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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3/12
    이놈의 병! -웰빙과 소비병과 피자매연대에 대해서
    무나
  2. 2005/03/12
    서브시스턴스 없는 저항없고, 저항없는 서브시스턴스 없다
    무나
  3. 2005/03/12
    우리의 월경, 우리가 관리한다!(1)
    무나
  4. 2005/03/12
    건망증
    무나
  5. 2005/03/12
    이사하며(1)
    무나

이놈의 병! -웰빙과 소비병과 피자매연대에 대해서

  • 등록일
    2005/03/12 12:39
  • 수정일
    2005/03/12 12:39
피자매연대(http://bloodsisters.gg.gg)의 느림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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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를 보니, 20대 여성들이 카드빚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어간다고 나온다.
대학생들의 신용카드 발급을 제한하고 있지만, 그들의 소비습관까지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이 필요할 때면 고민을 하든, 하지 않든 카드를 긁는다.
가슴에 아무리 번민이 가득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이것이다.
소비를 피하지는 않는다는 것. 어느새 소비 그 자체가 우리들 삶의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반 자본주의 어쩌고 하면서 제아무리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를 욕하면서, 청렴결백을 떠는 듯해도,
나 자신조차 이 소비습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건 필요하지 않건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사야만, 그것이 가치있는 재화로 내게 다가오고, 또 나는 돈을 지불하는
그 관계 자체에서 행복을 찾는 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슬슬 옥죄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나 역시, 인사동 등지에 가면 잠잠했던 소비병이 도진다. 우습게도,
가장 기품있고 우아해보이고, 삶의 질과 연관되는 이른바 웰빙의 골목에서
나는 엄청나게 소비를 조장받는다. 이것도 사고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저 예쁜 한지 편지지를 써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사람도  떠오를 정도이니까.
나는 나의 욕망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누르고 한지가게에 들어갔다.
창호지 두 장을 2천원 주고 둘둘 말아 손에 드니, 왠지 아직도 손이 비어있는 느낌이다.
거리를 배회하며, 각종 귀걸이, 목걸이, 반지, 인도 옷들, 희안한 장신구들을 바라본다. 원래 인사동 그런 곳 아니었냐고?

인사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난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이 골목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그 때, 인사동 골목의 80%는 화랑이었다.
화랑은 언제나 공짜로 들어가 걸려있는 그림을 구경하고 나오면 되는 그런 공간이었고,
나에게는 신기하고 고마운 곳이었다. 지금은 찻집인지 밥집인지 술집인지 하는 곳으로 변한 건물에, 예전에는 ‘그림마당 민’이라는 화랑도 있었고, 지금 단성갤러리만 살아남은 그 주변도 온통 조그만한 화랑들이어서, 들어가서 쓱 한번 보면 그집 그림을 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뻘쭘함을 무릅쓰며 그런 곳에 들어가는 일을 무척 즐겼던 것 같다.
돈이 좀 되면, 화랑을 나오면서 팜플렛 하나 천원 주고 사서 집에 들고오는 마음이 행복했었다.
그런 행위들은 소비가 줄 수 없는 어떤 뿌듯함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조금은 엄숙하기도 한 그러한 의식을 치르면서 성장해왔다.
한 두 시간 정도 걸으면 서른 군데가 조금 넘는 화랑들을 둘러볼 수 있었고,
골목 골목에도 작은 화랑들로 아기자기했다. 내 기억에 90년대 중반 이후,
급작스럽게 ‘오, 자네왔는가!’ 따위의 인위적이기 그지없는 전통업소들이 들어왔고,
스타벅스가 들어왔을 땐, 인사동이 변해간다는 것에 대한 회의도 흐지부지해졌던 것 같다.
요즘엔 인사동에 한지를 사러 가거나, 구경거리가 없나 둘러보긴 하지만,
그림을 보러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한 2년동안, 중심가에 있는 단성에도 한 번 안들어간 것 같으니까.

