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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여성주의
    공돌
  2. 2006/08/02
    분노.
    공돌
  3. 2006/08/02
    노사간의 형평
    공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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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구원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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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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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입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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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2
    노동조합 위기 -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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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8/02
    노동조합 위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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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02
    인물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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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02
    전자감시와 관련집회에서의 소회
    공돌

여성주의

새파란, 청춘의

꽃다운 여인이 촌스런

치마를 입고서 낯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혹시나 모르는 늘어진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살포시 가리며.

 

저 높은, 하늘을

꽃다운 여인은 바라다

보면서 낯선 사람 중 한사람

호감을 가지며 술한잔 하자고 나에게

어디로 어디로 오라고 이야기 하면서.

 

다함께, 모여서

마시는 술잔을 누구가

마다하겠냐만은 늦은 시간

집에다 데려다 준다고 취한 술김 내부으며

꽃다운 여인을 집에다 데려다 주면서.

 

멋모른, 그녀는

고맙다 차한잔 하라고

새파란 청년은 그녀를 보면서

불거진 아랫도리 오만가지 상상에

제버릇 남못주고 사고를 치면서

 

너에게, 나라는

사람은 어떠한 존재이냐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기치면서

불거진 아래도리 죽어가면서

제버릇 다른여자 찾아가면서

 

여기서, 저기서

남자들 모인곳 나는 그년과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돌아다닐 때

그녀는 그 동네를 떠나 가면서

 

개새끼, 소새끼

남자는 다그래 나는 그놈이

사랑 한다고 조잘거릴 때

결국은 실수였고 그러지 않겠다며

다짐을 했건만 한순간 무너지면서

 

마음이, 열리지

않으니 앞으로 어떻게 나는

살아야 되는가 생각해 보면서

아픈 가슴 쓸어보며 정리한 마당에

그 새끼 결혼식 한다고 하면서

 

오라고, 전화를

하면은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한때의 불장난 자나깨나 불조심

지나간 일 쓸데없이 생각해보면

나오늘 아무일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조용히

지내고 싶고나 영원히 사랑을

채워가면서 그 사랑 남에게 나눠주면서

촌스럽고 꽃다운 여인이고파.

 

2005.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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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세상사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분노가 있다. 그러나 그런 분노는 쉬이 삭히게 마련이다. 주변에서도 만류한다. 정작 중요한 분노는 삶의 가치와 철학을 의미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화를 다스리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분노가 있다.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분노. 물로 나에 대한 분노는 늘 존재한 것이므로 내가 날을 세우고 항상 반성하게끔 하지만 내가 참을 수 없는 분노는 그렇게도, 그렇게도 아무 생각없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 사람들이 버젓이 결혼해서 잘먹고 잘산다는 사실이다.  

 

내 대학원 동기인 형이 있다. 노조간부 10년하고 이제는 가정에 충실하리라 자신도 형수도 소원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형수는 자궁암이고, 아버지는 췌장암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가정에 충실하게 되었단다. 그 잘난 가정에 충실하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하단다. 휴가도 내어 형수와 잠시 수술전에 여행도 다녀온다고 한다. 나는 해줄게 없어 하얀 봉투에 돈 10만원 넣었다. 그리고 겉봉에는 이렇게 썼다.

 

"형수요. 형님 신경쓰지 말고 맛난 것 드시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나도 용서할 수 없고, 나도 용서받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살 것이고 또한 구차하지 않겠다. 다만 나를 건드리지 말아달라.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 나를 건드리지 말아달라. 누가 준 고통을 내가 함께 감내하기 힘들다. 특히 그를 알면 더더욱 나는 감내하기 힘들다. 왜냐면 나는 그들을 심판할 자격도, 혹은 그들의 가족을 해할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관계없는 고통을 내가 왜 져야 하는가. 누구도 나를 돕지 않으며 나의 앞길을 앞가림해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결국 자기의 길을 지체할 뿐 시간 낭비일 뿐이다. 다만 내가 타인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한 것만 나는 책임을 지고 싶다. 가증스럽게 떠들고 싶지도 않으며, 그들을 앞에 앉혀놓고 불편하게 위태롭게 비판하고 싶지도 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것은 고통받은 자들은 왜 그들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인가! 왜! 왜! 왜!

