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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한대수
    공돌
  2. 2006/08/02
    괴물
    공돌
  3. 2006/08/02
    조종사 파업에 대한 짧은 생각
    공돌
  4. 2006/08/02
    촛불 아래 죽은 소녀
    공돌
  5. 2006/08/02
    병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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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02
    제주에 대한 짧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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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2
    서해에서
    공돌
  8. 2006/08/02
    한강대교를 건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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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02
    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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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02
    김어준
    공돌

한대수

겨울새를 본다.

 

노동의 새벽, 헌정음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한대수의 '겨울새를 본다'는 한대수의 설명이 딱 들어맞다. 너무나 놀랄 정도이다.

 

"춤을 추며 듣다가 눈물을 흘리게 되는 곡"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눈물이 나는데, 희망이 계속 비좁은 살틈과 머리 속을 비집고 나오고 있다. 아껴 들어야 하는 곡이다. 완성도에 놀라기보다는 사람을 너무 부끄럽게 하면서,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뭔가를 하게끔하는 곡이다. 설명할 수 없을 만치.

 

뱀발: http://mediafile.paran.com/MEDIA_763632/BLOG/200511/1133319445_poem16.wma

        아직도 노래가 나올지는 의문이다.      

 

        한대수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다시 한 번 쓰고 싶다. 다시. 그에 대한 인터뷰는 많이

        읽었지만, 그의 책은 아직 사보지 않다. 사실 두렵다. 돈이 아까울 까봐서.

 

200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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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우리, 사람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이다.

 

오늘 거울을 보았는데, 아무리 웃어보아도 나는 어느 순간인가, 괴물이 되어 있었다. 뚱뚱한 괴물이든, 인상더러운 괴물이든 간에. 나는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어떻게든 현실의 이 마법을 벗어나야 하는데, 점점 나는 괴물들과 만나면서 괴물이 되고 괴물과 인간의 차이를 못느끼겠다.

 

인간으로 살아남듯, 괴물으로 살아있든 간에 제일 중요한 차이는 인간은 언젠가 자신의 운명으로 장렬하게 결정짓고 이 세계를 떠나지만, 괴물은 누군가의 손에 처절하게 쓰러져 죽어간다.

 

내공이 필요하다. 인간이 되기 위한 내공이 필요하다. 내 나이 서른 살에 서른 밖에 안되는 정신연령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그 만큼의 인생과 세계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뛰어 넘어야 하고, 넘어서야 한다. 분발하자. 내게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릴 때가 된 거 같다.

 

2005.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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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 파업에 대한 짧은 생각

조종사들은 연봉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연봉이 적은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이주 노동자들은 기분이 나쁘다. 그러나 노동기본권은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간에 평등하게 주어지는 권리이고, 그것을 우리 헌법이 기분상하지만 보장하고 있다.

사회양극화 문제가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지 않는다고 양극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종사들도 파업이라는 선택에 먼저 우선해야 할 것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도 있다. 적어도 바베큐를 먹어도 가려가면서 먹어야 했다. 사실 바베큐 그거 비싼 것도 아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고, 사회변혁을 위한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바베큐 이전에 함께 나눠 먹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같은 직원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은 승객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보다 그 파괴력에 있어 더욱 강하다. 강한 파괴력 만큼 그것을 연대의 힘으로 이용하면 더욱 강했을 것을 나는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이만이 말했듯이, 노조는 결국 두개의 칼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정의 칼'은 결국 불의에 대항하여 이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평등하지 않은 불의를, 이 사회의 노동을 평등하게 하는 정의의 칼로 다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타깝다.

파업에서는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파업의 승리는 조종사들이 이긴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항공 노동자가 승리해야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이 싸움은 진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연대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어 그렇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다. 그들의 노동조건의 개선이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별 것 아닌 얘기를 왜 공론화하지 못하는지, 나는 그게 안타깝다.

제3자가 되어 바라 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파업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이 지지를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들만의 파업에, 그들만의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나는 그러한 이기주의라는 비난이 무섭다.

그렇지만 조종사들의 파업이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그들의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주장이 정당하게 받아지려면 그 만큼의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것이다.

2005.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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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아래 죽은 소녀

한전이 원망스럽다. 전력노조가 더 원망스럽다. 발전노조도 원망스럽다. 어짜피 촛불켜놓고 죽을 목숨이라면 이미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촛불을 산 그녀가 가엽지도 않은가?