  이제 인사동은 웰빙족들의 호사스런 소비공간이 되었고,
그 부유한 자들의 틈에는 나같은 가난뱅이들의 허영심을 채워줄 싸구려 물건들도
곳곳에 진열되어있고, 몇 천원짜리 쪼만한 장식들이 돈으로 값을 따질 수 없는
좋은 그림들의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래도 인사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만.

  우리 시대에, 웰빙이란, 건강식품, 다이어트상품, 유기농채소와 면생리대로 대표된다.
공통점은, 정신의 풍요를 강조하면서 하나같이 비싸다는 것인데, 원래 몸에 좋은 것은 비싸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것이 우리시대의 웰빙이다. 우리 시대의 웰빙상품 소비는,
그 물건들이 왜 비싼지, 생산과정이 어떠하기 때문에 몸에 좋은지도 별로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몸과 영혼과 행복은 서로 분리되어있고, 이 모두를 소비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먹어왔던 것, 입어왔던 것, 생활 속에서 노동을 통해 얻고 누리며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것이,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비싸고 몸에 좋은 것으로 둔갑을 하는 것을 보면
소비병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소비병에 걸린 사람들은 아직도 풍요(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차원에서)가 노동과 생산과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모른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자신의 몸에서 소비의 병을 치유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인데,
몸을 쓰지 않고, 무조건 간단하고 편리하게 살려고 하는 것을 보면, 불쌍하고 가련할 따름이다.
몸을 쓰긴 쓰되, 몸짱이 되기 위해서 헬쓰클럽에 나가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가 우리의 육체를 관리하고 감독하고 다스리는 힘의 위력을 새삼 깨닫는다.
영혼과 대화를 하긴 하되, 요가 비디오 빌려서 따라하고 곧 잊어버리는 기억 상실증에
또 한번 그 위력을 깨닫는다.
일러주지 않으면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구조 또한 참 아슬아슬하다.
모두가 병들고 모두가 치유하고 싶어하지만, 모두가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편리하고 쉽게만 하려 한다.
홈쇼핑도 생기고 인터넷 쇼핑몰도 마구마구 생기니,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유기농 채소를 기르려고 생각하지 않고, 아무도 생리대를 만들어서 쓰려고 생각하지 않으면 웰빙은 무슨. 자신의 병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계속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토마토와 고추, 쑥갓 등 묘목을 심어놓고 보는데, 날마다 쳐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그 초록 잎사귀들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들과 마주하는 시간은 고요하고도 활기차다.
뒷산에서 흙을 퍼오고, 화분을 정리하고, 옥상에 낑낑대며 화분을 날라놓고, 날마다 계단을 올라
그네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잎사귀를 만지고,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의 날씨를 예감하는 일은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소비의 병이 이렇게 고쳐지는 것임을 안다.
나는 요즘 물도 적게 쓰기 위해 오줌을 눌 때는 좌변기에 앉지 않는다.
물론 밖에 나가면 어쩔 수 없지만, 집에서는 화장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시원하게 일을 보고
한 바가지 물로 씻어낸다. 처음엔 나도 모르게 좌변기에 앉기도 했는데, 점점 바지 내리고
엉덩이를 깐 상태에서 다시 화장실 바닥으로 엉금엉금 걸어와 소변을 보는 일이 잦아졌고
이젠 조금씩 정착이 되가는 추세이다. 그러자, 습관적으로 휴지로 밑을 닦았던 것도 한 두 번씩
물로 처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찬물로 씻는 것은 두렵고도 생경해서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최근, 피자매연대 사람들이 휴지 쓰지 말고 손수건 가지고 다니자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나서 내가 얼마나 많은 휴지들을 쓰는 지 알게 되었다. 아직도 휴지를 들고 다니지만,
곧 가제 손수건을 들고 다닐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손수건 빠는 재미도 느낄 것이고,
손수건 빨아 너는 재미도 느낄 것이고, 손수건 마르기를 확인하면서 아직 눅눅한 손수건을
만지작 거리며 명상도 할 것이다. 진짜 좋은 삶(well-being)이란 무릇 이런 것이리라.

