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상처입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에 평생을 아파하거나 인생의 한 단면, 얼굴의 한 단면, 정신의 한 단면이 짓이겨져 차마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간은 함부러 상처를 주어서도 안되며 받은 상처를 상처로 갚지 않아야 한다.

 

문득 상처를 주고 받는 일들이 가십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슬픈 소식에 짧게나마 메모를 남겨본다.

 

2005.10.2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조합 위기 - 둘

아래 글에서 말했듯이 노동조합, 이 네글자가, 이 네글자가 어려우면, 노조가, 이 두 글자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을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50억의 기금으로 박사 100명만 만들어 보는 프로젝트! 그러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지 보자. 또한 현실은 어떤지도 생각해보자. 현실을 뒤에 생각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있다는 열정이 있는 것 아니겠나?

 

 

1. 텔레비에 초등학생 꼬마가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OOO노조위원장"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가 뭔지를 물어보니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우시고, 또한 정의로운 일을 하시잖아요."이런 대답이 판치는 사회. 그러나 이 사회는 아직도 삼성을 욕하면서 삼성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더 많다.

 

 2. 단전단수에 벌벌떠는 우리 민중을 위해 발전노조, 전력노조, 한수원노조가 함께 조합비의 10%와 특별 조합비를 모금하여 그들의 전력과 상수도를 공급하게 되면서 전력공사 사장에는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OOO 노조위원장이 물망에 오르게된다. 아쉽지만 전력회사가 먼저 촛불에 타죽은 어린 영혼을 위해 전력을 공급한단다.

 

3. 우리의 꿈나무들이 노동조합에서 제공하는 공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님이 되고, 박사가 된 뒤에도 자발적으로 5년간은 노조의 정책연구소에서 일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사회. 그러나 민주노총의 정책연구소에는 박사가 없다.

 

4. 지친 노조활동가들이 미래와 생계에 대한 계획을 하고,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시골의 작은 쉼터에서 6개월이고 1년이고 쉴 수도 있고, 아예 눌러 박혀 노동공동체운동의 귀감을 보여 주기도 할 수도 있는 환경. 이러한 환경을 제안하면 욕만 먹는 게 현실이고, 강수돌 선생처럼 혼자만 하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는다.

 

내가 스쳐가면서 생각한 것이 이런데...이게 몽상이면 결국 나는 노조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궁굼하기 그지없다.^^

 

2005.10.2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조합 위기-하나

노동조합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누구는 개소리하지마라, 누구는 위기다 준비하자 등등 많은 얘기들이 나온다. 물론 술자리에서는 더욱 이러한 얘기들은 극에 달한다. 내가 보기에 위기라고 하는 소리나 위기가 아니라고 하는 소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둘다 똑같으니깐....말이다.

 

먼저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유일무이한 변혁단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니 나도 어쩔 수는 없다. 다만, 머리 속의 지식도 아이디어도 고갈되어 가니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사실 과거 10년 전, 우리 노동조합이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부르짖는 것만큼 사회보장을 함께 외치고, 하청구조의 개선을 위한 투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지금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 지도 모른다. 이것도 개소리다.

 

여하간 나 또한 이런 개소리를 하고 있고, 닭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미래에 대한 구상이 전제되지 않는 현재의 비판과 반성을 한마디로 개소리다. 반대로 현재의 비판과 반성은 미래를 위해서 존재하는 보험이라는 얘기다. 비판과 논쟁은 무조건 필요하나, 무슨 이익에 의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목소리만 큰 놈들이 악악대면 결국 게임오바니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이 소리도 노래를 불러봐도, 시를 써봐도 아무런....아무런 힘이 없는 걸 어쩌겠는가.  

 

그래서 미래를 고민하면서 나는 과감하게 민주노총이 비정규기금으로 모으고 있는 50억의 기금을 다른 곳에 투자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지금, 미래에 대한 도전이고 준비이기도 하다. 그것을 어디에 투자하라고 하면 또 거품 무는 사람이 많기에 투자한 이후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래야 나를 몽상가로 판단하고 딴지 걸지 않으리..

