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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08
    나를 봐, 피투성이가 되었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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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2/28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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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11/28
    여기가 어디지? Where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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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만 더, 한번만 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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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랄도 가지가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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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1/09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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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1/04
    새로운 시작
    mush

나를 봐, 피투성이가 되었어.

트랙팩님의 [성폭력 생존자에 관한 지지와 연대] 에 관련된 글.

 

 

0. 오랜만에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쓴다.

사실 눈팅을 계속 하던 차였다.

그냥 지나치려고도 했었다.

그런데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1. 여자

 

나는 여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여자다.

그래,

나는 여자다.

 

그러나 내가 여성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만 여자라 인식했을 뿐 나는 스스로를 여성이라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인식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른다.

 

남성과는 무언가 다른 대우--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차별받고 있다는 느낌을 수도 없이 "느껴왔지만",

그것이 나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현실'임을 "인식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었다.

내가 비로소 여성이라는 인식.

내가 여성이기에 받아 왔던, 내가 여성이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당했던 수많은 상황들.

그것은 참담했고 패배적이었으며, 그러기에 다른 한편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너에게 그런 상처를 안겨줄 의도는 아니었어.

 

그러나 나는 상처를 입었다. 그것은 결과였다.

그가--그들이 그럴 의도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의 상처는 그들이 내뱉는 말 한 마디로 치유될 수 있는,

그렇게 허허 웃으며 넘겨낼 수 있는,

그런 것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는 편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 그 주둥아리를 닥치기 바래. 아가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3. 재생, 재생, 무한반복, 재생.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아이를 두고 치맛속을 더듬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동네 속셈학원 선생의 탈을 쓴 변태새끼의 쳐죽일 작태는 둘째치더라도.

여고시절 학교 안에서 떠도는 무수한, 미스테리한 사건의 진상을 따지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남학생이 판치는 캠퍼스 안에서 여학생으로 살아남기 버거워 스스로 남성화를 자처하는 여성들을 일상으로 목격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성추행의 경험이 얼마나 피해자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는 가해자가 심심찮게 발견되는지는 둘째치더라도.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긴다는 자의적 해석으로 끝끝내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마는" 이상한 뇌구조의 정신병자들이 지천에 깔렸음은 둘째치더라도.

 

항상 여성은 왜, 당하는 거지?

왜 나는 그런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거지?

왜 우리는 그런 상처에 아파해야 하는 거지?  

무한반복되는 상처의 기억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옆에, 나와 내 주변에서 항상 일어나는 조용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사건은 언제나 미해결. 공소시효 만료. 꽝꽝꽝.

그리고 다시 반복.

 

 

4. 나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고, 나는 그녀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고개를 치켜세우고 눈빛을 칼날같이 벼리는지,

마음으로 느껴진다.

그녀가 받은 상처, 그 상처의 고통을 모두 이해할 것 같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그러한 상처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나는 그녀를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무한반복되는 여성 개인들의 상처가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만 머무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그녀가 내딘 한걸음은 그래서 더없이 소중하다.

상처받은 모든 여성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녀의 선택과 결정을 지지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지를 표할지 고민은 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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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났다.

1.

 

웃음이 났다.

뭔지 모를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고,

그 다음은 뒤통수를 맞은 냥 어안이 벙벙했다.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기도 했다.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듯한

그 거만한 몸짓들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과 웃음이 났다.

 

 

2.

 

조금만 나를 돌아보려 했던 것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게다.

훗.

조금의 미련도 없다.

필요하지만 나를 망가뜨리면서까지 있어야 될 절실한 곳은 아니다.

아니다.

절실했고 올인했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무한한 인내력만을 '강요'하는 곳에서 나는 지쳤다.

나는 아직 덜 여물었는지 몰라도

더 이상의 인내는 나를 더 피폐하게 만들 뿐임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에게 버거운 짐 하나를 내려 놓고 다른 새로운 짐을 지려 할 뿐이다.  

나에게는 나의 능력과 열정과 의지를 100은 아니더라도

최소 50은 보장해 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바닥을 쳤다.

솔직히 내 능력과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시험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묻히며 살아온 걸음걸음에 결정의 주체로 남겨온 흔적은 많지 않았다.

 

 

3.

 

뒷걸음질 치며 발자국들을 살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쉬이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다시 시작은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절실하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려 하는 지금이 사실 가장 두렵기도 하지만.

 

그러나

스물 일곱.

나흘 후 스물 여덟.

아직 젊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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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지? Where am I?

1. 