요즘 피자매 달거리대가 확 뜨긴 떴는지, 주문도 많이 들어오고, 웰빙 쇼핑몰에서 같이
하자고도 연락오고 아주 난리인데, 좋은 현상이면서도 조만간에 판매가 확 줄었으면 싶은 마음도 있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어온 사람들이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감을 잡을 것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면생리대 만들기 워크샾을 여러 번 해나가면서, 매번 놀라운 체험하게된다.
처음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나와같이 소비의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참 씁쓸하기도 한데, 더 무서운 것은 나이가 어릴 수록 그 증세가 심하다는 것이다.
달거리대를 전시해놓으면, 일단 와서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확인하고 바로 하는 말이
“와, 예쁘다. 근데 얼마에요?”인데, 왜 좋은지, 왜 써야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든 별로 없다.
우리가 막 설명을 하면, 나이드신 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시고,
아주머니들은 쑥스럽게 웃으시면서 꼬치꼬치 물으시고,
젊은이들은 관심있게 살펴보고, 잘 들으며,
십대 중에서도 중고딩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또래 애들과 수다떨기에 정신이 없으며,
초딩쯤 되는 애들은 그저 살지 말지를 고민한다. 참나, 이래서야 되겠느냐 싶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바느질을 시작하면 그토록 고요하고도 활기차게 변한다는 것은
보지 않으면 믿기도 어렵다. 그들은 집중을 해서 바느질을 하고, 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잘 떠들고 논다.
손이 천을 만지는 감촉에도 몰입하고, 바늘의 단단하고도 부드러움에 몰입하고,
길다란 실과 좁은 구멍과 나풀거리는 먼지들까지 몰입을 하고,
그들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머리카락도 그 순간 고요하다.
난 이런 순간에 어떤 기운들을 느끼는데, 그래서 나도 가만 있지 못하고 결국엔 바느질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서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나는 또 한 번 놀라는데,
모두들 훨씬 예뻐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얼굴에선 빛이 오르고, 어떤 사람들의 얼굴에선
쫒기는 사람의 뭔가 흐트러진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 곳에서 각자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자본주의의 두꺼운 가면이 금가고 녹아드는 모습을 본다.
소비병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그래서 밝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아무리 피곤하고
목이 쉬어도, 워크샾을 하고 나면 기분이 아주 상쾌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최근, 면생리대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들이 막 생기고 있다.
뭐, 자신들은 좋은 일을 한다고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웰빙에, 좋은 물건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현실적인 일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 업체들도 필요하긴 할 것이다.
아직 이 땅에는 소비병에 물든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당신들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으니,
우리에게 대량생산을 좀 맡겨주시오.’하는 부탁 아닌 부탁은 좀 안해줬으면 싶다.
피자매연대가 나날이 발전하고, 여기 저기 알게 모르게 워크샾이 퍼져나가면서 달거리대 작업팀도 늘고, 튼실해져 대량생산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좀 잘 알아줬으면 한다.
대량생산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고, 우리의 운동은 사람들에게
클릭 한 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자신의 물건을 직접 만들면서 명상도 하고, 삶의 여유도 느끼고,
소비의 병을 치유하고, 조금씩 소량생산, 자급자족의 패러다임을 확산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수고로움을 통해 서로 연대하고 작지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제발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피자매연대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을 즐겁게 느끼고,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피자매연대에서도 아직 만들기가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 면생리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에서 판매를 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이주노동자의 천막농성단을 지원하기 위한 행동에 돈이 필요하고,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에도, 풍동 철거민들의 투쟁에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도
판매를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한 걸음씩 일회용 안쓰기로 가길 바라고
사회에서 소외되는 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길로 가길 바라고 결국에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소비는 줄 수 없는 수고로움의 행복을 체득하기를 바라며,
결국에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시스템을 부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피자매연대 활동은 여성의 생리라는 작은 영역(물론 아주 작은 영역이라고 보기도 힘들지만서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진실되고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피자매연대가 ‘피자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자매연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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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시스턴스 없는 저항없고, 저항없는 서브시스턴스 없다

  • 등록일
    2005/03/12 12:36
  • 수정일
    2005/03/12 12:36
다음은 '나락한알'에 홍철님이 올린 글입니다.
http://cafe.daum.net/narakhanal


"서브시스턴스 없는 저항 없고, 저항 없는 서브시스턴스 없다"  

'서브시스턴스'라는 개념은, 우리 땅과 자유 학교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계신 동지들은 이미 귀에 익은 개념일 것입니다.