예전에 내가 누차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한전과 노조가 함께 단전된 생계빈곤형 가정에 전력을 공급하자고 말이다. 이제 회사도, 노조도 같이 사는 기본 전제라고 했다. 특히, 전력은 우리나라 산업의 기간산업자 동시에 필수공익사업이다. 이만큼 공익을 위해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더 공격을 받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프랑스는 에너지에 대한 기본권을 인정한다. 내용은 이렇다.

'곤궁 상태로 특별한 곤란에 직면해 있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가스, 수도, 전기, 전화 서비스를 받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보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는 전력 회사, 가스 회사, 수도 공급 회사 등과 협정을 체결하여 '에너지 연대 기금'으로 빈곤층에게 전력을 공급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사례들 필요도 없다. 법적 근거를 찾으려면 프랑스에서 찾을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찾으면 된다. 그리고 산자부 돌망치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만 개소리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 헌법 10조는 기본적인 인권과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고, 인간답게 살게끔 국가가 보장해주도록 의무 짓고 있다. 이건 좀 추상적이라면, 헌법 34조는 아예 더 구체화된다. 1항부터 5항까지는 인간답게 살게끔 해주겠다. 바로 이소리다.

3, 4항의 경우 사회보장, 사회복지를 증진하고,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를 보장하겠다고 한다. 누가? 국가가. 헌법 35조도 인간이 건강하게, 쾌적하게 살 권리를 보장한다. 헌법 37조 1항은 이외에도 열거되지 않는 권리를 보장한다. 그렇다면 에너지를 보장하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산자부는 없다고 한다. 돌탱크들이다. 상식적으로 봐라. 못사는 사람 사회부조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하고, 빈곤층 지원하고. 이게 전부 자원봉사활동인가? 소위 우리가 맨날 이 나라 조선을 좆같이 안되어 잇는 것 중에 하나를 꼽는 바로 '사회보장'이다. 사회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보장해주겠다는 거다. 물론 세금내면 말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세금 낼 형편이 안되면 갂아주거나 면제해주기도 한다. 일정한 나이에 이르거나 돈이 생긴다 싶으면 세금을 얄전없이 거두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민주노동당에 의문이 있다. 이게 정당이니깐 법안발의를 하는 것 같은데. 적어도 법안 발의를 하려면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한전과 노조 불러놓고 기금조성하자, 안그러면 국정감사때 한 번 보자, 이렇게 조져야 먼저 시스템을 만들 조건을 완성시킬 것이고 그에 따라서 법제도로 온전히 정립될 수 있다. 그런데 될 지 안될지 모르는 법안 던져놓고 사람이 죽었다, 이렇게 하면 결국 선동밖에 안되는 것이고, 선동도 제대로 안되는 것이다.

여하간 오늘 여중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고, 나는 눈물이 난다. 너무나 슬프다. 룸쌀롱에서 돈지랄하는 인간들이 뒤지는 것은 그랬구나 해도, 이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한전의 올해 전기요금 체납액이 340억 정도다. 이건 큰 액수가 아니다. 제발 다른 것에 비교하지 않도록 해달라. 나는 이것이 더 갑갑하다. 참고로 내 개인적으로 볼 때 방법이 있다. 도저히 안되면 이 방법을 쓸수는 있다.

"로또 기금을 활용하라."

200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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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대해서

짧게 쓰고 싶다.

병은 사람을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외로움을 이겨내지 않으면 병에서 이겨낼 수 없기도 하다. 그것은 마음의 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다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육체의 병은 중하고 중하지 않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약이나 의학기술로 극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시간이 해결한다. 다른 모든 치료제는 플라시보 효과에 지나지 않는, 쓸데 없는 것들이다. 오직 시간, 그 속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치료제로 시간을 떼울 뿐이다.

2005.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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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대한 짧은 소회

1. 제주에 가보니 제주의 절경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내 삶의 일정한 자극이 필요했다.

2. 적잖은 에너지는 충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시간동안 누군가와 함께가는 여행이 사육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가는 것이다. 특히 신경림이 그랬던가 누가 그랬던가, 패키지 여행은 '사육'이라고 했는데 그게 절실하게 느껴진다.