 

길을 찾자고 했다.

한 때는 너무나 명확했던 길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 길은 내 앞에 뻗어 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저 길 중간에는 무엇이 놓여져 있을지 알지 못할 뿐이다.

또다시 부딪혀야 할 장애물들이 무엇일지 몰라 서성일 뿐이다.

시야가 불투명하니 내 자신조차 불투명해지는 것 같다.

불안은 그래서 찾아오나보다.

 

 

2.

 

뒤돌아 보았다.

여지껏 내가 걸오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역시, 그것 또한 안개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만들어 온 시간의 기억은 이제 단편으로만 남았다.

기억이 가물하니 감정의 찌꺼기도 있는듯 없는듯.

다만 알 수 없는 것들만 밀려든다.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했는지,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후회라 말하기엔 열정이 넘쳤다.

회의라 말하기엔 아직도 열정이 넘친다.

 

 

3.

 

언제나 꼭지점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난 그랬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중심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었고, 나를 만드는 것에 대해 망설였다.

이십대 후반, 거칠게 달려온 나의 이십대가 조금은 불쌍하기도 하다.

조금만 나를 찾아보려 할 것을.

조금만 나를 중심으로 바라볼 것을.

조금만 나에게 신경써 줄 것을.

새삼 나 자신에게 미안해진다.

조금만 이기적으로 되볼까.

아주 말고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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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블로그문을 닫습니다.

간간히 찾아주시던 동지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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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들-다시 싸움을!

1. 그 날들

나는 아직 그 날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날들은 여전히 현실이다.

98년 종로의 기억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때 비로소 거리를 느꼈기 때문일게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던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우던 그 감동,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가 전부인 노동자들의 그 깡다구,
처절하게 싸우면서 여기저기 부상투성이어도 동지들 앞에 내색도 않던 그이들과 함께였기 때문일게다.

그 후에도 수없이 이어졌던 거리의 기억들.
99년의 관악을 메우던 서지 투쟁도, 00년초입부터 인천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대자 동지들의 투쟁도, 거리로 나앉게 생겼던 울산노동자들의 가열한 투쟁들도, 01년의 한통계약직 투쟁도, 그리고 03년의 열사투쟁도, 04년 박일수 열사 투쟁도, 자결도, 크레인 점거도 불사하는, 처절함마저 느끼게 하는 투쟁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힘겨운 싸움들.

그렇게 끊이지 않고 터져나오는 투쟁들.
그렇게 이어져온 그날들.
그러나 변한 것은 별로 없다.



2. 그 이들

그 날들 속에 함께 했던 이 중에는 떠난 이도 있고, 남아 있는 이도 있다.
죽어서 떠난 이도 있었고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돌아선 이도 있다.
떠난 이들은 가끔씩 과거를 추억하며 현실의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날들을 함께 했던 그 이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그러나 그들이 배신자가 되어 내 앞에 서게 된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한단 말인가.



3.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들

설마설마했지만 동지들이라 믿었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 눈앞에 섰다.
팔뚝에는 질서유지대를 완장을 차며 '다수파'라는 이유로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소리높여 외친다.
'소수파'는 극좌파의 좌익맹동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역사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흥분하여 말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확히 제출하지 못한다.
절절하게 호소하는 총파업 요구는 우리의 무능력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총파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조차 구체적이지 못하다.
뿌리깊게 자리잡은 개량주의의 근원을 도려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싸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누구도 속시원히 대답하지 못한다.

싸움은 여전히 쳇바퀴를 돌고 있다.
싸움의 내용도 총파업 요구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싸움의 방식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윗대가리들'만 겨냥할 뿐, 대중과 함께하는 싸움은 조합투쟁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민주노총'식'의 총파업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대중적인 총파업이 무수한 패배를 겪으면서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총파업 이상의 요구가 추상적인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총파업 자체가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이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들이 바로, 지금, 지나가고 있는데 말이다.



4. 다시 싸움을!

솔직히 나 또한 민주노총의 작태를 보면서, 그리고 사회적 합의주의의 완전정착과 그로 인해 닥쳐올 노동자 생존권의 완전박탈을 목전에서 지켜보면서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제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전노투의 투쟁을 지지한다.
다시 그러나, 전노투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되어서는 안된다.
전노투의 싸움은 그 내용에 더욱더 과감하고 구체적인 것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과 계획/일정은 보다 치밀하고 아래를 향해야 한다.
이미 반동의 길로 들어선, 배신자 민주노총 지도부의 작태와 경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오직 아래로부터의 투쟁, 계급대중의 압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내부의 적만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심장을 겨누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3월 15일, 그리고 오늘은 이미 '그 날들'도 기록되었다.
이후에 이어질 '그 날들'은 계급성과 당파성으로 무장한 노동자계급이 승리의 깃발을 내리꽂을 수 있도록, 그렇게 채워질 수 있도록, 분투, 또 분투해야 한다.
동지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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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 더, 한번만 더

다시 한번만. 다시 시작해.