지난번 '서브시스턴스의 관점으로'라는 주제로 <힐러리에게 암소를> 등의 글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래 글은 이번 <녹색평론> 7-8월호에 실릴 마리아 미스와 일본 사람들의 대담 <서브시스턴스 회복의 가능성>의 일부입니다.

글 속에 나오는 '서브시스턴스 퍼스펙티브'라는 말은, 우리 말로 무리해서 번역하자면 '자율, 자급, 자치의 관점' 정도가 될까요. 아무튼 일부러 외국말 쓰자고 쓴 것이 아니고 도무지 아직 우리말로 적절히 옮길 수 있는 번역어가 없다고 김종철 선생님도 고심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일본사람들도 그냥 일본말로 '사부시스탄스'라고 쓴다네요.

아무튼 아래의 소제목

"서브시스턴스 없는 저항 없고, 저항 없는 서브시스턴스 없다"라는 독일 사람들의 말은, 아주 명쾌하고도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노동운동'과 서브시스턴스 관점에 관해 언급한 대목은 우리의 '연대의 방향'과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인 대목이다 싶습니다.

마리아 미스와 반다나 시바가 함께 쓴 <에코페미니즘> 같은 책을 보면 이러한 사상과 관점의 전모가 좀더 뚜렷이 드러나겠지만, 아쉬운 대로 곧 나올 <녹색평론> 7-8월호를 통해 세계화에 저항하는 투쟁의 길에 나선 우리가 과연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봅니다.

(우리 '땅과자유' 제2, 3신과 이 서브시스턴스의 개념을 연관지어 깊이 사색해 보실 것을 동지들께 권합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한 대목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마리아 미스와 대담 출처 소개 등은 맨 아래에 붙입니다. 번역은 이 목 씨가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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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시스턴스 없는 저항 없고, 저항 없는 서브시스턴스 없다"

  후루타 :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점은 '서브시스턴스 퍼스펙티브'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세번째 질문이 되겠는데요. 이를 위해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미스 씨께서는 서브시스턴스 퍼스펙티브는 모델이 아니라고, 그것은 '퍼스펙티브'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문제에 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미스 : 한가지 얘기가 더 있어요. 케냐정부가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정책 하에서 원래 케냐에 있던 농업을 갈아엎고 커피 생산을 확대시키라는 정책을 부과했습니다. 케냐라는 나라에서는 토지는 남성들의 소유물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땅에서 일하는 사람은 여성들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까 케냐 여성들은 커피농장에서 열매를 수확하거나 커피나무를 재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커피가격이 하락했을 때, 남성들은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이 없어져 돈이 바닥나고 말았지요. 그리고 농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성들 입장에서는 임금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커피를 수확해야 할 이유를 잃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농장 일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남성들은 정부에, 커피를 수확할 수 없다느니 생산된 커피열매가 팔리지 않는다고 호소하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절망적이기는 케냐정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은행에서 빌린 융자금의 이자를 지불할 자원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계은행도 커피생산에서 이익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화가 나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은행에서 여성들에게 압력을 넣어 대부금을 주는 대신에 커피생산을 확실하게 하도록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케냐정부는 남성들에게 아내를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가족은 조화를 유지해야 화평해진다는 등등의 말로 권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과 변함없이 여성들은 꿈쩍도 않고 케냐의 커피농원에서 일하기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또, 정부는 주부의 모델이라는 것을 케냐의 가족들에게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여성 한사람이 남성 한사람에 대해 임금을 받지 않고 노동으로 봉사한다는 모델입니다. 이러한 모델을 억지로 강요했던 것인데, 전통적으로 케냐의 여성들은 집단을 이루어 일하는 일종의 '팀워크' 같은 것이 있어서 이러한 모델을 강요하는 정부의 시도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케냐에서는 커피나무를 베어버리면 7년형에 처한다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머리가 아주 비상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만, 커피나무를 잘라내는 대신에 커피나무 사이사이에 콩이나 토마토 따위를 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커피나무를 그대로 방치해둔 채 물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시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커피나무는 베어내게 되었지요. 케냐정부는 대단히 불안정했고, 또 세계은행 역시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게다가 시민들 사이에서도 정부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커피나무를 잘라내고 그곳을 야채밭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채를 재배하게 되었고, 자기가 먹을 것과 가족들이 먹을 식량을 얻고, 그리고 먹고 남은 야채를 시장에 내다팔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스스로 마을에서 생명유지를 가능케 하는 서브시스턴스적인 시장을 형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아프리카의 남부와 동해안, 중부까지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점점더 크게 확산되었고 사람들은 환금작물 재배를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여성들이 시작한 운동이며, 여성들은 글로벌한 자본주의를 위한 일, 곧 대가 없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세가지 교훈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여성들은 세가지 차원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요소에 대항했습니다. 첫번째 차원은 자기 남편, 두번째는 국가, 세번째는 세계은행으로, 다시 말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에 대항했습니다.