3. 특히 한라산을 오를 때에는 별 생각없이 갔다가 쓰레기만 줍고 왔다. 그래서 한라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은 없다. 한라산에 오르는 사람에 대해서 왜 산에 가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산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성찰'하고 '겸손'함을 배우러 가는 곳이다. 신성한 곳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주 갈 필요는 없다. 자주 가는 사람은 결국 평소 성찰도 잘 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4. 제주는 넓기 때문에 섬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도다. 따라서 차가 있어야 전체를 잘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되거나 혹은 돈이 있는 사람 둘 중 하나의 조건만 성립되면 된다. 따라서 자전거나 인라인을타고 제주를 돌거나 아니면 렌트카나 자기 차가 있어야 한다. 신혼여행을 오는 사람은 이 두가지 조건에 모두 갖춰진 사람들이다.

5. 자리돔물회, 한치물회는 별로 맛이 없었다. 갈치회 또한 그리 탐탁지는 않았고 다만 갈치조림에 밥을 쓱싹 비벼먹는 정도만 했다. 그냥 동네에 파는 갈치조림에 불과했다. 두사람에 5만원이다. 제주의 먹거리에 이 정도에 불과하니 조금 실망이고, 또한 똥돼진지 흑돼진지도 그게 진짜 똥을 먹는지, 검은지는 확인을 안해봐서 '그저 괜찮네'정도의 자위만 하고 왔다.

6. 비행기 안 - 저녁 비행기의 스튜어디스가 이쁘고 아침시간에 나오는 스튜어디스는 아줌마인 거 같았다. 그냥 그렇다고.

7. 제주에 가면 돌담을 많이 보게 되는데 나중에 질린다.

8. 이중섭 미술관에 갔는데 은지화 몇 장과 원본 그림 몇 개, 자필 편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복사본이었다. 별로 볼게 없었다. 설명이 없었다면 입장료 1000원이 아까웠다. 전시관 2층에 동료 화가들이 그림 몇 점을 남겨두었고, 전시관 앞쪽에는 생가가 있는데 아직도 사람이 살고있다. 이중섭의 자식들은 조선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9. 제주에는 세가지가 많다. 그 중 마지막 여자가 많은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쉽다. 바람이 많이 불어 낚시를 못한 게 좀 아쉽다.

10. 4.3 항쟁을 알리는 표지는 별로 없고, 특히 도로이름이 5.16도로, 1100고지도로 등 불쾌한 도로나 표지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맑다. 장사꾼 빼고.

2005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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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에서

서해

부두 노동자였던 이브 몽탕과 캬바레를 전전하던 그리스인 조르주 무스타키. 그의 노래가 귓전을 때리면서 나는 서해로 향하는 차를 타고 있다. 하늘은 내가 한 동안 본 적이 없는 청량함으로 덧칠되어 있고, 흰색 물감으로 살짝 터치한 것처럼 구름은 새털모양의 긴 깃털을 흩날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서해까지는 약 3시간 가량 걸린다. 그러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탈 때까지는 그러저럭 즐길만하게 갈 수는 있지만 서해에 들어갈 때부터는 어디가 어딘지 지도를 보고서도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여기저기 붙어있는 '대하축제'의 긴 현수막과 새우모양의 표지물을 제외하고는 이정표에 의존하는 것이 필수다.

일단 목적은 대하를 구경하고, 여유가 된다면 새우를 먹어보는 것이 현재의 목표다. 전자는 달성해도 후자는 좀 어려울 듯. 그래도 안면도까지 진입에는 성공한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이 막히지는 않았다.

충청도는 그 산과 물의 형색이 가히 남해나 동해를 능가한다. 특히나 바다와 산, 그리고 군데군데 놓여진 호수들이 이 때까지 보지 못한 절경들과 어우러져 눈(目)의 미학적 관점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다. 설악산에는 벌써 7부 능선까지 단풍이 들었다고 하지만 충청도의 이런 날씨와 기온에는 아직 단풍은 때가 조금 이른 것 같았다. 그래도 보색의 대비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푸르름과 발그스레한 단풍잎들의 조화도 그러저럭 보아줄 만은 하다.

