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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5
    괴물보다
    공돌
  2. 2006/08/04
    새는 좌우로 난다?(1)
    공돌
  3. 2006/08/04
    지갑 잊어먹음
    공돌
  4. 2006/08/04
    블로그 정리
    공돌
  5. 2006/08/02
    노무현 귀때기
    공돌
  6. 2006/08/02
    그게 어떻게 절충이고? 임마~
    공돌
  7. 2006/08/02
    우리들의 알량함에 대하여
    공돌
  8. 2006/08/02
    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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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02
    Der kaukasische Kreidekreis
    공돌
  10. 2006/08/02
    연금술사
    공돌

괴물보다

괴물봤다.

 

공룡영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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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좌우로 난다?

블로그 대문에 글 하나가 올라와 있더라.

 

http://blog.jinbo.net/chasm/?pid=12

 

나는 이런 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근데 읽으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좌파는 훈장이 아니다."

 

좌우당간 새는 날기만 하면 된다든지, 날아봤자 새라든지,

 

좌우파가 서로의 날개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혹은 묵인)하고 있다는 것한다든지. 결국 이런 보충적 관계라는지. 참 쓸데없는 지적이고 별 의미없는 성찰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결국 좌파의 순수성을 높여내자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리영희 선생의 "새"라는 메타포는 "사회"다. "날개"를  좌우파의 이념으로 치환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그렇다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의 문제는 좌파의 순수성, '우리가 정통'이라는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나는 이들의 논의가 개신교 신도들의 '이단'논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나와 다른 자를 철저하게 구별하므로써 자신(기존 교회집단)의 권위를 회복하고, 기존 질서가 도전받는 일에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철옹성을 구축할 수 있다. 따라서 이단을 구별해 낸다고 개신교가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신도가 교회를 바꿀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새가 두 날개로 날든 말든 간, 새는 날아야 '살아'있는 것이다. 이제 닭을 보고 새라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좌파의 순수성을 논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바로 자신이다. 적과 나의 구분은 사실 낡아빠진 개념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적과 얼치기들이 더욱 설치고 다니기 때문이다.

 

결국 좌파가 분열하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새가 좌우로 날든 간에 안타까운 것은 두 날개 모두 심각한 관절염과 류머티스에 걸려있다는 점이다. 왼쪽 날개가 오른 쪽 날개를 도와줄 수 없다. 치료방법은 단 하나.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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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잊어먹음

재곤이가 사준 지갑.

그리고 현금카드와 교통카드.

신분증과 찜질방 포인트 카드.

 

 

"인생을 살면서 한 번씩 뜻하지 않게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리 기분나쁜 일은 아닌 듯하다.

쓰레기 같은 책들도 양장본이라는 이유로 일단은 책장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은 내가 손수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해 보아야 겠다.

새 책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말이다.

 

뱀발: 지갑을 잊어먹어도 술은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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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정리

블로그 정리가 끝났다.

 

사실 계륵과 같은 글도 지우지 못하고 올려두었다. 그리고 쪽팔리는 글도 지우지 않고 올렸다. 그 때를 생각하면 글쓰기와 생각의 시계열적 흐름을 보면서 반성하기 위해서다.

 

 

실제 옮겨 놓고 싶은 글 중 하드 디스크가 맛이 가서 옮겨놓지 못한 글도 있다. 조만간 현찰이 마련되면 하드디스크를 복구해서 올려야 겠다.

 

 

그리고 진보넷 블로그로 이사를 감행한 것은 기쁜 일이다.

상업적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사용하는 내내 광고나 대문에 있는 상품광고는 거슬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여기는 좀 다르다. 그래서 상업적이지 않은 블로그를 옮긴 것을 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일단 새집에 오니 마음은 푸근하다.

 

다만 선택적으로 글을 삭제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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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귀때기

오늘 신문을 펼친다.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할 수 있는 말이 바로 이런거다. 죽는 소리하다가도 '막가는' 소리를 하는 그 분에게 인간적인 동정도 가지 않는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아래 글에서 노무현의 지지자로 보이는 사람이 쓴 글을 보았다. 한국 정치사의 획기적 변화(내가 보기에는 이변일 뿐이다. 이건 폄하가 아니라 현실적인 평가이다.)라고 하지만 정치개혁의 측면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정치권의 정치자금 문제는 그 한계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나는 아래 글에서 그 글을 쓴 사람이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이 더욱더 노무현 정권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에 대해 반문하고 싶다. 그의 글이 더욱더 정돈되지 않은 일반적인 민주당(혹은 열린 우리당)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문제는 심각하다.

