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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26
    웃음
    공돌
  2. 2006/08/23
    노동법과 사람들
    공돌
  3. 2006/08/22
    솔직한 사람들
    공돌
  4. 2006/08/14
    정봉수
    공돌
  5. 2006/08/10
    씨발.
    공돌
  6. 2006/08/09
    뉴트롤즈
    공돌
  7. 2006/08/09
    철밥통
    공돌
  8. 2006/08/09
    내가 둔한지..
    공돌
  9. 2006/08/08
    할러웨이-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공돌
  10. 2006/08/08
    두개의 글.
    공돌

웃음

동생과 대화(메신져) 중에 기억나는 일. 그이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동생: 아빠가 갑자기 막 미친듯이 웃다가 나중에 우리 가족 영문도 모르도 다 자지러지게 웃은거 기억나나?
나: 언제?
동생: 오래됐다... 그래서 왜 갑자기 그래 미친듯이 웃었냐니까...대답이 먼지 아나
나: 모르겠는데...그런 적이 여러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여하간 뭔데?


동생: "우리가족이 요즘 너무 웃음을 잃은 것 같아 다 같이 웃어 보자고 함 웃어봤다"

동생말로는 어이가 없었다고 하나, 지금도 가끔씩 그렇게 웃을 기회가 적지 않아 좋기는 하다. 직접 만나서는 아니지만. 전화가 있다는 것은 때로는 정신을 이어준다는 차원에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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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과 사람들

최근에 읽었던 책들(평던, 논문 등)에서는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법을 공부했던 사람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임종률, 이영희, 이광택 등등...

 

그들의 지금 삶이 현재와 무관하지 않기에, 80, 90대의 운동가들의 변질된 삶을 돌이켜 본다.

 

조영래 평전(안경환)이라든가,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전순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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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사람들

그녀의 이야기.

 

철도노조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그녀.

 

이제 노조가, 운동권이 싫단다.

 

나도 이해간다. 싫을만한 이유는 그녀 자신이 만들기 보다는

 

그 내부 사정 때문일 것이다. 내부사정.

 

사람은 늘 발 밑을 늘 조심하고 다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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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수

정봉수는 하재필(나의 고교선배)씨의 재수시절 친구다.

 

제작년인가, 한 번 보고 올해 다시 한 번 봤다.

형수님과 함께 왔고, 그이의 아들들인 여찬이와 여진이가 함께 서울역으로 왔다.

한참을 뛰어도 아이들은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금방 나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여찬이는 나와 화장실에 세수를 하러갔는데, 소주와 맥주가 매우 쓰고 독하다고

하면서 어른이 되면 그것을 마시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 둘은 한참 웃었다. 나를 두고 한 말인지, 여찬이의 부모를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삼촌."

"응?"

"매미가 해충이예요?"

"음...사람을 해치지 않으니깐 해충은 아니겠지?"

"근데요. 매미는 땅 속에서 올라와서는 나무의 액을 빨아먹는데요."

"그래? 그래서?"

"근데 그게 나무에게는 안좋은 거잖아요?"

"그렇겠지. 나무에게는 안좋겠지."

"매미가 너무 많아져서 안좋을 거예요. 그래서 해충이 아닐까요?"

 

여찬이는 2학년인데, 관찰이나 생각이 굉장히 사려깊다.

 

"삼촌.."

"어?"

"모기는 해충이예요?"

"모기는 사람을 해치니깐 해충이겠지?"

"그러나 사람을 죽이지는 않잖아요."

 

여찬이의 해충과 익충의 구별법을 멀리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찬이는 아빠와 엄마, 하재필씨 주변의 쓰레기를 줍니다. 그러다가 여진이와 함께 서울역을 달리고 내달렸다. 어찌나 잘 뛰시던지...기특한 녀석들. 그리고 하재필씨에게 내가 말했다.

 

"아이들이 똑똑하고 참 순수합디다."

 

그러나 하재필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그 말이 오래도록 남아서 글을 남기게 되었다.

 

"봉수 아이들이잖아. 아니 봉수의 아내가 거의 영향이 절대적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정봉수씨를 기억했다. 그는 운동권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닌 지금껏 어렵게 살아온 소시민, 노동자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인상과 달리 모든 말에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부드러움이 서로 모순적으로 교차하면서 사람을 압도한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몇 시간이고 항의했었던 그 사람. 정봉수. 그러나 그는 사람에게 함부러 말을 놓지 않는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다. 그에게서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그를 만나고 감동이 있어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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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세상에 자유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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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롤즈

뉴트롤즈

 1. Allegro
 

2. Adagio

3. cadenza

4. shad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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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밥통

철밥통을 욕하면서도 철밥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http://blog.jinbo.net/gimche/?pid=176
 

블로그 대문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고민지점도 명확하다. 나는 그런 면에서 둔하고 느리다. 그러면서도 모순되게 즉흥적인 부분이 많아 글쓰기는 평생에 나를 성찰하는 훈련의 과정 이상으로 의미는 없을 듯 하다. (띄어쓰기도 많이 틀리고, 적합한 용어나 논리의 흐름도 술을 먹으나 안먹으나 같다.)
 

윗글, 출처는 밝혔다. 재미있게 읽었다.  
 

1. 재미있는 성찰(경험)과 분석은 "나 또한 과거 공무원이 되고자 했지만, 공무원직이 가진 안정적인 면만이 강조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안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방향이 아님은 분명하다."라고 하는 부분.
 