 

2005.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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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간의 형평

1..........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

20미터의 고공 작업로에서 인간의 중력과 몇 방울의 가연성 물질을 담보로 자신들의 처절하고도 지극히 단순한 요구를 11일간 주장했다. 아니 그 요구를 같이 얘기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헌법상에 보장된 권리는 인정해 달라고 했다.

 

2.........

 

그러나 사측은 이러한 요구와는 무관하게 모르쇠로 일관하고, 경찰은 어떻게든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방패와 곤봉, 도끼로 무장하고 언제든지 위태로운 저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해서 대기 중이었다. 나는 미시적으로 사측과 경찰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최소한 지킬 것만 지켜주면 나머지의 것은 우리가 책임지기 마련이다.

 

 

나는 사측이 인간적인 욕구를 담보로 농성에 들어간 노동자들에게 인도적 배려는 커녕 사회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의 방문까지도 깡그리 무시한 것도 현대와 동종업계의 자본의 이해가 달려있는 사안에 대해 "협상의 벼랑끝 전술"이라 이해하면 백번 만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현대하이스코 자본의 벼랑끝 전술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벼랑끝 전술은 물리적 위치에서도 차이가 났다.

 

3. 의문발생

 

과연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제는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었던 것들을 철회하라고 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에게 실력을 쌓으라 한다. 그만큼의 힘을 가졌으니, 법이 더이상 후견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짱구들이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 속에서 어떠한 관념으로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의 시선에는 대기업 노조와 오버랩되는 총파업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기업들의 막대한 손실만, 그것도 정확히 계산되지 않은 추정치에 불과한 손해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가게 되면 입는 노동자 개인의 손실과 노동조합의 손실, 그리고 사회적 비난에 따른 손실 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을 수 밖에 없다.

 

또한 노동조합이 힘을 가졌다고 치자, 그래서 국가의 후견을 더이상 기대하는 것은 노사의 힘의 균형에 반한다고 하자. 그러면 헌법까지 무시하면서 노동조합의 요구가 노동조합의 인정이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한 힘의 균형은 힘으로 싸울만한 상대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목숨을 담보로 싸우고 있고, 하나는 사무실에서 음식 배달해가며 버티고 있는데 이 둘이 결과적으로 대화에 성공했다고 해서 양자는 대등하니깐 국가의 후견은 필요없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노동조합의 위기논쟁과 관련해서도 일부 학자들이 노동조합의 공공성과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나는 그것을 노동조합이 꼭 해야하는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이 영원히 근로조건 개선투쟁에 천착해서는 안되지만 근로조건이 도저히 조건이라기 보다는 족쇄에 가까우면 일단 먹고살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조금 살만해지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챙겨가면서 투쟁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술도 한 잔 사고, 노동단체나 시민단체에 가입도 하고 기부도 좀 하고, 이게 규모가 커지면 노동조합 차원에서 공공성 투쟁을 통해 민중의 삶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조금씩 전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 따위 얘기는 나같은 돌머리도 하는데, 문제는 노동조합만 책임을 묻고 왜 사용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을 묻지않는지 궁금하다. 물론 학자가 아닌 활동가는 문제가 다르다. 학자는 적어도 노동조합과 자본가 양자에게 동일한 무게의 질책과 동시에 동일한 양의 책임과 숙제를 부과해야 한다. 그러나 이건 솔직히 노조만 하구잽이인냥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니 나도 한 숨 밖에 안나온다. 솔직히 이건 노동조합이 이제껏 책임을 그리 많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발적 이익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현대하이스코 정규직 노동조합. 노동조합의 꼬리표에 씨팔 무슨 정규직 비정규직 이 따위를 언제부터 달았는지 모르지만, 일단 얘기가 딴 쪽으로 샐까봐 입을 틀어막는다. 나는 또 백번 천번 양보해서 정규직 노동조합이 "고용불안"때문에 아무런 투쟁을 하지 못했다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같이 나서서 싸우면 자기 일도 아닌데 내가 피해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상은 결국 두 가지의 사고가 전제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같이 투쟁하면 같이 죽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일이 아니면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건 상식인 듯 보이지만, 상식과 거리가 멀다. 이는 같이 투쟁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든 정규직 노조의 근거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노동조합은 자기 일에 대해서만, 자기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이익집단에 불과하게 된다.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이다. 고용안정을 어떻게 단단히 약속받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고용안정이 이 땅의 노동운동을 강고하게 만들어 줄거라고 생각치 않는다. 문제는 차별이다. 차별없는 것이 단단한 고용안정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이 차별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결과적으로 평등 프로젝트는 안하겠다는 것이지 뭔가!

