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차량도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초겨울이라 단풍은 없지만, 대신 시야가 참 좋았습니다.

심학산은 평야지대 한 가운데 솟아난 봉우리라 사방으로 막힘이 없었습니다.

  

등산로 초반에 보이는 산남리 방향의 벌판/ 시야가 뻥 뚤렸습니다.

 

이쪽은 파주입니다. 왼쪽 교하지구와 오른쪽 운정지구가 완전 아파트 숲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심학산 능선길/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입니다.

 

 

심학산은 해발고도가 193.6m라고 합니다.

해발고도는 얼마 안 되어도 벌판에 솟아있어 제법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길고 완만한 코스로 올라가서인지 가파르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상을 앞두고 남은 귤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습니다.

정상에는 정자가 있고, 정자 밑으로도 사방을 구경할 수 있도록 시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북쪽을 보니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곳이 보였고, 통일전망대와 그 너머 북한 땅이 훤히 보였습니다.

서쪽으로는 김포평야 넘어 문수산성과 강화도의 여러 산들이 바로 보였습니다.

  

전망대에서 본 북쪽방향/ 강끝이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곳이고, 강으로 삐져나와 있는 봉우리가 통일전망대입니다. 그리고 인물들을 중심으로 곧바로 멀리 보이는 곳이 북한 개성 땅입니다. 개성 송악산은 사진으로는 안 나왔네요...

 

 

파주 출판도시/ 강쪽으로는 습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네요. 이곳은 재두루미의 월동지라고 합니다.

가장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들이 강화도입니다. 시야가 좋은 날이면 훨씬 잘 보일 것 같습니다.

 

고양시 방향. 왼쪽에 보이는 낮은 봉우리가 고봉산이고 그 너머로 북한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출판도시옆 돌곶이 꽃축제장 모습/ 채송화님이 인터체인지 앞에 있는 습지가 매립되었다고 적정하셨는데, 예전에 찍어서 전망대에 전시한 사진을 보면 아직은 아닌 거 같습니다.

 

전망대에 전시해놓은 사진/ 7번이 생태습지인데, 이곳은 아직 변형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학산 정상은 전망이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들은 오래도록 이곳 저곳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배밭 쪽과 서패리 방향 두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초 계획했던 배밭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숲속에서 만난 자작나무의 작은 군락/ 피부가 높은 산처럼 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반가웠습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있는 이정표

 

 

이정표를 보니 우리가 갔던 능선길 말고도 산 중턱을 이은 둘레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출발했던 배수지에서 이곳까지 4km 가까이 되네요...

길도 아주 작은 오솔길이었습니다. 거리도 제법 되는 게 한 번 걸을 만 할 것 같습니다.

  

아시아출판문화센터 옆 한옥 서호정사(西湖情舍)

 

 

우리는 배밭으로 내려와 출판단지 쪽 비포장도로로 내려왔습니다.

걷기 좋은 비포장도로인데다 출판단지와 한강이 바로 보여 제법 운치 있는 길입니다.

이쪽으로 내려오면 고양시 쪽 자유로에서 출판단지를 간다면 초입에 해당하는 곳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아시아출판문화센터 옆에 있는 한옥을 둘러보았습니다.

이 한옥은 정읍의 김동수씨 작은댁 사랑채를 열화당의 이기웅 사장이 옮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건축가들이 저마다 뽑내며 지은 현대건축물들 사이에 있는 한옥은

지금은 주인을 잃어 쓸쓸하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샛강을 따라 난 도로를 걸어서 출판도시를 가로질렀습니다.

 

 

출판도시를 가로지르는 샛강/ 갈대와 억새가 가득했고, 군데군데 이렇게 샛강을 볼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이 샛강에는 원앙을 비롯한 많은 새들과 수서동물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샛강 옆으로는 넓은 초지가 있었습니다. 차량이 다니는 길을 그 만큼 샛강에서 밀어낸 것이죠.

