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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시장화 정책의 뇌관 ABAC


 

3) 시장화 정책의 뇌관 ABAC

 

아펙이 거대 기업들이 내놓는 여러 정책들을 논의한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996년 공식 슬로건이 "아펙은 사업(Business)을 뜻한다"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 점은 무엇보다 ABAC(APEC Business Advorsory Counsil; 아펙 기업자문위원회)가 아펙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구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ABAC이 1996녀에 미국 주도로 만들어졌고 회원국별로 저명기업인 3명이 포함되도록 돼 있다. 한국에서는 동양그룹 회장 현재현, 대성그룹 회장 김영대 등이 포함돼 있다.



ABAC는 정상회의 직전 대기업의 주요 요구들을 정리해서 정상회의에 제출한다. 그 한 예로 아펙 기업자문위원회는 "1998년 회원국들의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촉진"한다며 포괄적인 작업 프로그램으로서 아펙 식량체계(APEC Food System; AFS)를 제안했다.('아펙 식량체계의 논의 동향과 과제', <세계경제> 1999년 10월호)

 

여기에는 WTO에 어긋나는 비관제조치의 단계적 폐지, 수출보조금 철폐, 유전자조작식품 규제 완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곡물메이저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인데, 그도 그럴 것이 위의 내용을 만든 자는 다름 아닌 곡물 다국적기업 카길의 부사장 로빈 존슨이었고, 그는 이미 1998년 아시아에 농산물을 수출하는 대기업들의 바람을 요약한 보고서 '아펙과 글로벌 식량 체계 구축'을 아펙회의에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아시아 시장을 보루로 여기는 농산물 관련 다국적기업들한테는 거의 성경으로 통한다.(Brewser Kneen, 2003)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 농산물 시장 개방이 얼마나 아시아인들한테 유리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단지 카길만이 아니다. 최근 ABAC에서는 주되게 IT 기업들과 생명공학 기업들의 요구들이 총망라되고 있다. 2002년 ABAC가 낸 보고서 <세계화에 직면하기: 아펙의 길>(Facing Globalization: the APEC Way)에는 IT 산업의 향방, 비관세장벽 철폐, 생명공학 산업 부응 방향 등이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ABAC의 구성목적 "더 나은 기업환경 조성"

 

ABAC의 표어는 "더 나은 기업환경 조성"인데 종종 ABAC는 노동시장 정책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다양한 권고를 하고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ABAC는 "국내 노동시장에서 유연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권고를 정상회의에 제출했다.

 

ABAC와 함께 대기업들의 희망사항들이 아펙을 통해 집중되는 또 다른 기구는 아펙 최고경영자회의(APEC CEO Summit)다. 아펙 최고경영자회의 의장은 현재 두산그룹 회장인 박용성이다. 올해도 이 회의에 시티그룹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쉐브론텍사코 같은 미국계 다국적기업의 주요 경영진이 참가할 것이다.(<옮긴이 주> 귤육상쟁으로 그 더러운 치부가 드러난 박용성과 같은 재벌총수들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해 주는 기구에 의해 주도되고 뒷받침되는 아펙이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는 뻔하다. 이런 자들이 법을 어겨가며 회사에서 돈을 빼돌리기까지 하는데, 결과적으로 아펙은 이들의 도둑질을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검찰이 이들의 불법에 버젓이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보면, 국가권력이 이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음 또한 너무나 자명하다!!!)

 

2004년 아펙 최고경영자회의에서는 두 명이 기조연설을 했다. 미국 NGO가 뽑은 최악의 10대 그룹이자 이라크 국영은행을 사들여 이라크 전쟁으로 떼돈을 번 시티그룹의 회장과 1997년에 한국에 IMF 구조조정 계획을 강요한 장본인 중 한 명인 전 미국 재무성 장관 로버트 루빈이 기조 연설을 했다.(그들의 무시무시한 주장들을 직접 대면하고 싶으신 분이 있으시다면 www.apecceosummit2004.com을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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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이 내놓는 시장화 조치들


 

2) 아펙이 내놓는 시장화 조치들

 

아펙이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고도 강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음에도 적어도 아펙이 아시아에서 시장화를 확산시킬 수 있는 정책들의 박람회 구실을 했음은 분명하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아펙은 에너지/보건/의료 등 우리 삶과 직결돼 있는 많은 공공부문을 사유화하는 여러 정책들과 아이디어들을 쏟아냈다. 아펙 내에서는 아시아의 공기업을 사유화히기 위한 여러 방식이 끊임없이 제안되곤 했다. 아펙은 2002년 OECD와 함께 규제개혁 합동회의를 열어 "발전설비 민영화 전력 도매시장의 개혁"을 각별히 주문했다.

