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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

미술학원에서는 늘 관찰력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정밀묘사를 스케치북 가득 그려내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나무를 갈색으로 표현하는 데에 주저한 적이 없다.

풍경화를 그린다. 나무가 있다. 나는 주저없이 갈색 물감을 붓에 묻혀 나무의 형태를 잡는다.

그래,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짙은 갈색이다.

이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고정관념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순간 뇌 안에서 작은 전구가 켜지는 듯한 만화적 느낌에 휩싸였다.

 

우리는 종종 나무 또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나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연상하는 이미지는 보통 정적이며, 생명의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인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매커니즘을 통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듯이

나무 또한 숨가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존재적 처절함만큼, 나무의 생애 또한 처절하지 않다고 누가 감히 단정할 것인가.

인간의 생애에 입혀지고 덧칠되는 수많은 고통과 위선과 허무와 희열과 행복의 색채만큼이나

나무의 생애 또한 그렇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단정하는가.

인간이 소란스럽게 호들갑 떨며 두려워하는 온갖 자연의 재앙들을

인간보다 훨씬 기나긴 세월 동안 버텨내는 그네들이 아닌가.

 

그래. 어쩐지 안경을 쓰기가 너무나 싫었던 차갑고 청명한 아침.

뭐든지 가까이 가지 않고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나의 근시안 덕분에

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처음엔 나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 순결하고 깨끗하며 평온했던 그 아침의 공기를 가슴 가득히 채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성기성기 날카롭고 가벼운 모양새로 엉켜 있는 눈꽃들 위에 가만히 입술을 대어

그 작고 날카롭지만 취약한 창조물들이 입술의 미약한 온기로 녹아내려가는 느낌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나무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갑자기 나의 눈을 휘어잡았다.

마치 두드러기에 걸린 아이의 몸처럼 붉은 반점이 점점이 박힌 그네의 몸은

한쪽에서 보면 이끼가 자라난 초록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차분한 보랏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피를 머금은 듯한 검붉은빛으로 휘돌아치고 있었다.

아주 당연한 발견 속에서 마주하는 신선한 충격. 그네의 몸은 짙은 갈색이 아니었더랜다.

누가 그네의 몸을 갈색 물감을 묻힌 성의없는 붓질 한 번으로 규정하도록 나에게 일러 주었던 것일까.

늘 지나치던 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내 눈으로 봐 왔던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째서 그네의 본래 색을 무시한 채 짙은 갈색이라는 재미없고 심심한 전형을 대입해 왔던 것일까.

어째서 그네 또한 생명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 나와는 다른 무생명적 존재로 치부했던가.

그래, 눈부시게 청명했던 오늘 아침,

나의 눈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의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그 안경이란 놈을 벗어던진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나무라는 존재의 생명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나무에게 완전히 밀착된,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순간 아, 하고 터지는 한숨. 혹은 탄성.

그네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심한 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완벽한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며 아름다운 자연의 곡선으로 뻗어나가던 그네의 가지가

그네의 뿌리에 기대어 올려다보았을 때는 얼마나 아귀처럼 처절한 모습이었는지.

그래, 관상용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그곳에 자리잡고 살아가게 되었을 그네이지만,

그네의 삶은 결코 관상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생명을 향해 처절하게 뻗어나간 아귀같은 손,

언젠가 불지옥을 묘사한 그림에서 보았던, 그 지옥불 속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검은색 손들처럼

그렇게 태양빛을 향해 무섭게 질주해나간 그네의 가늘지만 강인한 가지들의 모습이 말해주듯이.

살아남기 위한 그네의 삶은 얼마나 그 나름대로의 고통과 희망의 연속이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은, 세상의 안경 속에서 그 나무를 타자화하여 바라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삶의 치열함과 생명성을 무생명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를 '안다'라고 생각해 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나는 또 그 나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안경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틀림없이 갖가지 색채가 어둡고 밝으며 또 빠르고 느리게 휘몰아치고 있을 모든 존재들의 삶을

나의 기준에서 너무도 가볍게, 단색의 무생명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사람은 너무나 독단적이구나. 저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라 싫구나. 저 사람은 예의없으니 비호감이구나.

