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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02
    구걸
    공돌
  2. 2006/08/02
    노동자의 죽음으로 하는 경고
    공돌
  3. 2006/08/02
    Tommy Emmanuel 공연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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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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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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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봉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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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자애병원에 대한 하종강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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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8/02
    노조가 사탄인가 - 성모자애병원
    공돌
  9. 2006/08/02
    아홉살 인생, 나는 아직 아홉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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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02
    해외여행
    공돌

구걸

구걸하는 사람들...노숙자..서울만 해도 이러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들을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들은 방치하는 국가가 더욱더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걸하는 사람도, 노숙자도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를 받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그들 중에 오히려 껌을 팔러 다니는 아줌마와 지체장애인들의 모습 속에 고단한 하루를 끊임없는 삶에 대한 희망으로 절망을 이겨내는 그 모습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늘은 그 분들을 위해서 나도 한끼를 굶는다.

 

200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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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죽음으로 하는 경고

죽음이라는 것은 다시 회귀하지 않는 단절이다. 윤회라는 것도, 저승세계라는 것도,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창작에 불과하다.

 

죽으면 그의 세계는, 그의 우주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우리가 개미나 거미를 죽였을 때, 그것에 대해 깊은 반성이나 괴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아닐지라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그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소중하다. 또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나와 연관이 있을 때,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죽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눈물이 난다.

 

노동자가 점점 죽어가면서도, 절박함을 죽음으로 대응해도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연관성이 멀어지기 때문일까? 그러나 예전 사람들의 죽음은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음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밀려드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분신을 하고, 자결을 하는 마지막 이유는 내 생각으로 '뭔가에 이길 수 없을 직시한 마지막 저항'이라는 것이다. 죽은 이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것을 다시 돌려서 생각해 보면 뭔가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가 싸워야 하는데 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마지막 저항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개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나아가 집단이나 그 조직은 그가 내리는 마지막 경고, 행동에 대한 마지막 경고를 의미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노동운동판이 점점 책임감없이 달려든다. 싫은 소리는 듣지 않으려고 한다. 모두들 빠꿈이들이고, 대안은 다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누구도 선뜻 실천하자고 말 못한다. 같이 해야 행동이 되는 건데, 혼자하는 것은 발광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우울하지만, 노동자 '김동윤' 의 마지막 경고이자 마지막 외침을 기억하자.

 

더이상 소중한 생명으로 외치는, 경고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20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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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my Emmanuel 공연을 다녀오다

백암아트홀. 그리고 내한 공연,

전좌석 매진,

토미 임마뉴엘

거의 3시간에 이르는 공연.

 

연주자는 단 한 사람.

 

424명의 관객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미남의, 동네 아저씨같은, 좋은 매너의

농담도 잘하는

친절한 토미 아저씨.

 

실력은 말할 것도 없다.

1부와 2부로 나누었다.

1부후 15분을 쉬고 다시 2시간에 걸친 공연

우리가 아는 곡은 모두 소개하는 센스.

 

앵콜 신청을 하지않았는데,

내가 아쉬워 하면서 한 곡이

빠진 거 같다고 생각한 곡을

마지막 인사가 끝났음에도

연구하는 그의 고마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친절하고

연주곡의 속도를

관객에게 선택하라는 자신감

그리고 "very fast"라는 관객의 주문에

정말 very fast하는 그의 놀라움

 

혼자 연주를 보러갔으나

혼자가 아닌 느낌

그의 글로벌 마인드

아프리카의 한 아이를

월드비젼같은 단체를 통해

돕고 있다는 그의 훈훈함

연주만큼이나 관객의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1부 공연의 즐거움은

2부 공연의 퍼포먼스를 능가하는 연주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에 맘껏 취했다.

5만원이 아깝지 않다.

연주 도중에 줄을 맞추는 놀라움

가끔씩 한 손은 연주하고 다른 손은 관객을 가르키며

관객과 일체가 되는 모습

 

정말 멋지다.