 

이처럼 모든 것은 형평성의 기술없이는 어느 하나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청에서 나오는 금속성의 카랑진 목소리는 한 때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근로조건을 위해 투쟁하였던 과거의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같이 투쟁할 동지가 있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같이할 동지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한탄스럽다.

 

파업을 지원하는 100명의 학생들도 고맙지만, 정규직 노동조합이 1명이라도 나와서 그들에게 빵과 우유를 지원하고, 경총에서 1명이라도 나와서 이 문제에 대해서 진정 원만하게 풀어가기 위한 방화수를 준비해 왔다면 오늘날 남한 사회의 저거들 잘묵고 잘살기 이데올로기 공세에서 조금이나마 숨통은 틔일 거라는 볼멘소리를 해본다.

 

200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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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구원투수

수퍼스타 감사용. 이제 그는 패전처리 전문투수가 아닌, 구원투수로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7회말! 누구도 등판하고 싶지 않은 그 마지막 게임의 끝자락에서 그는 희망을 던졌다. 그 희망은 결국 오늘의 아름다운 호투(好投)로, 내일에 대한 당찬 전투에 임하는 굳센 신념을 둘레 7인치에 무게 145g의 작은 야구공에 알차게 담아 던졌다.

 

그렇게 알지고 속꽉찬 암팡진 그 구원투수를 생각할 때마다 내 인생에 그만한 구원투수가 있음에 나는 너무나 고맙고 새삼 감사하다. 우리가 그렇게 구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서로 깊이 있고 미쁘게, 곰비임비 살아온 것이 정말 고맙다.

 

나도 그대처럼 게임의 승패에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든 잡은 공을 열심히 던지되, 던진 공은 미련없이 놓아주었으면 한다. 언젠간 그대와 같이, 나처럼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 사람에게 구원투수가 되고 싶다. 절망이 담긴 공에 분노를 담아던지기 보다는 공이 가야할 곳을 찾아주는 직관과 냉철함, 그러면서도 단 한개의 공이 누구에게 가야할 지를 아는 계산없는 그 대범함.

 

우리가 가야할 곳. 그리고 치뤄야 할 게임은 많다. 그리고 두려움과 낯섬, 익숙함과 안정됨의 경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나비가 되어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 질문에 이미 대답을 가지고 있다.

 

"날으는 나비가 아니더라도 헤엄치는 나비가 되어주마."

 

20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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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있습니다 - 최춘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절된 모든 사실처럼 느끼는 것들을 이어 붙이려는 시도없이는 모든 일과 사람과 행동과 사건은 찰라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거나 미친 것이 되어버린다.