정권의 각료들이 드림팀이라고 공세적으로 방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는 건 삶의 양태가 변화된 것이지 계급적 상황은 다를바 없다. 과연 지금 우리가 독재라는 외부적인 탄압기제가 사라졌을 뿐, 정보화와 기계화로 생활환경이 바꼈을 뿐,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에는 노무현의 정책적 마인드를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노무현 정권은 과거 김대중 정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악의 ‘문민정부’가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말을 굳이 하지도 않아도 될 것을, 왜 저런 말을 계속해대는지 그 속내가 너무나 뻔이 보여 더욱더 속상하다. 이제는 노무현의 귓때기까지 뭐가 막혔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2003.11.06 22: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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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떻게 절충이고? 임마~

논쟁이 붙었습니다. 물론 음주중에 붙은 논쟁만큼이나 열띤 것은 없지요. 그러나 하는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이 모두를 지치게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야~니네들 보니가 룸펜같다. 이제 고마해라."이런 분위기였고, 또 한 쪽은 "어떻게 절충과 수용이 같을 수 있냐, 너는 너무 제도권적 사고를 하는 게 아니냐."는 야박한 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문제인 즉은 이렇습니다.

법대출신들은 "어짜피 법제도에서는 헌법의 이념성에 있어서 자본주의 헌법과 사회주의 헌법에 대한 가치평가를 한다는 자체는 의미없는 일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회대출신들이 "그건 니네들이 배운 헌법책에 나온 그대로지. 근대는 모두 사회복지국가적 헌법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정도의 차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잖아."

이 때 문제를 제기한 법대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절충의 형태로 가는 거지. 사회복지국가적 헌법도, 사회복지국가도 모두다 절충지점을 찾은 결과물이잖아?"

이 때 공대출신의 한 후배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건 수용의 개념이 더 강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내 개인적으로는 사회복지국가적 형태를 띤 국가가 본질적으로 그 경제적 시스템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변형된 자본주의가 아닐까요?"

그러자 바로 법대출신이 반박합니다.
"그건 아니지. 수용과 절충의 개념은 어짜피 종국적으로 같은 거지. 그러면 너 말대로 사회주의라는 시스템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사회복지국가가 절충이 아니라면 절충은 도대체가 뭐야?"

긴 침묵이 흐릅니다. 같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쐐기를 박은 질문이 법대출신의 입에서 거미줄 흩어져 나옵니다.

"전에 너가 말했던 임금채권의 최우선 변제에 있어서도 그렇지. 결과적으로 질권, 저당권을 가진 사람들도 회사가 도산하면 자기들 생존의 문제도 그것에 달려있는 거잖아? 그래서 양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절충안이 지금의 형태가 아니냐고? 사실 초기 자본주의가 지향했던 소유권 절대 이념을 근대 자본주의는 이제 제도적인 장치로 제한하고 있잖아?"

아~답답해집니다. 법대출신, 얄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대출신의 후배는 미덥지 않게 바라보다가 이런 얘기를 꺼냅니다.

"선배가 말한 건 이해는 하죠. 그렇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절충안은 아니라는 거죠. 균형적인 관점에서는 질권, 저당권자도 살아야겠지만 임금노동자의 입장이 아주 미미하게 반영된, 불리한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들도 절충안이 된다는 말이잖아요? 사회주의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시스템에서 절충이라는 개념은 내가 볼때는 없다고 보는데. 다만 변질된 형태는 존재해도 말이죠....."

법대출신 열받습니다. 당연히 옆에 있는 '꿘'을 떠나 대구빡이 돌빡이 된 우리들에게는 정말 이런 얘기는 답답하고 갑갑한 얘기입니다. 그러다가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 서로의 논쟁 스타일에 대해서 또 한마디씩 주고 받습니다. 이게 점점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결국 술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 라운드는 끝나고 이제 2라운드로 갑니다. 아~잠온다...

