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memo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 '번역'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간단해 보인다. 그건 다른 언어로 된 것을 내 언어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자를 탓한다. "뭔 말인지 모르겠어. 번역이 문제야." 그런데 벤야민은 이 간단한 답을 의심한다. 예술작품이나 예술형식을 대할 때 수용자를 고려해야 하는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결코 생산적이지 않아.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라는 논문은 이렇게 출발한다. 

 

번역론을 이야기하면서 벤야민은 왜 뜬금없이 예술을 들먹이는 것일까? "어떤 예술작품도 인간의 주의력을 전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시도 독자를 위해, 어떤 그림도 관람객을 위해, 어떤 교향악도 청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니체의 예술관을 연상시키는 벤야민의 이 예술론은 번역론으로 이어진다. 예술작품인 시가 독자에게 이해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시의 번역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의 시에 전달 이외에 들어 있는 것, 그것은 일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비밀스러운 것, '시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그러니까 번역자 역시 시작(詩作)을 함으로써 재현(widergeben)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벤야민은 번역이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원본 없는 번역은 없다. 여기에서 번역이라는 것이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번역은 분명히 하나의 형식이다. 그리고 원작 속에 바로 그 번역의 법칙이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통해 결정되어 있다. 벤야민은 "원작이 번역을 요구"하는 경우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마치 잊어버릴 수 없는 어떤 순간 - 그러나 사람들이 잊어버릴 수도 있는 어떤 순간 - 이 잊히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벤야민은 순간의 이 요구가  사람들이 부응하지 못하는 어떤 요구를 가짐으로써 동시에 이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신의 기억'을 지시한다고 말한다. 번역이 이와 같은 구조를 갖는다면, 번역자의 과제는 독자에게 이언어(異言語)로 된 하나의 작품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번역에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어떤 신적인 것을 지시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은 그것이 "원작들에 내재하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그 원작들의 번역 가능성 속에서 표출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신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순수언어'이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번역 속에서만 잠시잠깐 자신의 모습을 내비친다. "순수언어 자체인 이 마지막 본체가 언어들 속에서는 단지 언어적인 것과 그것의 변화들에 묶여 있다면 […] 이 의미에서 그 본체를 풀어내는 일, 상징하는 것을 상징된 것 자체로 만드는 일, 순수언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번역이 지닌 엄청나면서 유일한 능력이다." 이러한 번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벤야민은 하나의 '기괴한(monströs)' 예로 휠덜린의 소포클레스 번역을 들고 있다. 벤야민이 볼 때 그것이 기괴한 이유, 그래서 중요한 이유는 '직역'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통상 번역자의 과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원문에의 충실함이 결코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재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의미는 그것이 특정 낱말에서 '의도된 것'이 '의도하는 방식'에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통해 획득되기 때문이다. 흔히 단어의 '정조(情調)'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휠덜린은 구문에서조차 직역의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모든 의미의 재현을 헛되게 만들고 이 시를 이해불가능한 것으로 끌고갔다.(고 한다. 나는 휠덜린의 독일어 번역을 읽어본 일이 없다.ㅡㅡ;;) 즉 원작이 번역에 있어 어떤 본질적인 측면을 갖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것이 전달의 노력과 전달할 내용의 질서에서 번역자와 그의 작품을 이미 해방시켰다는 점에서만 번역에 본질적"이다. 

 

벤야민은 흥미롭게도 여기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Im Anfang war das Wort)"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특이한 방식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말씀'이 비유하는 것은 번역되는 원문이다. 즉,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것 뿐이다. "번역의 언어는 스스로 가게 내버려둬도 되며, 실제로 의미를 마주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이 구절이 갖는 엄청난 규정적인 의미를 벗어버린 게 된다. 태초에 있는 말씀, 그것이 온 세상을 창조했고, 또 구원하러 세상에 온 그리스도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본래 세상의 모든 이치이며, 세상 그 자체이며, 또한 온 세상이 배우고 따라야 할 로고스다. 그런데 벤야민은 그것은 그저 처음에 있었을 뿐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번역이 그 시대에 잘 읽힌다면 그것은 잘된 번역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오히려 바로 언어보충에의 거대한 동경이 작품에서 표현되는 일이 직역을 통해 보증된 충실성의 의미이다." 순수언어는 이 지점에서 나온다. 진정한 번역은 번역 자신의 매체를 통해 원작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 번역 속에서 순수언어는 유한한 언어들의 한계를 열어젖히며, 새로운 언어를 생산해낸다. 

 

이러한 벤야민의 번역론은 번역에 있어서 객관성(본문의 본래적이고 정확한 의미)과 주관성(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의 의미)이라는 두 요소 모두를 폐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적이고 메시아적인 순수언어는 유한성에 갇혀 버린 이 객관성과 주관성을 넘어 끊임없이 생성되는 언어의 가능성을 '번역'이라는 형식 속에서 현실화한다. 그것은 어떤 문법이나 로고스에 갇히지 않으며 오직 도래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신성인 셈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