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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정의와 환경성차별주의(번역)

  • 등록일
    2005/03/12 14:53
  • 수정일
    2005/03/12 14:53
환경정의와 환경성차별주의

-미국의 학생환경운동연대
(Student Environmental Action Coalition : http://www.seac.org)
의 탐폰반대운동 사이트에서 퍼온 글


자연 생태와 환경을 보전하는 일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이며 시민의 권리이고
여성의 권리이고 선주민의 권리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의 권리와 노동의 권리에도 연관된다.
이러한 권리는 서로 얽혀 있으며, 한쪽이 해를 입게 되면 다른 쪽도 해를 입게 된다.

우선, 환경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들의 환경파괴를 외부로 전가하려는 세력들에 대항하는
풀뿌리들의 운동이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주로 사회 빈곤층과 유색인 지역 등사회 주변부에 세워지는
쓰레기 매립지, 소각장, 공장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다.
환경정의 운동은 바로 환경파괴로 인한 피해가
여러 주변부 민중들과 어떻게 연관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일회용 탐폰과 생리대는 제품의 제조과정에서부터 매립과 소각에 이르기까지
저소득층과 유색인에게 지대한 피해를 입힌다.
생리대 공장과 펄프 공장은 독성이 강한 화학물들을 지하수와 대기 중에 방출시키며
노약자들에게 각종 호흡기 질환 등을 유발시킨다.
펄프를 표백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성되는 다이옥신은
매우 강력한 발암물질이다.
또 공장들은 비소, 바륨 등의 중금속을 방출한다.

지속가능한 면화프로젝트(Sustainable Cotton Project)에 따르면,
지구상에 뿌려지는 살충제의 25 퍼센트가 면화에 뿌려진다고 한다.
면화가 많이 생산되는 미국 남부 지역의 사람들은
오염된 물과 토양 속에서 이런 화학물질들에 오염된 생선을 먹고 있다.
또 매일 방대한 양의 쓰레기들이
저소득층, 유색인들의 마을 근처의 매립지와 소각장을 가득 매우며
지역 환경의 질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일회용 생리용품의 편리성 이면에는,
이렇듯 미국의 주변부 민중들의 고통이 숨어있다.  

한편, 환경정의 운동과 성차별주의는 어떠한 관련성을 갖는가?
환경정의투쟁은 억압과 지배의 역사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지배라는 측면에서
가부장제도 환경정의운동의 스펙트럼 속에 들어온다.
비록 환경정의운동과 환경성차별주의반대운동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개념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확실하다.
환경성차별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는 월경생활과 여성위생산업이 사회적 억압에
긴밀하게 엮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탐폰은 "월경하는 사람들"이라는 특정 부류의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집중시키는 위험한 물건이다.
우리가 정의하는 "월경하는 사람들"은 생물학적 여성뿐만이 아닌
다양한 성별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월경하는 사람들은 여성이고,
따라서 가부장제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연구
혹은 여성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이들의 생태주의적 접근 또한
환경성차별주의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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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반대 누드시위에 대한 단상

  • 등록일
    2005/03/12 14:43
  • 수정일
    2005/03/12 14:43

모피반대 누드시위에 대한 단상

 

어제 명동거리에서 두 미국 여인의 누드시위가 있었는데
몇분만에 경찰에 잡혀갔다고 한다. 엄청난 기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역시나 초점은 '둘이 벗었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번 시위로 내가 가진 옷들중에 동물의 가죽이나 털이 들어간 것들이 없는지
곰곰히 살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약 15년 전에는 오리털잠바, 일명 덕다운이 한반도를 쓸고 갔었다.
그때 난 중학생이었는데, 대학생인 언니만 오리털잠바를 사준다고
심하게 삐졌던 일이 기억난다. 오리털의 인기는 무스탕의 등극으로 사그라들었고,
무스탕 역시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무겁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지금도 장롱에는 그떄 싯가로 20만원 했던 무스탕이 애물단지처럼 쳐박혀 있다.
이제는 무겁고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는 소가죽을 두른다는 심리적 부담이
나를 더 압박한다.

비록 오리털과 무스탕을 안 입어도,
따져보니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나에게 아직도 많다.
우선 세무재질로 된 지갑이 그렇고, 저번에 산 구두도 합성피혁이 아닌
진짜 가죽이다. 매일 입다시피 하는 오버코트모자에 프릴장식으로 달린 털도
만져보니 느낌이 아무래도 진짜 동물털이다. 집 난방이 부실하다보니
영하 5도 밑으로 떨어지면 늘 입게되는 따뜻한 앙고라 스웨터도 토끼털 아닌가!