"정리해보자. 내가 볼 때, 절충이나 수용이나 똑같다구. 계속 너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절충안이 사회복지국가가 아니라고 하는데, 너 말은 사회복지국가 또한 결국 자본주의의 한 변형이라고 볼 뿐이다. 이 말을 하는 거잖아? 그러면 절충은 뭐냐? 수용은 뭐냐라고 물은 거고. 너 말대로 수용은 한 쪽 일방의 왁꾸는 그대로 있고 다만 일부나 그 이상에 대한......"

법대출신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짤랐습니다. 다시 사회대 출신이 말했습니다.
"나는 절충의 형태가 하나는 질적으로 변형되는 것과 양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게 물리적인 결합이든 변증적인 결합이든 간에 절충은 결국 또 다른 것으로의 전화를 의미한다고 본다."

역시 사회대는 추상적입니다. 그러면 예시를 들어라는 법대출신의 반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그는 면벽취침에 들어갑니다. 이제 남은 건 3명....이건 완죤히 서바이벌 논쟁입니다.

대충 무슨 말이신 줄은 아시겠죠?

한 놈은 계속 "그게 무슨 절충안이냐, 하나의 변질된 형태지"라고 반박하고 한 놈은 "결국 니가 말하는 절충과 수용의 차이점은 뭔데?"라고 지리하게 물고 넘어 갑니다. 양자의 입장에서 절충과 수용을 구별하지 않는 법대출신의 야비함에 모두가 혀를 내두리고 있습니다. 아~ 그게 어떻게 절충이고? 임마~

절충을 정의내리기 참 어렵습니다. 한 몇 년 법서 읽었다고 결국 하는 말이 1설과 2설 사이에는 항상 절충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하하~ 임금노동자의 생존권이 우선이냐! 질권, 저당권자의 재산권이 우선이냐?(재산권이라기 보다는 생존권이라는 표현을 씁디다.) 결국 절충은 그 사이에 임금채권의 보장에서 최우선 변제와 같은 것이 절충이라고 법대생은 주장합니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은 절충이 아니라고, 재산권 중심의 사고를 하는 집단이 임금노동자의 생존권에 대한 저항을 막기위한 일부'수용'에 불과하다고. 그렇다면 과연 절충은 뭔지. 도통~
써놓고도 이게 논쟁인가 싶습니다요.

2003/08/2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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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알량함에 대하여

간만에 아주 늦게 지하철을 탔습니다. 오늘은 제가 하던 일(직장이라면 좀 뭣하고)을 그만두는 날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앞으로 생계는 어떻게 꾸릴지, 공부는 잘 될는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늦은 시간에 앞으로 제가 하던 일을 인수인계해 줄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곁들여 소주한 잔을 마시고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혹시나 빵이나 기다리던 버스는 역시나 오지를 않는군요. 시불시불하면서 지하철을 타러 내려옵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묵은 배를 주려잡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한 시민단체의 스티커를 보면서 저는 지하철을 빨리 타야겠다는 일념으로 볼 일을 일사천리를 끝내고 지하철 승강장으로 뛰어내려갔습니다.

붕~ 이미 지하철을 떠나버렸습니다. 불러도 소용없고, 예전에 호기를 부리며 지나가던 지하철을 세워서 타고 갔다는 얘기는 온데간데 없이 다음 지하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익근무요원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니 다음에 올 지하철이 막차인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술김에 독서를 하면서, 양 귀는 쫑긋 세워듭니다. 이번에 놓치면 '끝장이다'라고 하면서 저는 '뚜르르르'하는 소리만 학수고대합니다.

드디어 지하철에 저는 입성하고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붕뜨고 있습니다. 아~ 집은 나의 안식처요, 삶의 터전이요, 휴식의 공간이요,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자리도 많습니다. 평소에는 어디든지 앉으려는 인간의 얄팍한 본성 때문에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강탈(?)당하면 분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런 생각에서 저를 아주 평온하게, 거의 득도한 중처럼 지하철 자리에 온몸을 묻습니다.

가끔씩 보면 지하철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모금 및 각양각색의 구걸을 하는 사람들에 이르기 까지 늦은 시간에도 그들의 실천(?)은 지하철에서 끊이질 않습니다.

