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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1/17
    친일파의 민족사적 의미
    낑깡

친일파의 민족사적 의미

광복 60주년을 맞아 남북한은 새로운 화합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민족화합이라는 대전제 아래 북한은 대단한 결단을 내렸고, 이에 남쪽도 흥에 겨워 민족화합과 통일을 구체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즈음에 우리는 과거사 청산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사 청산의 핵심은 친일청산입니다!!! 그렇다면 친일청산을 위한 여러 측면의 준비작업들이 필요합니다. 이는 왜 우리가 친일을 청산해야 하는지를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추상적 차원에, 친일청산이 머무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 민족주의 연구를 스무 해가 넘게 해온...

서중석 교수의 여러 책들 가운데 ‘배반당한 한국민족주의’(이하 ‘책’)란 책의 내용들을 간추려, 구체적인 주제에 따른 제목 아래, 소개하고 저의 생각을 실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친일파의 민족사적 의미’(이 제목은 ‘책’의 ‘제4장 친일파의 존재양태와 구조적 성격’ 부분에 작은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를 따져보는 것은, 우리네 역사에서 친일파의 해악이 우리민족사에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는데 꼭 필요한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조선말 전세계는 구미열강과 일본, 중국 등의 외세각축장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자본주의 발전이 심화되면서 제국주의가 탄생하고 이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욕심을 채울 ‘시장’을 놓고 싸우다가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까지 일어납니다. 이런 외적 조건의 강제 속에, 내적으로는 조선중후기 이후로 쓰러져 가는 나라와 겨레의 안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걱정해 오던 지배세력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침략에 호응, 협조하여 반식민지-식민지-분단체제가 되는 데에 주구 노릇을 하거나 협력하였고, 또한 그것을 유지하는 데 적극적 소극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하였고, 이들의 주구로서 한 점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활약(?)한 자들을 ‘친일파’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이 바로 외세의 민족강점을 실제적으로 이뤄 준 ‘민족내적 추동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선말에 겪은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정은, 내적으로는 민족분열의 과정을 일으킵니다.

즉 자본주의의 침투나 제국주의 침략에는 반드시 그것에 호응하거나 협력하는 반민족세력이 있기 마련인데, 그 세력이 우리나라에서 바로 ‘친일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왜 민족분열을 가져온 친일파가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구조적 원인에 대해 서중석 교수의 글을 참고해 보죠!

>>> 한국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는 중세체제가 붕괴도어 가는 과정에 있었고, 아직 근대적 민족의식도 근대적 국가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세체제의 해체기에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변혁의 압력을 주제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왕실과 다수의 관료들(조선중후기 이후에 사회의 기득권을 놓지 않았던 전통적인 지배세력들 <- 저자 주 아님)은 기득권을 보호 유지하기 위해서도 외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중인층(이와 함께 신진관료, 일부 지식인, 상인층, 출세주의자 포함)은 신분적 특성 때문에 외세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재빨리 친일파로 변신할 수 있는 계층이었다. 봉건적 권력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상황에 따라서 잠시나마 외세의 농간에 넘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근대화의 담당층은 정치적으로도 독자성을 갖지 못했고, 경제력이 아주 취약하여, 제국주의 외세에 의존하여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독립을 포기하고, 독립을 먼 훗날로 돌리면서 침략자의 보호와 지원에 의하여 자신의 물질적 발전을 꾀하고 또 제구주의 침략논리에 순응하고 제국주의자와 함께 그 논리를 민중에 강요(여기서 이른바 계몽이 양면성이 나타난다)하는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이광수, 윤치호, 박영효, 최린, 최남선, 송진우 등등 / 시대순 아님 <- 저자 주 아님)이 나타났다. <<<

결국 조선 중후기에 일어나는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병란 속에서 그 당시 지배층이 보여주었던 모습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의 흐름과 함께 더욱 복잡하게 얽혔을 뿐, 사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죠! 정말 ‘그들만의 나라’를 추구한 것입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사실 나라도 아니고, 민족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정말 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친일파의 문제가 왜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문제와 의미를 던져주느냐?
이들이 해방 직후, 바로 척결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우리 역사와 삶에 지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기 위해 서중석 교수의 글을 다시 인용해 보죠!

>>> 첫째, 친일파는 해방 후 청산되기는커녕 일제 때보다 한 단계 차원이 높아져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권력엘리트였고, 사회-문화계, 경제계의 지도층이 되었다.

둘째, 친일파는 해방직후부터 단정운동을 벌여 분단의 내적 요인을 이루었고, 분단체제의 지주로서 40여년 동안 극우반공이데올로기로 민중을 억압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파괴한 반민주적 파쇼적 반통일 세력이었다.