내가 그러한 단선적인 색안경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내가 안경을 벗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또 나름대로의 치열함으로, 에너지로 역동하며 다양한 빛깔의 사고를 엮어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타자'로 파악할 때에는 그러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절대로 조우할 수 없으리라.

 

아침,

나는 그렇게 나무를 통하여 다시 한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경이로움을 자각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존재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존엄한 것인가.

누가 감히 상대를 규정하고 비난하고 미워할 수 있을 것인가.

단선적인 앎, 그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무지보다 못하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모든 존재와 합일을 이루려는 의지 즉 사랑과 관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바르고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나무를 보는 눈보다는 전체 숲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무 하나하나의 경이로움과 생명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찌 숲을 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식으로 '숲'을 '알고 있다' 라고 착각하는 자들이야말로

인간애가 결여된 채 공학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수많은 어리석은 지식인들이다.

굳이 파시스트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장중심적 사회에서 인간 존재를 소홀히 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공돌이와 공순이의 피땀, 전태일의 분신을 망각한 채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은

개별적인 인간존재의 경이로움을 알지 못한 채 숲의 형태를 왜곡하여 파악한 불쌍한 이들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진부하게 길어질 테니 일단은 피한다.

 

그러나 나무의, 그 나무의 경이로운 정도로 치열하고 생명감 넘치는 삶의 흔적이 내게 가르쳐 주었듯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을 존엄히 여기는 그 경외심과

포기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모든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나무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 준 나의 근시안.

설사 이 눈이 몽골인들처럼 드넓은 평원 전체를 볼 수는 없는 눈일지라도,

나는 이 눈을 가짐으로써 평원에 돋아난 풀 한 포기의 경이로움과 조우할 수 있음이 감사하며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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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한 판 같은 사람.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길을 바라보는 노총각 두 명의 결혼 소식이 도착했다.

정말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아갈 것만 같은 분들이었는데,

두 분 모두 엄청 급작스럽게, 게다가 한꺼번에 결혼 뉴스를 들고 등장하셨다.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두 분 모두 혼자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화려한(?) 싱글이셨기에

나의 비혼가정에 대한 로망이 깨지는 듯해서 쪼끔 서운하긴 하지만,

그야말로 겹경사라 하겠다.

 

언제나처럼 능글능글한 말투로 전화를 걸어온 노총각 아저씨의 깜짝 결혼 발표에

깜짝 놀란 나머지 "응? 결호오온~~?!??" 이라고 하이톤으로 대답하니

능청스러운 그분의 말씀, "야, 삼촌이 계란 한 판 넘어 두 판으로 갈 때까지 혼자일 수 없잖냐~"

 

'계란 한 판'이라는 표현.

나이 서른을 그렇게 표현한단다.

그 표현을 처음 들어 봤는데,

굉장히 좋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서른 즈음이 되었을 때,

정말 꼭 계란 한 판 같은 사람으로 성장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란 한 판. 그것을 떠올리면, 굉장히 풍성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집에 계란 한 판만 있으면 순식간에 식탁이 풍성해진다.

계란 후라이 대충 부쳐서 간장이랑 참기름이랑 넣고 밥 비벼 먹어도 한 끼가 해결되며,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으로 만들 수 있는 어머니표 밥반찬들은 얼마나 다양하고, 또 하나하나 얼마나 맛난가.

요즘에는 아토피다 뭐다 해서 계란 들어간 거 잘 못 먹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더만,

대부분의 경우 계란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친구들과 함께 찜질방이며 목욕탕에서 수다를 떨며 까먹는 계란은 얼마나 감칠맛 나는지.

