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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돌
  2. 2006/08/02
    에릭홈스봄
    공돌
  3. 2006/08/02
    공동번역 성경
    공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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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보스와 붉은 돼지
    공돌
  5. 2006/08/02
    개인기
    공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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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죄추정의 원칙.
    공돌
  7. 2006/08/02
    교권침해...엄마들이 학교를 찾아가다
    공돌
  8. 2006/08/02
    공돌
  9. 2006/08/02
    깨달음이 뭘까.
    공돌
  10. 2006/08/02
    공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의 도처에는 새로운 시도 발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그러한 노력들이 '개량주의'으로 치부되거나 매도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도 비단 그런 일은 흔히 발견된다. 좌파할동가들은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와 같은 사람들을 개량주의자로 도매금화 해버린다.

그러나 그들도 유심히 읽으면 반면교사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로자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의 논쟁 속에서도 왜 카우츠키 해법에 대한 로자의 분석이 때로는 그 당시에 대중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는가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 로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편이다.

 

얼마전 환경운동가 대니 서라는 작자가 텔레비젼에 모습을 간만에 드러냈다. 그가 77년 생 29세이니깐 22살 때 다큐멘타리를 했다고 하니, 약 7년만에 그가 어떻게 변신,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그를 보면서 두가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를,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첫째는 그가 왜 환경운동가에서 에코-스타일리스트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다. 그는 참으로 똑독하고 자기주관이 강한 소위 '난 놈'이다. 그에 대해서는 시중에 나와있는 책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가 '지구의 날'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왜 우리는 노동자의 날에 태어나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을 묻어나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좀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다. 경찰이 경찰의 날에 태어났다고, 목사가 성탄절에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가 부러워할까에 댛서는 지극히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그냥 여기까지는 이렇게 해두자.

 

그의 직업 변화는 기존 환경운동가들과의 연대를 박차고 나가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방식에 맞는 운동방법을 택한 것이고, 그것이 설사 운동이 아닌 하나의 비지니스라해도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할 것이다. 그의 행동이 환경운동의 대의와 배치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방법의 차이이고, 그 목표에서 상이한 형태라 할지라도 사회에 유익한 방법이라면 굳이 그것을 비판하거나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도리어 부메랑이 되는 법이다. 다만, 그의 행동을 면밀하게 보면서 우리가 그의 아이디어에서 배울 점은 무엇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 두가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둘째, 대니 서라는 작자를 보여주는 언론의 태도, 즉 언론관에 따라서 많은 부분이 달라져 보일 수 있다. 언론관이라 뭣하지만 방송사에 보내는 대니 서의 평가는 가히 극찬이다. 비지니스 사업가로서도, 기존의 환경운동의 형태면에서도 세련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중산층의 환경운동(혹은 환경관련)참여는 환경문제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성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자기가 출판하는 잡지회사에 대기업의 광고가 선듯

 

나의 광고를 내어달라는 것은 자기 회사의 '친환경성'을 상품화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없이 오직 '성공'의 관점에서만 미화하고 포장한다.

이건 좀 문제있다. 과정이 없다. 광고를 게제하기 까지의 환경서약 쯤은 있지 않겠는가. 그런 과정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니 서가 자기는 핸도폰과 자동차없이 사는 사람이고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방어하면서 산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매니져가 전화다받고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대충 선수라면 좋게봐주겠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서 그것을 풀어주는 뭔가가 없다는 건 문제있다. 대니 서가 그리 못되먹은 작자는 아니라고 보지만 냉철한 평가도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위 두 가지를 묶어서 그것을 내 행동양식에 조금이나마 접목하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먼저 일정한 원칙은 존재하되, 그 원칙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의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의 경직성이 전체가 유익한 방향으로 가는데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거라면 새로운 발상으로 전환도 필요하다. 그러나 실험에서 그쳤을 때에는 과감하게 돌아오고 실험이 가능성을 보이면 끝장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나와 관계된 사람, 혹은 대중들과의 소통에서도 항상 소통이 과도할 정도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 남의 의견을 재단해서는 안되며 재단해야 하는 경우면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속의 평가는 일부가 주도권을 잡은 평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충분하게 내릴 수 있는 평가로서, 한 쪽 방향의 경직된 형태의 비판이 아니라 '상호 평등한 양과 질의 비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정도로도 개량이나 변질을 극복할 수 없다면, 그냥 제자리에 있는 것이 낫고, 이 정도의 자세가 되어있다면 개량이나 변질의 비판을 감수하고도 한 번 새로운 발상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물론, 내 생각에는 그렇다.