안면도에는 그 지명들이 특색이 있고, 순우리말의 지명이 많다. 그래서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동해가 망망대해처럼 느껴진다면, 서해는 어머니의 가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향기가 문득 기억에서 흩어져 코끝으로 스며들어온다.

너무나 고운 모래밭을 걷노라면, 발가락 사이로 밀려드는 바닷물과 모래의 까실함이 함께 나의 기분을 더욱 촉촉하게 적신다. 이런 모래는 과연 어디서부터 부서져서 먼저알처럼 촘촘히 이 모래밭에 뿌려졌을까? 그건 우리가 생각치도 못하는 몇 만겁의 역사가 우리를 지탱하는 건 아닐까.

차를 타고 백사장이 아닌 갯펄로 가봤다. 새만금을 가보고는 싶었지만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검은 갯펄의 보드랍고 미끈한 감촉은 수많은 생명체를 보듬어 줄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하지 못하다. 콘크리트로 무장된 딱딱한 무정만이 존재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건 그냥 그대로의 모습이다. 어떻게 바뀌는 것도, 형태를 변형하거나 합성되거나 유기적으로 결합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름답다.

'그냥 두는 것'은 곧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양면의 실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양면이란 자연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한다. 마치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을 인간의 거친 쇠조각으로 긁어대고 박아대면 결국 모든 생명체의 변화는 정지된다.
그것이 그대로 둠과 무수한 변화의 변증적 합일의 상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말로만 변화를 얘기하고, 무수한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박제화 시키려는 것일까?

2003.10.10 19: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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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를 건너며

늦은 시간. 어쩔 수 없이 나는 삼각지에서 내려서 용산까지 걸어내려 왔다. 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용산에서 한참을 걸어 '한강대교'를 건너게 되었다. 물론 옵션으로 '한강철교'인가는 몰라도 연속으로 다리 두개를 건넜다.

용산을 지나면서 길모퉁이를 돌아가기전에 보면, '정육점'이 있다. 붉은 불빛에 쾡한 눈을 가진 아주머니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관심있는 분'들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억지로 길을 피해 돌아간다. 길 사이마다 보이는 붉은, 차라리 선분홍에 가까운 충혈된 불빛들. 한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잠시 움찔. 그러다 눈꼬리를 재빠르게 올리면 겸연쩍은 듯 사라졌다. 그들은 결국 영혼을 파는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여하간 노래를 흥얼대면서 걸어가는 것. 그것만큼 자유는 없다. 저멀리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양아치풍의 아저씨가 택시를 세운다. 그리고 택시는 '부웅'하고 떠난다. 약 1초 뒤에 뒤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린다.

"여보! 여보. 아이구. 여보오...."

강의 중앙에 이르자 건설노동자들이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착암기로, 용접기로 다리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대교 중앙 교각을 사이에 업클로즈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노동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다시 느낀다. 기계음과 금속성의 철근 절단 소리는 함께 나의 노래를 디베이스하기 보다는 조화를 이루게 한다. 강산에의 노래를 정신을 맑게해!

노량진에 도착할 무렵, 상도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터널을 지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공사한 흔적들이 널려있고, 커다린 교회가 얇은 언덕 위로 동네슈퍼와 헐거워진 어느 집 지붕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 곳을 빠져나가야 되는데. 어떻게?

택시를 탄다. 고작 5천원 뿐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00동까지 가면 얼마죠?"
"만원 안짝입니다."
"예......"

일단 탄 것이라 눈을 부릅뜨고 5천원 한도 안에 내려야 했다. 작년만 되었어도 사정을 말하고, 그냥 떨이로 가자고 했을껀데 이제는 그런게 조금 부끄럽다. 아니 많이 부끄럽다.
5천원이 된 곳. 그리고 나는 걸어걸어서 아주 조금 아는 친구의 집에 하루를 머문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지?(두리번*^^*)

그러면서 들려오는 한 구절...

"네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 K.Marx

2003.09.29 12: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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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대하여


손은 인간의 철학과 역사를 반영한다. 특히 손은 신분을 나누는 철저한 기준이 되지만,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는 포장지로 이용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손가락에 끼워진 사치스런 광물들 때문이다.