둘째, 여성들은 돈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녀들은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옛날부터 내려온 서브시스턴스적인 생활로 돌아가 그것을 부활시켰던 것입니다. 쓰고 나면 사라져버리는 돈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자신의 생활보장을 쟁취하려 했다는, 보통 노동조합이 소망하는 것 같은 보장이 아닌 별개의 보장, 자신의 생활을 위한 안전보장을 쟁취했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진정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셋째, 그녀들이 자신의 생산수단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들은 특별히 자신의 토지나 자산의 권리를 자기 명의로 할 것을 호소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것을 쓰는 데서 시작했지요. 토지나 자산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벌였던 것이 아니고 단순히 자신들이 처한 입장에서 행동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곳에 있던 수단은 서브시스턴스적인 생활을 구축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독일에서 나온 슬로건을 가지고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브시스턴스 없이 저항 없다" 즉 서브시스턴스가 없다면 저항을 하더라도 그 투쟁을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노동자나 노동조합에서 지금까지 벌여온 것과 같은 운동을 펼친다 하더라도, 글로벌 경제 속에서는 그들의 운동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딘가에서 해결을 본다고 하더라도 다시 또다른 곳으로 문제가 이전될 뿐이며, "임금을 인상하라"거나 "직업의 안정을 보장하라"고 부르짖더라도 지금의 경제체제 안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슬로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항하지 않으면 서브시스턴스는 없다"입니다. 서브시스턴스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 쟁취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세계를, 또 글로벌 경제를 응시하면서 싸워나가지 않는다면 서브시스턴스적인 생활마저 지켜낼 수 없다는 얘기지요. 케냐의 여성들의 행동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서브시스턴스 없이는 저항도 없습니다. 저항하지 않고서는 서브시스턴스란 없는 것이지요.

후루타 : 무엇에 대한 저항이냐 하는 문제입니다만,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고, 지금 같아서는 제2단계로 들어선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라 해도 좋겠군요.