앗 또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 아끼는 5년이 훌쩍 넘은 손때 묻은 가방도 가죽가방이다.
"가죽은 오래가고 오래 쓸수록 정이 든다"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일부러 손때 묻히고 정을 들여왔던 건데,
생각해보니 동물을 죽여 그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치면, 일반 모피코트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동물의 고기를 먹고 가죽을 이용하는 것을 그만두어야할까?
이런 질문을 하면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가 있다.
어떻게 고기를 먹고 어떻게 가죽을 이용하는가에 대한 맥락과 상황에 대한 고찰이 빠지기 된다는 것.
대대로 그 자기가 사는 고장의 자연과 공존하며 그 균형을 지키며 살아온 농민이
집안에 경사가 생겨서 기르던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 손님에게 대접하는 풍습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다. 고원의 칼바람을 막기 위해 기르던 소나 말의 가죽으로
천막을 짓고 옷을 해 입는 유목민의 문화를 비판할 생각도 없다.
문제는 가죽과 고기가 상품으로 난무하는 이 소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과의 균형을 파괴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체계적인 도살과 살육인 것일 터.

싯가 200-300백만원을 훌쩍 넘는 모피코트를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밍크 백 마리를 죽이는 짓은
정말이지 "돈지랄"에 의한 대대적 살육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게다가 가죽을 깨끗하게 벗겨내기 위해서 동물들을 살해하는 방법이 매우 잔혹할 뿐만 아니라,
가죽이나 모피를 위해 키워지는 동물은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그 모피가 부드럽고 고가라고 하니
이렇게 체계적인 살육과 고문시스템도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씨암탉은 그래도 살아있을 동안은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자유를 누린 행복한 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잔치 때 돼지를 잡는 장면을 목격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살육의 공포에 대한 최초의 원형으로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원형을 가슴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소비주의 시대에 경이롭다고 해야 할 것은,
막상 소 잡고 닭 잡는 생생한 장면에 대해서는 경악하면서,
모두가 엄청난 양의 고기를 "오바"해서 먹고, 엄청난 양의 가죽을 "오바"해서 쓰고 있다.
살생과 비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사람을 넘어 동물에게까지 전이되는 이 상당히 의식화된 "인도주의"시대에
고기, 가죽, 모피에 대한 수요는 더욱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때로는 "동물보호"라는 말이 동물이 학대받고 무차별 학살되고 있는 현실을
교묘히 가리는 "휴머니즘"의 대명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언론들에서 떠들어대는 "동물보호"는 서구인들과 중산층의 3세계에 대한 이중 잣대를 떠올리게 해서
느끼하고 낯간지러울 때가 많다.

늘 하는 생각이고 주장이지만,
동물보호는 "서브시스턴스"라고 하는 자급과 재생의 삶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부르주아 휴머니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필요"가 아닌 "잉여"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바라보자는 얘기다.
자본주의 생산, 소비 시스템이야 말로
본디 비폭력인 자연의 체제를  폭력의 체제로 치완하며, 동시에
그 폭력을 휴머니즘으로 위장하는 "의사비폭력"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폭력인 자연, 그 스스로의 균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것도 근본적으로 "보호"될 수 없다.


그나저나 나부터 진작 했어야 할 "채식주의"를 몸으로 한번 채득해보는
한해가 되어야 할텐데...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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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균형발전과 신개발주의의 갈등"을 읽고 든 생각

  • 등록일
    2005/03/12 13:33
  • 수정일
    2005/03/12 13:33

"균형발전과 신개발주의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김홍빈 전 서울 부시장이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심포지엄에서 했던 격려사입니다.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전 서울 부시장이라는 사람이 꽤나 좌파적인 사고를 가졌군요. 신기^^ 

