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

from 콩이 쓴 글 2007/05/21 08:12

1993년도였나요. "엄마의 바다"라는 TV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인 김혜자와 고현정과 고소영 자매, 유복하던 세 모녀의 삶이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갑자기 가난 속으로 추락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지요.

사업가였던 그 집안의 아버지는 사업에 문제가 생기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심장마비로, 즉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죽었습니다.

극 중에서 딸들이 혼기 꽉 찬 아가씨들이었으니, 이 아버지는 50대 초반 정도였을 겁니다.

1993년의 드라마에서는 50대 남성의 죽음, 그게 참말로 어이없고 불쌍한 일이던 것이지요.

그 즈음부터였던가요.

YS의 신한국 건설과 대기업들의 신경영전략을 앞 다투어 떠들어주던 신문과 방송 한 켠에 '40대 가장이 과로사로 쓰러져간다'는 기사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 말입니다.

십년을 훌쩍 넘어, 요새는 어떤가요.

작년 가을, 대우자판 최동규 동지가 구조조정 압박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목숨을 잃을 당시 나이는 겨우 서른 아홉이었습니다.

지난 4월 대구 한국델파이에서 입사 일주일만에 철야근무 중 쓰러져 숨진 노동자는 고작 스물 다섯이었습니다.

이제 과로사는 중년만이 아니라 청년 노동자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의 자료에 의하면 97년부터 2001년까지 4년간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수는 무려 1,500명이 넘고,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더군요.

공식 통계만 따져보더라도 하루에 4명이 쓰러지고 그 중 1명이 목숨을 잃은 셈이니,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수는 얼마나 많을까요.

정말 이상하고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병원도 많아졌고 의학도 발달했고 사람들의 평균 수명도 늘어났는데, 어째서 정작 열심히 일해온 우리 노동자들은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걸까요?

그것도 점점 젊은 사람들이 쓰러지게 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일터가 너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40시간 근무를 하거나 주5일제가 도입되는 걸 보면 부분적으로나마 노동강도가 줄어들고 있는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이 곧 노동강도를 줄이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노동시간이 실제로 줄어든 경우는 가뭄에 콩나는 정도에 불과하고, 기껏 노동시간이 줄어들더라도 그만큼 더 집중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용불안은 또 어떤가요?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이제 석기시대 유물보다 더 오래된 말이지요.

"자식 시집장가 보낼 때까지는 일해야지"라고 말하면 사치스러운 바램이고, 요새는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둥, '삼팔선(38세가 되면 해고될 위험이 높아진다는 말)'이라는 둥, 정말 살벌한 말들이 유행입니다.

그러니 노동자는 짤리지 않으려고 더 아둥바둥 열심히 일하거나, 아니면 언제 짤릴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더 벌어두자는 마음에 잔업·특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걸 입히고 좀더 가르치기 위해, 노년에 조금이라도 덜 가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한 대가로 돌아오는 건 무엇일까요.

장시간 노동에 몸은 골병들고, 만성피로와 스트레스에 만사가 귀찮고, 가족들에게는 고작해야 ‘돈버는 기계’ 취급이나 받고...

그래도 살림살이는 별반 달라지지 않고, 고용불안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결국 노동자가 견뎌내야 할 노동강도와 스트레스만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놈들, 고도의 노동강도와 고용불안, 노동통제로 인한 스트레스는 모두 뇌심혈관계 질환, 과로사의 주범입니다.

과로사라는 말은 1969년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말인데, 일본식으로 읽으면 ‘카로시’라고 한다는군요.

헌데 요즘 일본에서는 ‘카로 지삿추’라는 말이 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뭔 뜻인고 하니 ‘과로에 의한 자살’이라는군요.

과로사가 몸이 견딜만한 수준을 넘어선 노동강도와 이를 견딜만한 수준에 못미치는 휴식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과로에 의한 자살은 마음이 견딜만한 수준을 넘어선 노동과 그걸 견뎌낼 힘을 얻을 수 없는 휴식 때문에 생기는 문제겠지요.

아무런 삶의 낙도 없거니와 ‘낙’을 따지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길만큼 팍팍한 세상에서 돈의 노예, 임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느니, 차라리 삶을 접어버리고 싶어지는 겁니다.

요즘 신문과 방송에서 건강 정보를 다루는 코너가 많아지면서 과로사에 대한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여가를 즐기고 운동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려면 스트레스 없는 일터, 여가시간을 충분히 누리는 일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른 걸레 쥐어짜듯' 노동자의 육체적·정신적 힘을 최대한 쥐어짜는 노동현실을 바꾸어,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적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을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과로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예방 대책일 겁니다.

예전에 썼던 글을 재구성해서 [건강한 노동세상] 소식지에 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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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1 08:12 2007/05/21 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