 

최근 아펙은 1980년대 이후 영국에서 사유화 과정의 일환으로 대거 도입된 일명 공/사협력체 방식 PPP(Private-Public-Partnership)를 효과적인 경제 정책으로 권장하고 있다. PPP는 대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기업의 지분을 차지함으로써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1980년대 이후 세계 전역에서 추진돼 왔다. 사유화 이후 대참사를 여러 번 일으킨 런던 철도에도 바로 이 PPP 체계가 도입됐다. 기업이 공적 서비스 부문에서 이윤 확장에만 치중한 결과, PPP 체계가 도입된 서비스 부분에서 대형사고와 요금 인상이 잇달았다.

 

다국적기업들은 선진국뿐 아니라 개도국들과 제3세계에서도 PPP 방식을 노골적으로 권유해 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의 보고를 보면 아프리카에서도 셰브론 텍사코, 엑손 모빌, 쉘, 토탈피나엘프와 같은 4개의 주요 정유회사들은 공/사협력체 방식을 통해 석유 산업을 장악해 왔다. 그뿐 아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수도 라고스 지역에서 PPP 방식으로 사유화됐는데, 그 결과 6개월마다 10~15%씩 요금이 인상돼 요금을 못 내는 가정이 늘고 공장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노동조합과 대중의 반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세계은행과 IMF가 대출조건으로 PPP를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식 기반 경제 구축의 허구

 

2005년 아펙의 핵심 7대 과제 가운데 하나인 "지식기반경제"는 또 다른 사례다. 2005년 외교통상부가 발간한 '아펙의 역점과제'에서 아펙이 지식기반경제의 혜택을 공유하자면서 제안한 주요 내용에는 "지적재산권 단속 강화를 위한 역내 협력-지적재산권 단속관련 회원국들의 능력 배양 사업 전개"가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2004년)에도 칠레 아펙 회의는 지적재산권에 관한 "포괄적 전략"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통과시켰다.

 

지식기반경제 혜택을 공유하자는 데는 또 다른 이해관계가 있다. 더 많은 생명공학 기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펙의 뉴스레터를 보면 싱가포르의 게놈 연구소를 칭송하면서 유전자조가 산업의 부흥을 은근히 기대하는 대목이 적잖게 등장한다. 거기에는 임상실험 목록, 혁신적인 생명공학 제품, 생명 서비스 같은 단어들이 무역과 연결돼 있는 구절들도 가득하다.(www.apec.org)

 

아펙이 제안하는 아시아태평양 보건정상회의에 참여하는 기업들에는 다국적제약회사들의 목록이 가득하다. 한 마디로 말해 지식경제기반혜택은 유전자조작과 생물 해적질을 통해 다국적기업들이 누리는 이윤 잔치다. 작년 아펙회의는 "에이즈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 의약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5년 아펙의 주요 핵심 의제에는 의약품접근권을 박탈하는 지적재산권 강화가 포함돼 있다. 아펙에서 조류독감을 해결할 수 있는 포로그램이 논의될 거라지만, 위선적이게도 아펙은 조류독감 백신을 소유한 로슈(Roche) 같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권을 보장하는 지적재산권 강화를 핵심 의제로 내세우고 있다.(<옮긴이 주> 길리아드 주가 상승으로 엄청난 주식차익을 챙긴 럼스펠드 사건은 이런 아펙의 위선적 본질의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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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의 경제적 목표와 그 결과


 

<2장> 아펙을 통해 본 세계화와 전쟁

 

1. 아펙과 세계화

 

1) 아펙의 경제적 목표와 그 결과

 

아펙이 주요한 경제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무역 투자 자유화와 무역 원활화, 경제 기술 협력, '반테러' 분야 협력이 그것이다. '반테러 분야 경제 협력'은 2001년 9.11 이후 아펙이 각별히 강조하는 목표다. 아펙은 이 세 번째 목표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자금 이동을 차단하는 여러 계획을 실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첫 번째 목표는 무역 자유화 같은 관세/비관세 부문에서의 시장 개방을 가리킨다. 이 분야는 크게는 모든 아펙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이행해야 할 계획과 개별 회원 국가들이 제출하고 이행해야 할 소위 '자발적' 계획으로 나뉜다.

 

두 번째 경제기술협력 부문에서는 사실상 아무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개도국은 경제기술협력의 강화를 희망하고 있는 반면, 선진국은 시장개방 계획에만 치중해 왔다. 사실상 개도국은 신진국이 아펙 내에서 개도국의 시장 개방에만 관심이 있고 경제 기술 협력에 관해서는 실질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해 왔다.