그러나

신개발주의의 재적 모순이라며, "균형발전"과 "시장원리에 의한 개발" 좀더 넓게 개념화 하면 "평등"과 "자유"를 여전히 모순적 개념으로 대치시키는 듯 합니다. 그러한 모순적인 개념으로의 전제가 "제3의" 길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서도 그렇고 신개발주의에서도 그렇고 "균형발전"(평등)과 "시장원리를 통한 발전"(자유)은 자본주의, 개발주의 하에서 서로 보충적이고 보완적 개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균형발전은 개발의 "당위론"이 되는 것이고, "시장의 원리를 통한 발전"은 방법론이 됩니다. 한마디로 균형발전을 시장의 자유를 통해 이루자는 것이죠. 여기에서 균형발전이란 강북이 강남처럼, 제3세계가 1세계처럼, 시골이 도시처럼, 유색인이 백인처럼, 여성이 남성처럼 등등의 근대화의 이분법에서 열등한 한쪽이 우등한 한쪽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전제에서 시장의 원리, 자본의 원리가 무한대로 체택되는 논리가 되겠죠. 결국은 그 원리에 이득을 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따라잡으려고 개발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따라잡아보라고 손짓한 그 강남, 1세계, 도시, 남성, 백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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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개발주의’ 비판
“균형발전과 신개발주의의 갈등”
한국공간환경학회/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심포지엄 격려사
강홍빈 2004. 6.4

1. 말머리에

만시지탄이 있으나 오늘 이 심포지엄이 열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한국공간환경학회와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에 감사드립니다.

2년 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돌아오면서 저는 이제 조용한 도시 관찰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제게 남은 시간을 바로 쓰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건 시장과 정성들여 만든 정책들이 후임자에 의해 일그러지고 버려지는 것을 보면서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만, 그러한 아픔 또한 남기고 온 일에 대해 떠난 사람이 버리지 못하는 부질없는 집착 탓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대규모 개발사업을 몰고 올 것이 불 보듯 뻔한데도 청계천 사업이 ‘생명을 되살리는’ 사업으로 포장되어 요란한 팡파레 속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도 혼자 속만 태웠습니다. 그리고 정략적 타산에서 탄생된 신행정수도계획이 ‘지배구조 개혁을 위한 역사적 사업’이라는 위정자의 거창한 의미부여 속에 충분한 검토도 국민적 합의과정도 없이 진행되어도, 누군가 양식 있는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하겠지 하고 비켜나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혼자 속앓이 한 것이 쌓인 탓인지 몸까지 안 좋아져 지난 1년 동안 본격적인 은둔자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고삐 풀린 개발주의의 질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자라나, ‘불도저 서울시장’의 독주를 비판하는 글들이 나타나고 신행정수도계획에 대해서도 헌법소원이 제기될 모양입니다.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더 이상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먼 산 보듯 할 수가 없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서울시정과 함께 보낸 사람으로서, 그리고 도시를 사랑하며 도시에 대한 공부와 실천에 한 평생을 보낸 사람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분명히 말해야 할 책무를 느낍니다.

2. ‘신개발주의’의 대두

지금 우리사회는 바야흐로 도시개발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듯 합니다. 수도이전계획으로 온 충청권이 들썩이고 서울은 서울대로 도심지역에서는 청계천‘복원’에 따른 연변재개발을 두고, 변두리에서는 ‘뉴 타운’ 건설을 두고 기대감과 우려가 교차되고 있습니다. (뉴 타운 개념의 창시자 에베네저 하워드가 놀랄 언어의 왜곡 - 이것 또한 ‘신개발주의’에 공통된 속성입니다) 지방은 지방대로 기관장 소속 정당과 관계없이 크고 작은 개발사업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도시계획 관련 교수와 용역업계는 넘쳐나는 자문과 용역으로 바쁘고 시민은 신문 전면과 황금시간대의 방송을 장식하는 세련된 부동산 광고에서 혹은 기죽고, 혹은 ‘재테크’의 호기를 찾습니다. 카지노 개발이다, 경견(競犬)장 개발이다 해서 투자자를 등치는 개발사기극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발선호’의 현상에는 지난 급성장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믿음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개발은 성장이며 발전이어서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느림은 침체요 빠름은 발전이라는 생각, 물리적으로 낮고 작고 오래된 것은 그 사회적 내용에서도 병리적인 것이어서 높고 크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어 마땅하다는 논리가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단번에 큰 변화를 가져올 개발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할 재원을 끌어오는 정치가야 말로 유능한 정치가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시대의 ‘신개발주의’와 지난 압축성장기의 ‘구개발주의’ 사이에는 차이도 큽니다. '구개발주의‘가 확대되는 경제활동과 새로운 계급을 담는 도시공간을 만들고 제조업에 소비시장을 만들어주었다면, 신개발주의에서는 ‘차별성’ (부르디외)을 부각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장소 자체를 상품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신개발주의 프로젝트들은 하나같이 생태, 환경, 역사, 문화, 여가 등의 ‘잘나가는’ 주제로 스스로를 포장합니다. 구개발주의의 주역은 국가였지만, 신개발주의에서는 국가와 민간부문이 공고한 파트너쉽을 이룹니다. 구개발주의는 ‘필요’를 채우기 위한 개발을 양산했다면, 신개발주의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발을 고안해냅니다 (보들리야르). 구개발주의가 비켜지나갔거나 버려두었던 공간을 구개발주의는 다시 찾아내 ‘황금의 알’을 낳는 투자사업을 만들어냅니다.
3. 신개발주의의 허구성

