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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일단 짧은 메모. 

 

-'엄친아'로서의 벤야민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는(응?)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도대체 그는 왜 암울해져만 가는 1930년대에 이런 글을 편집하고 출판하는 데 몰두했던 것일까.

 

-일견 개인의 어린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보이는 글이지만 <일방통행로> 등에서 보여주는 "이미지", <유사성론> 등에서 전개하는 "미메시스" 등이 벤야민의 이 산문 곳곳에 녹아 있다. 책에다가 막 표시해두었는데, 타이핑하기 귀찮아..ㅡㅡ;;

 

-가장 흥미로운 꼭지, 혹은 아마도 벤야민이 이 글을 세상에 내놓은 이유가 되는 꼭지는 마지막에 나오는 <곱추 난쟁이>이다.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곱추 난쟁이. 그렇다. 바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1테제에 나오는 그분(신학!)이다. <1900년...>에서 곱추 난쟁이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언뜻언뜻 자신을 드러내어 유년의 벤야민을 놀래키고, 실수하도록 만든다.(벤야민은 종종 무언가를 깨거나 넘어뜨린 듯 하다.) 그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가 누군가를 쳐다보면 "사람들은 주의력을 잃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곱추 난쟁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산산조각 난 물건 앞에 당황해하며 서 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나면 모든 사물들은 사실 '난쟁이'가 된다. 벤야민은 이것을 곱추 난쟁이가 벤야민이 사물에 다가갈 때마다 그것의 절반을 "망각에 창고에 저장하기 위해" 회수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곱추 난쟁이가 '관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망각된 기억'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마치 임종시에 필름처럼 인생이 펼쳐지듯,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 펼쳐낸다. 벤야민은 지금까지 자신이 기록한 유년시절의 이미지들이 곱추난쟁이의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속삭인다. "사랑하는 아이야, 아, 부탁이다,/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벤야민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서 메시아를 찾았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 과거는 성공적으로 기념되고 기억된 과거가 아니다. 오직 곱추 난쟁이로부터, 즉 스스로 구부러져 왜곡되었으며, 어둠 속에 있으며, 우리의 잊혀진 과거, 잊혀진 기억을 관리하는 그 관리인으로부터 오는 과거이다. 그는 우리가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사물들, 사건들을 기억한다. 깨뜨려지고 넘어진 것들이 그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한다. 벤야민은 역사유물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난쟁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난쟁이에게 '신학'이라는 이름을 준다. 벤야민에게 신학은 바로 이 억눌린 기억의 귀환을 맞는다. 세계가 배제하고 망각했던 것들이 풀어해쳐져 우리에게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 벤야민에게 구원의 순간이며, 이 곱추 난쟁이에 대한 서술을 통해 벤야민은 자신의 유년에 대한 서술이 단지 어린 시절에 대한 개인적 추억 놀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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