 

아펙 내에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 회원국들이 추구하는 핵심 경제적 목표는 사실상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이다. 물론 그것을 목표로 해 왔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아펙은 WTO 출범에 결정적 구실을 하기는 했다. 미국은 유럽이라는 경쟁자를 제압해 WTO의 농업 협상을 매듭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펙의 주요 성과로 꼽히는 '치적'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최대 고비를 맞이했을 때 미국의 클린턴은 아펙을 활용해서 그 고비를 넘긴 것을 매우 다행스레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제1차정상회의 때 18개국 정상을 모아놓고 지지부진한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을 타결짓기 위해 유럽연합에 공동으로 압력을 넣자고 제의했다. 다른 정상들도 이에 동조했고 결국은 그 해 12월 장장 7년 동안의 협상 과정을 마무리짓고 우루과이라운드에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을 가능케 했고 이로써 세계무역기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아펙에의 새로운 기대', <세계경제> 2004년 6월호)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그 '치적'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펙은 GATT에 관한 우루과이라운드 무역 협상이 비틀거릴 때 자유무역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의 소장이자 아펙 저명인사그룹 위원장인 벅스텐은 회원국들의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있는 거대한 장벽이 있는데, 아펙이 좀더 과감하게 행동한다면 아펙은 세계 무역자유 구조에서 완전히 새로운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이코노미스트>, 1994년 11월 12일)

 

한국의 외교안보연구원도 WTO DDA의 성공적 출범을 아펙의 주된 성과로 칭송하고 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가 교착 상태를 보이고 있을 당시 아펙의 무역자유화는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1996년에는 정보기술 협정의 타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아펙은 최근 도하 라운드의 성공적 출범에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아태 경제협력체의 향후 발전방향, 조용균, 외교안보연구원)

 

사실상 WTO 협상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아펙은 중요한 협상 진전이 모색되는 장이었다. 지난 6월 제주에서 열린 아펙 통상장관회의 때도 그랬다. 당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주도로 '도하개발 의제에 관한 특별선언문(제주선언문)'이 채택됐는데 2006년 타결을 목표로 하는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오는 12월 홍콩 6차 각료회의를 기점으로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어내도록 아펙 회원국들이 앞장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또한, 공산품 관세인하 분야에서 관세가 높은 개도국일수록 더 많이 낮추도록 하는 '스위스 공식'을 도입할 것과, 서비스 협상의 실질적인 진척을 위해 1, 2차 양허안을 제출할 것을 지시하는 등 분야별 계획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그래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롭 포트머은 "아펙이 무역자유화를 중요한 기둥으로 삼는 전통을 이었다"고 기뻐했다.

 

아펙 내에서 다국적기업의 입맛에 맞는 무역 자유화 조치는 여러 차례 발표됐다. 1996년 필리핀 수빅에서 열린 정상회의 때는 "역내의 무역/투자/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조기자유화 대상 분야"를 선정하기 위한 협의가 있었다. 미국은 다음 해 열린 1997년 밴쿠버 정상회이 때 수산물, 환경제품, 서비스, 화학, 임산물, 보석, 에너지, 의료장지, 정보통신, 종자, 비료, 항공산업 등 15개 분야에서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아펙의 주요 경제적 목표는 보로르 선언으로 대표된다. 보고르 선언은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아펙 회의에서 등장했다. 선진국은 2010년까지, 개도국은 2020년까지 아펙 회원국 간의 자유무역을 실행하자는 것이다. 일종의 아시아판 나프타다.

 

이 계획이 착착 진행된 것은 아니다. 1994년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발표된 이 계획은 그 다음 해 1995년 오사카 정상회담에서 다소 후퇴했다. 일본이 "자유화는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선언"을 단서조항으로 달았다. 물론 일본 자본가들은 아펙 내 무역 자유화를 통해 이익을 얻기를 바란다. 다만, 그 이익을 미국 지배자들이 고스란히 챙겨가는 것에 이견을 드러낸 것이었을 뿐이다.

 

올해도 보고릇 선언이 다시 한 번 논의될 것이다. 반기문은 2005년 부산 정상회의 첫날의 주요 의제가 보고르 선언이 될 거라고 밝혔다.