 

뒤에 이어서....

 

2005.10.2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물평가

인물을 함부러 평가해서는 안되나, 때로는 그 평가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또한 사회에 유익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래서 인물 평가를 필요악이자,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나 내 개인이 인물 평가를 하려는 이유는 그때그때 느낀 그 인물에 대한 솔직함 느낌을 보관하기 위해서이다. 그것 뿐이다. 그 평가가 시시각각 변하게 되면 나 또한 문제가 있거나,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예방책을 미리 찾아보는 것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2005.10. 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전자감시와 관련집회에서의 소회

요즘 현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를 감시, 관찰하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우울증 및 정신장애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먼저, 그들의 산재인정을 거부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 특히 방용석 이사장(이하 방사장)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것 안다. 자잘한 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가 이번 국정감사에서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노동감시에 따른 정신질환을 산재로 인정하라는 하이텍 노동자의 농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객관적 근거없이 호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9월 30일 동조집회 못가서 하이텍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열심히 투쟁하신 만큼, 노동자의 권리를 분명히 찾으리라고 믿는다. 다음에는 꼭 가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객관적 근거없이 토론에 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토론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건, "호소"다. 호소가 항상 객관적 근거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산업의학과 의사들이 하이텍 노동자들의 병이 산재법상 병이 된다고 했다. 그 의사들은 무슨 야매의사들인지는 몰라도 공단측 심사담당 의사들은 병이 안된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보통 되든 안되든 간에 "호소"를 하면 그 호소를 언제하는 가에 주목해야 한다. 노무현이 지역감정 청산하자고 졸라 외칠 때, 경상도 사람들이 귀도 안열었다. 같은 동향이라도, 노무현은 '깜'이 아니라고 노무현 이야기 듣도 안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TV토론에 나와 말끝마다 "도와주십시요 "이런 말을 한 것은 객관적 근거가 얼마나 치밀하고 짜임새가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객관적 근거로 통하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나라면 어떻겠소. 내 입장을 이해해주오. 좀 도와주오"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동정을 구하는 것이다. 동정...같은 동향으로서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같은 동향, 진짜 같은 노동운동의 동향인 방 사장은 어떤가? 자기는 호소를 안해본 사람처럼 객관적 근거없는 호소에 불과하니 들을 필요가 없단다. 호소는 위와 같이 다음의 코스를 밟은 뒤 최후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객관적 근거를 대도, 그것이 씨알이 안먹히면 결국 하는 것이 호소이다. 호소는 결국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것이다. 강자는 호소 따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동향인 방 사장이 호소를 안듣는 이유를 살펴보자. 이건 김대환 노동부장관(이하 김장관)도 마찬가지 이다.

 

1. 노동운동이 자선봉사가 아니다. 가장 이기적이면서 가장 사회적인 운동이다. 그것을 지도해 본 사람이라면 결국 자신의 결정 이전에 공생관계의 결정을 가장 존중한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은 그 구성원이 절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생관계의 구성원들은 공생관계의 결정에 따른 지도자의 지도와 책임에 신뢰를 하게 된다.

 

2. 그런데 이와 달리 공생관계의 결정 이전에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획정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결정을 공격하는 자와 지켜줄 수 있는 자 사이에 빈 공간 사이에서 좀 더 넒은 범위를 확보한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위치는 항상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비무장 지대에서 자신은 비무장 지대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려고 한다. 따라서 문제는 자신을 방어하는가에 있는가, 아니면 공생관계를 방어하는가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게 된다.      

