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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2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들을 찾는다!(3)
    김강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들을 찾는다!

수유 너머 구로 청소년 프로그램 <문방사우 2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강 - 머리말 강의

 

전도사 시절의 습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끝내면서 왠지 "기도하겠습니다." 할 뻔 했다능.ㅡㅡ;

 

구로에서는 요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무려 중학생들한테 읽자고 하고 있다.ㅋㅋ 반응은 각양 각색. "이 사람 짜증나요"부터, "뭐 이런 듣보잡이"까지.ㅋ 물론 대부분은 아예 글의 느낌 조차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만.

 

7시 반에 조별로 모여서 한 시간 반 동안은 그날 분량을 1200자로 요약해 온 글을 함께 읽고 서로의 글을 평가한다.(놀랍게도 이 평가 시간이 너무나도 재미있다.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해 아이들은 귀를 쫑끗 세운다!) 그리고 함께 질문을 만들고, 나름대로 대답을 도출해 본다. 그리고 나면 함께 모여서 그날 이야기에 대한 선생님의 강의가 30분 정도 이어진다.  뭐, 텍스트가 텍스트이다보니 책의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한 강의라기보다는 선생님의 인생특강에 가깝다는 느낌이..(나의 경우는..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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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송장이 아니라 길동무다. 짐승의 무리나 신자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와 더불어 창조할 자들을, 더불어 추수하고 더불어 축제를 벌일 자들을 찾고 있다. 가축의 무리와 목자 그리고 송장과 더불어 그가 무엇을 도모하랴!”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中)


오늘은 첫 시간입니다. 우리가 읽은 글도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이죠.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런 말이 붙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니체는 이 책을 모든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삶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은 아닐 겁니다. 과연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니체의 말을,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요?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었나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처음 진리를 깨닫고 동굴을 나와서 그의 가르침을 시장터에서 전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기만 하지요. 동굴 앞에서 해를 보면서 자신만만하게 “나는 너처럼 베푸는 자가 되고 싶다!”고 외친 차라투스트라였지만, 정작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을 자격이 없던 사람, 또는 듣고도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웃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머리말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숲 속의 성자 같은 사람입니다. 숲 속의 성자는 더 이상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고독하게 숲에서 살면서 신만을 예배하며 사는 늙은이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은 너무나도 불완전한 존재다. 나는 신만을 사랑한다.”고. 성자는 ‘중세’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중세 유럽은 그야말로 신이, 혹은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근대가 오면서 사람들은 중세의 자취를 무너뜨렸습니다. 신은 이제 세상에서 물러나 아주 작은 영역에서만 숭배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아직 그걸 모르고,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신을 섬기고 있었지요. 차라투스트라는 그에게 줄 선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장터의 군중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숲 속의 성자 같은 사람들 숲으로 내쫓은 사람들이고, 신과 교회를 내쫓은 근대인들을 대표합니다. 자, 그들은 신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신을 죽인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위대해지고, 강해지기를 선택하지 않고 그저 조그맣게 오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보고 “가축의 무리”라고 말합니다. 베푸는 자가 아니라 돌봄을 받으려는 자가 되어버린 사람들, 신이 죽은 시대에 국가라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국가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특별한 지혜를 가지고 새로운 삶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모두가 다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남아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신 좀 그만 섬겨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삶과 희망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와 우리 자신의 몸에서 찾지 않고, 저 멀리 있는 하늘이나 어떤 영혼 같은데서 찾고 있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한다는 건, 지금의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지금 여러분의 삶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즐겁고, 사는 게 흥미로워서 오늘 잠들 때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하면서 잠들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극복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극복한 인간, 그것이 이 책에 나오는 어려운 말인 “위버멘쉬”라는 말의 뜻입니다. 신이 없다면, 인간은 인간을 넘어서기 위해 스스로 힘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항상 외줄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가야 하는 길이지요.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시장터의 사람들처럼 모두가 다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가만 두고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청소년은 이런 책을 읽을 자격이 없고, 그저 학교 공부나 해야 하고, 학교 공부를 잘 못 하면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일이나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신은 남자니까 이렇게 살아야 하고, 여니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삶의 형태를 고정시켜놓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사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보려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결국 마을에서 쫓겨납니다. 그는 시장터에서 외줄을 타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의 시체를 끌어안고 고독하게 길을 갑니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길이, 삶을 창조하려는 위버멘쉬의 길이 결코 고독한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송장이 아니라 길동무다. 짐승의 무리나 신자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숲 속의 성자나, 시장터의 군중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그의 길에는 그와 함께 길을 걸을 친구들이, 길동무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이 차라투스트라의 길동무가 되어서 그의 말을 듣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길동무가 될지, 아니면 삶을 사랑하지 않는 숲 속의 성자 같은 사람이 될지, 또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만 살아가는 무기력한 시장터의 군중이 될지는 여러분이 결정할 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길동무가 된다면,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멋진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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