 

미국의 무역대표부는 그 동안 아펙 내에서 주요 경제적 목표들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해 왔다. 아펙 창설의 일등공신인 워싱터의 경제이론가 프레드 벅스텐(Fred Bergsten)조차 작년 칠레 아펙회의 직후, "1989년 창설 이후 아펙이 일련의 다양한 무역정책들을 내놓기도 했으나 그 동안 제시된 무역자유구상들은 사실상 사문화된 것 같다"고 토로했다.(연합뉴스 2004년 11월 15일)

 

벅스텐은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광범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창설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40개 이상의 자유무역협정들이 복잡하게 얽힘으로써 생기는 "스파게티 볼" 효과를 최소화하자는 게 핵심 취지다. 미국 지배자들이 걱정하는 "스파게티 볼" 효과는 아시아 지역에서 아시아 + 한중일 자유무역협정이 창설돼 미국의 대아시아 통상 입지가 좁아질지 모를 가능성이다. 아시아와 유럽이 각각 지역 차원의 자유무역지대를 만들 경우 미국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서둘러 대비책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한테 아시아 경제가 차지하는 경제비중은 미주 대륙에 비하면 네 배나 높다. 더군다나 시간이 갈수록 미국한테 아시아는 더 중요해지고 있다. 아시아는 미국 채권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이제 미국 경제의 주요 변수가 아시아라는 사실을 미국 지배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펙 내에서 미국은 아시아 + 한중일 FTA 같은 아시아 국가들 전체의 자유무역지대화를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지켜볼 태세다. 미국이 빠진 아시아만의 블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미국한테 무엇이 문제겠는가. 아펙의 공간을 이용해서 싱가포르와 뉴질랜드 사이에, 태국과 호주 사이에 FTA 등이 체결됐다. 그러나 미국한테 아시아만의 자유무역지대화는 결코 반길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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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을 아시아의 소강국으로 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공간으로

 

별첨 2

 

'아펙을 아시아의 소강국으로 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공간으로'

 

아펙은 단지 미일 같은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기구만은 아니다. 아펙은 호주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이나 한국 같은 아류 제국주의 '소강국'들한테도 중요한 기구다. 예를 들어 호주는 앞서 말했듯이 아펙 회의를 통해서 동티모르와 솔로몬군도에 파병한 것을 정당화할 구실을 얻었다. 한국은 아펙의 창설 회원국일 뿐 아니라 아펙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2001년 상하이 정상회담 때 조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서가 채택되는 데서 당시 김대중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다음 해 2002년 멕시코 로스까보스 정상회의 때 "북한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이 논란 속에서 통과된 것도 한국이 열렬히 지지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다.

 

2003년 태국에서 열린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태국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노무현대통령이 아펙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와 함께 '항구적 자유 작전 참여로 적극적인 반테러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은 조지 부시를 결정적으로 도왔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미 상공회의소와 미국 아펙 사무국이 주관하는 '미국 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 "한국의 시장개혁과 외국인 투자환경 개선 노력"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 아시아의 주요 맹주로서 한국의 지배자들은 아펙이 경제안보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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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중국의 대 아펙 정책


 

별첨 1

 

중국의 대 아펙 정책

 

중국이 아펙에 가입한 해는 1991년이다. 가입할 때만 해도 중국은 동아시아 내에서 아펙에 가장 회의적이었다. 중국은 아펙을 미국과 일본의 대립 속에서 태어난 기구 정도로 여겼던 듯하다. 따라서 아시아를 자신의 텃밭으로 만들려는 미국의 전략에 대해서도, 미국을 견제하면서 아시아 시장에서 주도력을 유지하려는 일본의 전략에 대해서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중국이 아펙에 가입한 이유는 중국에게 중요한 시장인 미국한테서 최혜국 대우를 받기 위해서였다. WTO 가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한 작업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했다.

 

한편, 미국의 압력 때문에 EAEC(동아시아경제협의체)에 분명한 입장을 표하지 못하던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마하티르 구상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아세안(ASEAN) 시장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더욱 굳히고자 했다.

 

그러나 아펙에 대한 중국의 수세적 태도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달라졌다. 결정적으로, 2001년 개최된 상하이 아펙회의 전후로 아페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바뀌었다. 장쩌민은 "중국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제회의"임을 부각시키면서 13개국 정상들과 특별 외교를 했다. 2001년은 미중관계에서도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였다. 이 때 부시는 장쩌민과 10월 19일 양자간 정상회담을 열어 '테러와의 전쟁'을 토대로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구상하기로 합의했다. 부시는 "중국은 미국의 적이 아니라 친구"임을 역설했다. 장쩌민은 "일관되데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부시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장쩌민은 미국 보잉사의 항공기 30대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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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일본의 아펙정책과 미일간의 긴장과 갈등

 

2. 일본의 아펙 정책과 미일간의 긴장과 갈등

 

일본의 아펙 정책은 '미국과의 공존과 견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일본이 처음으로 아펙 구상을 발표한 '개발연구회 보고'를 보면,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과의 공존을 중요한 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 공존은 미국의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도 담고 있었다.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과 공조하지만 미국 경제력 쇠퇴의 한 상징인, 미일 경제 마찰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88년부터 아펙에 관한 정책들을 차근차근 준비한 일본은 정작 아펙 창설을 직접 제안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일본은 "아시아 침략 역사와 경제면의 지배적 지위를 고려해서 돌출하지 않고, 북미와 아시아 쌍방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보다는 경계를 받지 않는 호주에 주도권을 쥐게 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전술적 배려"(김원중, 1998, '일본과 동아시아 경제통합 - APEC과 EAEC를 둘러싼 갈등', <경제와 사회> 1998년 가을호(통권 39호))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펙호'의 닻을 올린 국가는 호주와 일본이었다.