손은 운명을 표시하는 지표로, 쉽게 말하면 사기치기에 딱좋은 신체부위 중에 하나이다. 관상이야 근래에 뜯어고치는 인간과 현대의 각종 노폐물들이 인간의 표정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그것보다 손의 피부는 강한 편이라 그렇게 문제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손으로 사기를 치는 인간과 손에 그어진 몇 줄에 자신을 운명을 내맡기는 인간도 더러있다. 물론 손금봐준다는 명목으로 여성과 잘된 '꾼'도 있을 수 있다. 조심해야 되겠지만.

여하간 손이라는 건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관이며, 이 기관은 결국 머리속을 모든 반응과 과정을 나타내주는 안테나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머리와 손, 손노동이 지적노동에서 분리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창조적 노동이 통제된 노동으로, 특히 근대와 현대를 거쳐 테일러주의가 '시간동작'을 연구하면서 점점 인간을 손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기관으로 머리는 손을 지배하기 보다는 손의 저항을 막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삶의 조건들은 맑스가 <자본>에서 묘사했듯이 노동자들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환원하는 기계의 소외 효과처럼 지적인 발전을 불가능하게(권현정, 맑스주의 페미니즘 현재성, 105 쪽)"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은 손가락이 짤려나간채 속수무책으로 오직 산재보상만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의 손을 보며,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고목나무같은 손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짤려나간 노동자의 손을 보면서, 어머니 비린내와 기름때 묻은 손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것이 단순한 역사가 아닌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언제든지, 곡괭이와 낫을 들게하고, 또한 총을 들게한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어 왔고, 앞으로 세상은 바뀌어 왔다. 그래서 자본주의라는 오야붕의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거짓이고, 결국 살아있는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 그리고 모든 민중의 손이 바로 진실일 뿐이다.

2005.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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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무슨 총수야. 혼자할 때도 총수였는데...

 

그는 배울 점과 느끼는 점이 다르고, 배우지 말아야 할 점이 있으나 배우지 말아야 하는 점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배우지 말아야 할 사실과 논리 속에는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자리잡은 행동과 관습들이 이미 녹아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위선에 가깝다는 점을 느낀다.

 

다른 것보다 그의 인터뷰에서 느끼는 것은 그의 딴지는 딴지를 위해 존재하는 딴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 스스로가 딴지가 되어 사회의 갑갑한 부분에 대해 화염병을 들고 뛴다. 던지기고 하고 때로는 심지를 뽑기도 하지만 결국 불을 붙이고 돌아오는 근성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좋다. 마초의 혐의. 그 따위는 비판받아야 하고, 다만 인격적으로 밟지는 말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 마초. 그것도 현실의 나다.

 

그의 인식의 활로가 열려 있는 것은 바로 이 대목 아닐까?

 

그의 말... 

 

"제가 배낭여행 한 50개국을 했는데.. 근데 여행을 한 열 개 나라 정도까지 할 때까진 가장 먼저 그 나라의 다른 점들이 보였죠..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타면 어떤 나라는 토큰을 내고, 어떤 나라는 현금을 내고 그런 작은 차이도 처음엔 다 신기하죠. 동전크기만 달라도 신기해서 수집을 하고. 근데 3~40개국을 넘어서는 어느 시점부터는 같은 점이 보이기 시작해요. 버스를 타면 돈 낸다, 다 똑같단 말이죠. 그니까 현상은 다 사라지고 본질만 남은 거죠. 그리고는 사람 사는 데는 다 통하기 마련인 규칙만 남는데, 그 규칙대로만 살면 돼, 나머지는 다 껍데기야 라는 그런 통찰, 살아오시면서 그런 본질에 대한 통찰을 위해 노력하셨던 거 같은데.."

 

우리는 사사건건, 지랄을 하고 있다.

 

뱀발: 그의 말 하나더..우리는 자신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 경기도지사 후보 열땅의 진대제와의 이너뷰에서.. 두발 자유화에 대한 질문, 대가리를 무제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심한 경우에 인정하기 어렵지 않으냐라는 진대제의 답변에 대해...

 

총 : 심한 건 어느 정도죠? 무슨 색깔을 해야 심한 건가요?
진 : 무슨 그..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것은 저는 좀 보기 안 좋더라고요.

총 : 초록색이 싫은 건 진후보님 취향이고, 그건 그 학생이 결정할 문제 아닌가요?
진 : 예. 근데 저 보는 관점에서 얘기하라는 겁니까 아니면...

 

2006.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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