 

3. 이렇게 되면 자신을 지키는 자와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따라서 느슨한 연방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코드라는 것은 사실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코드를 맞추기 이전에 100볼트인지, 220볼트인지를 맞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4. 따라서 일정한 연방관계에 대한 도전은 결국 자신의 결정과 범위를 더욱 공고히 하게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자신이 지나온 일생에 따라 갖추게 된 가치관을 포기하는 대신, 연방관계의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 그속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가변적인 연방관계의 룰을 깨지 않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격을 받게 되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방어하게 된다. 자신이 노출되게 되면 더욱더 필사적으로 방어한다. 그러나 방어는 본능이지만, 방어에 따른 공격은 이성을 가장한 본능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 방어든, 공격이든, 호소든, 협박이든 간에 아무 것도 얻거나 이룰 수가 없게 된다.

 

가령 김장관의 경우, 더이상 올 수 없는 길에다가 멈출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가 진보적이었는지는 잘 모르나, 감투쓰기 전의 세간의 평가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을 보는 순간, 사람 눈이 뒤집히는 경우라면 일단 그 사람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자들이 많은 곳에서 혹시 술을 산다든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서 우쭐댄다든지, 공짜 술과 밥을 자주 먹는다든지, 평소 누구 험담이나 뒷다마를 잘 깐다든지, 자신의 어려움을 필요이상 오바해서 이야기한다든지, 편을 가를려고 한다든지, 어디든지 인정받을려고 한다든지, 학벌을 자주 얘기한다든지, 집안 얘기를 자주 한다든지, 주변에 가우잡는 친구들 얘기를 많이 한다든지, 자기는 안하면서 남을 질책하는 걸 잘한다든지 이런 점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너무 많지만 단 하나로 요약하지만 다음과 같다.

 

"호소할 때 들어주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된 사람이다. "

 

2005.10.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구걸

구걸하는 사람들...노숙자..서울만 해도 이러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들을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들은 방치하는 국가가 더욱더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걸하는 사람도, 노숙자도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를 받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그들 중에 오히려 껌을 팔러 다니는 아줌마와 지체장애인들의 모습 속에 고단한 하루를 끊임없는 삶에 대한 희망으로 절망을 이겨내는 그 모습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늘은 그 분들을 위해서 나도 한끼를 굶는다.

 

2005.10.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의 죽음으로 하는 경고

죽음이라는 것은 다시 회귀하지 않는 단절이다. 윤회라는 것도, 저승세계라는 것도,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창작에 불과하다.

 

죽으면 그의 세계는, 그의 우주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우리가 개미나 거미를 죽였을 때, 그것에 대해 깊은 반성이나 괴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아닐지라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그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소중하다. 또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나와 연관이 있을 때,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죽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눈물이 난다.

 

노동자가 점점 죽어가면서도, 절박함을 죽음으로 대응해도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연관성이 멀어지기 때문일까? 그러나 예전 사람들의 죽음은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음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밀려드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분신을 하고, 자결을 하는 마지막 이유는 내 생각으로 '뭔가에 이길 수 없을 직시한 마지막 저항'이라는 것이다. 죽은 이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것을 다시 돌려서 생각해 보면 뭔가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가 싸워야 하는데 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마지막 저항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개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나아가 집단이나 그 조직은 그가 내리는 마지막 경고, 행동에 대한 마지막 경고를 의미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노동운동판이 점점 책임감없이 달려든다. 싫은 소리는 듣지 않으려고 한다. 모두들 빠꿈이들이고, 대안은 다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누구도 선뜻 실천하자고 말 못한다. 같이 해야 행동이 되는 건데, 혼자하는 것은 발광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우울하지만, 노동자 '김동윤' 의 마지막 경고이자 마지막 외침을 기억하자.

 

더이상 소중한 생명으로 외치는, 경고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2005.9.1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ommy Emmanuel 공연을 다녀오다

백암아트홀. 그리고 내한 공연,

전좌석 매진,

토미 임마뉴엘

거의 3시간에 이르는 공연.

 

연주자는 단 한 사람.

 

424명의 관객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미남의, 동네 아저씨같은, 좋은 매너의

농담도 잘하는

친절한 토미 아저씨.

 

실력은 말할 것도 없다.

1부와 2부로 나누었다.

1부후 15분을 쉬고 다시 2시간에 걸친 공연

우리가 아는 곡은 모두 소개하는 센스.