 

2005.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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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홈스봄

“공산주의를 비롯해서 대의를 주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갖는 최악의 문제는,

 너무나 고결한 나머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까지도 정당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적은 그르지 않다.

 또한 세상에 대해 적당한 기대감을 갖는 사람만이 끔찍한 해악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는 지적도 그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정이 없다면 인간이 인간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비록 그런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1999, 에릭 홉스봄)

 

홉스봄. 요즘에는 밴디트(Bandit)를 읽고 있다. 집중해서 읽을 시간은 없지만, 가끔씩 읽고 있다. 그이의 학문적 성과물 속에는 학문적 성찰외에도 인간에 대한 내면적 성찰의 깊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 책은 잘 없다. 최근에 그런 책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전순옥 선생님의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나의 노동학과 관련된 지식 뿐만 아니라 노동철학과 인생철학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남성노동자들이 많이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한다.

 

위의 홈스봄이 말한 것을 씹어 보면서 또 하나의 느낌이 들었다. 원문이 어떤지는 몰라도 말이다.

 

세상에 대한 적당한 기대감. 그러나 인간 본래 구실. 나는 이 사이의 벽을 '공정함'으로 풀고 싶다. 공정함이 있다면 끔찍한 해악과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고, 인간의 본래 구실이라는 "평등"이라는 가치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말은 지금은 노망든 할매인 오리아나 팔라치(얼마전 내가 본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을 읽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가 한 말과 겹쳐진다. 그래서 공정함이 생각났나 부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온 이들이 보통사람과 달랐던 점은 그들의 지성도 힘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상도 아니며, 오직 보다 원대한 야망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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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성경

공동번역에 참여하셨던 두분의 목사님. 문익환 목사와 이현주 목사.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읽었는데....출처의 제목은 '개신교에서 공동번역성서 사용을 거부하는 이유'이다.

 

 

문익환 목사 : 공동번역을 하자니까 한가지 사실이 발견되었어 무엇인지 알아?

이현주 목사 : ???

문익환 목사 : 요새는 말이야 구교(Catholic)가 신교(新敎)이고 신교(Protestant)가 구교(舊敎)더라고 !!

 

 

공동번역 성경은 예수와 제자가 서로 존대말을 쓴다. 그리고 한글문장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공동번역 성경은 번역을 맡은 학자들이 일정한 기준에 따라 합의한 부분이 많아 성경을 날 것으로 읽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 성경이 카톨릭과 개신교의 사제, 목회자, 학자가 참여하여 번역하였음에도 유독 개신교는 이 성경의 사용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웃긴 것은 교회 신자들에게는 권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책장에는 다 있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하느님으로 바뀐다고 하느님의 헤어스타일이 바뀔지언정 그 본질은 바뀌진 않는다. 또한 '보혜사'라는 이런 말들은 '협조자', '도움주는 이'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성경이 가지는 진리의 타당성이 높아질 수 있다.

 

여하간 성경에 나오는 많은 구절이 역사적으로나 성찰하기에 좋은 구절이 많아 다시 하나 구입하려고 하는데 여간 쉽지 않다. 신약성경은 새번역성경(카톨릭에서 최근 번역, 출판)과 구약성경은 구약학자 최의원 박사의 ‘새즈믄 우리말 구약정경(신앙과 지성)'을 사도록 해야 겠다. 잔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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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와 붉은 돼지

보보스.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

 

강준만의 간단한 설명.

 

"보보스의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우디알랜의 영화, '애니홀'에서의 압축적인 지적.

 

“쇼핑백을 들고 카페를 전전하면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인간만 아니면 됐죠 뭐.”

 

쇼핑은 할 수 있다. 쇼핑백에 무엇을 담는가가 문제다. 머리 속에 담겨진 것과 쇼핑백에 담는 것이 다르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개인은 모순이지만 이런 집단은 한데 어울린다. 저거들끼리 주고받는 것이다.

 

"진보적 아나바다". 딸딸이다. 서로 손을 잡고, 요래~요래~요래요래~

서로 돕는 자위행위다. 이것은 모순을 뛰어넘는 변태다.