그의 음악은 즐거워서 좋다. 그리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더욱 좋다.

슬픈 곡은 너무 슬퍼서 그 슬픔에 빠지지 않게

즐거운 곡은 폭발하게끔 하는 그의

낙천적인 연주솜씨

 

두 아이의 아버지

6살난 딸을 위해 만든 연주곡

아름다웠고, 그의 노래도 감미로웠다.

기타부비에서 클라식칼 개스까지

이었다가 떼었다가하는 메들리풍의 연주

그도 취해서 즐거워 하는 모습이 좋았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연발하다. 화요일 2교시 수업을 째고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 기회가 잘 없다.

나중에 꼭 이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같이 봐야겠다. 큭큭큭~

 

여자친구가 아니더라도 기타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좋다.

 

토미가 다시 한국에 올날을 기대하며~

이상 넘치는 감정은 여기서 주체하자!

 

200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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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통

사람은 두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도 한가지 일관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 물론 여러가지 모습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것이 다중인격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동시다발적인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비교적 나는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는데는 실패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목표가 분명해지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질 때 타인의 여러 면모를 발견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새로운 모습은 점점 개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숨겨진 모습은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여자를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이 여러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여러 명의 여자를 상대하는 사람은 그 여자의 수에 따라 다른 면모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의 상대녀는 아니다. 오직 자신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자신이 100%를 다 안다면 110%를 알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100%를 아는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별로 큰 문제는 안된다. 가장 친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러한 방법은 일일이 소개하기가 그렇다.

 

여하간 지나간 행적이 있을 것이고, 그 지나간 행적을 퍼즐을 맞추듯이 쭉 끼워 맞추다 보면 빠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빠진 퍼즐이 어디에, 무엇인지를 알게되면 결과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항상 들통이 나기 마련인 인생을 살고 있다. 모든 것은 언제가 드러난다. 다만 증명방법이 문제이다.

 

200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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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당신들은 아는가?

 

내 폭발하듯한 마음을 아는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하다. 그러면서나는 이렇게 무위하고 있는 걸...상처가 나면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심정을 아는가!

 

어느 누구가 나의 고통을 바라보고 웃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는 더 분노하고 더 질기게 잘근잘근히 나 심장을 꺼내어 들고,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분노는 에너지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춤추며 분노하고 싶다. 대가리 박터지게 인생의 한 방을 가르키는 사람들은 부당해고라는 악마와 싸우고 현실을 목도한다는 자들은 자신의 감시 속에서 감시수당을 받으며 하루를 버틴다. 누가 현실주의자인가? 누가! 누가!

 

먹고 살라고 하는 건 결국 동물도 하는 것이다. 날짐승도 하는 거란 말이다. 인간은 그럴려고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면서 동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의 가치를 찾아야 된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나의 고통이 아닌데 내가 눈물흘리는 것이 동물과 나의 다른 점이다. 무척 오늘 슬프다....너무나.

 

200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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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봉도 여행

일단 갈무리만 해둔다. 승봉도를 다녀왔다.

1) 1박 코스로 갔으나 파랑주의보 관계로 인해 결국 이틀을 더보내게 되었다. 결국 4일을 섬이 있었던 셈이다. 갇힌 게 맞는 표현이다.

 

2) 자신에 대하여 끝없는 성찰이 필요했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하는 삶을 생각해야 했다.

 

3)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여유와 긴장, 짜증과 권태 속에서 결국 나는 공동체 내에서 불안한 존재였다. 결국 자신의 재능만으로 살아갈 순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4) 소유욕은, 나아가 욕구를 통제하는 방식을 좀 익혀야 겠다. 남이 하기 싫은 것도 나도 하기 싫다. 그러나 해야 할 때 같이 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5) 담배는 결국 사람을 무료하게 한다. 건강에도, 몸에도 그리 좋은 효과가 없고 의지를 상실케 한다. 생각을 정리해 보면, 내 두뇌의 통제권은 내가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약물이나 다른 물질에 의해서 두뇌의 통제를 상실한다면 결국 그것이 목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6) 남들이 어렵다고, 극복하기 어려운 것들을 생각해 보고, 그것들을 이기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해 보아야 겠다. 김진애가 그런 것 처럼 "Suspend your belief(너 자신의 신념을 흔들어라)"해야 겠다. 좀 더 강력하게 말이다.