'안년하시므니까. 조희는 국제학생봉사단 이루본 대표 기못찌(가명), 나카무라(가명) 이므니다. 조희는 소마리아와 아흐가니스탄 등 오료운 사람들을 돗기위해 모그믈 하고 있스므니다. 칸사하므니다'라고 모금을 하는 일본과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젊은 청년들을 보면서 한 번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지요. 사실 조금은 내키지 않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가능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동전을 들이미는 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치는 않습니다. 다만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조금 부담이 되지만 일단 동전을 꺼내기 전에 먼저 사람에 대한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사실은 감정에 더 치우치지만) 판단을 한 끝에 그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채워 줍니다.

때로는 지하철에 노쇠한 할머니나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보았을 때에는 저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를 벌까하는 계산도 해봅니다. 한시간에 얼마면 하루면 얼마겠지, 그러니깐 한달이면? 이런 생각들이 많아지면 호주머니와 지갑은 거의 용접이 된 상태로 열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는 도중, 오늘 내가 지하철을 내리기 직전에 저는 그런 알량한 계산들과 내가 가진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힘들다고, 때로는 경제적으로 내가 그리 풍요롭지 않다고, 아니면 그것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지 내가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고 내가 내 입으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을 때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다른 부분에서도 알량하게 작용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방금 먹은 술이 채 소화기를 타기도 전에 닭발을 먹고 올라오는 묘한 냄새를 동반한 트림을 꾹꾹 누르고 밟고서 저는 아까 꺼내든 책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분이, 약 20대 초반에 여자분이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하게 좌석에 앉은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한 손에는 큰 벙튀기 과자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팔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두둥~

"안녕하세요. 저는 부모님이 없구요. 동생이 많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이것을 팔게 되었...."

"어구..죄송합니다. 이번 역에서 내리거든요."

그리고 그 여자분은 나의 다음 자리에 앉은 분에게 또다시 그 설명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그리 두텁지 않은 잠바차림에, 앞니가 한 두 개 정도만이 남아있고 눈의 초점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채, 또렸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빨리 나아서 저도 빨리 잠을 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상술이라고, 그것은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눈 빛은 보면 진실을 말해줍니다. 적어도 다른 능력이 없는 저에게는 그런 것은 거의 신기에 가깝게 발휘됩니다. 그리고 황급히 저는 지하철을 내렸습니다. 찝찝합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니 2천원이 나옵니다. 순간 저는 나에게 쓰는 돈 얼마는 진짜 아깝지 않게 생각하면서 다른 삶, 그것도 생존의 벼랑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도 인색하고 알량한지 자못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분들이 정부에서 보조를 받는지, 혹은 누구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는지, 하루에 얼마를 버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 택도 없이 핸드폰 전화를 20분이나 썼고,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호기를 부려가며 얼마를 계산하겠다고 내색을 하면서, 20만원이 호가하는 기타를 사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구입했다고 남들에게 떠벌이고 다닐 때, 그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도 늦은 시간에 홀로 과장 봉지를 들고 동생 약값을 벌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이 따뜻해지는 것을 말하기 전에 나부터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가끔씩 내가 하는 소비 중에 남을 위해서 하는 소비가 얼마나 되는지, 가치가 있는 소비를 위해서 얼마나 정당하게 벌고자 하는지를 다시금 고민합니다. 한 때는 그 사람들이 지나가면 머리를 쳐박고 자는 척을 하거나 코구멍을 후비면서 딴 짓을 하면서 그 사람들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던 부끄러운 시간들이 제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하는군요.

만약 내가 그 사람의 처지라면, 자신의 그러한 절규를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진짜 그것이 진실인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 버냐고 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요?

예전에 한 티브이에서 앵벌이에 대해서 조폭이 배후에 있고, 그것을 시켜서 수익금을 착취한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분들의 삶이 더욱더 힘들어지고 어려워졌다는 다른 한 쪽의 뉴스도 접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내는 세금이 정치자금으로, 거액의 비자금으로 변모하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세금을 낼 수 있을까요? 문제는 안내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쓰여지는 것, 본래의 목적에 쓰여지도록 만들어내는 구조와 그 구조에 대한 믿음이 있었야 합니다.

