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 되면 쉴 줄도 모르고, 놀러갈 줄도 모르고, 어디 맛있는 곳이 있는지도 안가보니까 모르지요. 일 있을 때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벌어놓자, 그러다보니 어느새 청춘이 다 지나가고 돌이켜보면 벌써 사오십세. 나중에 좋은 날이 오면 즐겁게 재미있게 살겠지, 그랬는데, 그 날이 없네요. 항상 부족하고 힘들고, 살아가는 게 너무 재미없이 살아가요. 매일 특근, 잔업, 야간근무 이렇게 살다보니 언제 봄이 오는지 언제 여름이 가는지 몰라요.”

 

2005년,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만난 생산직 노동자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나은 건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거라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언제 올런지, 그 때까지 버틸 수 있을런지 확신하기 어렵다.

 


공장 안의 시간

 

이들 자동차 공장 노동자의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공장이다. 하루 평균 10시간의 장시간 노동, 한달 평균 4개 이상의 특근, 게다가 주야 맞교대까지.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고 해도, 실제로 출퇴근과 그 준비로 보내는 시간을 따지면 12시간이 훌쩍 넘는다. 그야말로 인생의 절반을 공장에 묶여서 지낸다.

 

온종일 노동으로 보내는 와중에 그나마 노동자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휴식시간이다. 그러나 이른바 공식적인 휴식시간은 오전 오후 10분씩. 화장실 한번 다녀오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게다가, 가뜩이나 모자란 휴식시간마저도 노동자의 몸과 건강보다는 기계의 가동과 생산량이 우선이다.

 

“휴식시간은 따로 없지요. 제 장비는 자동장비라서 계속 돌리거든요. 그렇게 안돌리고 10분동안 껐다가 돌리면 다시 못해요. 다시 켜면 처음 서너 개는 버려야 해요. 거기서 5분 정도 먹어요. 그 다음 10분 계속 두세 개를 버려야 해요. 그러니 10분 껐다가 다시 하려면 15분이 걸려요. (정상적으로) 15분이면 10개가 나오는데(그만큼 덜 생산하게 됨). 그래서 계속 돌아가는 거죠. 공식적으로 시간을 달아먹고 (실제로) 이 공장에는 휴식시간이 없죠.”

 

물론 이렇게 말하던 노동자도 쉰다. 정해진 물량을 뽑아낼 때까지 일을 몰아쳐서 해놓고 스스로 쉬는 시간을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서 쉬는’ 현실의 근본에 깔린 자본의 논리를 주목해야 한다. 노동자는 10분동안 기계를 껐다가 켰을 때 발생하는 생산 손실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 10분의 휴식을 줄이거나 뒤로 미루었을 때 자기 몸의 어디가 얼마나 망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쉬면 안되는 이유(생산에 차질이 생기니까)는 스스럼 없이 말하지만, 쉬어야만 하는 이유(내 몸이 망가지니까)를 말하기에는 자신이 없다. 오히려 ‘알아서 쉬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부도덕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나마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휴식이 없다면, 아예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공장 안의 시계가 휴식시간을 가리키고 있을 때에도, 공장 안에 흐르는 시간은 생산의 논리, 효율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 따라 구성된다. 그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노동자의 몸과 정신은 자율성을 갖는다.

 


공장 밖의 시간

 

그렇다고 해서 퇴근한 후 혹은 출근하지 않는 날의 시간은 온전히 노동자의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일과표 상으로 본다면 분명 휴식 시간이고 자유 시간이지만, 실제로는 공장을 벗어났다는 장소의 차이만 있을 뿐,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노동에 빼앗긴 상태이다.

 

“일하면서 힘든거요? 개인적인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게 가장 힘들어요.”

 

“할 게 없어요. 저녁 8시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9시 10시인데 뭘 하겠어요? 가만히 있어요. 갈 곳이 없어요. 그 시간에 어디를 가겠어요?”

 

시간이 없다.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다종다양한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그 시간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답은 두가지, 잠 아니면 술이다. 집에 돌아가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은 잠으로 채워지고,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은 술로 채워진다. 내일을 견뎌내려면 오늘의 피로를 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잠을 잔다.

 

“녹초가 되서 자기 바빠요. 씻고 아이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뉴스도 보고 그래야 하는데, 집에 가면 뭘 할 수 있는 체력이 안되는 것 같아요.”

 

“주간 근무 때는 일주일에 나흘은 술을 마셔요. 술을 많이 마셔서 피곤하지만, 술을 안먹으면 낙이 없잖아요."

 

어쩌다 황금같은 시간이 생겨도, 잠과 술 말고는 달리 해본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간간히 술을 끊고 자신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위해서였다. 더 오랫동안 강도높은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필요와 위기감 때문이었다.

 

‘제대로’ 쉴 수 없는 공장 안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공장 밖의 시간과 활동을 철저히 규제하고 관리하기, 가족이나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기, ‘일하기 위해’ 쉬고 ‘일하기 위해’ 운동하기… 이처럼 노동력을 팔기 위해, 팔만한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공장 안은 물론이고 공장 밖에서조차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이나 한 인격체로서 누려야 마땅한 권리를 접어두고 오로지 ‘노동자’로서 살아가야만 한다.

 


일하기 위한 휴식?