 

7) 섬에 여행을 갈 때에는 2명이 가는 것이 좋으며, 가능하면 많은 수가 갈 때에는 일정한 몫을 각자가 부담해야 한다. 역할이든, 돈이든 간에. 그리고 시간은 충분해야 한다. 이번에 느낀 것이지만,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를 가진 사람들은 여행을 할 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기 때문에 별로 대책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번 여행에서도 고양이 한 마리가 따라와서 결국 주인집에 잡혀서 포로가 되었는데, 새벽에 내가 칼로 잘라주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고양이가 죽든 말든간에, 일단은 자유로운 몸이었으니 그 상태로 복원하되, 자기 발로 다시 주인집으로 들어간다면 나도 그건 말릴 수가 없다.

 

8) 쓰레기 분리에 대해서 각별히 생각을 해봐야 겠다. 쓰레기 최소가 맞을 것이다. 최소화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겠나?

 

9) 휴대폰은 중요한 것이다.

 

10) 여행의 목적이 분명치 않으면 결과적으로 여행이 유흥에 불과하게 된다. 술이나 마시는 여행이 되버렸다. 그 섬의 특징이나 그 섬에 갔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오직 몸만 갔으니, 돈만 깨지고 단발적 개그나 유머로 버티었다. 일부는 재미가 있었으나 웃겨준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나는 별로 즐겁지는 않았다. 좀 active한 사람과 같이 가보고 싶다.

 

귀찮다고 무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11)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당장에 처리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자. 여행의 후유증은 일로 극복해야 한다.

 

12) 멤버들이 놀고 떠날 때에는 즐거워야 하는데, 그러한 방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에 멋지게 헤어지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이상 여기까지 갈무리 한다.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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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애병원에 대한 하종강의 글

병원에는 염분을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저염 식이 환자’들이 있다. 한 병원에서 저염 식이 환자용 물김치에 누가 소금을 집어넣는 일이 벌어졌다.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부분 경력 10년이 넘은 식당 아줌마들은 “우리들은 그런 실수를 절대로 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식당 일을 외주로 돌리기 위한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 고의로 소금을 집어넣은 것 같다.”고 했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실제로 상당히 의심이 되는 사람도 있으니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맡기자.”고 했지만, 병원 측에서는 이상하게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아줌마들에게 '살인자'라고 협박을 하더니, 결국 그것이 빌미가 돼 식당 운영은 외주 용역으로 전환됐고 30명 가까이 되는 식당 아줌마 노동자들은 모두 해고당했다. 환자들에게는 약이나 다름없는 치료식을 이윤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용역업체에 맡긴 것이다.

그 아줌마 노동자들이 복직시켜 달라고 싸운 지 벌써 100일이 넘었다. 수녀님이 원장을 맡고 있는 그 병원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할 때마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운다. 수학여행 가야 한다고 손을 내밀던 아이들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진다. 식당 일을 해 온 10여년 세월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인시위를 한다.  

아줌마 노동자들이 밤 새 병원 담벼락에 붙인 대자보들을 아침마다 수녀들이 나와서 모두 떼어버리면 아줌마 노동자들은 또 다음날 밤 새 대자보를 붙이고 수녀님들은 아침에 또 모두 떼어내는 일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됐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점심시간마다 식당 앞에서 선전전을 벌인다. 그분들께 미안하다고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조합원들이 대부분이지만, 관리자들과 의사들은 줄을 서서 밥을 타 먹는다. 병원이 법원으로부터 받아낸 접근금지가처분 때문에 자신의 일터였던 식당 문을 잡아보지도 못한 채, 유리문 너머에서 일하는 용역직원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줌마들은 가슴이 찢어진다.