오늘 술자리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것을 술상 위에서 떠벌이다가 정작 그들의 삶에서는 나는 피해가려는 모습을 되내이면서 다시는 그렇게 알량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반성해 봅니다. 변화는 일상에서 자그마한 나의 행동이 변화하면서 점점 사회를 전염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새샘 느껴봅니다. 오늘은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평소에 편협하고 속좁게 굴던 내 가슴을 양주먹을 쿵쿵 내리치면서 이렇게 다짐을 합니다.

"열심히 사세요. 저는 별로 도움은 안되겠지만 나는 당신을 믿어요."

2004.02.18 0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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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지금껏 여러 유혹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나를 설득할 이유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싶었어요. 결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아이.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말죠. 피터펜 콤플렉스!

그런데 이제 유혹이 덩어리가 되어 옵니다. 떼거지로 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욕망과 화학적으로 결합을 하고, 급기야 적분을 하여 시그마를 끼워 모두 더한 값에 세제곱을 하고 옵션으로 0.78615에 2×3.14를 곱하면 4.937002가 나오는데 이것은 피라밋의 둘레값과 같게 되어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아~!

하나씩 하나의 유혹만 덤벼라. 오늘은 그래 네 놈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참자. 오늘은 술을 마시지 말자. 잠시라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젓갈같은 것들은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서 분노를 삭히고 기억을 지웁니다. 그리고는 학교 앞으로 갑니다. 얘들 몇 명이 보드게임방으로 갑니다. 피씨방을 싫어하는 무리입니다.

마작같은 'Rummikub(룸미쿱 맞나?)'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패가 마작같은데 마작과는 다른 게임입니다. 이걸 한 판 합니다. 대갈통에서 전기충격을 당한듯이 찌르르합니다. 이런. 내가 근 1달 이상 대굴빡을 놀려두었구나 경탄하면서 한 판 더 합니다. 눈이 더 아파요.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이제는 새로운 걸로 합니다.

이번에는 '젠가'라는 게임인데 54개의 나무조각으로 만들어진 블록을 빼내서 위에 차곡차곡 쌓는 건데 역시나 담배를 많이 피고 술을 많이 먹는 나로서는 결국 '손떨림'을 견디지 못해 모두가 쌓아놓은 나무블럭을, 그 바벨탑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뷩신, 환자....

이건 벌칙을 마음대로 정합니다. 특히 뺀 놈과 그 전에 잘못 뺀 놈은 부진정연대책임을 지도록 하여, 술값을 쏘게한다거나 게임비를 내게 해도 좋은 위하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손떨림에 이미 낙인찍인 사람들에게는 낙인화작용이 사회복귀를 결정적으로 저해한다고 봅니다. 통설입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좀 스피드를 요구하는 '할리갈리'라는 게임을 합니다. 게임이름을 외우지도 못하겠네요. 카드를 냅니다. 그리고 5개의 모양이 만들어지면 스뎅으로 만든 벨을 누르면 남은 카드를 다 착취해가는 게임인데, 벨은 커녕 스텡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카드는 아예 나눠주는 건만 못하게 모조리 빼았깁니다. 이 카드의 규범적 효력에 관하여는 양면적 적용설과 편면적 적용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벌칙에 대한 협약과 같이 본 게임에 대한 최저기준의 성격을 갖지 않으며 표준적인 벌칙이 작용하고 있고 이 게임은 저같은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카드 두장 유리하게 주는 원칙'을 부정하게 된다면 결국 카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 놈의 결정권능은 더욱 강화된다고 보는데 견해가 이 게임의 주류입니다. 두장 더 달라고 땡깡을 부려도 소용없습니다. 에잇. 다해먹어라!!

"아항~주식해서 잃으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

그러나 이런 게임이 저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죠. 역시 정신 건강에는 술입니다. 술~적당히 마시는 술!

2003.09.29 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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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kaukasische Kreidekreis

1997년 갓 휴가나온 나는 한 선배의 집에서 '전쟁입문'이라는 낡은 책자를 집어들었다. 근데 글자보다는 그림이 많았던 걸로 기억되는 그 책은 바로 브레히트가 쓴 것이었다. 그렇게 브레히트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남은 시작되었고, 복학이후 브레히트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그의 대한 매력은 점점 더해갔다.

1999년. 극단새벽에서 브레히트의 원작인 '코카서스 백묵원'을 새로이 재구성하여 '어느 골짜기에 관한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연극 보지 못했다. 많이 아쉬웠다.