나는 현재 문제되고 있는 개발사업의 창도자들이 순전히 정략적인 이유에서 이러한 사업들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설령 정략적인 이유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해서 그 사업들이 모두 옳지 않다는 논리 또한 성립되지 않습니다. 제가 신행정수도나 청계천연변 재개발, 뉴 타운 사업을 문제 삼는 것은 그 사업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동기와는 무관하게 이 사업들이 기초하고 있는 ‘신개발주의’의 관점에 사회적 정당성, 경제적 적실성, 문화적 타당성, 정치적 민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업들은 나름대로 ‘불균형’의 문제를 치유하려는 취지에서 발상된 것이지만 (물론, 표면상의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사업들이 실행에 옮겨지면 그 불균형은 오히려 더 심화되거나 새로운 형태의 불균형이 초래되어 결과적으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부추기게 되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정의로운가

신개발주의에서의 개발사업은 흔히 공공-민간의 파트너쉽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는 개발사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용적율, 건폐율, 토지가, 조세 등에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민간개발자는 개발에 소요되는 재원을 조달해 사업을 실행에 옮깁니다. 얼마 전 여야로 갈려지기는 했지만 건설부와 서울시의 두 씽크 탱크가 공동주최하여 관민합작사업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했던 일도 이런 의미에서 시사적입니다.

관민합작개발은 소위 ‘신고전주의경제’전략을 구사하는 ‘기업가적 정부’에서 흔히 채택하고 있는 개발방식입니다. 런던의 도크랜드 개발, 뉴욕의 배터리 파크 개발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지만 그 밖에도 우파적 시장이 이끄는 많은 도시들이 이런 방법을 써서 오랜 방치와 제조업의 쇠퇴로 침체된 도심지역을 ‘소생’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발사업들의 결과 도심지역이 물리적으로는 ‘소생’했을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현상을 심화시켰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찰입니다. 한참 첨단산업, 서비스산업의 확장으로 호황을 누리게 된로스앤젤스, 초호화 아파트 트럼프 타워가 건설되는 뉴욕 만하탄에 갈 곳 없는 노숙자가 양산된 것이 바로 이러한 경제양극화를 실증하고 있습니다 (7만에서 20만으로 추산, 닐 스미스). 도심‘공동화’의 문제를 주장하지만, 숱한 사람들의 생업의 터전을 뚜렷한 대안 없이 비워서 고급 아파트로 대체한다면, 이것이 과연 사회정의에 부합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들 아파트의 건설주와 거주자가 별다른 부담 없이 도심의 지리적 이점, 시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청계천으로의 접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궁과 남산의 조망을 독점하도록 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요? 청진동의 해장국집이 고급 와인 바로 대체된다고 해서 이것이 발전일가요?

구개발주의에서는 정당성을 결여한 정부였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최소한의 세입자대책은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정당성을 갖춘 지금의 정부는 오히려 ‘시장논리’에 맡겨 오히려 세입자대책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왕십리 뉴타운만 하더라도 주민 열 명 가운데 여덟 명이 세입자인데 그 중 다섯명에서 여섯명은 어디론가 떠나야 할 판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이 지역에 생업을 두고 있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개발주의자들은 성장을 하면 그만큼 효과가 ‘아래로’ 흘러들어 결국은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저소득층에게도 돌아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필터링’이론의 허구성과 그 바탕이 되었던 ‘발전론’의 바탕은 도전받고 있습니다. 시장논리에 맡기는 개발이라고 하지만, 그 시장은 이미 대자본, 건설사업자, 금융자본, 대단위 토지소유주에게 유리하게 구성된 시장입니다. 그나마 마련된 계획기제를 바꿔가면서까지 자본친화적인 시장에 개발을 맡긴다는 것은 결국 정치권력이 기득권층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책에 시민을 내모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두고 사회정의를 보장하는 계획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효율적인가