가톨릭 내에서 웬만한 사업장들의 경영 책임자를 두루 거쳤다는, 자타가 인정하는 유능한 CEO인 원장 수녀는 이미 상당한 저명인사가 된 사람이다. 정치권과 검찰과 정부와 청와대 곳곳에 원장 수녀가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인력 풀’을 갖추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당 대표급 국회의원들, 검찰 수뇌부 간부들, 청와대 요직 인사들과 직접 통화하는 사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원장 수녀는 지방노동사무소장이나 경찰서장급 정도는 잘 상대하지도 않는다. 사건을 처리하는 검찰, 경찰, 노동부의 공무원들은 위의 높은 분들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줌마 노동자들은 흡사 거대한 대한민국 국가권력 전체와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노동부 본청의 높은 관리가 원장 수녀를 만나 “노동조합과 좀 협상을 해 보시지요.”라고 권유했을 때, 원장 수녀는 얼굴 표정 하나 흩뜨리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도 마귀와 협상하지 않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이런 때 하는 말이다. 노동문제에 대한 천박한 인식이 보수적 신앙과 결합하면, 그때에는 정말 대책이 없다. 노동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공부를 제도권 교육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 세월동안 언론의 그릇된 보도를 통해 얻은 자신의 노동문제 이해 능력이 얼마나 천박한 수준인지 알지 못하는 인사들이 지도자로 행세하는 사회에서는 헌법상의 권리인 노동조합을 부인하는 것을 일류기업의 경영철학인 양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자랑하고, 그 경영자에게 대학교에서는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코미디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마귀와 협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 수녀도 노동조합과는 협상할 수 없다? 그 말을 예수님이 들었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종교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 수준인 나라에서 "맞아 죽을 각오로 하는 친조종사노조 선언"을 했으니, 맞아 죽을 만한 일을 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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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사탄인가 - 성모자애병원

한 번 물어보자. 지난 청구성심병원 이후, 성심이든 성모든 이런 성(聖)자가 들어가는 거룩하신 자본은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병원 파업에 주목하기 보다는 병원이라는 자본조직 내에서 가장 힘없는 약자가 주님의 보호 아래서 탄압받는 노동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주목하고 있다. 결국 수녀도 신부도,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결국 시발놈에 시발년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마귀와 협상하지 않았다고 하는 성모자애병원 병원장 수녀 시발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조지기에는 너무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모르는 국회의원이 없고, 모르는 부자가 없다. 자기 자신도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당연히 노동자는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 개인은 질 수 있어도 노동자들, 노동조합은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동영상을 보는데, 아무런 자극적이지도 않은 이 동영상을 보는데, 눈알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데, 그 안압을 견디자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힘들고 아픈 사람은 들은 정작 내가 아닌데, 왜이렇게 감정이 이입되는지 모르겠다. 청구성심 이후 또 여지없이 내가 생각한 노동정책이든, 노동법이든 간에 상식없이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없이는 다 쓰레기에 불과하다.

 

내 어머니라고 생각해보라. 내 이모, 고모라고 생각해보라. 내 누이라고 생각해보라. 투쟁이라는 낯선 글자를 주먹에 움켜지고 그들이 벽보를 붙이고 시발 수녀들은 떼고. 이런 일상이 반복되는 한 아직도 우리 노동의 희망은 없다. 결국 루신이 말한 것과 같이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셈이다. 다만 그것은 땅위의 길과 같이 걸어가면 생기는 것이고 걸어가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걸어가고 있다. 노동자들도 이제는 더이상 마귀와 협상하지 않는다. 다만 투쟁으로 돌파할 뿐이다.