 

1988년 최초로 아펙 구상을 발표한 일본 통산성을 위와 같은 전략을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라고 표현했다. '개방적'이라는 말과 '지역주의'라는 말은 분명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에게 이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었다. 일본은 1985년말 이후 아시아 등지에서 일본 산업의 국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엔고 때문에 해외투자를 아시아 나라들에 집중했다. 당시 일본의 해외투자 가운데 약 13% 이상이 이 지역에 집중됐다. 일본 통산성은 이 구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1991년부터는 아시아 각국과 일본의 각료들이 참가하는 경제정책 조정 포럼인 '아세안 경제각료회의와 일본 통상대신간의 정기회합'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 자본가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만든 제품이 수출되는 지역은 상당 부문 미국이었다. 만약 미국이 일본산 수출품에 규제를 가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 사넝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원활히 움직이게 하려면 북미에서도 새로운 시장을 계속 창출해야 했다. 그래서 북미 시장에 대해 폐쇄적인 지역주의가 아닌 '개방적 지역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아펙에 대한 일본의 이런 태도는 미국이 아펙을 단지 우루과이라운드의 보조자 정도로만 여겼을 때까지만 해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아펙을 적극적인 도구로 삼으려 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클린턴 정권의 대외정책 입안자 구실을 한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Economics) 소장인 벅스텐(Bergsten)과 그가 만든 아펙 저명인사 그룹(Eminent Persons Group; EPG)은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1차 아펙 정상회의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공동체를 위한 아펙 비전'을 내놓았다. 주되게 역내무역 자유화, 무역투자 원활화 조치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미국의 공세적 무역정책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클린턴도 1993년 7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한 연설을 통해 '태평양공동체' 구상을 내놓았는데, 여기에는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와 지적 소유권 보호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아시아를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일본은 미국의 '자유화' 방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래서 당시 EPG 의장인 벅스텐은 일본 정부가 미국을 지나치게 견제하려 한다고 불평했다. 미국을 얼마만큼 견제해야 하는지 또 견제할 수 있는지를 놓고 통산성과 외무성이 분열을 겪기도 했다. 미국과의 공존 유지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이른바 '탈미아시아주의'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아펙의 경제적 목표들이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들이 광범한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아펙 내에서 벌인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을 들 수 있다. 1997년에 터진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1월 콸라룸푸르 회의에서 아펙의 무역 자유화 논의는 미국과 일본이 벌인 심각한 갈등과 말레이시아 마하티르와 당시 미국 부통령 앨 고어 사이의 설전 때문에 주요 의제들이 표류하기도 했다. 1998년에 미국과 일본이 무역장벽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을 때 일본은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의 지지를 등에 업고 미국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지지를 받으면서 입장 차이만을 계속 확인했다. 당시 일본은 당분간 더 이상의 시장 개방 계획을 중단하자고 했고, 그럼으로써 회의는 사실상 종결됐다. 일본의 외무장관은 "미국이 악의 정신에 사로잡힌 나머지 국경개방이 더는 불가능할 정도로 취약한 나라들의 목구멍에 억지로 시장개방의 기준을 밀어넣음으로써 이 지역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그가 "집시 자본"이라고 부른 것이 더는 말레이시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자본 통재 조치를 취하려 했고 당시 클린턴 대신 참여한 미 부통령 앨 고어는 말레이시아 국민이 마하티르를 타도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면서 마하티르와 정면 충돌했다.

 

결국 다음해 말레이시아와 미국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1999년 아펙 무역장관회담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1999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정상회의 결과를 다룬 한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아펙에 관한 유일한 쟁점이 있다. 아펙이 비틀거릴 것인가 아니면 골골거리면서 죽을 것인가."

 

이 모든 사실들은 아펙의 '하나의 공동체'라는 표어 이면에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치열한 이해다툼과 갈등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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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에 대한 제국주의적 전략 (2)


 

1. 아펙에 대한 제국주의적 전략 (2)

 

또한 미국의 아펙 정책은 시간이 갈수록 경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미국은 아펙에서 단지 무역과 경제뿐 아니라 소위 안보 쟁점들을 결합해 다루고 있다.

