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C_옮긴이의 글

from 콩이 쓴 글 2009/11/20 17:50

 

 

옮긴이의 글

 


1. CTC와 만나다

 

이 책을 처음 발견한 건 2008년 2월이었다.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이나 노동자 건강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 며칠 째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자료들은 온통 반도체 회사 영업 실적과 주가 정보, 아니면 신제품 개발 소식들 뿐이었고, 작업환경이나 노동자 건강에 대한 자료는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반도체 노동자 건강에 대한 정보를 찾게 된 배경에는 더욱 이상한 일들이 가득했다. 그 때 나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백혈병은 주로 어린이나 노인에게 발생하고 젊은 성인에게는 무척 드문 병인데 젊디 젊은 2, 30대 노동자들 여러 명이 같은 회사에서 이런 병에 걸렸다는 건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백혈병 환자가 늘어나고 있는데도, 이 모든 일이 우연일 뿐이며 작업환경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삼성반도체의 태도도 이상했다. 삼성 정도의 기업이라면 적어도 뭔가 설득력 있는 해명을 내놓을 만도 한데, 작업환경의 안전성을 확인시켜 달라는 요청은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더욱 이상했다.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지만 감추고 있는 것처럼.

 

노동부도 정말 이상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제대로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더니, 조사는 하겠지만 조사내용은 절대로 공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기업이 영업 비밀을 지켜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라나. 그 “비밀” 속 어딘가에 백혈병을 일으킨 범인이 숨어있을지도 모르지만, 기업이 요청한다면 정부는 그 범인을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였다.

 

피해 노동자들도 그/녀들이 날마다 냄새맡고 손대야 했던 화학물질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회사가 단 한번도 알려준 적이 없으니까. 어쩌면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얘기할 수 없었을 거다.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종합병원 무균실 아니면 중환자실에서 투병 중이었으니까.

 

저 거대한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꽃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이 백혈병으로 툭툭 쓰러지고 있는데, 피해자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회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만 하고, 정부는 아무 얘기도 해줄 수 없다고만 하는 답답하고 이상한 상황. 우린 반도체 공장의 현실을 알 수 있는 자료라면 무엇이든지 찾고 싶었고, 찾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실리콘 밸리 독성물질 방지연합SVTC 홈페이지를 발견했고, 그 곳을 통해 이 책을 찾았다.

반가왔다. 이 책은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았던 반도체/전자 산업의 현실을 자세히 들려주고 있었으니까. 반도체와 전자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얼마나 해롭고 위험한 화학물질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그런 공장들이 세워졌던 지역들이 환경오염으로 얼마나 고통받아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불임과 유산, 암으로 쓰러져왔는지. 이런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보다 인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에게 반도체/전자 산업 자본이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그리고 무서웠다. 몇십 년 전에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시작하여 영국, 동유럽,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거쳐온 그 이야기들이 지금 한국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 이 자리를 빌어 2006년에 출간된 이 책에는 미처 담기지 못한, 2007년부터 비로소 시작된 한국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2. '디지털 강국', '삼성 공화국'의 침묵을 깨다

 

“몸에 멍이 많이 들고, 먹으면 토하고 어지럽고 그래서 친구가 병원을 가자고 했는데… 백혈병이라고 했어요. 엄청 울었어요. 내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그래요.”

 

2005년 6월, 황유미씨는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한지 2년 만이었다. 의사는 혹시 화학물질을 다루는 일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녀가 한 일은 웨이퍼를 바구니에 담아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에 차례로 담갔다가 꺼내는 세척작업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보낸 사람들은 백혈병과 작업환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장담했다. 만일 직업병이라면 이토록 큰 공장에서 어떻게 유미씨 혼자 병에 걸리겠냐고.