 

뱀발: 관련 동영상이 아직도 살아있다.

        mms://media.cast.or.kr/kndic/movie/05_0809_cmc100.wmv

 

        이 사건은 이후 인천지노위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게된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투쟁은 끝이 나지 않게 된다.

 

200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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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나는 아직 아홉살?

위기철의 소설이 원작이다. 난 소설은 읽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았는데,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는 - 어릴 때 기억들이 다른 사람도 비슷하겠지만 - 뭔가 숨겨진 것이 들켜버리는 감정때문 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백여민, 장우림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면서도 오금복과 신기종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영화는 여민이와 우림이의 감정의 굴곡이 느슨하면서도 팽팽하게 연결된다. 여민이 뒤에는 여민의 깊은 뜻을 아는 든든한 기종이가 있고, 우림이와 여민이와의 미묘한 감정 속에 금복이는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여민이를 늘 생각한다.

 

어릴 때의 감정은 어른들이 말하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사랑보다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들의 사랑은 물신에 찌들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덕보려는 생각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지는 어른들의 사랑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치 기름지고 야무지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본주의에서도, 공산주에서도 사랑은 없다는 '사랑의 기술'이 전하는 핵심교지를 다시 되돌아보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사랑이 그 때의 사랑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다시 돌아가는 것도 부질없다. 오직 지금 내가 벗어나야 할 것은 바로 모든 애욕과 물욕이다. 사물을, 세계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결국 자격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저 행할 뿐일때,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나의 옆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우림이와 여민이는 결국 사랑에 있어 우리들의 스승이다. 그러나 결코 닮을 수 없는 스승이다.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회용으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익숙한 일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랑은 새롭지만 항상 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고 받는 것에 익숙하며 계산이 앞서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은 어머니 밖에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숭고하지만 결국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학습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주는 자체에 감사해하고, 받는 마음 또한 감사해야 한다.

 

우림이가 마지막에 서울에 떠나면서 여민이에게 보낸 안경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것은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여민이의 어머니를 위해서 선물한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여민이의 두 번째"기 되어도 기분나쁘지 않다고 하는 우림이의 마음 씀씀이도 너무 고왔다.

 

뱀발: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 중 돈이 없어 사보지 못하겠다면 다음 주소를 눌러주세요.

http://cyimg9.cyworld.nate.com/common/file_down.asp?redirect=%2Fh25901%2F2005%2F8%2F5%2F17%2F%BE%C6%C8%A9%BB%EC%C0%CE%BB%FD%2Etxt

        책은 기본적으로 사서 보는 겁니다.

     

2005.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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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차타고 가는 기분 좋지만 그대 두고 가야 하는 이내맘 안타까워 그러나 이젠 떠나가야 하는 길위에 서서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누구는 외국에 가서 신나게 외국문물과 문명을 탐닉한다. 나는 외국 코끝도 못가봤다. 그런데 전혀 부럽지 않다. 왜냐면 그 만큼의 정신이 국제적인가? 시샘나기 보다는 가소롭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기풍을 느끼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적어도 러시아 현실에 눈물 쯤은 흘려주는 센스는 있어야 한다. 미국에 가서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문명이나 다양한 인종들에 대한 생각들또한 거대 조각상이나 마뉴멘트들에 놀랄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아직도 부시가 먹고자는 백악관에 돌이라도 하나 던지고 와야 국제적인 여행이다.

 

중국에 가면 하염없이 만리장성을 걷기 보다는 텐안문에 서서 민주주의 만세 삼창은 해주는게 도리다. 물론 티벳에 가면 가능하면 인간이 손발이 닫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안가는게 예의다. 술쳐먹고 하면 신이 노여워 하시니깐.

 

국제적인 여행은 정신적인 교감과 연대를 의미한다. 그런 여행을 해야지 독일가서 누구 묘지가고, 맥주가 뭐 맛이 밍숭맹숭하다느니, 그 거리가 아름답다느니. 화폐가 아깝다.

 

200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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