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그러니까 이건... 2009년 쓴 석사논문의 결론부.

 

지금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의 ‘다중’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존재론과 윤리학, 정치학을 검토하고, 그것이 민중신학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들을 탐구해 보았다.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주권적 신학체제와 신학적 주권체제에 맞서, 다중의 능력으로부터 출발하는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그는 평생 칼뱅주의자들의 선동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예속을 욕망하던 다중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그러한 다중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중에 대한 그의 이러한 긍정은 존재론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신과 세계는 분리되거나 구분될 수 없는 일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신 즉 실체는 세계의 수많은 양태들로 무한히 많은 방식을 따라 표현된다. 그런 점에서 신은 만물의 내재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양태들은 단지 수동적이기만 한 전체의 부분들이거나, 실재성 없이 전체에 복속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자연의 양태들이 무한한 방법으로 변용되며 실존한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신만이 모든 개체들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체들의 끊임없는 변용이 또한 신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양태들의 관계와 변용을 ‘관개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였다. 신의 양태인 각 개체들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로 고찰될 수 없으며, 항상 관계 속에서, 관-개체로서 존재한다. 각각의 개체는 관계 안에서 변용됨/함으로써 신의 능력의 일부인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표현하며 실존한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라고 부른다.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이 코나투스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모든 개체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각 개체가 자신을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와 합력하여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이 개체는 ‘다중’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다중이 자신의 코나투스에 입각하여 공통-되기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능력의 증대를 체험하고 능동적인 존재로 변용하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의 ‘민주주의’였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통-되기의 정치학을 통하여, 위로부터 초월적 규범에 의해 성립되는 권위주의적 국가의 형상이나, 자연상태의 각인이 자신의 능력(자연권)을 양도하는 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자유주의적 국가의 형상을 폐기한다. 이 두 입장은 모두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다중을 각각의 개인으로 분리하고, 또 각 개인을 그가 가진 코나투스로부터 분리하는데서 그들의 국가학을 세운다. 따라서 국가와 지배자는 다중에 대하여 외부적이고, 초월적인 매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다중은 수동적인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스피노자는 다중의 민주주의야말로, 모든 다른 정치형태의 존립을 근거지우는 절대적인 통치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다중의 공통-되기를 가로막고 다중을 항구적인 수동적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당시의 종교에서 찾았다. 종교는 다중으로 하여금 초월적인 신에 대한 상상 속에서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다중은 각각의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상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다중에게서 박탈하는 수많은 법과 제도, 규율을 통해 주권적인 신학체제를 구성한다. 다중은 이러한 종교체제 속에서 적합한 원인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통념과 교조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적 상상력이 다중들로 하여금 공통-되기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에게 종교는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상상의 체계이기도 했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많은 신화와 역사 서술을 담고 있지만, 그 대의는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공통-되기의 윤리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다중은 세상의 이치를 적합하게 앎으로써 공통-되기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종교적 상상력을 통해서도 공통-되기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했다. 각 개인이 자유롭게 신앙적 상상력을 갖고 이웃과의 유대를 나누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가 생각한 “보편 종교”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종교의 전복적인 활용을 통해 다중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V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 현실과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여 보았다. 스피노자의 이론 속에서 우리는 대의제 민주주의로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나 체제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다중의 실천, 예속적인 통치를 넘어서서 자율적인 자기-통치로 나아가는 다중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촛불집회는 이러한 절대적인 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대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며 솟아오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안토니오 네그리를 참조하여, 탈근대 자본주의의 생산의 변형 속에서 이러한 다중의 현재적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촛불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난 다중은 점차 사회화되어가며, 삶을 생산하는 것으로 변해가는 현대의 노동형태 속에서 그 잠재성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다중의 개념은 그동안 중요하게 부각되지 못하였던 민중신학의 존재론적 측면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민중신학은 그동안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으로부터 예수와 민중, 하느님과 민중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궁극적인 구원과 지금 이 자리에서의 정치적 해방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구원론에 있어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받아 왔다. 그러나 이것은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그것을 곧 비판의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극복하려 한 것이 바로 그런 주객도식과 존재의 양의성 위에 세워진 서구 신학의 구원론이 아니었던가. 

 

신과 세계, 신과 다중(민중)이 주체과 객체로 구별되지 않는 물(物)과 공(公)의 존재론을 통해 민중신학은 어떤 초월적 구원자가 아니라 민중 스스로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때문에 민중신학의 중요한 과제는 서구신학의 이러한 비판적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원론적 존재론 바깥으로 더욱 탈주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 사건이 곧 예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하나의 결정적이고 유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 사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개념을 폐기한 것이었다. 그 대신 민중신학이 발견한 것은 수다한 민중의 분출이요, 그리하여 수다한 예수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 사건’이라는 이름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민중의 해방사건,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다중의 공통-되기의 사건을 신학적 상상력의 언어로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해방신학과도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신학과 해방신학은, 말하자면 만 사람이 있어도 하나의 구원,즉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만이 있다. 다만 정통신학이 그 하나의 구원을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 ‘믿는 자’의 천국행으로 이해했다면, 해방신학은 그것을 고통 받는 사람을 향한 우선적 선택으로 이해함으로써 내용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신학의 틀과 존재론에서부터 구분된다.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대상인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속에 구원 사건들이 있는 것이다. 만 사람이 있으면 만 개의 구원, 혹은 그것들의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n개의 구원‘들’이 있다. 구원사건은 수없이 일어나고, 또 그 구원사건들은 서로 소통하고 촉발한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과제는 하나의 구원론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원의 사건들을 발견하고 증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민중신학은 2000여년의 기독교 신학의 전통 위에 놓여 있다. 민중신학의 언어 역시 야훼, 그리스도, 메시아, 구원, 종말 등의 전통적인 신학 용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종교론을 참조할 때 우리는 이러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용어의 사용을 민중신학이 기존의 기독교적 상상력을 다른 방식으로 선용하는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민중신학은 거리낌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전태일의 죽음”을 한 지평에서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희헌이 잘 지적했듯이, 우리는 전통신학의 ‘속죄의 기독론’이 민중의 고난의 ‘실재성’(actuality)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심리학적인, 혹은 상상계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고난을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서 자신의 고난에서 놓여남을 심리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고난의 실정성을 제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이란 종교적 언어로 이해되어야지 형이상학적 ․ 과학적 언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고난에 대한 위대한 공감자 ․ 대속자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인 희망의 문제이지만, 그것의 실재적 극복은 여전히 민중의 계속되는 자기초월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민중의 이러한 실천은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끝나지 않을 영원의 시간 속에서 펼쳐진다. 여기에 다른 구원은 없다. 민중이 노동을 통해 세계를 만들어가고, 또한 사유화된 세계로부터 탈주하여 공(公)으로 나아감으로써 구원을 빚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민중에게서 나오고 민중으로 말미암아 민중으로 돌아갑니다. 민중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것입니다. 아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