 

그런데 2006년 여름, 유미씨와 2인 1조로 함께 일했던 이숙영씨가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황상기씨는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이 같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이 큰 공장에 백혈병 환자가 딱 두 명 있는데, 우연히 같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황상기씨는 문득 딸이 치료받던 병원에 같은 공장 출신의 백혈병 환자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회사에 따져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백혈병 환자가 세 명인 건 사실이지만 공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 황상기씨는 백방으로 수소문해 다섯 명의 백혈병 환자를 더 찾아냈다. 하지만 회사는 한 명씩 찾아낼 때마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작업환경과는 전혀 상관없으니 산재신청을 할 수는 없다”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성반도체는 속초에 있는 유미씨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병가 기간이 끝났으니 퇴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병원비는 대줄테니 사표를 쓰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병원비를 주지 말고 산재처리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버님께서 큰 회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으면 해보라’고 하더군요.”

 

이런 회사의 태도에 황상기씨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진상을 밝혀낼만한 사람들, 똑똑하고 힘있는 사람들을 찾아 온갖 정당과 언론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삼성을 상대로 하는 일이라서인지, 아무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른 뒤, 마침내 유미7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월간 <말>지의 기자였다.

 

하지만 취재는 쉽지 않았다. 백혈병이 재발한 유미씨는 병세가 몹시 악화되어 인터뷰조차 제대로 이어가기 힘들었다. 그 전까지 유미씨와 연락을 주고받던 회사 동료들은 기자가 취재를 시작한 직후 마치 누군가 단단히 “입단속”을 한 듯이 일제히 연락을 끊었다. 그들 말고는 삼성반도체의 작업환경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취재가 지연되는 동안 유미씨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갔고, 2007년 3월 6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진료를 위해 새벽 5시 조금 안 돼서 집에서 출발했어요. 수원 아주대 병원 가서 피 검사 하고 영양제 주사 한 대 맞고 돌아오는데… 이천 쯤 왔는데 애가 차 뒤에서 덥다고 그래요. 먹지도 못해 삐쩍 말라서 몸무게가 20kg 밖에 안 됐어요. 찬바람을 나오게 하니 이번에는 춥다 그래요. 20분을 달려 횡성쯤 왔을 때 뒤를 돌아보니 애가 얼굴이 창백해져 있어요. 제 옆에 타고 있는 집사람이 뒷좌석을 보더니 ‘유미 아빠! 애가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아요’라고 다급하게 그러는 거예요. 차를 길가에 세우고 보니 ‘꺽꺽’거리며 마지막 숨이 넘어가고 있어요.”

 

삼성은 유미씨의 빈소로 위로금 오백 만원을 보냈다. 가난한 한 가족을 빚더미에 올려놓고, 회사가 내민 백지 사직서에 서명한 댓가로 세계 최고의 반도체 공장에서 내민 돈이라기에는 너무 적었다. 하지만 설령 오천 만원, 아니 오억 원이었다고 해도 열 아홉에 입사해서 스물 셋에 떠난 유미씨의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다음 달 <말>지에 그녀의 이야기가 실렸다. 황상기씨는 노동운동, 인권운동, 건강권운동 단체의 활동가들과 만났다. 산재신청이 불가능하다던 회사의 말은 거짓이었다. 산재신청은 회사가 아니라 노동자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껏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에 걸린 사람은 황상기씨가 찾은 여섯 명 뿐이라던 회사의 말도 거짓이었다. 유미씨 얘기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면서 또 다른 백혈병 피해자 가족들이 연락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20, 30대의 젊은 아내나 딸, 남편을 잃은 가족들이었다.

 