 

"예수부활 영생극락"

 

이 말을 수십 번 외치는 할아버지(최춘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미스터 코리아? Why two kerea?"라고 외치며 지하철을 맨발로 걸어다녔다고 한다. 그는 통일이 되면 신발을 신으리라고 하면서 진정한 미스코리아는 유관순이고, 진정한 미스터 코리아는 안중근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말씀들....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노망 들었군."

 

그러나 모든 사실과 삶의 연속관계를 완전히 무시한 상태에서는 이러한 얘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판단을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뭔까 짧은 시간 '예수믿으라'와 '안중근과 유관순'을 말한다. 도대체 무엇인가?

 

짧게 나마 그 할아버지의 인생은 과거 독립운동을 하였던 시절로 돌아간다. 유복한 자녀로 태어나 동경에서 유학을 했고, 그 당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에게 상속된 모든 땅을 이북에 피난 온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게 된다. 그는 그 당시 김교신 선생, 우치무라 간조 등 무교회주의자들에게서 자유와 평화, 영생의 삶을 배우고, 결국 가가와 도요히코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은 이러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고, 그 속에서 이 땅의 진정한 평화가 통일에 있음을 그는 아주 압축된 언어로 소개하고 말했던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분 또한 "특정 종파나 계파에 속하지 않으시면서 저렇게 활동하고 계시니 외로울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무교회주의의 평화사상과 함께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뒤 귀국하였다던 그의 얘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고아들을 많이 키우셨고, 노숙자들에게 빵과 밥을 주는 일을 죽기까지 계속하였다.

 

너무나 자명한 과정이 있고 모든 것은 이유가 있다. 그의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진실이 증명한 "발"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그 미친 노인네인 최춘천 할아버지는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합니다."

 

힘들지 않느냐에 대해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이후 리포터는 얼마후 할아버지를 다시만납니다. 그리고 리포터에게 마지막으로 지하철에서 손을 번쩍 들며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 이후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는 영혼 속까지 깊이 헤아리는 심안을 가지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가까운 관계 속에서 그러한 심안을 통해 작은 인내와 배려를 해 본적이 있는가? 오늘도 작은 깨달음이 내일로 이어지기 위하여 내 속에 있는 위선과 자만의 거적데기를 벗어버리고 싶다. 그것이 설사 고통스러울지라도!

 

최춘천 할아버지 동영상

 http://www.godpeople.com/?GO=palbok_2

 

 

2005.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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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에 평생을 아파하거나 인생의 한 단면, 얼굴의 한 단면, 정신의 한 단면이 짓이겨져 차마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간은 함부러 상처를 주어서도 안되며 받은 상처를 상처로 갚지 않아야 한다.

 

문득 상처를 주고 받는 일들이 가십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슬픈 소식에 짧게나마 메모를 남겨본다.

 

200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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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위기 - 둘

아래 글에서 말했듯이 노동조합, 이 네글자가, 이 네글자가 어려우면, 노조가, 이 두 글자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을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50억의 기금으로 박사 100명만 만들어 보는 프로젝트! 그러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지 보자. 또한 현실은 어떤지도 생각해보자. 현실을 뒤에 생각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있다는 열정이 있는 것 아니겠나?

 

 

1. 텔레비에 초등학생 꼬마가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OOO노조위원장"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가 뭔지를 물어보니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우시고, 또한 정의로운 일을 하시잖아요."이런 대답이 판치는 사회. 그러나 이 사회는 아직도 삼성을 욕하면서 삼성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더 많다.

 

 2. 단전단수에 벌벌떠는 우리 민중을 위해 발전노조, 전력노조, 한수원노조가 함께 조합비의 10%와 특별 조합비를 모금하여 그들의 전력과 상수도를 공급하게 되면서 전력공사 사장에는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OOO 노조위원장이 물망에 오르게된다. 아쉽지만 전력회사가 먼저 촛불에 타죽은 어린 영혼을 위해 전력을 공급한단다.