청계천을 ‘복원’시킨 뒤 그 연변의 영세상인들을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현대적인 아파트, 오피스텔, 오피스 건물들을 세워 도심공동화를 막고 서비스 산업에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서울시 당국이 청계천사업에 뛰어든 진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과연 도심의 소생일까요. 현재의 도심은 거침없이 대체해버려도 좋을, 서울의 도시경제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하는 쇠퇴된 공간일까요.
김용창, 강우원 박사들의 연구가 보여주듯, 청계천 주변지역은 겉보기에는 초라해보여도 상당히 역동적이며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갖춘 생산공간입니다. 수많은 자영업주들과 숙련노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연줄망을 통해 이 지역을 서울 전역은 물론,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를 상대로 하는 독특한 ‘산업지구’로 만들고 있습니다. 복잡한 하청조직을 통해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기간산업과 연결되어 있으며,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상당한 고용기회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경제지리학자들이 보여주듯, 이러한 ‘산업지구’는 비록 소규모공장, 기업들로 구성되어있기는 해도 ‘유연적 전문화’와 ‘건설적인 협력관계’로 다국적기업과도 경쟁할 수 있는 자생적인 산업조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박삼옥). 북부 이탈리아의 북부 섬유제조지역이 그 예입니다. 섬유산업의 메카, 동대문시장이 역시 그러한 산업지구이며, 청계천 연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워 아파트 몇 채를 더 짓기 위해서, 청계천에 물을 흘리고 버드나무를 심기 위해서, 이를 고사시키거나 강제 이주시키려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힘겹게 형성된 소중한 자산을 일거에 파괴하는 ‘폭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과거 권위주의시절, 우리는 도심의 기계판매업소, 전자상가들을 ‘부적격’ 시설이라 해서 강제로 이전시킨 경험이 있습니다. 누가 어떤 잣대로 ‘도심’의 구역을 정하고 ‘부적격’시설을 판정했는지는 애매합니다만, 그 결과가 성공적이었는지 자성해볼 일입니다. 이러한 ‘폭력적’ 조치 이전에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 마땅하겠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에 와서도 이러한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개발주의에 경도된 시당국, 이를 지원하는 ‘관학파’의 연구진에게는 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관점이 결여되어있습니다.

신개발주의자들은 그들이 ‘비적격’이라고 여기는 업종들이 나간 자리에 고급 빌딩이 들어서면 서비스업종, 첨단업종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이 생겼다고 그 공간에 들어설 회사가 창업되지는 않습니다. 서비스 업종에 고용기회가 다소 생겼다고 전통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직업을 쉬 바꾸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어제까지 선반공이던 사람이 오늘 회계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취업난이 가중되는 이 때, 멀쩡하게 작동하는 ‘고용의 밭’을 갈아엎는 것은 정말 무모한 일입니다. 결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생겨나는 화이트컬러 일자리가 그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의 안정성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선진도시들의 경험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삶을 풍요롭게 살찌우는가?

서울의 강남과 같은 도시환경을 만들어낸 ‘모더니즘’ 미학은 이제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개혁을 향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음에도 모더니즘 도시이론은 인간이 배제된 기능주의적 도시이해, 전통과 역사와 의미의 세계를 배제한 기계주의미학으로 표준화된 건물, 몰개성적이고 삭막한 도시경관을 양산해냈습니다. 걷고 싶지 않은 거리, 살고 싶지 않은 동네, 정이 붙지 않는 도시가 그 결과였습니다.

강북이 강남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자산입니다. 우리가 원해서 그렇게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이는 지키고 요긴하게 활용해야 할 자원인 것입니다. 근대이전에 형성되어 모더니즘의 수술을 피할 수 있었던 골목길과 필지들이 이루는 공간적 맥락, 도시의 곳곳에 각인된 역사의 흔적, 장소들에 대해 공유되고 있는 집단기억, 전통시장과 앞서 말한 ‘산업지구’의 역동성, 여기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름대로의 생활세계. 여기에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뿌리가 있고 정체성의 근원이 있습니다. 타워 팰리스, 아파트의 숲, 63 빌딩이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다시 신개발주의의 불도저를 끌어들이는 것은 곧바로, 이런 자원성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커질 희소자원을 목전의 이익을, 그것도 소수의 이익을 위해 소진해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가회동, 인사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미 10여년전, 남산주변의 토지소유주들은 남산 제모습찾기를 위해 개발욕구를 희생하면서 고도제한을 받아들였습니다. 전통과 맥락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와서도 10여년전 평범한 시민들의 인식을 정책수립자들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소의 철학자, 에드워드 케이시가 지적하듯 장소는 바로 우리와 별개가 아니라 우리의 일부입니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것입니다. 장소를 잃으면 우리는 자신의 제일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상업주의 개발에 홀려 장소를 한갓 건설을 위한 대상지로 취급할 때 우리는 장소를 인간과 분리된 물질로 객체화시킬 뿐 아니라 그로서 스스로를 ‘약탈자’로 전락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신개발주의는 우리에게 그런 약탈자가 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민주적인가