 

이렇듯 공장 밖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 길이와 배치, 내용이 온통 공장 안의 시간에 의해 지배받는다. 노동자는 공장 안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자신의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 평생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언제 출근하고 언제 퇴근하며, 한달에 몇번을 쉬고 일년에 몇일을 쉴 것인가는 자기 뜻과 무관하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공장의 생산 계획이다. 어떤 종류의 차를 얼마나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자본의 생산 계획이 곧 노동자의 일상에 대한 기획과 지배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쉬고, 여덟 시간 잠자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필요한 만큼보다 훨씬 오래 일해야 하고 필요한 만큼보다 훨씬 적게 쉬어야 한다. 일상에서 휴식의 길이와 내용은 ‘다음 날 다시 일할 수 있을 만큼’ 으로 제한된다. 사색과 창조, 삶을 한발 진전시키기 위한 여가와 휴식은 꿈도 꿀 수 없다. 노동자에게 휴식이란 쳇바퀴같은 일상에서 탈출할 힘에 미치지 못하고 내일 다시 그 쳇바퀴를 밟아갈 만큼의 힘, 내일 다시 방전시킬 만큼의 재충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나마 쳇바퀴를 밟아갈 만큼조차 재충전하지 못할 지경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골병과 과로사는 이를 경고하는 적색등이라 하겠다. 1969년 과로사(karoshi=death from overwork)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던 일본에서, 최근 ‘과로에 의한 자살’(Karo jisatsu=suicide from overwork)이라는 신조어가 떠오르고 있다. 단순하게 설명해서 과로사가 몸이 견딜만한 수준을 넘어선 노동강도와 이를 견딜만한 수준에 못미치는 휴식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과로에 의한 자살은 마음이 견딜만한 수준을 넘어선 노동과 그걸 견뎌낼 힘을 얻을 수 없는 휴식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일하며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다가 죽어간다

 

“더 이상은 못해요. 지금도 한달에 일하는 시간이 450시간이거든요. 한달에 쉬는 날이 3, 4일밖에 안되니까요.”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2003년을 기준으로 연간 2,525시간을 일했고, 그 중 1,567명은 연간 3천시간을 넘게 일했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오래 일한다는 일본조차 연간 1,825시간에 불과하며, 영국이나 독일은 연간 1,500시간에도 미치지 않는데, 그나마 이 공장에서 한달에 450시간씩 일해야 하는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하나.

 

크라이슬러에서 일년 동안 10만명의 노동자가 자동차 111만대를 만들어낼 때, 현대자동차에서는 5만 1천명의 노동자가 127만대를 만들어낸다. 현대자동차 자본은 세계 5위, 세계 3위를 내다보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지금도, 그 자동차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과로로 쓰러져 죽고, 기계에 깔려 죽고, 낫지 않는 골병으로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죽도록 일하고, 죽을 때 까지 일하고, 일하다가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노동에 의해, 그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에 의해 서서히 살해당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왜 이 죽음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는가. 왜 모두들 목을 늘이고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

 

그래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할 수 있을 때 벌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피할 수 없을 만큼 만연해 있는 고용불안감 때문이다.

 

언제 어떤 이유로 생물학적 죽음 혹은 사회적 죽음을 맞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오라면 나오고, 나오지 말라 하면 나올 수 없는’ 관계에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오지 말라’는 명령은 희망퇴직이나 정리해고처럼 영구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설비 개조를 위해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 노동자들은 몇달간의 무급휴직을 견뎌야 한다. 유연생산체제 덕분에 생산량이 줄어들면 특근 수가 줄어드는데, 시급제와 성과급에 기초한 임금 체계에서 노동시간의 감소는 곧 생활비의 감소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곧 노동시간에 대한 불안감, 임금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불안감은 실제로 고용이 불안한 조건이냐 아니냐와 아무 상관 없이 보편적으로 퍼져있다. 자본은 사내 방송, 소식지, 대자보를 동원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고용이 불안하다고, 98년(대규모 정리해고)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고 협박한다. 다른 어떤 것도 고용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고용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세뇌한다. 이런 ‘고용 이데올로기’ 앞에서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개기다가 짤릴 것이냐’ 아니면 ‘묵묵히 따를 것이냐’ 둘 중 하나다.

 


사람답게 일해야 사람답게 쉴 수 있다 - 쉬엄쉬엄 일하자

 

일상의 힘은 ‘길들임’에 있다. 다시 일할 수 있을 만큼 쉬는 수준에 길들여지다보면, 휴식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 이하로 내려가도 ‘견딜 만 하다’라고 받아들인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했던가. 어쩌다 모처럼 긴 휴식이 주어져도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을 수도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할 방법을 몰라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다’라고 생각하거나, 상품화된 여가 문화를 소비하며 그것이 참된 휴식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속담에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회는 일만 하고 놀지 못하는 ‘돈버는 기계’가 되기 싫으면 일도 안(못)하고 놀기만 하는(실은 놀지도 못하고 일답지 않은 일들을 전전하는) ‘백수’가 되라고 한다. 이따위 말도 안되는 양자택일에서 과연 누가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일터에서 보내는 노동시간은 물론, 일터 바깥에서 보내는 비노동시간까지, 일을 하건 쉬건 노동자의 일상 전체가 자본의 생산과 효율 논리에 따라 구성, 기획, 조정되고 있는 현실에서 사람답게 일할 권리 없이 사람답게 쉴 권리를 누릴 수 있을까.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야 한다. 쉬는 날이 더 많아져야 한다. 일하는 날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 역시, 일의 밀도를 낮추고, 노동자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공식적인 휴식시간을 확보하고 늘려야 한다. 오늘 쌓인 피로를 풀고, 내일 써버릴 노동력을 간신히 충전시키는 정도로는 쉬어도 쉬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제대로 쉬어야 한다. 여유롭고 쉬엄쉬엄 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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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2 14:50 2006/06/22 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