라면으로 초라한 한 끼를 때울 때에도 계란 하나 깨 넣으면 뭔가 풍성해지는 느낌이 든다.

가난한 농촌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버지의 학창시절,

막내아들을 유난히 아끼시던 할머니께서 가끔 형들 몰래 도시락에 챙겨 주셨던 계란 프라이는

지금도 아버님의 포근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래, 내가 서른이 되었을때,

계란 한 판의 느낌처럼 그렇게

여러모로 쓸모 많고, 어디서나 환영받으며,

어디에 있던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풍성하며 포근한 느낌을 안겨 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계란 한 판 같이 포근하고 성숙해져 있는 내 자신을 꿈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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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 전날 밤

 

건전한 대한민국 여고생 달달의

기말고사 전날 밤 식단은

 

커피 세 잔

커피만 마시면 두통이 생기는 자신을 위한 타이레놀 두 알

초콜릿 하나

커피+초콜릿이라는 아토피의 적을 섭취한 뒤의 후유증을 막기 위한 스테로이드제 한 알

 

...꼭 의사가 아니더라도,

상식적인 건강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악할 만한 구성이라 하겠다.

커피를 받지 않는 몸에 억지로 카페인을 부어넣고

그 고통을 잊으려 진통제를 먹고

피부병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먹고........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며 공부하는 달달의 모습은,

고3을 코앞에 두고 2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르는 고2 학생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서로 진통제를 먹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시험 전날이 되면 다들 각성제에 커피에 진통제 등등은 기본이 되어버린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는 아해들이 우리의 자화상인 양 느껴진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이유도 모른 채 끝없이 질주하는 아해들.

그저 낙오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며

자멸의 길을 향해 다같이 달려가고 있는 그 아해들의 모습은 현재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렇게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공부해야 하는 현실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친구 중 한 명은 일주일 전부터 위염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너무 아파서 공부가 되지 않는다며 아까 식당에서 울음을 터트렸더랜다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갈 시간도 아까워서

진통제로 버티면서, 울면서, 토하면서,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이건 독한 모범생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낙오자에게는 극도로 냉엄한 입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한민국 모든 아이들의 몸부림이며, 현실인 것이다.

 

대선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요즘 인터넷은 온통 대선 광고로 도배되어 있다.

이명박 후보는 명박 오빠만 믿으라며 청년실업 잡아준대고,

정동영 후보는 나의 행복을 찾아주겠단다.

 

사실 두 사람 모두에게 별로 믿음은 없지만,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발

우리 고등학생들

정상적으로 자신의 건강 고려해 가면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교육수준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우리들을 비인간적인 경쟁 속으로 내몰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산양 비슷하게 생긴 동물인 스프링벅들은, 풀을 조금이라도 더 먼저 뜯어먹기 위해 달려가다가

결국은 온 무리가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비극적 집단 자살을 한다고 한다.

우리 또한 이러한 무의미한 경쟁에서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지만

알고 보면 이 길의 끝에는 집단 자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든다.

 

지금 내신에 목을 매며 커피를 몸 속으로 부어넣는 나의 모습,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나처럼 비인간적인 공부 기계가 되기를 종용하는 이 사회, 

이것이 진정 인간적 가치가 중심이 되어야 할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이란 말인가?

 

씁쓸하다.

나는 다시 공부로 돌아가야겠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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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연애운도 봐주길 바래~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장난삼아 사주팔자를 봤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장난삼아 봤던 건데,

내 성격이며 전공까지 알아맞추는 데는 '와, 제법 용하다' 싶었다.

심지어 작년에서 올해까지 짝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까지 알아맞추시길래,

이 점쟁이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만원짜리 사주나 봐주고 계실 분이 맞나 싶었을 정도.

 

그런데 이 점쟁이 아주머니가 연애운을 읊으실 때 확 깨버린 거다.

물론 내가 여자니까 일반적으로는 남자 만날 운세를 짚어 주시는 게 맞겠지만,

내가 누군가. 이 땅의 당당한 레즈비언 아닌가.