셋째, 친일파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근대화 지상주의에 서서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들의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 모델은 재벌중심적인 것으로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하였고, 정격유착으로 극우독재권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바람직한 가치관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성장제일주의는 자본주의 윤리를 수반하지 않은 천민자본주의로 어떠한 수단 방법을 쓰더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풍조를 만연시켰다. <<<

더불어 그는 친일파와 친미파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분석을 해볼 필요성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 친일파는 대체로 친미파와 겹치고 있으며, 러-일전쟁 이전에도 반러시아적인 성향이 있었고, 반식민지-식민지에서는 일제에 대한 항쟁을 배격, 반대하고, 문화운동-실력양성운동을 편 지상주의자였으며, 또 반사회주의자들이었고 해방 후에는 반공극우이데올로기의 주 담당층이었다. <<<

그는 나아가 왜 친일파가 친미파일 수밖에 없는가를 분석합니다.

즉 이승만이 반공극우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기득권을 철저하게 국익으로 포장하여 많은 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던 50년대, 민족의 개념은 없고 오로지 자신만의 기득권을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해 먹었던 그 때, 그들이 왜 친일파들과 한 패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끔 해줍니다.

>>> 첫째, 1905년까지 한구의 친미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미국인 선교사의 역할 및 미국의 대한정책은 일본의 대한침략정책과 반드시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고, 일제의 한국 지배를 허용하고 지원한 20세기 초부터는 오히려 상보적인 관계로 나아갔다.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영적 세계를 담당하고 통감부는 한국인의 현실세계를 이끌어 가자고 ‘역할분담’을 제의한 것은 통감부 시기 미국과 일본의 대한정책의 상호관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둘째, 해방후 미군은 한국에 들어온 그날부터 식민체제를 청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식민체제를 온존시키는 반혁명적 현상유지정책을 썼던 바, 친일파들은 미국정시대와 그 이후에 일제 때보다도 한층 격상된 지위를 누렷다. 셋째, 친일파 친미파는 대체로 자산가층이었고, 유학을 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서구지향적 기독교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

31 운동 이전의 초기 친일파들은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한, 특히 일본에 관비로 유학했던 지식인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소위 개화파들 대부분이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이들이 대부분 친일파였죠!

제가 20여년 전에 배웠던 것과 너무 다르죠!
참, 웃지 못할 한심한 노릇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 스스로 왜곡된 역사를 배웠으니 말입니다!

31 운동의 충격으로 인하여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라 불리는 통치방식을 동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악랄한 ‘민족분열정책’입니다. 이때 일제가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세웠던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을 살펴보는 것은 외세가 우리 민족의 분열을 어떻게 만들고자 하는지를 잘 알게 합니다.

(1) 친일분자를 귀족 양반 유생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 각 계층에 침투시켜 그 계층과 사정에 따라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케 할 것.
(2) 종교적 사회운동을 이용하기 위해 사찰령을 개정하여 불교 각 종파의 총본산을 경성에 두고 이의 관장 및 원조기관의 우두머리에 친일분자를 앉히는 한편, 기독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편의와 원조를 제공할 것.
(3) 친일적인 민간유지자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조선청년을 친일분자의 인재로 양성할 것.
(4) 양반 유생으로서 직업이 없는 자한테는 생활방도를 마련해주고, 선전-민정경찰에 이용할 것.
(5) 조선인 부호 자본가에 대해 일선(日鮮) 유대를 권하고, 노동쟁의 소작쟁의를 통해 노동자 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킬 것.
(6) 민간인 유지한테 교풍회 진흥회 등의 일선융화 단체를 조직하도록 하고, 이들에게 국유림을 일부 불하하고 산림 입회권을 주어 농촌지도에 힘쓸 것. 그리고 일본한테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를 관리로 등용할 것.

한마디로 친일파의 민족사적 의미는 외세의 민족분열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나라와 겨레의 의미는 오로지 그들만의 기득권이 지켜질 때만이 뜻이 있는 것이죠! 그들의 후손들은 그들 조상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물려 받아, 심지어 빼앗긴 땅도 소송으로 되찾아 가는 ‘몰염치’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런 친일파의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 지금 더욱 중요한 까닭은…

이들이 무려 100년이 넘는 긴 시간에 걸쳐 외세와 결탁하여 우리역사와 민족을 농락한 장본인들이고, 아직도 그 후과로부터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고, 지금도 몸서리치며 모두가 신음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린 외세의 압력에 못이겨 그 외세 다음으로 큰 병력을 우리의 이익과는 관계없이 보내고, 한번으로도 모자라 30년 세월을 두고서 변함없이 똑 같은 강제에 내몰림은, 친일파 청산과 이를 통한 민족화합과 통일을 위한 바탕의 마련을 해야 하는 이 때에 우리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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