황상기씨는 분노했다. “삼성은 스스로 일류 회사라 하면서 어떻게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진실을 밝혀서 다시는 유미씨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상기씨를 통해 이 문제를 처음 접하게 된 활동가들도 이 문제가 단지 황유미씨 한 사람의 것은 아니라는 데에 깊이 공감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2007년 11월 20일, 수원의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앞에서 십여 명이 모여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쟁취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대책위원회”가 발족한 뒤 더 많은 피해자들과 제보자들이 연락을 해왔다. 백혈병에 걸린 남편을 만삭의 몸으로 간병하다가 결국 떠나보내야 했던 아내. 생리가 끊기고, 피부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동료들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훔치던 스물 두 살의 아가씨. 같은 팀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삼십 대의 젊은 나이에 희귀 암으로 차례 차례 쓰러지는 걸 보니 불안하다고 전화해 온 엔지니어.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생하다 어렵게 아이를 낳고, 첫 돌잔치를 한달 앞두고 백혈병을 진단받은 아내 얘기에 한숨짓던 남편. 뇌종양에 걸려 남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부모….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책위원회”는 깨달았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은 백혈병 뿐 아니라 수많은 질병을 겪고 있다는 것을. 삼성만이 아니라 다른 반도체 공장들에서도 똑같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도체공장만이 아니라 다른 전자산업 공장들의 작업환경에도 그리 다르지 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굳건히 지켜온 “디지털 강국”, “삼성공화국”의 침묵이 이제 서서히 깨지고 있다는 것을. 그 뒤로 “대책위원회”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3. CTC는 곧 우리의 얘기

 

지난 2년 동안 “반올림”이 겪어온 일들은 또 다른 책으로 묶을 만큼 다사다난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책 CTC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과 너무도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20세기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영국의 그리녹에서 까닭도 모르는 채 암으로 쓰러져간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21세기 한국의 반도체 노동자들과 꼭 같다. “반도체 공장에 오래 다니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입소문에 두려워하고 실제로 불임과 유산에 고통받은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다.

 

전자산업의 경쟁력은 “NUNS(No Union, No Strike-무노조 무파업)”에 있다는 외국 기업주들의 이야기도,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기 위해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마저 제멋대로 짓밟고 있는 삼성의 경영진과 꼭 닮았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해고나 물리적 폭력으로 보복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전자회사들 이야기를 읽으면, 몇 년동안 회사의 탄압에 맞서온 한국의 “시그네틱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의 사연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생명과 환경을 망쳐도 좋고 불법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기업을 감독하고 제어하기는커녕, 불법을 눈감아주고 기업들이 더욱 활개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주겠다고 나서는 정부의 모습 역시 어느 대륙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한결같기만 하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이처럼 어두운 공통점들만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모든 곳에서 우리는 자신과 가족의 고통을 딛고, 자본의 탄압과 회유를 견디며 세상을 향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첫 목소리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 첫 목소리에 메아리를 이루어 힘을 보태는 다른 노동자들과 운동가들,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은 지금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반올림”의 모습과도 같다.

 


4. 번역을 마치며

 

사실 이 책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글쓴이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고, 또 어떤 부분들은 낯설고 어려워 이해하기 버거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만한 가치는 여전히 충분하다. CTC는 세계 반도체/전자 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의 문제를 망라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단행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한글로 옮기기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만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전문 번역가를 구할 만한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고를 내놓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자발적인 의지로 힘을 보탠 분들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김승섭, 김승현, 김정화, 김태훈, 류현철, 박원일, 박정준, 유홍식, 이주한, 정호연, 정효진, 조성진, 최영철, 최홍조님은 각자 자신의 직업과 활동으로 바쁜 가운데에도 시간을 쪼개어 영어 사전과 인터넷을 뒤져가며 초벌 번역을 맡아주셨고, 손진우, 이지연, 이현정, 이용대님은 다소 거칠게 번역된 원고를 다듬는 일에 힘을 보태주셨다. 박영일, 손진우, 이지연, 이훈구, 장안석님은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일일이 넘겨가며 ‘찾아보기’를 꼼꼼하게 완성해주셨다. 이 분들 중 어느 한 사람만 없었더라도 이 책이 온전히 나올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깊이 감사드린다. 오랜 시간 동안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준 “반올림” 동지들과 메이데이 출판사, 그리고 책을 편집하고 인쇄하고 독자들의 손에 닿을 때까지 애써주셨고 애써주실 모든 노동자들께도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통해 우리 모두를 일깨운 고 황유미, 이숙영, 황민웅님의 영전에 이 책을 드린다.

 

- 2009년 10월, 공유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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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17:50 2009/11/20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