2003년 올해 어느 대학에서 원작을 충실하게 연출한 브레히트의 희극을 맛보게 되었다. 실로 이게 몇 년만인가? 빼고 더하는 일이 자루할 정도로 시간은 오래되었지만 망설임없이 이 연극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학생들의 연기지만 그래도 많은 노력이 있음이 느껴졌다. 다만 연기의 숙련정도가 차이가 많이나서 어색하다는 느낌이 다소 있었지만 그렇게 껄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대학에서의 연극이 3,000원을 받을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적이다.)

장장 2시간 40분에 달하는 코카서스 백묵원.
'솔로몬의 재판'과 12C 중국고대소설 '회란기'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한 아이를 가운데 두고 친모를 가리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그러나 본래 관점은 시작부분에 골짜기의 소유권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특히 극단 새벽의 '어느 골짜기에 관한 논쟁'은 "땅은 가치있게 쓸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는 원작의 결론과 달리 비무장지대의 소유권 분쟁을 통해 "땅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의 내용을 번역하는 수준의 연기가 아닌 한국사회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의 연출과 각색이 필요한 것이 이 작품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것이 자칫 원작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도 위험이 항상 이 작품에는 도사린다. 그러나 걱정은 마시라. 브레이트의 탁월한 계산이 이 극작에는 단연코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틀사건 안에 또다시 또다른 사건이 내부에 다시 액자식으로 끼워져 있는 연극으로 보통 '연극속의 연극'(극중극)이라고 한다. 나중에 장 뤽 고다르는 이것을 영화에 도입하기도 한다는데, 여하간 틀사건은 2차 대전 후 러시아의 두 집단 농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토지 소유권 분쟁을 다룬다. 그래서 틀사건을 어떻게 조명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본 연극은 조금 이 부분이 부족해서 아쉬웠다. 주요 포커스가 연극의 말미에 아즈닥의 재판에 그 포커스를 잡은 것으로 보여서 그렇다.)

이 연극에서 우리는 틀사건으로서 소유권 논쟁과 그 내부에 존재하는 총독의 아이를 키우게 되는 한 하녀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골짜기의 소유권 논쟁이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 이는 결국 '극중 속의 극'인 딸의 친자확인 소송에서 구체화된다.

원래 총독의 아이였던 '미헬'
미헬의 친어머니 나텔라(총독의 부인이다)와 재판정에 서게 된 그루쉐라는 하녀. 그루쉐는 미헬이 자신의 아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우둔한 재판관인 아츠닥은 검사를 시켜 미헬의 주위에 백묵으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게 한다. 그 동그라미의 안에 아이를 들어“?한 뒤, 양어머니와 친어머니가 미헬을 그 원 밖으로 아이를 끌어내는 어머니가 진정한 어머니라고 판단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루쉐는 아이를 차마 잡지 못하고 말한다.

"나는 아이를 꽉 잡지 않았어요. 재판관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한 것 취소하지요. 용서를 빕니다. 아이가 모든 이야기를 할 때까지 그를 단지 데리고만 있겠어요. 그 애는 아직 말을 몇 마디밖에 못합니다."

그러자 재판관 아츠닥은 그루쉐와 나텔라에게 다시 한번 아이를 잡아당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루쉐는 아이를 끄렁당기지 못한다.

'재판관님. 제가 무례했던 것은 죄송해요. 그렇지만 제가 아이를 키웠어요! 내가 아이를 다치게 해야겠어요? 나는 못해요."

변호사를 대동한 나텔라는 승소를 확심하지만 아츠닥은 결국 그루쉐에게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그루쉐에게 멀리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극중에서는 이 부분이 압권인데, 조금 아쉬운게 있다면 음향이나 그런 결정적 판결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나텔라를 추방하고 총독의 재산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그 공원의 이름은 재판관 아츠닥의 이름 딴 '아츠닥 공원'.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 나름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결국 브레히트는 키운 자식의 정을 혈육의 정보다 강하게 긍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앞서 소유권 논쟁에서도 그 소유권이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필요한 자에게 분배'한다는 강한 이념적 메세지와 화학적으로 결합한다. 이는 두가지의 극이 서로 다르지 않는, 서로를 관통하는 극으로 마무리된다.