 

이미 미국은 동티모르 문제와 같은 아시아 내의 정치적 분쟁에도 아펙을 활용했다. 당시 아펙에서 호주는 동티모르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당성을 거머줬다. 1999년 아펙 정상회의 때 동티모르에 파병할 다국적군 구성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얻은 공간도 바로 아펙이었다.

 

미국 대외정책에서 결정적 조언자 구실을 하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바 있는 브레진스키는 일찍이 아펙이 미국의 '지혜로운' 패권 전략 추진의 공간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동만큼이나 정치적 역동성과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야말로 미국의 패권을 제대로 보여 줘야 할 공간인데, 그에 비하면 아펙은 너무 느슨하다고 투덜댔다.

 

"아시아는 세계경제의 중심이 돼가는 것과 동시에 정치적 휴화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유럽에서처럼 전통적인 영토적/인종적/민족적 분쟁을 희석/흡수/봉쇄할 수 있는 다변적 협력 구조가 없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 가지 지역협력기구, 동남아의 아세안, ARF(Asian-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아시아지역포럼, 아세안이 주도하는 정치안보 협상 기구), 그리고 APEC 등은 모두 유럽을 묶어 주는 다변적인 지역 협력 연대망에 춸씬 못 미친다.

 

오늘날의 아시아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대중적 민족주의가 집결된 곳이다. 아시아의 대중적 민족주의는 대중 매체에 대한 갑작스런 접근에 힘입어 가열되고 있고,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부의 격차로 인해 팽창되는 사회적 기대감으로 더욱 높은 휘발성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화는 이러한 대중적 민족주의가 정치적 동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여 준다. 증대되는 아시아의 군비 규모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위태롭게 만든다.

 

요컨대 동아시아는 펄펄 끓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 이러한 역동성은 이 지역의 급속한 경제 성장 속도로 인해 평화적인 방향으로 분출되었다. 그러나 비록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활화성이 높은 점화점에 불이 당겨지면서 제어력을 상실한 정치적 열정이 그러한 안전 밸브를 압도하게 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잠재적인 점화점은 많은 분쟁 지역에 상존하며, 각기 흑색 선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잠재적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Z.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삼인 202쪽)

 

브레진스키의 말대로 아시아는 가장 많은 주요 강대국들이 집중해 있는 곳이자 가장 군비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국제전략문제여구소는 이 지역이 2005년에 유럽과 중동을 뛰어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수입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바로 이 곳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펙을 효과적인 무기로 활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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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전략 (1)


 

<1장>  아펙의 탄생 배경과 주요 회원국들의 이해관계

 

2005년 부산 아펙의 공식 표어는 "하나의 공동체다." 그러나 아펙의 창설 과정은 이 표어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 준다. 아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일본은 아펙을 둘러싸고 제국주의적 긴장과 갈등을 빚었다.



1. 아펙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 (1)

 

아펙은 1989년에 창설됐다. 처음 아펙 창설을 주도한 나라는 일본과 호주였다. 1989년 11월 캔버라에서 1차 회의가 열렸을 때만 해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아펙을 자신들의 무역 블록을 안전하게 보호할 임시 도구로 여기는 정도였다.

 

일본 정부와 기업주들로서는 당시 막 생겨난 유럽공동체(EC) 경제블록 및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지대) 같은 미국 중심의 경제블록과 벌이는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호주가 동티모르와 솔로몬군도에 파병을 공표한 것도 아펙 회의를 통해서였다.

 

한국 정부도 아펙의 주요 창설국 가운데 하나다. 당시 호주 노동당 내각 총리 봅 호크는 도쿄에서 일본의 장관들을 만난 뒤에 한국을 방문해 아펙 창설을 제안했다.

 

이 때 미국은 왜 빠졌을까? 아펙 결성이 일본과 호주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아펙에 대한 미국의 관심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아펙은 출범 당시만 해도 미국은 자신을 '왕따'시키는 아시아 경제권의 형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보조 수단 정도로 아펙을 인식했다. 한 마디로 말해 소극적 개입 정책이었다.

 

그러나 1993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미온적인 미국의 태도는 돌변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각료급 수준이던 아펙 회의를 정상급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미국의 대 아펙 계획이 바뀐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미국은 아펙을 통해 유럽연합을 견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993년 당시 유럽 국가들은 유럽 단일 시장을 만들고 안보정책 분야를 통합할 유럽연합을 창설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유럽연합 출범을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여겼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신태평양공동체 구상'과 '아태지역협력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 일련의 발표는 유럽연합을 겨냥한 것이었다. 한편, 클린턴의 아시아 구상도 유럽연합을 자극했다. 유럽연합의 지도자들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아시아를 미국이 통제할 수 있다면 유럽이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라는 명분에 더 매료됐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클린턴이 '신태평양공동체 구상'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94년에 대아시아 전략(NAS)을 발표해 아시아에 더 깊이 개입하려는 의지를 내비쳤다.