저 녹슬은 듯한 다리를 건너면 이체4거리이고, 오른쪽은 헤르만하우스 입구입니다.

 

파주 출판단지는 샛강이 있는 습지를 메워 만든 곳입니다.

이곳은 바닷물이 올라오는 지역이고, 홍수가 나면 아마도 잠겼을 곳일 겁니다.

완전한 육지도, 그렇다도 완전한 하천도 아닌 습지대니 그 식생이 얼마나 풍요로웠을까요.

 

어쨌든 지금 남아 있는 습지라도 잘 보존했으면 좋겠습니다.

  

헤르만하우스/ 왼쪽은 우리 일행입니다. 왼쪽부터 채송화님, 기냥초이님, 이녀비님

/ 가로등도 특수철로 씌어 자연스럽게 꾸몄습니다.

  

헤르만하우스 끝 꽃단지 쪽 하천매립공사장/

자연하천을 그냥 냅두면 좋을 텐데, 토목귀신이 붙었는지 그게 안 되나보네요...

 

 

우리는 헤르만하우스에서 공사중인 곳을 거쳐 점심을 먹기 위해 서패리 콩당보리밥집으로 갔습니다.

공사장을 지나 돌곶이꽃축제를 하는 지역을 지나 마을을 지났습니다.

 

콩당보리밥집

 

 

콩당보리밥집에서 보리밥 2인분, 수제비 2인분과 막걸리 한 동이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근처에서 200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저번에 구상한 길(http://cafe.daum.net/gyolle/G1kl/17)을 따라서 가봤습니다.

그래도 답사를 하고 나니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전답사를 할 적마다 느끼는 건데, 한 번에 제대로 된 길을 개척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조만간 다시 한 번 답사를 가야할 것 같습니다.

 

다음 답사 구상은 따로 글을 적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을 겨울코스로 잡았는데, 봄도, 가을도 나름대로 좋을 것 같습니다.

함께 해주신 채송화님, 이녀비님, 기냥초이님 고맙습니다. 

   

고양올레길 찾는 사람들

http://cafe.daum.net/gyo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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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친정 묘역

1.

 

장희빈.

비록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남편이 내리는 사약을 마시고 죽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그런만큼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내겐.

 

언젠가 내가 조선 당쟁에 대한 글을 쓴다면 시작은 광해군 등극, 끝은 장희빈의 죽음으로 하고 싶다.

 

내가 장희빈을 매력적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장희빈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단편적인 지식을 모아보아도 그녀는 결코 악인은 아니었던 거 같다.

적어도 라이벌이었던 인현왕후나 정적이었던 노론보다는 말이다.

 

그녀는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와 왕비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근엄한 조선시대 사관들이 실록에 그녀를 표현하기를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고 했단다.

이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왕비(후궁 포함)들 얼굴에 대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단다.

 

어쨌든 장희빈의 무덤도 장희빈 친정의 무덤도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 있다.

묘지기행이 취미고, 앞으로 묘지기행을 하면서 글도 쓰고 싶고, 더욱이 당쟁에 관한 글을 쓴다면 장희빈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내겐 그들의 무덤이 고양시에 있다는 것은 내겐 행운이다.

 

 

2.

 

장희빈 친정 무덤은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항공사진으로 봤을 때 은혜초등학교 자리가 무덤들이 있던 중심자리였던 거 같다.

 

서울이 확장되고, 묘역이 개발되면서 1974년 고양시 고봉산 숯고개 자락으로 이장해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장하면서 신도비를 비롯한 석물들도 함께 이장했다는 점이다.

 

장희빈의 아버지 옥산부원군 장경(張烱)의 신도비. 밑돌인 귀부의 길이가 거의 4M 20CM에 이른다. 이 거대한 석물을 197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용도 만만찮았을 터인데 후손들이 고맙다.

 


묘역은 이제 그 앞에 커다란 식당이 들어와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데다, 그 흔한 안내간판 조차 없어 초행자는 찾기 힘들 것만 같다.