 

진중권이 경비행기를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포르코 로소’(Porco Rosso·붉은 돼지)라고 이름을 붙였단다. 그것이 중형급 자동차와 비슷한 가격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타고다닐지 걱정이다. 기름값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가 보보스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 경비행기 자체에 대해서는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언제 누굴 태울 것인가가 문제다. 붉은 돼지가 왠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 그리고 갑자기 수해와 경비행기가 오버랩되는 이유.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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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

공부. 

 

공부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기다. 시험을 잘쳐도, 시험성적이 좋아도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부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다시말하면 물고기 낚는 사람이 낚시도구를 잘 다루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낚시도구를 잘 다룬다고 고기를 많이 낚는 것은 아니다. 예수처럼 말로써 완빵에 고기떼를 발견하기는 사람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성대모사 잘한다고 다 잘사는 것 아니다. 마찬가지다. 아예 고도로 숙련되든지, 아니면 줄을 잘 타든지. 여하간 결론은 버킹검. 공부는 자기탐구의 과정이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 되버린 현실을 부정할 수 만은 없다. 다만 그런 현실에 가끔은 낙담하고 신경질이나 이런 현실이 말세라고 생각할 때, 영혼의 아가미는 적어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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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의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경찰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무죄추정의 원칙. 이건 그들의 눈에는 이미 유령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권리에 있어서는 분명했다. 그러한 권리가 타인의 권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 때, 사회는 좀 더 진보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 그가 100%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피의자였을 때 '피의자 '라는 말을 방송에서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연쇄살인범'. 이미 언론과 여론에 의해 이미 그는 판결을 받은 자가 되었다.

 

그러나 좋든 싫든 간에, 그가 법정에서 재판을 거쳐야 비로소 그는 '진범'이 된다. 시민들의 판단은 시민에게 맡기고, 판사의 판단은 판사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나 판사를 믿지 못할 일이 많아 그것이 문제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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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침해...엄마들이 학교를 찾아가다

먼저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규명해본다. 쉬운 예로 미국을 보자. 1965년 틴커 판결 전후에 나왔던 논의로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특권이론, 부모대위이론, 계약이론,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 등으로 각자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지 모르지만 약 7-8년전만 해도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이 통설이다.

 

각 학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특권이론은 전통적으로 재학관계를 학교가 학생에 대해 가지는 특권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초헌법적 특권을 서당의 훈장에게 부여한다. 말이 안되는 이론이다. 다음으로 부모대위이론은 학생에 대해 부모의 지위를 대위하여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이번 사건에 비추어보거나 개정 사학법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은 이야기다.

 

학생과 학교는 계약관계라는 입장 또한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의무교육 외에 비상식적인 부분도 이해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여하간 학교가 학생에서 일련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일정한 행정작용과 비슷하게 보는 것이 설명하기에도 학생의 권리를 보호하는데도 쉽다. 왜냐하면 사법적인 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학교와 학생의 소송상의 대립. 이건 뭔가가 좀 어색하다.

 

이런 어색함은 '교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움에 있어 기본적인 전제는 선생과 학생간의 신뢰와 존경,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의 흐름은 이와같지 않다.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통제와 규율, 지배와 공포에 있다. 이건 학교도 산재되어 있는 권력기구에 불과하다는 미셀푸코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교는 당연히 아이들의 신체일부까지도 간섭하고, 또한 폭력을 행사한다. 교사의 폭력은 사실상 국가폭력과 다르지 않는 미시적 권력의 폭력이라고 본다. 여하간 이러한 이론의 밑바탕으로 가지고 이번 교권침해 논쟁에서 빠져있는 것을 살펴보자. 생각해보니 위의 이론은 그냥 재미삼이 써 놓았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히 든다. 지울까 말까.

 

1. 본질

 

교사가 무릎을 꿇다, 요게 굴욕적이고 교권침해라는 이야기인데, 부모들이 굴욕적으로 한 것이 무엇일까. 전후좌우를 살펴봐도 나는 부모의 입장을 먼저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10분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에 밥을 먹어야 하고, 어느 놈은 마늘쫑을 제대로 씹지못해 마늘쫑을 그대로 토하기까지 하니 부모의 마음에 마늘쫑이 아니라 마늘이 다발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다.