신수도이전, 청계천사업, 도심재개발기본계획변경 등과 관련해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시비가 무성합니다. 그간의 진행과정을 보면 그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절차적 민주성의 문제와 함께 저는 신개발주의 담론에도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개발주의 담론에서는 ‘균형발전’처럼 극히 포괄적인 목적과 ‘인센티브 제공에 의한 도심재개발촉진’ 같은 기술관료적 수단을 필연적인 관계로 연결시킵니다. 그 결과 목적은 너무 가치론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수단은 너무 가치중립적인 사안이 때문에 쉽사리 논의꺼리로 부상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수단 밖에 없는지, 하는 가장 당연한 질문조차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서술방식 자체가 이성적이며 상호소통적인 토의를 조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은연중 배제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균형발전’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가치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균형, 불균형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정책당국자가 어떻게 이 사안을 바라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기 전에는 찬성, 반대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에 찬성하고 반대하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기술관료적 처방, 또는 ‘시장논리’에의 귀결은 그것대로 가치중립적인 ‘전문성’, 또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정을 해결책으로 내세워서 일반인의 점검욕구를 와해시킵니다. 사실은 그 ‘가치중립적’ 언술 속에도 많은 가치판단과 성급한 인과관계가 상정되어 있음에도 불투명한 언어로 가려 그것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공간의 문제에서 가치의 문제는 배제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공’의 작용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전제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도시공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가치가 상충되고 조정되는 공간이며, 모든 정책은 본원적으로 다양한 명암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흐리는 대신, 대차대조표를 명확하게 하고 공론의 장에서 그 갈등을 풀어가는 것이 성숙된 민주주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르페브르는 말합니다. 도시공간은 상품이나 마찬가지로 생산된 것이어서 본래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이것을 도외시하고 기술관료주의나 시장자율의 뒤에 숨는 것은 권위주의이며 우민주의의 행태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시민은 정책의 파트너가 아니라 이념조작의 피동적인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4. 포섭과 회유

사실, 신행정수도이전, 청계천복원과 그 연변 재개발, ‘뉴타운’ 개발 등은 하나같이 우리의 미래에 심대한 영향을 가져다 줄 사안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는 양적, 질적으로 매우 미미합니다.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현상 자체가 규명되어야 할 우리 시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이져 언론들의 무관심 또는 방관은 그 자체가 무척 시사적입니다. 매일 신문 한 두면을 몽땅 차지해서 부동산 광고가 뜨고 부동산면에서는 시시콜콜 재테크의 방법을 제시하고 부동산시장의 ‘불황’을 개탄하지만 정작 초대형 개발사업에 대한 취재는 극히 평면적이고 형식적입니다. 이 사정은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동산 광고는 늘어나고 있지만 그 많은 시사토론, 심층취재 프로가 제공되지만 위 사업들에 대해서는 조용합니다. 로간과 몰로치의 성장기계론이 생각납니다. 도시의 권력 엘리트들이 담합해 친성장정책, 개발사업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냄으로써 자본축적기회를 계속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기업, 정부와 함께 언론은 그 핵심 멤버로 등장합니다.

로간과 몰로치는 개발로 이익을 보는 전문계 또한 ‘성장기계’의 일원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중견은 중견대로, 소장은 소장대로 이 거대한 사업들에 몸이 얽혀있습니다. 이해관계로 포섭하는 방법은 폭력, 공론형성의 차단과 함께 국가가 위기를 해소할 때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데이비드 하비). 이러한 상황에서 학회들도 예외적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회개조의 열망 속에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던 서구의 도시계획분야와 달리 우리나라의 도시계획은 국가에 의해 기술관료적 임무를 부여받으면서 태어났고 수단합리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학’의 세계에 왕성한 비판의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입니다.