아주머니가 연애운 짚어주신다길래 신났다가 한순간 확 깨버린 거다.

평소에는 애인 고르는 데 엄청 까다로운 척 하다가,

엉뚱하게도 단순하고 운동 잘하는 타입에 확 꽂힌다는 말은 정확하다.

근데 그게 왜 남자냐구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심지어 2010년에 연하 두 명이 생긴댄다.

아주머니........그거 레즈비언한테도 유효한 건가요?

삼년 뒤에 연하'남'말고 귀여운 소녀들 두 명 옆구리에 행복하게 끼고 다니면 안되겠니? ㅠㅠ

 

언제쯤이면 사주팔자 짚어주시는 아주머니도

'OO씨는 여자를 좋아해요, 남자를 좋아해요?' 라고 물어 볼까.

아니면 사주팔자 짚어 보다가 '아이구, 타고난 레즈네!' 라고 말해 주는 용한 보살님은 없을까?

 

어여쁜 레즈비언 처녀보살님한테 속시원하게 팔자풀이 듣고 싶다. 으헝헝.

지금이야 점집 차려놓고 '레즈보살'이라고 걸어 놓으면

호모포빅들한테 온갖 폭력 당하기 딱 좋겠지만.....

점집 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동성 커플 궁합 보고, 그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언능 왔으면 좋겠다. 으헝헝.

 

내 전공이며 성격이며, 연애운 빼고 다른 건 다 정확하게 들어맞췄던 그 아주머니가

시간이 흘러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나면,

내 연애운도 정확히 봐주실 수 있는 개방적 보살님이 되어 있길 바라면서,

 

실은, 만원 내고 연애운도 제대로 못 본게 억울해서 하소연해 본다. 흑흑.

레즈비언도 속시원하게 속속들이 사주팔자 봐주길 바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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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사춘기'

 

 

 

뭉크의 ‘사춘기’는 발가벗은 소녀가 두 손을 교차해서 몸을 가리고 침대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아직 덜 성숙한 소녀의 젖가슴과 앙상한 팔. 겁에 질린 듯 커다란 눈동자엔 슬픔과 두려움이 담겨 있다. 소녀는 막막한 얼굴이다. 이제 더는 아이가 아니다. 몸에 생긴 변화만큼 마음에도 여러 변화가 찾아왔지만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들은 곁에 없다. 소녀는 낯설고 무섭다.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기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충고가 한꺼번에 소녀를 짓누른다. 이 사춘기 소녀의 침대 뒤 오른 쪽 벽에 그려진 어두운 그림자처럼 무언가 순식간에 들이닥쳐 송두리째 삶을 망쳐버리게 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나 마냥 어둡고 답답할 것만 같던 사춘기가 지나면 네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 그저 방문을 잠그기 시작하는 너의 비밀을 존중해주며 기다리는 수밖엔.

 

삶이 언제는 우리에게 우호적이던가. 때론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이 위태롭고 우리가 바치는 열정을 비웃듯 차갑고 냉랭한 시선을 던져도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담담히 걸어가야 한다. 끔찍했던 순간들이 돌아보면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는 것처럼.

 

한겨레, 2007년 11월 0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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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들이여, 움직여라!

 

 



 

 

 

 

레주파 카페에서 레즈판님이 만들어 올려주신 이미지 몇 개 가지고 왔어요.

 

'차별금지법이 차별법이 되어도 좋은가' 라는 문구가 확 와닿습니다.

 

처음에 법무부에서 차별금지법 입법했을 때는,

 

드디어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가는가... 라며 희망찬 기분에 들떴었는데

 

현재 돌아가는 상태는.... 그야말로 비통한 한숨이 나올 뿐이죠.

 

사회에 잔뜩 끼인 호모포비아의 독가스가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기분입니다.

 

오늘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이 열린다고 들었어요.

