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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전략 (1)


 

<1장>  아펙의 탄생 배경과 주요 회원국들의 이해관계

 

2005년 부산 아펙의 공식 표어는 "하나의 공동체다." 그러나 아펙의 창설 과정은 이 표어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 준다. 아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일본은 아펙을 둘러싸고 제국주의적 긴장과 갈등을 빚었다.



1. 아펙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 (1)

 

아펙은 1989년에 창설됐다. 처음 아펙 창설을 주도한 나라는 일본과 호주였다. 1989년 11월 캔버라에서 1차 회의가 열렸을 때만 해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아펙을 자신들의 무역 블록을 안전하게 보호할 임시 도구로 여기는 정도였다.

 

일본 정부와 기업주들로서는 당시 막 생겨난 유럽공동체(EC) 경제블록 및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지대) 같은 미국 중심의 경제블록과 벌이는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호주가 동티모르와 솔로몬군도에 파병을 공표한 것도 아펙 회의를 통해서였다.

 

한국 정부도 아펙의 주요 창설국 가운데 하나다. 당시 호주 노동당 내각 총리 봅 호크는 도쿄에서 일본의 장관들을 만난 뒤에 한국을 방문해 아펙 창설을 제안했다.

 

이 때 미국은 왜 빠졌을까? 아펙 결성이 일본과 호주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아펙에 대한 미국의 관심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아펙은 출범 당시만 해도 미국은 자신을 '왕따'시키는 아시아 경제권의 형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보조 수단 정도로 아펙을 인식했다. 한 마디로 말해 소극적 개입 정책이었다.

 

그러나 1993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미온적인 미국의 태도는 돌변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각료급 수준이던 아펙 회의를 정상급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미국의 대 아펙 계획이 바뀐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미국은 아펙을 통해 유럽연합을 견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993년 당시 유럽 국가들은 유럽 단일 시장을 만들고 안보정책 분야를 통합할 유럽연합을 창설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유럽연합 출범을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여겼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신태평양공동체 구상'과 '아태지역협력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 일련의 발표는 유럽연합을 겨냥한 것이었다. 한편, 클린턴의 아시아 구상도 유럽연합을 자극했다. 유럽연합의 지도자들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아시아를 미국이 통제할 수 있다면 유럽이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라는 명분에 더 매료됐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클린턴이 '신태평양공동체 구상'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94년에 대아시아 전략(NAS)을 발표해 아시아에 더 깊이 개입하려는 의지를 내비쳤다.

 

둘째, 미국 지배자들은 일본과, 동아시아 경제권의 역동적인 주체로 부상할 한국과 중국을 아펙이라는 틀 속에 둠으로써 아시아의 주요국들을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박종귀, , 새로운 사람들, 398~404쪽) 유럽을 견제하는 한편 국제경제의 또 다른 강자인 일본을 미국의 영향권에 묶어놓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될 것이었다.

 

일본을 견제하겠다는 미국 지배자들의 구상은 '확대 나프타' 계획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92년 8월 나프타 협정을 통과시키고 얼마 뒤 미국은 '확대 나프타 구상'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의 핵심은 나프타를 아시아 지역까지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유독 일본만이 제외돼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확대 나프나 구상'의 진정한 의도는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이익을 일본이 독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시아의 '2인자'들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한/중/일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제안한 '동아시아 무역블럭'을 지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썼다. 그래서 1990년 우루과이라운드 교섭이 결렬된 직후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가 제안한 '동아시아 무역블록'의 애초 구상에 한국/일본/중국 3개국이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자신이 빠진 동아시아만의 무역블록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했다. EAEC(East Asia Economic Caucus; 동아시아 경제협의체)로 불린 이 구상은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그룹'이 아니라 느슨한 모임 정도라고 할 수 있는 '코커스'(협의체)로 최종 명칭이 변경됐다.

 

미국은 일본이 말레이시아 같은 국가의 지지를 받아 아시아 경제블록을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미국 지배자들한테 미국이 빠진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한테 여기에 참여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압력도 있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베이커는 1991년 아펙 서울회의에서 "40년 전에 한반도에서 피를 흘린 것은 미국인이었지 말레이시아인이 아니다"라고 한국 정부에 일침을 놨다.

 

'남반구초점' 소장 월든 벨로는 아시아의 산업 엘리트들이 일본 자본가들과 깊숙한 전략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아펙을 통해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고 지적했다.(월든벨로, '일본 중심의 무역블록의 실상과 미국의 아펙 구상', <역사비평> 33호 1996년 여름호)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미 하원 청문회에서 미국의 무역정책 및 교섭 자문 위원단 관계자 폴라 스턴은 이렇게 경고했다. "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이 동아시아 무역총량의 약 45%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때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국가 간 통합은 미국과 동아시아의 무역관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침해할 수도 있다."

 

셋째, 아시아 경제와 시장 자체도 미국 지배자들한테 매우 중요했다. 1988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미국 수출 총액의 12%를 점하고 있었으나, 1993년에는 그 비율이 20%로 높아져 유럽연합, 캐나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했다. 당시 미국 정부 산하의 주요기구들은 '대규모 신흥시장 전략보고서'(BEMs; Big Emerging Markets;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폴란드)에서 아시아 시장에 개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확인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세계 총생산에 기여하는 비율 면에서 북미지역과 아시아가 각 4분의 1을 차지함으로써 두 지역의 비중은 동등해졌다.

 

미국 지배자들은 아시아 시장이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에게 "기회의 창"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무역 자유화와 시장개방을 위한 여러 정책들과 방향들을 아펙 회의에서 제안해 왔다.(이것에 관해서는 뒷장에서 서술하겠다.)

 

아시아 경제가 미국 지배자들한테 갖는 중요성은 단지 무역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미국경제는 아시아 정부들이 빌려주는 돈에 의존하고 있다.동아시아가 2005년에 미국에 빌려줄 것으로 예상되는 돈은 3천1백억 달러(약 3백27조 9천8백억 원)로, 이는 미국 정부 연간 적자의 거의 절반이다. 동아시아의 정부들이 사들이는 미국 채권의 규모는 미국의 누적 국제수지적자의 43%에 달한다. <파이낸셜 타임스> 말마따나 "군 자금은 아시아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대규모 외화흑자를 보고 있는 동아시아의 3대 경제 - 일본, 중국, 한국 - 는 미국에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다시 미국에 빌려줘서, 미국 기업들과 소비자들이 이 경제들로부터의 수입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교역 흐름이 세계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일본/중국/한국은 2004년 말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 1/2/4위에 올라 있다. 아시아의 주요 3국이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우는 데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다국적기업이 포진해 있고 페덱스(FedEx) 경영자가 회장으로 있는 아펙기업인자문회의가 최근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시아에서 채권시장을 더욱 활성화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1993년 시애틀 정상회의를 전후로 한 미국의 태도 변화 배경과 미국의 아펙 정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럽연합과 일본과 중국 견제를 위한 도구로서 아펙,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버팀목으로서 아시아와 아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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