 

 

다시 시작하는 거다.

처음부터, 싸그리, 모조리, 죄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동지들이 곁에 있다.

투쟁만이, 세상을 뒤엎는 투쟁만이

가지지 못한 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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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가 잘려나가도 참아야 한다?

제목을 써놓고 보니 다시 섬뜩해진다. ㅡ.ㅜ

 

 

1. Hanna's War

 

때는 대략 일주일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인적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둔지 며칠되지 않은 그 때, 나는 낮밤이 뒤바뀌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켠 TV에서는 야시시한 영화들이 방영되고 있었고, 나는 괜찮은 영화가 없나 싶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마침 '한나의 전쟁'이라는 영화를 발견했고, 영화는 중반스토리를 치닫고 있는 듯 했다.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시기의 헝가리였고, 주인공은 이십대 초반의 한나라는 이름을 가진 유태인 여성이었다.

당시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관계로 설명이 정확하고 충분하지 않지만 정리해 보면

;그 당시의 헝가리는 나치독일에 충성을 맹세한(?) 정부에 의해 반유태인 정책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유태인들은 나토로 내몰려 하루하루를 긴장속에 살고 있었다

;주인공 한나는 헝가리가 아닌 팔레스타인 유태인 정착촌에서 살고 있었는데(영화를 중간부터 봐서 주인공이 어떤 연유로 그곳에서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_-;;),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헝가리에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헝가리 거주 유태인들은 나치스의 폭압속에서 지난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한나와 그의 동료(동지)들은 그/녀들을 구출하기 위해 헝가리 잠입을 시도한다

;그들의 계획(활동)은 굉장히 비밀적이었고 조심스러웠으며, 헝가리 정보경찰과 게쉬타포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연락망과 접선경로를 모두 암호화/비밀화했고, 적발시에는 중요한 문서와 자료의 소독은 필수였으며 그 최후의 대처를 위해 자살용 권총을 모두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의 동요하는 분자들이 늘 그러하듯, 그들은 자신을 포함한 조직의 계획보다 자신의 안위와 생명을 더욱 중시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는 동료의 사실상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정보경찰에 발각, 끌려가고 만다. 그리고 그 동료는 결국 나치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헝가리 정보경찰은 직감적으로(-_-;;) 한나가 이야기하듯 영국군 소위가 아님을 깨닫고, 헝가리 국적을 가지고 있음과 본명을 이야기할 것을 끊임없이 추궁한다. 혹독한 매질과 잠안재우기, 손톱뽑기 등의 참혹한 고문속에서도 한나는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자신의 본명을 말하게 되는 결정적 고문(그 때 잠깐 졸아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전기고문 아니면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로 살을 태우는 고문 둘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이 그것이었다. 한나는 자신을 그렇게도 못 살게 구는 고문관에게 본명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은 발설하지 않게 되는데...

;어찌 되었든 한나가 그 처절한 고문을 버티어 내면서 고문관들은 그녀에게 더 이상의 고문을 자행하지 않게 된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의 안위를 내세워 그녀에게 협박아닌 협박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 했던가. 그녀의 어머니는 외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시도하며 딸의 선택과 결정에 자신이 방해되지 않게 하려 한다

;이 후의 줄거리는 2차 세계대전이 종료로 치닫던 시기 한나가 재판장에서 이야기했던, 그녀의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부터 자신이 재판관들에게 받았던 그 심문을 당신들이 머지 않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 때문이었을까. 재판관들은 일주일 후에 잡힌, 형을 확정하는 재판(이걸 모라고 하던데.. 용어가 기억안남. -_-;;)에 모두 참석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그녀를 그렇게도 고문하고 회유하던 장교들은 재판결과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자신들의 직권으로 총살형에 처하게 된다. 러시아 군대가 부다페스트로 진격하고 있을 그 때에.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이렇게까지 길게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 후에 꾼 꿈 때문이다. 

 

 

2. 사지가 잘려나가도 참아야 한다.