 

3. 우리의 꿈나무들이 노동조합에서 제공하는 공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님이 되고, 박사가 된 뒤에도 자발적으로 5년간은 노조의 정책연구소에서 일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사회. 그러나 민주노총의 정책연구소에는 박사가 없다.

 

4. 지친 노조활동가들이 미래와 생계에 대한 계획을 하고,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시골의 작은 쉼터에서 6개월이고 1년이고 쉴 수도 있고, 아예 눌러 박혀 노동공동체운동의 귀감을 보여 주기도 할 수도 있는 환경. 이러한 환경을 제안하면 욕만 먹는 게 현실이고, 강수돌 선생처럼 혼자만 하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는다.

 

내가 스쳐가면서 생각한 것이 이런데...이게 몽상이면 결국 나는 노조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궁굼하기 그지없다.^^

 

200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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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위기-하나

노동조합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누구는 개소리하지마라, 누구는 위기다 준비하자 등등 많은 얘기들이 나온다. 물론 술자리에서는 더욱 이러한 얘기들은 극에 달한다. 내가 보기에 위기라고 하는 소리나 위기가 아니라고 하는 소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둘다 똑같으니깐....말이다.

 

먼저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유일무이한 변혁단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니 나도 어쩔 수는 없다. 다만, 머리 속의 지식도 아이디어도 고갈되어 가니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사실 과거 10년 전, 우리 노동조합이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부르짖는 것만큼 사회보장을 함께 외치고, 하청구조의 개선을 위한 투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지금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 지도 모른다. 이것도 개소리다.

 

여하간 나 또한 이런 개소리를 하고 있고, 닭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미래에 대한 구상이 전제되지 않는 현재의 비판과 반성을 한마디로 개소리다. 반대로 현재의 비판과 반성은 미래를 위해서 존재하는 보험이라는 얘기다. 비판과 논쟁은 무조건 필요하나, 무슨 이익에 의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목소리만 큰 놈들이 악악대면 결국 게임오바니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이 소리도 노래를 불러봐도, 시를 써봐도 아무런....아무런 힘이 없는 걸 어쩌겠는가.  

 

그래서 미래를 고민하면서 나는 과감하게 민주노총이 비정규기금으로 모으고 있는 50억의 기금을 다른 곳에 투자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지금, 미래에 대한 도전이고 준비이기도 하다. 그것을 어디에 투자하라고 하면 또 거품 무는 사람이 많기에 투자한 이후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래야 나를 몽상가로 판단하고 딴지 걸지 않으리..

 

뒤에 이어서....

 

200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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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평가

인물을 함부러 평가해서는 안되나, 때로는 그 평가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또한 사회에 유익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래서 인물 평가를 필요악이자,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나 내 개인이 인물 평가를 하려는 이유는 그때그때 느낀 그 인물에 대한 솔직함 느낌을 보관하기 위해서이다. 그것 뿐이다. 그 평가가 시시각각 변하게 되면 나 또한 문제가 있거나,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예방책을 미리 찾아보는 것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2005.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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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감시와 관련집회에서의 소회