 

급식 3교대. 요게 문제다. 급식체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고 부모들은 먼저 선생과 교장에서 일단 이성적으로 급식의 문제를 이야기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사태의 흐름은 이렇게 가지 않았다. 부모들은 선생의 집으로 가서 항의를 했고, 선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다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있었고,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다 외면하고 있었다.

 

근데 급식지연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밥을 빨리먹으라는 종용이 반성문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 간과하고 있다. 밥을 늦게 먹은 것이 죄인가. 아이들이 밥을 늦게 먹는다는 이유로 채근하는 것이 교육인가. 행정상 다음 교육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선생의 책임이니, 책임을 벗고자 밥을 빨리 먹게 하고, 늦게 먹은 아이들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해서 다음부터는 화이팅해서 더 빨리 먹으라는 것인가.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게, 반성문의 내용이 과연 어떠했을까가 문제다. 틀리지 않은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적어도 밥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이 시간을 벌어주어 밥먹는 시간을 확보해주었어야 했고, 선생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관련 학교회의나 교사의 신분으로 교감, 교장에게 이런 문제를 건의했어야 했다. 그래서 일단 교사가 옳지 못했다.

 

 

2. 학교측과 교원단체의 반응, 심지어 전교조까지.

 

절망이다. 실망이 여러 개 모여도 절망까지 잘 안간다. 그냥 실망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절망은 단 한개만 다가와도 숨쉴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학교측은 대책이 없었다. 교원단체는 화났고, 전교조도 뿔다구났다. 근데 문제는 교육적 대책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서 말이 없고, 그냥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학교에서 선생을 몰아세우고 결국 선생이 무릎을 꿇은 사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이게 자칫 자기 family챙기기로 가면 결국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철밥통이야기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전교조의 대응도 문제이다. 이게 절망으로 간 결정타이다. "무릎꿇린 것은 심각한 교권침해"...신문의 제호들은 그랬다. 전교조의 논평을 담아낸 언론의 문제는 제껴둔다고 하더라도, 이건 씨팔 믿었던 도끼에 대가리를 찍힌 기분이다. 진상조사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정작 밥 늦게 먹는 아이들이 사실 수업을 받기 싫어 태업을 하는 건지, 준법투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실제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자질 없는 선생들에게 받은 굴욕과 상처가 일순간 떠오르면서, 정수리에 철밥통으로 한 대 맞는 기분이다. 극복해야 하는데...떠오르는 걸 어쩌겠나?

 

3. 언론의 태도

 

요건 간단하게 해 논평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방송사들은 과연 기사를 보도하는 건지, 영화를 만드는 건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중심이 무릎 꿇는 극단적 모습만을 여러 차례 방영하면서 선생에 대한 애처로움을 극대화시켰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학생들이 선생에게 맞는 사건을 보도하면서 말이다.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 두가지 상반된 기사를 해석하고 내놓는 대책이 일관성을 가져야 언론의 시각에 대해 시청자와 독자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정말 무식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다. 자기들은 아이들이 없는지 모르겠다. 오바이트 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4. 부모들

 

부모들의 문제는 다음과 압축할 수 있다. 먼저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선생을 위압적인 분위기로 몰고 간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생 옆에는 최고 책임자인 교장이 있었다. 교장은 말이 없었다. 나비처럼 날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들이 적절한 대책을 제안하고 그에 대해 일정한 요구를 제안하는 하는 수준이 아닌 선생의 사직을 종용했다. 좋은 선생들이 많다. 짤렸다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복직한 선생들 생각하면 선생들이 외압에 의해 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일말의 양심과 도덕적 태도에 실망을 하게 될 때가 문제이다. 폭행, 성추행 등 아이들에 대한 반교육적이고, 반인륜적인 작태에 대해서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오히려 이러한 부분에 교권의 정화를 위해 학교당국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부모들의 이러한 문제는 문제일 뿐,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아쉬울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선생들이 왜 인식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5. 무릎을 꿇다

 

결국 선생은 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중에 비티 인터뷰에서 사건의 진정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고 하였다. 무릎, 함부러 꿇는 것이 아니다. 선생의 입장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대책을 내놓고 부모들에게 사과를 했었더라면 사건은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선생과 부모들은 한바탕 싸웠고, 이에 분이 안풀린 아지매들은 결국 학교로 달렸갔다. 당연히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런 부모들의 태도에 대항할 정당성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무릎을 꿇는가. 교육자의 태도는 정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진정이나 봉합을 위해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건 다분히 쑈라고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뱀발: 일단 생각만 갈무리. 비정규직 교사를 이야기하면 더더욱 골때리다. 비정규직 교사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공격받을 대상은 학교, 부모, 정규직 교사. 그들은 자신들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더 치열해야 한다. 더욱더 철저해야 한다. 그러나 글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음 기회로 미룬다.