 

이것은 2시간여의 낮잠을 자면서 꾼 꿈인데, 일어나보니 웃옷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으면서, "이게 도대체 뭔 꿈이다냐"를 되뇌였다.

 

꿈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겠다.

;나는 지금 한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와 함께 있다. 그들의 인상착의는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만이 구분될 뿐이다. 그들과 나는 서로 알고 있으나 관계가 그다지 밀접하지는 않다  

;장소는 밖이 훤하게 보이는 2층 혹은 3층 높이의 방이다. 방 안에는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이상한 비닐포대 하나가 바닥에 깔려 있다

;그런데 나는 세명의 남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그 방에 있고 나는 없다. 그들은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 같으나 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남자가 방안을 나가고 여자둘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한 여자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한 여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간간히 고개를 끄덕인다. 곧 그 남자가 들어온다. 손에는 칼같이 날카로운 것들이 쥐어져 있다

;남자가 들어오자 여자는 비닐포대에 눕고 남자는 그녀의 사지를 잘라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선 덩그러니 남은 몸뚱이의 살갖을 벗내내기 시작한다. 사지가 잘리고 있는 그녀는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장면이 바뀌어 이제 내가 그 방에 있다. 한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 그리고 내가 거기에 있다. 장면은 이전과 정말 똑같이 반복된다. 남자가 나가고, 여자가 나에게 뭐라뭐라 계속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에 동감한다(그런데 그것이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_-;;). 그리고 우리는 남자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그런데 남자가 오지 않는다. 한 여자는 불안해하며 "왜 안오지?"를 연신 말하고, 나는 그때부터 불안해진다

;이를 어쩌지, 사지가 잘려야 하다니, 거기다 살갖까지 벗겨져야 하다니, 왜 이래야 하는거지, 사지가 찢겨나가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지, 차라리 죽는게 나을거야 등등. 나는 꿈을 꾸는 와중에도 생생하게 그것을 되뇌이고 있다

;그 때 그 여자는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남자를 찾으러 갔다오겠다고 한다. 나는 한동안 방안을 서성이며 고민하다가 결국 방에서 나오고 만다. 거리는 죽 뻗은 대로에 간간히 골목길이 있는 곳이었고 나는 앞만 보고 무조건 달린다. 한참을 달리다 뒤를 돌았더니 두 남녀가 나를 쫒고 있다.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타고 나서는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고 기차를 탄다. 기차에 오르고 나서 나는 꿈을 깬다

 

오! 맙소사!

도대체 이게 무슨 꿈이란 말이냐. 등짝이 땀으로 홀딱 젖은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란다.

 

 

3.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그 꿈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 섬뜩하기만 하다.

나의 심리상태가 엉망인지, 아니면 머지 않아 닥칠 좋지 않은 불행의 기운을 암시하는 건지, 단순히 영화의 고문장면이 깊게 각인되어 꾼 꿈에 불과한지, 도대체 이 꿈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이냐.

 

그런데 내가 갈등했던 그 순간, 그 순간의 고민들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활동에 있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정의 희생이 필요한 부분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을 단순히 개인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걸고 있는 동료들과 전개하는 모든 활동이 승리로 마감되게 하기 위한 것의 일환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형태로 드러난다면, 더 이상의 활동이 불가능해질 정도의 희생을 요구하거나 혹은 노동마저도 못할 정도로 육체적인 것까지 빼앗아가는 형태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거부해야 되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몇 분 후에 내 사지가, 내 동의하에 잘려나간다고 생각하자,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 드러운 꿈임은 틀림없다.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잡았다.

무어, 이건 꿈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성찰의 재료중의 하나가 며칠전의 꿈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혹독함 속에서도 자신을 잊지 않고, 동료를 배신하지 않고, 승리의 그 날을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그녀, 한나처럼, 그렇게 살기 위해 다지고 또 다져야겠다.

아싸~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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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도 가지가지

1. 완전 악질 1 - 자본가 개새끼들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

일하는 곳은 12시간 맞교대다. 뭐, 이건 다른 사업장도 거의 비슷하니 그러려니 하자.

한달 내내 쉬는 날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2주 주야교대 때는 완전 초죽음이다.

교대 주에는 무조건 16시간~19시간을 내리 일해야 한다.

한달 내내 풀가동시키는 기계에 내 몸도, 나의 동료의 몸도 이미 기계가 되어 버렸다.

기계는 기름칠이라도 한다지만, 우리는 기름칠할 건덕지도 없다.  

 

얼마전, 앉은뱅이병에 걸린 화성의 태국노동자 소식에 회사는 난리법석이었다.