 

둘째, 미국 지배자들은 일본과, 동아시아 경제권의 역동적인 주체로 부상할 한국과 중국을 아펙이라는 틀 속에 둠으로써 아시아의 주요국들을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박종귀, , 새로운 사람들, 398~404쪽) 유럽을 견제하는 한편 국제경제의 또 다른 강자인 일본을 미국의 영향권에 묶어놓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될 것이었다.

 

일본을 견제하겠다는 미국 지배자들의 구상은 '확대 나프타' 계획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92년 8월 나프타 협정을 통과시키고 얼마 뒤 미국은 '확대 나프타 구상'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의 핵심은 나프타를 아시아 지역까지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유독 일본만이 제외돼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확대 나프나 구상'의 진정한 의도는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이익을 일본이 독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시아의 '2인자'들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한/중/일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제안한 '동아시아 무역블럭'을 지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썼다. 그래서 1990년 우루과이라운드 교섭이 결렬된 직후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가 제안한 '동아시아 무역블록'의 애초 구상에 한국/일본/중국 3개국이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자신이 빠진 동아시아만의 무역블록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했다. EAEC(East Asia Economic Caucus; 동아시아 경제협의체)로 불린 이 구상은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그룹'이 아니라 느슨한 모임 정도라고 할 수 있는 '코커스'(협의체)로 최종 명칭이 변경됐다.

 

미국은 일본이 말레이시아 같은 국가의 지지를 받아 아시아 경제블록을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미국 지배자들한테 미국이 빠진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한테 여기에 참여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압력도 있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베이커는 1991년 아펙 서울회의에서 "40년 전에 한반도에서 피를 흘린 것은 미국인이었지 말레이시아인이 아니다"라고 한국 정부에 일침을 놨다.

 

'남반구초점' 소장 월든 벨로는 아시아의 산업 엘리트들이 일본 자본가들과 깊숙한 전략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아펙을 통해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고 지적했다.(월든벨로, '일본 중심의 무역블록의 실상과 미국의 아펙 구상', <역사비평> 33호 1996년 여름호)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미 하원 청문회에서 미국의 무역정책 및 교섭 자문 위원단 관계자 폴라 스턴은 이렇게 경고했다. "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이 동아시아 무역총량의 약 45%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때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국가 간 통합은 미국과 동아시아의 무역관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침해할 수도 있다."

 

셋째, 아시아 경제와 시장 자체도 미국 지배자들한테 매우 중요했다. 1988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미국 수출 총액의 12%를 점하고 있었으나, 1993년에는 그 비율이 20%로 높아져 유럽연합, 캐나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했다. 당시 미국 정부 산하의 주요기구들은 '대규모 신흥시장 전략보고서'(BEMs; Big Emerging Markets;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폴란드)에서 아시아 시장에 개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확인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세계 총생산에 기여하는 비율 면에서 북미지역과 아시아가 각 4분의 1을 차지함으로써 두 지역의 비중은 동등해졌다.

 

미국 지배자들은 아시아 시장이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에게 "기회의 창"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무역 자유화와 시장개방을 위한 여러 정책들과 방향들을 아펙 회의에서 제안해 왔다.(이것에 관해서는 뒷장에서 서술하겠다.)

 

아시아 경제가 미국 지배자들한테 갖는 중요성은 단지 무역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미국경제는 아시아 정부들이 빌려주는 돈에 의존하고 있다.동아시아가 2005년에 미국에 빌려줄 것으로 예상되는 돈은 3천1백억 달러(약 3백27조 9천8백억 원)로, 이는 미국 정부 연간 적자의 거의 절반이다. 동아시아의 정부들이 사들이는 미국 채권의 규모는 미국의 누적 국제수지적자의 43%에 달한다. <파이낸셜 타임스> 말마따나 "군 자금은 아시아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대규모 외화흑자를 보고 있는 동아시아의 3대 경제 - 일본, 중국, 한국 - 는 미국에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다시 미국에 빌려줘서, 미국 기업들과 소비자들이 이 경제들로부터의 수입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교역 흐름이 세계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일본/중국/한국은 2004년 말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 1/2/4위에 올라 있다. 아시아의 주요 3국이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우는 데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다국적기업이 포진해 있고 페덱스(FedEx) 경영자가 회장으로 있는 아펙기업인자문회의가 최근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시아에서 채권시장을 더욱 활성화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1993년 시애틀 정상회의를 전후로 한 미국의 태도 변화 배경과 미국의 아펙 정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럽연합과 일본과 중국 견제를 위한 도구로서 아펙,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버팀목으로서 아시아와 아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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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머리말

 

머리말

 

11월 12일부터 11월 19일까지 부산에서 아펙(APEC) 회의가 열린다. 아펙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21개국을 포괄하며 전 세계 GDP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 정부들의 국제기구다.