케냐 여성들이 가능한 일부터 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서 시작됐습니다. 힐러리처럼 지위상승을 애써 목표로 삼았던 것이 아니었고, 달리 변신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그저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의 가치관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는 그런 얘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여성해방사상과 똑같다고, 예상대로 미스 씨는 "일관된 페미니스트로구나" 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브시스턴스 퍼스펙티브'라는 것이 역시 모델이 아니라 '퍼스펙티브'라는 사실에 생각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서브시스턴스가 모델이라고 가정한다면, "무엇 무엇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서브시스턴스가 아니다" 하는 얘기가 되겠는데, 그것이 '퍼스펙티브'이기 때문에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그러한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일이 가능하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미스 : 그렇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언제든 시작할 수 있지요. 외부로부터의 혁명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을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전세계에 여러 다양한 장소가 있는데, 각 토지마다 다르다는 얘기지요. 일본이나 독일에서도 제각기 서로 다른 형태의 서브시스턴스 퍼스펙티브, 그 이상적인 존재형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케냐의 여성들에게서 기본적인 교훈은 얻을 수 있습니다. 혹 시간이 좀더 마련된다면 더 많은 독일의 사례를 나눌 수 있겠습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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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말
현재 독일 쾰른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인 마리아 미스(Maria Mies, 1931-)는, 이미 본지에 몇차례 소개된 저명한 여성 사회학자로서, 오래 전부터 여성, 환경, 제3세계 운동을 펼쳐왔으며, 현재 독일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이다. 특히, 근년에 그녀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서브시스턴스 퍼스펙티브(subsistence perspective)'라는 개념을 구축하여, 지금 인간과 자연을 근원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세계화' 경제에 맞서는 저항운동으로서 새로운 방책을 제시해왔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2001년 12월 7일 일본을 방문한 마리아 미스가 후지와라(藤原) 출판사의 주선으로 행한 대담기록이다. 출전은 일본 잡지《環》2003년 겨울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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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월경, 우리가 관리한다!

  • 등록일
    2005/03/12 12:32
  • 수정일
    2005/03/12 12:32
우리의 월경, 우리가 관리한다!

- 대안월경대운동에 대한 작은 보고서


매닉(피자매연대)

http://bloodsisters.or.kr


    처음 대안월경대와 월경컵(각주1 대안월경대는 면으로 만들어 빨아 쓰는 생리대를 말한다. 월경컵은 질에 삽입하여 월경혈을 받아내는 도구이다. 자세한 이미지와 설명은 피자매연대 홈페이지 bloodsisters.gg.gg를 참조하길...)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캐나다 친구를 통해서였다. 그것을 계기로 대안월경용품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이것저것 직접 사용해 보기도 하고 여기 저기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하면서 2003년 가을쯤에 피자매연대(각주2󰡐피자매󰡑라는 이름은 캐나다의 대안월경대 공동체인 Bloodsisters(bloodsisters.org)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를 꾸려나가게 되었다. 월경페스티발 거리축제 때 탐폰 판촉 부스 앞에서 캐나다 친구와 함께 󰡐탐폰은 독이다!󰡑를 외치기도 하고, 면월경대와 월경컵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목이 쉬도록 설명을 하기도 했다. 그 후로 수 차례의 대안월경대 만들기 워크샵이 있었고 현재는 그러한 작업들이 감자뿌리처럼 또 다른 워크샵들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 중에 사람들이 던지는 여러 질문에 이런 저런 궁색한 대답들을 늘어놓으면서 발전시키게 된 몇 가지 주제가 있는데, 한마디로 대안월경대는 무엇에 대한 대안이냐 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간단하게 탐폰과 일회용 생리대에 대한 대안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탐폰과 일회용생리대를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탐폰과 일회용생리대는 여성의 몸에 해롭다는 것이다. 1980년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36명의 여성이 독성쇼크증후군(Toxic Shock Syndrome, 일명 TSS)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려 사망하고, 1000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신형 탐폰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그 탐폰에 들어가 있는 흡수력이 높은 합성섬유가 독성쇼크증후군을 일으키는 포도상 구균의 감염을 높인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그 후 미국 FDA는󰡐흡수력이 낮은 탐폰을 이용하라󰡑라고 권고하는데 그침으로써 탐폰의 안전성에 관한 책임을 사용 여성들에게 떠넘겨버린다.