 

장희빈은 옥산부원군 장경(張烱)의 유일한 딸이다. 장희빈의 오빠는 드라마에 거의 왈패로 나오는 장희재다.

 

3.

 

위의 신도비를 먼저 보자.

나는 신도비를 아주 많이 봤다고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본 편이다.

그런데 저렇게 큰 귀부를 본적이 없다.

 

조각 또한 훌륭하다.

돌은 또 어떤가. 세워진 해가 아마도 장희빈이 왕비가 된 1690년일 터인데,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마모된 흔적이 거의 없다.

 

사진으로는 잘 못 느끼겠지만, 신도비의 비신(몸돌) 또한 매우 좋은 돌이다.

당시 새겨진 글씨가 지금도 매우 선명하다.

무덤답사를 많이 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저런 좋은 재질의 돌은 거의 왕릉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돌이다.

 

그런데 비석 몸돌에 비해 귀부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크다.

왜 그럴까?

 

신도비는 비문이 4면을 빼곡이 채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장형의 신도비는 비문이 앞면밖에 없다.

그만큼 기록할 것이 별로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장희빈의 가문이 다른 사대부 가문에 비해서 보잘 것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비문은 당대 대제학을 지낸 민암이 지었으니 글을 못 지어서 비문이 짧았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문을 기록하는 몸돌을 무작정 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귀부를 크게 하여 권위를 실어준 것 같다.

 

 

4.

 

신도비 위로 눈에 보이는 묘역 위에 곡장을 두른 당당한 무덤이 옥산부원군 장경의 무덤이다.

 


저 위에 곡장(담장)에 둘러싸인 무덤이 옥산부원군 장경의 무덤이다. 장경 무덤 뒤로는 장희빈의 증조 할아버지 장수(張壽)의 무덤이 있다. 나중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옥산부원군 무덤에 서있는 문인석. 돌의 재질도 좋고, 조각도 좋은 명품이다.

 

 

전면에서 보면 옥산부원군 무덤 왼쪽 커다란 나무들이 자란 곳으로 들어가면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영혼무덤이 있다.

 


장희재의 영혼무덤. 외로이 홀로 숨어있다. 사형당한 트라우마가 후손들에게까지 대물림 한 것일까?

 

 

장희재(張希載).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동생 장희빈의 후광을 입고 종2품 총융사(摠戎使)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장희빈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는데 시신을 미쳐 수습하지 못했는지 이곳에 있는 무덤은 영혼무덤이란다.

 

영혼무덤. 몸이 없는 무덤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상상한다. 실제로는 후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고는

후환이나 훼손이 두려워 영혼무덤으로 가장했을 거라고...

 

장희빈 친정이 장희빈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몰락했을 거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장희빈 친정이 당시 재력을 모으기 쉬운 역관 집안이었는데다, 숙종 임금은 무덤을 지키는데다 쓰라고 20결의 토지를 하사했다.

 

결이라는 단위는 넓이 기준이 아니라 토지 생산량을 기준으로 한 단위므로, 가장 넓이가 적은 최고 좋은 토지를 기준으로 할 때 약 3,000평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6만평의 토지를 하사한 것이다.

내가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장희빈과 장희재의 사형 이후 토지를 몰수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 후손들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을 것이다.

실제로 묘역은 1974년 이곳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불광동에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재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이 비록 사형을 당했다고 하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곳이 영혼무덤이 아닌 실제 장희재의 몸이 묻힌 무덤이라고 나는 상상하는 것이다.


 

5.

 

나중에 항공사진을 보니 산 위쪽으로 이 집안의 무덤이 더 있다.

아래 무덤 안내 비석에 15기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니 증조할아버지 장응인(張應仁)을 비롯한 장희빈 친정 무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부분은 다음 기회에 찾아봐야겠다.

그곳을 가 보면 아마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희빈 친정묘역 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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