정작 기이한 것은 소위 진보정당의 경우입니다. 분배정의를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다는 정당에서조차, 신개발주의가 가져올 빈익빈부익부의 문제, 고용파괴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길을 두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업을 두둔하는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 모든 도시문제는 결국 계급문제이며, 그 해결을 위한 투쟁은 노동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르페브르의 인식도 우리의 상황 속에서는 공염불로 들립니다.
5. 신개발주의의 역사적 배경

사실, 신개발주의는 전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구미 대도시들은 ‘80년대 이래 신개발주의에 의한 이른바 ’도심소생‘ 또는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크게 보면, 신개발주의의 확산과 정보화시대, 경제의 세계화시대에 조응한 자본주의의 구조조정과정을 연결시켜 이해하기도 합니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형성되어온 산업시대의 도시경제가 탈산업시대를 맞아 금융,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이를 반영하는 도심공간의 개조가 진행되는데 이를 촉진하는 것이 바로 신개발주의에 의한 부동산투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단기적인 이익을 노리는 금융 테크, 부동산투자로서는 침체국면에 접어든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높일 ‘창조적 파괴’와 ‘이노베이션’ (슘페터)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어찌되었던, 우리의 신개발주의가 지구촌에 불고 있는 세계화경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의 특수성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선진사회의 경우 신개발주의는 대체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적 정치권력과 신고전주의 경제이론에 기초한 정책환경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기하게도 진보와 보수 모두, 초대형 개발사업을 앞세우면서 개발붐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그 단초가 우리의 압축성장 역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압축성장은 ‘평등’과 ‘자유’의 희생 속에서 달성 가능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복지와 균형을 향한 요구를 억누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시장과 민간부문의 성장에 제약을 가함으로써 권위주의 정권은 효과적으로 국가주도 경제성장 전략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치권력이 소멸되고 압축성장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사라진 지금, 그동안 억제되었던 ‘평등’과 ‘자유’의 두 축은 일시에 쟁취되어야 할 지상의 가치로서 우리 앞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균형발전과 사회정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자율화와 민간부문 우위에의 요구가 지고의 목표로서 대두되게 된 것입니다. 양쪽 모두, 지난 시대가 물려준 유산과 관성을 타파하고서야 구현가능하기 때문에 개혁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오른쪽’으로의,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의 개혁을 요구하지만 말입니다. 정말로 분열적인 상황입니다.
서구의 경우에도 분명,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양자의 부침은 시대적으로 교차되어 왔다고 생각됩니다. 선진사회의 경험을 거칠게 요약한다면 산업혁명을 겪고 나서 자유주의 경제의 시대를 지나 복지국가의 과정을 거쳐 사회안전망에 대한 일정한 장치가 마련된 가운데, 복지국가가 ‘정당성 위기’를 겪으면서 (하버마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신자유주의로 정권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경우에는 자유주의 국가의 경험도, 복지국가의 경험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 경험이 결여된 속에서 근대화를 이루고 현대도시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외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지난시대에 잉태되었던 모순이 이제 동시적으로 분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기 나름대로의 당위성은 있으면서도 양립하기 어려운 두 요구, 균형발전과 시장원리에 의한 개발(성장)이 절실한 과제로 주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것이 바로 신개발주의의 숨은 포부이자 ‘정당성’의 논리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6. 신개발주의의 극복을 향해

그 포부와 정당성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신개발주의에는 용납할 수 없는 많은 문제가 내재되어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의롭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도 않으며, 문화적으로는 생활세계의 황폐화를 낳고, 정치적으로도 억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개발주의로는 균형발전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신개발주의에 내재된 사회관, 발전관 자체가 불균형적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우리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불균형상태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과거의 개발주의입니다. 개발주의의 산물을 개발주의로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신개발주의의 전제를 넘어서서 새로운 관점과 실천의 지평을 찾을 때 비로소 균형발전의 실마리가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저로서는 그저 모색의 방향을 어림잡아 짐작해 볼 뿐입니다.

신개발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 균형발전으로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균형발전에 대한 허상을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 체제가 존속되는 한 ‘고르지 않은 성장’ uneven development 을 만들어냅니다 (데이비드 하비). 고르지 않은 성장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다만 정책의 개입에 따라 그 ‘고르지 못한’ 정도가 심화되거나 완화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균형발전’이 도시공간의 문제, 물리적인 시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깊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균형, 불균형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문제이며,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사람을 빼놓고 (또는 이주시키면서) 지역균형을 논하는 것은 알맹이는 빼고 껍질만 가지고 논하는 격입니다. 강북의 땅값을 올린다고 강남, 강북 균형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강북 거주민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는데 일말의 기여를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지역간 불균형의 본질을 건드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시장기제에 맡기는 것으로만은 균형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규제완화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회정의와 삶의 질을 희생하고 삶의 뿌리를 고사시키면서까지 완화해 마땅한 규제는 없습니다. 시장기제의 전횡을 부추기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그 파행성과 부정적 영향을 막는 방향으로의 국가개입과 계획에 의한 조절이 불가피합니다.