 

아마 지금 한창 진행중이겠네요.

 

지금 열심히 발로 뛰고 있으실 분들에게 화이팅을 보내며,

 

우리 모두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라는 네 글자를 포함시키기 위해 단결해요!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죠.

 

그저, 나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 소박한 꿈을 위해 달려요 언니들! (오빠들도!!!)

 

 

 

더 많은 이미지 보고 퍼뜨려 주실 분은 요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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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일주일 전

 

수능이 일주일 남았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엄연히

지금은 블로그질 따위 할 시간조차 없을 만큼 눈코뜰 새 없이 바빠야 정상이겠지만,

아직 수시 발표가 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열중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 즈음 되면 정말 대입의 비인간성을 철저히 느끼게 된다.

주위 사람들 중 가장 여유롭던 친구들조차 하나 둘 날카로워지고,

하나같이 눈 밑이 퀭한 채 유령처럼 교복을 걸치고 교정을 떠돌아다닌다.

음... 심지어 너무 심하게 여유로워서 "너 인생 막장치냐-_-"라는 소리를 듣는 나조차

피곤해 보인다는 소리, 날카롭다는 소리를 듣는 요즘이니까.

 

공부하기 싫고, 얼마 전 사 놓고 펼쳐 보지도 못한 '리진'에 자꾸만 손이 간다.

사실 그것이 전혀 부정적인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자책해야 하고,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는 수학 모의고사 문제집 안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 들어가야만 한다.

 

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토나온다.

-_-

 

적성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사실.

특기자 전형이며 수시 전형이 아무리 많이 생겨나도,

결국엔 수치로 획일화된 붕어빵틀로 찍어낸 사람을 원하고 있다.

대입의 아이러니란 뭔가 알 수 없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음.... 결국 하나로 귀결되긴 한다.

모든 것을 다 잘 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정도?

아니면 외국 유학을 갔다 와서 영어를 끝내주게 잘하던지 말이다.

부유층이 아니라면....음, 모든 것을 다 잘 하세요! 기계가 되세요! 와하하!

뭐 이런 기분을 들게끔 한달까?

 

글을 엄청나게 잘 써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한 친구도

논술 때문에 대학에서 떨어지곤 한다.

왜냐하면, 논술은 글 쓰는 재주와 사고력보다는

체계적으로 '정답'을 써 내는 '분석력'(개뿔의!)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결국 학원이랄까.

정말 엄청나게 공부를 잘 하고, 온갖 상을 휩쓸었으며,

토플 점수도 높아서, '이야 ~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친구도

특목고 간 죄로 내신이 안 나와서 대학에 떨어지기도 한다. 친구 왈, 노무현 때문이랜다.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친구의 절망 앞에 차마 정치적인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반면 누군가는 내신 좋고 모든 것을 성실히 했지만

고등학교 평판이 안 좋아서 대학에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외국 유학 갔다 온 어떤 날라리 XX는

그냥 Y대 국제학부에 입학했다. 음, 팔자 좋다.

 

이 모양이다, 이런 꼬라지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러니 모든 것을 잘 해야 하는.

그야말로 '죽음의 트라이앵글'

그 속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가는 우리 고등학생들, 80만 명의 아해들.

 

하아.

이런 대입 전쟁 속에서

(요즘엔 초등학교 6학년 내 동생 다니는 학원에도 서울대반 있더라!)

레즈비언 친구의 성 정체성도 개방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시민의식과 인성을 함양한다는 것은

정말 뜬구름 잡는, 이상적인 소리가 아닐까.

뭐랄까

대학 가고 싶어서 울고 싶어졌고

이렇게 수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비인간적으로 자라나

갑자기 성인이 되고 사회에 던져질 아이들에게

무슨 시민의식 따위를 바라겠나, 라는 생각에

앞으로의 세상이 더 암울해서 또 울고 싶어졌다.

 

수능이 일주일 남았다.