(말장난을 좋아하는 선생들은 주로 "과거"에 방점을 찍기도 한다. 무슨 과거에는 안정적이지 않고 다른 이유로 공무원을 하려고 한 것이냐는 졸렬한 비판. 나는 그들의 비판방식과 수사법이 씨발 누구를 위해 적대적인지 묻고싶다. 공무원들이 공직사회의 개혁을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서 그걸 촉구하러 동, 구, 시청에 다니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안다.)

 

2. 그러면서 "철밥통을 욕하면서도 철밥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재벌을 욕하면서도 자신도 기회가 되면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돈을 왕창 벌고자 하는 사람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라고 하면서 진보적인, 그것이 매혹적인지는 몰라도 해법을 못찾고 있다고 한다. 
 

생각의 흐름이 진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가 어떤 노동을 하는지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의 일일 뿐이고 내가 평가할 생각은 없다. 더욱더 솔직하면 정답이 나올 듯하다.
 

인용에 대한 생각. 1번은 두 문장 간에 "모순"이다. 인식의 모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본질은 "안정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첫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비판이나 뒷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긍정이다. 그이가 왜 공무원이 되려고 했을까.


2번 인용에 대한 생각. 앞의 두 문장 간에 "비약"이다. 첫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문제이고, 뒷 문장은 돈에 대한 물신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말, 자본주의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공무원이면 돈을 왕창 벌지는 않는다. 특히 "무슨 수단을 써서". 나는 믿는다. 공무원들도 무슨 수단을 써서 공무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정성이 항상 '돈을 왕창 벌게'해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변칙과 편법이 주로 그렇고. 원칙으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꽤 있다.

 

그래서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성찰이 잘못되어 있어 해법을 못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을 많이 본다. 갑자기 '공공성' 문제가 튀어나오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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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둔한지..

일단 여기의 기능을 많이 알게 되었다.

 

물론 여기의 기능은 일기장이다.

 

일기장이 논쟁이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일정부분 열어 놓은 것도 가능할 듯 하다.

 

왜냐하면 내 친구들과 동료들이 나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여기와 집전화 뿐이니깐.

 

그리고 혹시나 캐즘 선생이 이 글을 보게 되면 꼭 한마디.

 

"선생의 블로그에서 글을 접었다 폈다하는 것 많이 신기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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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러웨이-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아직 손도 못대본 책이다. 하종강의 홈페이지에 누군가 글을 올렸는데 출처는 밝혀야겠다.

 

http://www.hadream.com/ 여기에서 박종호 <말꽃마당> 56번, 진호님의 글.

 

그의 글을 간단하게 요약해본다. 그냥 이 책에 대한 설명이므로 다른 평가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책을 쓴 저자 할러웨이(John Holloway)는 본문에서 "권력의 논리에 빠져드는 저항의 논리"를 논박한다. 모종의 진보정당을 통해 의회 집권을 통해 세상을 바꾸던(베른슈타인), 전면적인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던(로자 룩셈부르크), 이는 결국 '국가(the state of nation)' 중심적인 저항이며, "의도적이던, 의도치 않았던, 권력의 룰에 참여하게 되는, 즉 자신이 저항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도리어 그것이 되어 저항하는 모순"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분석한 뒤,

 

"할러웨이는 이러한 시도들이 모두 역사적으로 패배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권력에 저항하려면 반(反)권력이 되어 저항해야 한다면서, "권력을 쟁취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꾸기"에 대해 그 자신의 독특한 문체를 이용, 기염을 토한다."

 

기염까지 토했는지는 몰라도 반권력이 권력화됨을 비판하면서 게거품은 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대상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수사법을 채용해서는 안 된다."

 

이에 글쓴이도 "당연히 권력에 저항하려면 반권력적이어야 한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꽤나 상식적인 글을 어렵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인용이 누구의 이익에 혹은 누구의 손해를 가하는지에 대한 손익계산서를 작성할 때, 사람들은 또 개떼같이 공박을 시작한다. '그를 욕하지마, 혹은 그는 비난받아 마땅해.' 그리고 내가 공격받게 되고, '내가 공격받고 있다. 뭉쳐라. 적들이다. 조지자.'. 이러한 수순들. 후지다. 요게 그들의 수사법이고, 우리의 수사법이라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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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글.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과 집단의 문제가 다 그런 식이다. 일반적인 지지와 일방적인 반대만 있다. 중간적 입장은 매우 희귀하다. 양극단의 전선이 형성된 ‘전시체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전시체제’에서 ‘내부비판’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건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내부의 문제는 스스로 곪아서 터질 대까지 내버려둔다는 게 사실상 철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이건희 시대' 중에서 

 

중간적 입장에 대해서는 노동운동 진영도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노동시장이 경직적이고 임금투쟁에만 주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 안정만이 취약해 자신이 혼자 가족 등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직 먹고 살기 위해 임금 인상에 매달리고 해고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사실 노동귀족을 낳는 가장 큰 요인은 '기업별 교섭'이라는 한국의 노동조합체계다. 서구의 노조가 개별 기업의 '시장임금' 자체를 받아들이는 대신 국가 차원의 복지와 '사회적 임금'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타협을 추구했다면, 한국의 노조는 고립 분산적인 기업별 교섭을 통해 자기 회사 노동자들의 이익만 추구했다… 한국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오직 분파적 임금 인상에 매몰되는 '경제주의 전투성'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겨레21(조계완 기자) 576호 '노동귀족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런 것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많으나, 현장에 뿌리를 박고 있는 노동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은 이러한 지적을 심심찮게 하고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노동교육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카프카를 인용해보았다. 앞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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