 

노무현 정부는 2005 APEC 정상회의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앞으로 10년 동안 한국에서 있을 최대의 국제회의라며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킬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는 기대감까지 부추기고 있다.

 

부산시도 "부산 경제를 활성화하고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일 절호의 기회"라며 APEC 정상들의 접대와 행사장 주변 치장에 시민들의 혈세 2천7백언 원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APEC 정상들한테 깨끗한 부산을 보여주겠다며 부산역 노숙자들을 임시 수용소에 수용하고 노점상을 철거하고 있다.

 

한편, 정상회의가 진행될 "세계의 꼭대기"라는 뜻을 가진 누리마루의 APEC 하우스는 해군함정까지 동원돼 철통 보호를 받고 있으며 올해 초부터 '테러 대비'를 구실로 한 각종 훈련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는 묻고 싶다. 도대체 APEC이 뭐길래? APEC이 내거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표어에 담긴 진실은 무엇인가? APEC은 왜 태어났는가? APEC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왜 APEC에 반대해야 하는가? APEC이 한반도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아펙이 제국주의적 도구임을 논증하는 이 소책자가 이런 여러 궁금증을 해결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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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작의 되풀이...?!!

한국현대사를 읽다 보면 가장 분통 터지는 때와 장면이 있다!!!

막혔던 역사의 물길이 다시금 굽이치며 원래 흐르던 그 길로 흐르려다... 다시금 막혀 엉뚱한 길로 가버리게 된 "그 장면"을 생각하게끔 하는 신문기사를, 엊그제 읽었다!!!

 



<역사비평> 통권 62호, 2003년 봄호에 실린 정용욱 교수의 논문을 살펴보자!!!

"1945년 말 17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란 제목 아래 "미군정의 여론공작을 중심으로"라는 부제를 단 논문이다. 지은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논문은 현대사회에서 또하나의 엄청난 권력인 언론의 "어두운 괴력"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를 '신탁통치안'으로 왜곡보도한 경위에 대한 이 논문은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 결정서로 인해 시작된 소위 찬/반탁 논쟁은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일거에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국내에 반탁운동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상회의의 한국 관련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우러 27일자 머리기사이다. 삼상회의 결정서가 공식 발표된 것이 서울 시각으로 12월 28일 오후 6시이니, 이 기사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에, 또한 주한미군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또한 주한미군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발표된 이른바 관측보도이다. 아래 인용문은 그 기사의 원문이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받았다고 하는데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노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지급보(至急報).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이 기사는 삼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보도였다. 이 기사는 반탁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며칠간 삼상회의와 그 결정내용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태도와 보도방향을 결정했다...<<<

 


 

위 표를 살펴보면...

분명히 "오보의 날"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동아일보>의 보도내용은 잘못된 것임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후 미군정은 해방 뒤 남한 정국을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재편하는 작업에 곧바로 착수하여 '임정 해체와 새로운 정당으로의 재편'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추악한 의도까지도 위 표에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이 격렬한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려 들자, 미군정은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까지 서슴치 않으며 반탁운동이 그들의 의도아래서 작동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후 곧바로 "박헌영-존스톤 기자회견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공산당은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기자회견에 대한 왜곡보도를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조작한 미군정은 이를 통해 "국내의 반탁운동을 반소/반공운동으로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정면 대응이 모스크바로부터 나왔는데...

타스통신을 통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과 그 과정에 대한 실제진상 발표'는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급기야 하지와 맥아더로 하여금 '꿀 먹은 벙어리'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그 왜곡으로 말미암아 돌이킬 수 없는 '큰 물줄기의 뒤바뀜'을 일으키고... 결국 그렇게 왜곡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역사의 조작사건이 지금도 공공연히 일어날 수 있음을 짐작하게끔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박찬수 한겨레 기자의 예리한 눈이 '신탁통치 조작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포착하고 있다.

 

http://www.hani.co.kr/kisa/section-001006000/2005/11/001006000200511041935395.html

 

외세와 이에 빌붙어 그 더러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무리들은...

오늘도 이렇듯 끊임없이 그들에게 필요한 온갖 조작들을 서슴치 않고 있다니... 정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을 모르는 '악한'들이라고 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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