 

그 일주일 동안 전국 고등학생들 눈 밑의 다크써클은 더욱 짙어질 테고

수능날에는 어김없이 추위가 찾아올 테다

이 틈을 틈타 장사꾼들은 어김없이 떡이며 엿을 과대포장해서

어처구니없는 가격에 팔아먹을 테고

그 상술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수많은 학부모와 수험생의 친구들이 있다

고등학생들의 어깨는 점점 내려앉을 테고

자세는 점점 구부정해질 테고

그리고 그렇게 수능이 끝나면

아이들은 수험표를 들고 여기저기로 흩어져

이제껏 쌓아왔던 스트레스를 배설하고 다닐 것이다.

수험표 할인을 내건 미용실에서 퍼머를 하고 옷을 사 입고

어쨌든 어른들의 상술 속에서 그렇게 놀아나다가

대학생이 되어 아무것도 모른 채 사회에 툭, 내던져질 것이다

 

수능이, 대입이 인생의 끝이 아닌데

그 이후에도 알 수 없는 미래는 가득하건만

지금 우리는

마치 대학만이 인생의 마지막인 양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뭐 이래저래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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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소비의 어려움 - 이랜드의 힘이란!

 

 

이랜드와 연을 끊은 지 벌써 두 달이 사뿐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이랜드 불매운동에 참가하겠다고 다짐했을 때에는 쉬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니 그것 참 생각보다 쉽지가 않더군요.

 

제일 먼저 뉴코아아울렛에서 싸게싸게 사던 옷들의 유혹을 떨쳐내야 했지요.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옷을 싸게 팔면서도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인데,

단기적인 이윤에 눈이 먼 자본주의적 탐욕에 가득찬 인간은 그것을 자꾸 잊으려 듭니다.

서민으로써, 세일 깃발을 크게 내건 이랜드 매장을 외면하기란 참 힘든 일이죠.

거기에 납품업체들의 어려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깔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싼 가격은 자꾸 내 눈을 끕니다.

 

그래요.

자본이 이 사회를 움직이고, 오직 화폐 증식이 사회의 지상 목표가 되며,

'합법적' 방법을 통한 이윤 추구는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는

'돈', '가격', 그 아래 있는 착취구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안다고 해도 거기에 대항하기 힘듭니다.

 

처음 한 달 동안, 저는 정말로 심각하게 '이랜드 금단현상' 에 시달렸습니다.

우리 동네 유일한 할인마트 홈에버와 뉴코아 아울렛을 거절하고

버스를 타고 좀 나가야 하는 재래시장에 가거나,

똑같은 옷에 돈을 더 내고 산다는 건 뭐랄까,

눈 딱 감고 이랜드 매장에 걸어가고 싶도록 만들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힘이란 이처럼 강력합니다.

제 생활 곳곳에 이렇게 부도덕한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참 섬뜩한 기분이었어요.

나름대로 유기농 제품을 사고 생협에 참가하는 등 노력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렇게 착취구조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란 제법 힘든 일이었구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소비란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강력한 돈, 돈 돈에 매몰된 인간성을 살리는 길일 테니까요.

우리 옆집 아주머니일 수도 우리 어머니일 수도 있는 이랜드 아주머니들이

바코드 찍는 기계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노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돈 몇만원보다 훨씬 중요할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 고등학생인 제가 졸업한 이후

저 자신이 스스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겠지요.

 

그래, 그런데,

기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일원인 동시에 양심적 개인으로 살아가려니 참.

아니, 사실 생각해 보면 '양심적 개인'처럼 거창한 걸 갖다붙일 필요도 없어요.

그저 나를 위해, 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일인데,

생각해 보면 참 당연한 일인데,

화폐 증식 회로 안에서 쳇바퀴 돌리는 쥐처럼

오늘도 이랜드 매장에 가시는 아파트 아주머니들을 보노라면

참 한숨이 나옵니다.