요즘 현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를 감시, 관찰하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우울증 및 정신장애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먼저, 그들의 산재인정을 거부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 특히 방용석 이사장(이하 방사장)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것 안다. 자잘한 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가 이번 국정감사에서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노동감시에 따른 정신질환을 산재로 인정하라는 하이텍 노동자의 농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객관적 근거없이 호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9월 30일 동조집회 못가서 하이텍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열심히 투쟁하신 만큼, 노동자의 권리를 분명히 찾으리라고 믿는다. 다음에는 꼭 가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객관적 근거없이 토론에 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토론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건, "호소"다. 호소가 항상 객관적 근거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산업의학과 의사들이 하이텍 노동자들의 병이 산재법상 병이 된다고 했다. 그 의사들은 무슨 야매의사들인지는 몰라도 공단측 심사담당 의사들은 병이 안된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보통 되든 안되든 간에 "호소"를 하면 그 호소를 언제하는 가에 주목해야 한다. 노무현이 지역감정 청산하자고 졸라 외칠 때, 경상도 사람들이 귀도 안열었다. 같은 동향이라도, 노무현은 '깜'이 아니라고 노무현 이야기 듣도 안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TV토론에 나와 말끝마다 "도와주십시요 "이런 말을 한 것은 객관적 근거가 얼마나 치밀하고 짜임새가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객관적 근거로 통하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나라면 어떻겠소. 내 입장을 이해해주오. 좀 도와주오"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동정을 구하는 것이다. 동정...같은 동향으로서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같은 동향, 진짜 같은 노동운동의 동향인 방 사장은 어떤가? 자기는 호소를 안해본 사람처럼 객관적 근거없는 호소에 불과하니 들을 필요가 없단다. 호소는 위와 같이 다음의 코스를 밟은 뒤 최후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객관적 근거를 대도, 그것이 씨알이 안먹히면 결국 하는 것이 호소이다. 호소는 결국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것이다. 강자는 호소 따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동향인 방 사장이 호소를 안듣는 이유를 살펴보자. 이건 김대환 노동부장관(이하 김장관)도 마찬가지 이다.

 

1. 노동운동이 자선봉사가 아니다. 가장 이기적이면서 가장 사회적인 운동이다. 그것을 지도해 본 사람이라면 결국 자신의 결정 이전에 공생관계의 결정을 가장 존중한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은 그 구성원이 절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생관계의 구성원들은 공생관계의 결정에 따른 지도자의 지도와 책임에 신뢰를 하게 된다.

 

2. 그런데 이와 달리 공생관계의 결정 이전에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획정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결정을 공격하는 자와 지켜줄 수 있는 자 사이에 빈 공간 사이에서 좀 더 넒은 범위를 확보한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위치는 항상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비무장 지대에서 자신은 비무장 지대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려고 한다. 따라서 문제는 자신을 방어하는가에 있는가, 아니면 공생관계를 방어하는가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게 된다.      

 

3. 이렇게 되면 자신을 지키는 자와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따라서 느슨한 연방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코드라는 것은 사실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코드를 맞추기 이전에 100볼트인지, 220볼트인지를 맞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4. 따라서 일정한 연방관계에 대한 도전은 결국 자신의 결정과 범위를 더욱 공고히 하게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자신이 지나온 일생에 따라 갖추게 된 가치관을 포기하는 대신, 연방관계의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 그속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가변적인 연방관계의 룰을 깨지 않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격을 받게 되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방어하게 된다. 자신이 노출되게 되면 더욱더 필사적으로 방어한다. 그러나 방어는 본능이지만, 방어에 따른 공격은 이성을 가장한 본능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 방어든, 공격이든, 호소든, 협박이든 간에 아무 것도 얻거나 이룰 수가 없게 된다.

 

가령 김장관의 경우, 더이상 올 수 없는 길에다가 멈출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가 진보적이었는지는 잘 모르나, 감투쓰기 전의 세간의 평가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을 보는 순간, 사람 눈이 뒤집히는 경우라면 일단 그 사람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자들이 많은 곳에서 혹시 술을 산다든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서 우쭐댄다든지, 공짜 술과 밥을 자주 먹는다든지, 평소 누구 험담이나 뒷다마를 잘 깐다든지, 자신의 어려움을 필요이상 오바해서 이야기한다든지, 편을 가를려고 한다든지, 어디든지 인정받을려고 한다든지, 학벌을 자주 얘기한다든지, 집안 얘기를 자주 한다든지, 주변에 가우잡는 친구들 얘기를 많이 한다든지, 자기는 안하면서 남을 질책하는 걸 잘한다든지 이런 점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너무 많지만 단 하나로 요약하지만 다음과 같다.

 

"호소할 때 들어주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된 사람이다. "

 

200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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