    독성쇼크증후군과 함께 다이옥신 또한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대부분의 탐폰에는 레이온이 포함되어 있고 레이온은 나무 펄프로 만들어지는데, 이 나무 펄프를 염소 표백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 바로 가장 강력한 발암물질이자 환경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는 다이옥신이다. 다이옥신은 자궁경부암, 자궁내막증, 불임증, 난소암, 유방암, 면역체계결함, 골반내염증질환 등 각종 여성 생식기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다. 그 외에도 탐폰과 일회용생리대에는 인체에 해로운 여러 가지 첨가물들이 들어있다. 생리대를 사용하는 많은 여성들이 고질적인 국부 염증, 가려움, 질염 등을 호소하고 있고, 대안월경대로 바꾼 여성들은 그 증세가 많이 완화되었거나 없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탐폰과 일회용생리대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거의 탐폰과 생리대회사 자체에 떠넘겨지고 미국이나 한국이나 객관성 있는 독립연구기관이 전무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각주3󰡒Pulling the Plug on the Tampon Industry", Karen Houppert, Village Voice, February 7, 1995. 이 글은 미국 여성위생산업계와 FDA가 어떻게 탐폰의 위험성을 무시하고 은폐해왔는지에 대해 검증된 자료를 바탕으로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 각종 탐폰, 생리대 광고를 통해 여성위생산업이 조장하는 여성 억압적 가치의 확대 재생산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http://www.spotsite.org/에 들어가면 이 글을 읽을 수 있다.)

    여성의 건강에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것 이외에도 일회용 생리대와 탐폰은 엄청난 생태 환경 파괴를 초래한다. 생리대와 탐폰의 주성분인 펄프를 얻기 위한 벌목으로 제3세계 여성들의 삶의 기반인 숲이 황폐화된다. 또 펄프를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물의 낭비와 오염이 초래된다. 또 인구의 절반이 매달 내놓는 엄청난 양의 생리대 쓰레기는 소각할 때 발생하는 유독가스와 매립했을 경우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각종 환경호르몬과 유해물질을 통해 공기, 땅, 물을 오염시키게 된다.

    마지막으로 일회용생리대와 탐폰은 여성의 몸과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일회용생리대가 여성의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일반적 통념과는 다르게, 오히려 여성억압적 가치를 더욱 확산시킨다. 대부분의 일회용생리대 판촉광고는 월경을 자연스러운 몸의 현상이 아니라 여성이 감추고 극복하고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스스로 월경이라는 󰡐열등함󰡑을 극복하고 남성처럼 월경이 없는 듯이 일해야지만 남녀평등의 문제가 해결되고 자유를 쟁취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사회가 원천적으로 남성중심적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가린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감쪽같이 월경을 처리하는 비용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나날이 비싸지는 생리대에 드는 비용뿐만이 아니라 건강을 해치는 데서 오는 비용, 환경에 대한 비용들도 포함된다. 일회용생리대가 강조하는 “깨끗함”과 “안전함”은 표백약품과 초강력 흡수를 위한 각종 첨가물, 땅 속에 버려도 분해되지 않는 화학물질들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대안의 의미를 짚어가다 보면 결국 여성의 몸과 그들의 삶의 근간인 환경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세력의 중심에 여성위생산업, 펄프산업, 다국적기업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세계 민중들의 자급력과 재생력을 박탈하고, 약자에 대한 사회의 보호망들을 제거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산해낸 󰡒잉여󰡓가 자신들의 자본력과 기술력 때문에 이루어진 가치생산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여성, 환경, 이주민, 제3세계를 식민화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다층적 맥락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대안월경대운동은󰡐웰빙󰡑이라는 상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묻혀버리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대안월경대운동이 자본주의의 상품화에 반대하는 자급적, 재생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맥락화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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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 등록일
    2005/03/12 12:27
  • 수정일
    2005/03/12 12:27

난 건망증이 너무 심해서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곧잘 까먹곤 한다.

때론 이 망할놈의 건망증 때문에

내 인상이 송두리째 이 놈에게 뺏긴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놈에게서 내 삶을 탈환하기 위해서

대안은 기록을 남기는 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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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며

  • 등록일
    2005/03/12 12:24
  • 수정일
    2005/03/12 12:24

네이버 블로그를 웹하드처럼 쓰다가

진보넷 블로그로 오늘 이사했다.

거기 있는 글들을 죄다 이쪽으로 옮기고

그곳은 폐쇠할 예정.

좀 지속적으로 글을 써야지 잡글이든, 뭐든

쓰지 않으면 사고의 발전도 없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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