단돈 몇천원의 의미를 알기에, 따라서 그분들을 비난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래서 참 무섭습니다.

이랜드라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

과연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본주의에 대항해 이길 수 있을까요.

과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도 힘겹게 뉴코아아울렛에서 발걸음을 돌리며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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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이 좋다...!

 

 

이곳이 너무너무 좋다, 는 것을 깨달았다.

 

블로그홈에 들어오면 메인에 뜨는 여러 가지 포스트들을 보면서 느낀 것인데,

 

여기엔 참 많은 종류의 블로거들이 함께 어우러져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페이지 이름 자체가 '진보'블로그라, 거창한 담론만 오갈 줄 알았는데,

 

인간적이면서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든 면이 잘 나타나 있어서이다.

 

딱딱한 담론이 넘치는 곳도, 가벼운 허상만이 존재하는 곳도 아니다.

 

다만,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사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면을 존중해 준다 - 라는 느낌이 들게끔 해 주는 화면 구성이라, 참 좋다.

 

 

 

실존주의자들의 철학책에서 본 '인간 실존'이란 참 힘들고 삭막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유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이고 행복한 분들을 보면

 

참 좋은 느낌이다. 이런 것이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의 느낌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에 빨간 띠 매고 구호를 외치거나,

 

투쟁! 을 외치며 시사에 대해 비판하는 일 외에도

 

여행하고, 작은 정원에 물을 주며, 아기를 행복하게 키우고, 강아지를 사랑하고. 그런 것들.

 

큰 원칙과 작은 미물들을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일부러 어깨에 힘 넣고 공격적으로 말할 필요도,

 

일부러 가볍게 말할 필요도 없는 공간.

 

인간 존재의 모든 모습이 아름답게 존중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서 좋다.

 

이런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다, 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내가 온라인의 흰 여백에 키보드로 입력하는 텍스트가

 

예쁜 엽서에 쓰여진 조그마한 연필 글씨처럼, 그렇게 인간적이고 아날로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이곳을 발견해서 다행이다.

 

현실에 대한 사유와 삶에 대한 사유,

 

느리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있다고 느껴지는 화면 덕분에,

 

강한 구호와 투쟁들로 채워지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여유가 느껴지는 그런 공간이라,

 

왠지 안식을 얻는 것 같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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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좋아지지 않았어요

 

 

세상, 참 살기 힘들어지나 보다.

우리 아빠 초등학교 때는 소먹이 뜯으러 다니는 게 주 임무였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는 통학하고 시험보느라 나보다 더 고생하신 건 사실이지만

지방 고등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가는 친구가 여럿 있었댄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셨지만 어렵지 않게 취직하셔서 우리들을 키우셨다.

 

나 초등학교 때는 피아노 미술 수영 수학 영어 학원들을 다녔다.

명문 특목고 입학하겠다는 목표로 중학교 시절부터 새벽 한 시까지 학원에서 살았고

고등학교 들어와 보니, 고등학교 간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져

명문대에서는 특목고 아니면 잘 안 뽑아 가려고 하고, 지방고등학교는 인서울도 힘겹다.

대학 학벌?? 이제 말할 필요도 없다. 명문대 출신들도 취직하기 힘든 현실이다.

명문대 들어간다고 해도 미래는 불투명하다. 뭐하고 먹고 살지, 라는 고민.

 

나랑 내 동생은 다섯 살 터울이 나는데,

내 동생은 이제 피아노 미술 수영 학원 다닐 여유조차 없다.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누나처럼 도서관에서 동화책을 읽거나 미술을 하는 등

다양한 분야를 접해 보기는커녕

벌써부터 토익 공부, 중국어 공부, 영어 학원만 세 개.

특목고 준비 종합반에 들어갈까도 고려 중이다.

다섯 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이렇게 빨리 세상이 변해간다.

더욱 경쟁적으로, 더욱 소모적으로. 아이들의 인간적 성장은 매몰되어 간다.

 

슬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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