 

200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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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이빨이 몽창 빠지는 꿈을 꾸었다.

정신을 똑바로 안사니깐 이 따위 꿈이나 꾼다.

어쩌든가 빠지 이를 끼운다고 용을 쓰는 내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뭔가 안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았다.

 

뱀발: 오늘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날이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사는 날임을 새삼스럽게 확인케 하는 날이다.

 

2006.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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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뭘까.

한 몇 일 동안 계속 "깨달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명상도 잠시 했다. 내면에 있는 것들은 살펴보는 시간.

 

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할까?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깨달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철학과 노장철학의 공통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극단적인 약점은 그 철학의 "무기능성"에 있다.

 

부처의 "깨달음",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라는 말이나 노자의 "무위"나 사실 별 현실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면 적당히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wellbeing(넉넉살이)의 한 방편에 다름아니다. 물론 절박한 심정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선방에 앉아서!

 

결과적으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나 말씀을 들으면 그 때는 좋은 것이다. 평안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물론 지속적으로 자기가 그러한 질문을 통해 절차탁마하고 삼매에 빠져들면 또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경지는 결국 도가 "튼" 놈과 아닌 놈 사이에 차별의 간극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잘 이용하면 왠간한 사이비 종교하나는 너끈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어나갔는데, 결과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이든, 부처가 될려고 하는 이든, 마호메트나 노자, 장자, 문선명, 여호와의 증인 등등 그들을 믿는 말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꼴깝을 떨고 사는 건 매한가지다.

 

물론 깨달음의 경지는 나와 타인의 구분, 즉 경계가 사라지는 어딘가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은데 어떠한 자신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소위 대통령이든 노동부장관이든 성철 스님이든 간에 진정코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인가)받게된 공인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부처는 거리낌과 걸림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유인이다. 

 

근데 그것이 어떠한 자유를 주는지는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가 "대자유인"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러한 깨달음이 진정한 이 사회의 자유를 줄 거라고 생각치 않는다. 물론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자유, 자기세상의 구축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점은 인생살아가면서 필요하다고 본다.

 

자유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자기의 통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얻을 때 그게 자유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백날 가져봐야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게 또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는 자기통제라는 등식도 한참 생각 후에 던져 버렸다. "사회"라는 문제가 개입되는 한 그러한 등식은 웃끼고 자빠진 소리에 불과하다.

 

아직도 깨달음에 대해서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계속 생각은 이렇게 흘러간다. 탄압과 불의에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열반으로 보는 것이 맞는지, 수십년간 수행 끝에 납자들과 신도들의 추앙을 받으며 박정희의 서슬파란 칼 앞에서는 별 말이 없었던 성철 스님의 열반을 진정한 해탈로 보는 것이 맞는지.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고도의 경지는 전태일과 성철이 유사하나 문제는 그 모양새가 좌탈입망이냐 아니냐가 아닌, 누구를 위해 열반의 길을 갔는가가 핵심이다. 아직도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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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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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의 땀은 참으로 가치있다.

흘린 땀이 바로 과정이고 결실을 보장한다. 피부를 뚫고 나와

송글하게 맺힌 땀들이 뭉쳐서 흘러내릴 때 먼 미래를 약속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앉아 있으므로

땀을 흘릴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같은 땀이라도 공부하면서

선생님께 지적을 받거나 준비를 소홀히 해서 흘리는 땀.

 

그것은 운동선수의 땀 만큼이나 소중하다. 그러한 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안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부하면서 늘 땀을 흘리자. 그 땀은 현재 나를 위한 것이지만

진짜 내가 흘릴 땀은 따로 있다. 그곳을 향해 때로는 부끄러움과

성실함 사이를 부지런히 왔다갔다하여야 한다.

 

200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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