그렇다고 계획이 만능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계획과잉은 무분별한 시장주의만치나 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사회를 위협합니다. 단지 편향된 시장주의가 자유의 기치 아래 평등을 희생시킨다면 계획과잉은 평등의 기치 아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둘은 지난시대가 낳은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또한 계획이 ‘가치중립성’과 ‘과학주의’를 앞세운 전통적 계획, 기술관료적 계획이어서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수단합리적 전문성을 앞세워 도시공간을 사람과 역사와 기억과 체험이 배제된 개발의 ‘대상지’로서만 접근할 때, 그 속에서 진정으로 삶을 살찌우는 계획이 나올 수 없습니다.

셋째로는, 도시는 무성격한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살아있는 장소의 집합이라는 아주 당연한 인식의 기초 위에서 계획의 기틀을 다시 짜야 합니다. 그래서 단기적인 ‘교환가치’, 신기루 같은 ‘상징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사용가치’가 존중되는 방향으로 계획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존하는 장소들의 ‘자원성’을 재발견하고 그 자원성을 해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그 자원성이 자라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드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공간이 아니라 장소를 주된 계획의 범주로 삼는다는 말은, 곧 구체적인 사람들을 수립된 정책실행의 대상자가 아니라 정책수립과정으로부터 실행단계에 이르기까지 정책의 파트너로서 계획의 중심에 ‘복원’empowerment 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과 땅이 함께 자랄 때 진정한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물리적인 시설의 집합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적 구성체로서 도시를 이해해야 합니다.

공간 아니 장소의 중시, 인간본위의 계획으로 전환한다는 말은 곧 도시공간을 구성하는 인자들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동네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고 아름다움의 모델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름’이 다양한 종들로 이루어진 생태계처럼 지켜져야 할 도시의 자원이라는 점을 깊게 인식해야 합니다. 획일성, 보편성, 평균성이 아니라 차별성, 개별성, 특수성을 찾아내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다름’을 존중한다고 해서 ‘상대주의’에 빠져 ‘유아독존’의 세계에 숨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함께 소통하려 노력함으로서 다르게 살면서도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P. Healey, Habermas)

도시계획분야 안에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어느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분야에서는 성찰적 전통이 얕은 까닭에 생각 없이 동원되는 고정관념과 범주가 많습니다. 강북의 재개발과 관련해서도, 조건반사적으로 써오던 ‘철거재개발’이 아니라 작은 단위의 자력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단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심지역이 침체되게 된 큰 원인도 따지고 보면, 터무니없이 넓은 지역을 가능하지도 않은 철거재개발지역으로 묶어놓고 방치한 데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생력조차 고갈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방치한 까닭에 현 상태와 개발이후의 임대차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되어 신개발주의의 입맛에 맞는 개발대상으로 떠오르게 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다른 분야들도 크게 다르지 않겠습니다만, 도시계획분야는 자기성찰의 역사가 얕은 까닭에 깊은 검토 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동원되는 고정관념과 범주로 넘쳐납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키워지는 ‘전문가’들은 마치 사람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배우지 못한 채. 신통치 않은 매뉴얼을 성경처럼 알고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 같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교육과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도시현상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결여되어있을 뿐 아니라,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모색의 경험 또한 얕습니다. 언제 왜 누구를 대상으로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인 채, 수술 칼 놀리는 법만 익히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시계획을 도시현장으로,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삶의 가치에 대한 모색의 영역으로 옮기고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신개발주의를 통한 균형발전의 추구. 우리의 과거가 우리에게 해결하도록 남겨놓은 명제입니다. 목적과 수단으로 합쳐놓을 때에는 모순일 수밖에 없지만, 따로 떼어놓았을 때에는 각각에 내재된 가치, 자유와 정의가 절실한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게 된 역사적 배경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배역을 이해한다고 해서 이 명제의 사회적 정당성에 수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를 통한 평등의 실현’은 ‘평등을 통한 자유의 실현’만큼이나 오도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제3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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