2003.09.18 21: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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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도지히 공부가 안되서 친구가 잠시 빌려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었다. 1시간 정도에 뚝딱 읽어 치웠다. 내가 계속 여행을, 돌아와서는 내가 달라져 있는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졸랐는데 결국 하는 수 없이 이 책을 빌려준거다. 여행, 그것은 이제 설레임이 아니라 나에게는 도전이고 변화이다.

영화 토탈리콜. '미래에도 여전히 웬만한 모델 허리 굵기'만한 팔뚝을 소유하고 있는 더그 퀘이드는, 화성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하지만 돈이 없어 가지를 못한다.
"화성산을 등반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리콜을 방문하세요."
리콜이라는 여행사를 찾아간 퀘이드. 그는 여행사 직원의 상품 소개에 의구심을 갖는다.

"실제 여행을 갔다 온 것처럼 추억을 가질 수 있나요?"
"물론이죠.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여행이후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그건 사고죠. 그런 일은 아주 흔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죠."

그러면서 퀘이드는 여행사 직원이 진짜하고 똑같은 화성 여행 기억을 심어준다는 회사 광고를 점점 신뢰하게 된다. 그러다 여행사 직원은 파격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모든 여행은 다 똑같죠. 모든 여행의 공통점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똑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그게 어떻다는 말이죠?"
"달라져 있는 새로운 모습, 그것을 원하지 않나요? 우리 리콜에서는 '자아여행'이라는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결국 퀘이드는 여행사 직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밀 요원이 돼서 화성을 구하게 된다는 기억을 이식받기로 한다. 그러나 그에게 처해진 운명은 그를 단순하게 기억을 이식받는 조건의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위의 대화는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정리한 거니깐 혹시 영화를 우연찮게 보고나서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지어다.)

오늘 정말 만만디 정신으로 읽었던 '연금술사'는 흡사 고은의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를 연상케하지만 주인공'산티아고'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호탕함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외국 소설은 자고로 번역이 중요한데, 그 책의 저자가 밋밋한 글쓰기를 했는지, 아니면 번역가가 밋밋하게 번역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가 생각났다는 말이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앞뒤를 재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에 모든 것에 몰두한다. 도자기를 빚는데 손가락이 걸리적 거리면 도끼로 잘라버리고, 모든 것을 투자했던 사업이 일 순간에 무너진 후에도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우릴 방해할 것이 없다"며 오히려 홀연해진다. 이미 그는 대자유인인 것이다. 조르바는 결국 자신이 초연한 존재로, 모든 것에 대항하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 이미 바람처럼 세상을 비집고 들어간다.

'연금술사'에서는 인간 산티아고 또한 연금술사의 마지막 진언. 바로 연금술은 바로 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언어'가 숨겨진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결국 '사랑'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부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늘 놓치고 있는 것을 점지한다. 그건 '떠남'이다. 산티아고도 조르바도 화엄경의 선재도 모두 '떠남'으로서 얻는다. '떠남'은 하나의 비움이다. 그 비움이 결국 모든 것을 얻게 하지만 그들은 결국 얻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참다운 '얻음'이다.

매트릭스에서 우리는 그러한 '비움'='얻음'의 동시다발적인 개념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사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매트릭스는 일시적으로는 모르지만 영구히 인간을 그 속에 가둬놓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탈출하려고 하는 것인 셈이다. 있다, 그러나 없다. 그것이 매트릭스에서 숟가락의 존재에 대한 오라클의 설법처럼 결국 모든 양상은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두 개로 쪼개보는 우리의 허망한 사고에서부터 시작된다.

메시아는 결국 자신이 되어야 한다. 토탈리콜의 퀘이드나 매트릭스의 네오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깨어나기 위해 각고의 시련을 겪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자피 세상을 구원한다는 목적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떻게 변화해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자신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과 의지의 종합선물세트가 동시적으로 인류의 미래와 함께 합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건 이미 독수리 오형제에서도 증명된 바가 있다. 나는 그 오형제가 핵가족시대에서 점점 퇴물이 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아쉬움....

오늘도 여기를 떠나면서, 언젠가 완전히 떠나버릴 이 공간에 모든 주변을 찬찬히 돌아본다. 구석구석 말이다. 어짜피 존재는 다들 사라지거나 변질되는 법이니깐.

2003.08.22 00: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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