 

앵콜 신청을 하지않았는데,

내가 아쉬워 하면서 한 곡이

빠진 거 같다고 생각한 곡을

마지막 인사가 끝났음에도

연구하는 그의 고마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친절하고

연주곡의 속도를

관객에게 선택하라는 자신감

그리고 "very fast"라는 관객의 주문에

정말 very fast하는 그의 놀라움

 

혼자 연주를 보러갔으나

혼자가 아닌 느낌

그의 글로벌 마인드

아프리카의 한 아이를

월드비젼같은 단체를 통해

돕고 있다는 그의 훈훈함

연주만큼이나 관객의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1부 공연의 즐거움은

2부 공연의 퍼포먼스를 능가하는 연주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에 맘껏 취했다.

5만원이 아깝지 않다.

연주 도중에 줄을 맞추는 놀라움

가끔씩 한 손은 연주하고 다른 손은 관객을 가르키며

관객과 일체가 되는 모습

 

정말 멋지다.

그의 음악은 즐거워서 좋다. 그리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더욱 좋다.

슬픈 곡은 너무 슬퍼서 그 슬픔에 빠지지 않게

즐거운 곡은 폭발하게끔 하는 그의

낙천적인 연주솜씨

 

두 아이의 아버지

6살난 딸을 위해 만든 연주곡

아름다웠고, 그의 노래도 감미로웠다.

기타부비에서 클라식칼 개스까지

이었다가 떼었다가하는 메들리풍의 연주

그도 취해서 즐거워 하는 모습이 좋았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연발하다. 화요일 2교시 수업을 째고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 기회가 잘 없다.

나중에 꼭 이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같이 봐야겠다. 큭큭큭~

 

여자친구가 아니더라도 기타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좋다.

 

토미가 다시 한국에 올날을 기대하며~

이상 넘치는 감정은 여기서 주체하자!

 

2005.9.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들통

사람은 두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도 한가지 일관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 물론 여러가지 모습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것이 다중인격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동시다발적인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비교적 나는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는데는 실패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목표가 분명해지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질 때 타인의 여러 면모를 발견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새로운 모습은 점점 개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숨겨진 모습은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여자를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이 여러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여러 명의 여자를 상대하는 사람은 그 여자의 수에 따라 다른 면모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의 상대녀는 아니다. 오직 자신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자신이 100%를 다 안다면 110%를 알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100%를 아는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별로 큰 문제는 안된다. 가장 친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러한 방법은 일일이 소개하기가 그렇다.

 

여하간 지나간 행적이 있을 것이고, 그 지나간 행적을 퍼즐을 맞추듯이 쭉 끼워 맞추다 보면 빠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빠진 퍼즐이 어디에, 무엇인지를 알게되면 결과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항상 들통이 나기 마련인 인생을 살고 있다. 모든 것은 언제가 드러난다. 다만 증명방법이 문제이다.

 

2005.9.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폭발

당신들은 아는가?

 

내 폭발하듯한 마음을 아는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하다. 그러면서나는 이렇게 무위하고 있는 걸...상처가 나면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심정을 아는가!

 

어느 누구가 나의 고통을 바라보고 웃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는 더 분노하고 더 질기게 잘근잘근히 나 심장을 꺼내어 들고,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분노는 에너지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춤추며 분노하고 싶다. 대가리 박터지게 인생의 한 방을 가르키는 사람들은 부당해고라는 악마와 싸우고 현실을 목도한다는 자들은 자신의 감시 속에서 감시수당을 받으며 하루를 버틴다. 누가 현실주의자인가? 누가! 누가!

 

먹고 살라고 하는 건 결국 동물도 하는 것이다. 날짐승도 하는 거란 말이다. 인간은 그럴려고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면서 동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의 가치를 찾아야 된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나의 고통이 아닌데 내가 눈물흘리는 것이 동물과 나의 다른 점이다. 무척 오늘 슬프다....너무나.

 

2005.8.3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