왜냐하면 추가로 앉은뱅이병에 걸렸다고 확인된 중국인 여성노동자 3인이 내가 다니는 곳의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말헥산 뿐 아니라 갖가지 위해약품들을 손에 달고 사는 작업자들에게 지급되는 것이라곤 그 흔한 마스크도 없었다.

노동부에서, 엠비시에서, 검찰에서 불시에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작업장 한 구석에 들입다 쌓아놓은 약품들을 숨기느라 바빴고, 지급하지도 않았던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닥달이었다.

 

한동안 소란스럽던 회사가 잠잠해지자, 이제는 '낭비와의 전쟁'을 위시로 6시그마 시스템을 정착하겠다며 출근시간을 한시간여 앞당긴다.

전체 작업자를 6-7명의 팀체계로 나누고, 최소의 낭비성과를 올리는 팀에게 포상을 준다는 명목으로 각 팀별 경쟁을 부추긴다.

팀내에서도 제일 적극적인 사람과 제일 소극적인 사람을 매일 뽑아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여 팀내 경쟁도 불붙이고 있다.

 

거의 하루가 멀다하고 '사장님'과 관리자들의 훈시가 이어진다.

원자재 값의 상승, 원달러 환율의 하락(원청에서 지급되던 돈이 이제는 달러로 바뀐다고 한다), 각종 낭비요소의 증가 등으로 회사의 자금사정이 점점 나빠진다고 한다. 니미.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낭비요소를 제거해야 하고, 불량률도 낮추어야 한다. 씨팔.

그러지 못하는 작업자와 팀은 회사에서 쓸모없는 부품이 되어 버려 결국 축출대상이 되어 버린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쌓이는데, 완전 울트라 캡숑 전천후 작업자가 되어야 한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하여 그만둔 작업자들도 꽤 된다.

 

에이. 열받아.

그래서 예전에 노조결성의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이주노동자들이 퇴직금 지급문제로 집단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고 했고, 다른 한번은 회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몇이 모여 노조결성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두 쫓겨났다고도 했다.

내가 입사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또 한번 회사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는데, 라인 작업자중 한 사람이 회사 홈페이지에 회사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쓴 것이 화근이었다.

그 다음날 각 공장의 작업자들을 한데 모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협박 아닌 협박-싸이버 수사대에 다 의뢰해 놓았다; 불만의 내용을 볼 때 그 사람은 금방 손에 꼽힌다; 자진해서 불만을 공개적으로 게시한 이유를 설명하면 이 선에서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등등-을 해대었다.

몇번의 노조결성이나 집단행동의 시도가 묵사발된 것을 본 상태에서 그런 협박을 들은 전체 작업자들은-나도 물론 그랬다. ㅡ.ㅜ- 완전, 쫄았다.

 

지금 하고 있는 회사의 모든 조치들이 정말 짜증 그 자체다.

회사가 살아야 여러분이 산다는, 위대하신 자본가님들의 절대명제는 여기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다.

무엇이 되었든 쌓여있는 불만을 최고 형태로 드러내는 건, 사직서 한장 날리며 욕 한번 날려주는 게 끝인 이 곳.

조직되지 못한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기계처럼, 노예처럼 살아간다.

눈에 훤히 보이게 목줄을 죄어오지는 않는다.

노말헥산처럼 그렇게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자신 마저도 모르게 야금야금 노동자들의 살을 파먹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들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은 아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2. 완전 악질 2 - 민주노총 나리들

 

요즘엔 회사에서 돌아오면 씻고 바로 뻗기가 일쑤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은 물론이고 뉴스보기도 힘들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며칠전 민노 임시대대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암울하다, 암울하다, 매번 투쟁이 그렇게 개박살나면서 절절히 느꼈다지만, 이수호 집행부의 작태를 보니 정말 암울 그 자체였다.

 

한 여성 노동자가 대의원 '나리들' 앞에서 절절히도 호소했던 그 말, 나는 대의원도 아니다; 나는 그 흔한 노조도 없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다; 70만 조합원의 대표들인 대의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나 조직되지 못한 사업장의 1400만, 아니 1300만 노동자들은 지금 민주노총의 결정에 따라 목숨이 결정된다; 지금 나는 표결을 부결시키러 단상에 올라온 것이 아니다; 이건 표결로 결저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 그걸 모르는가; 사회적 교섭안이 통과되면 어떤 결과가 이어질 지 왜 모르는가; 얼마나 더 당해야 알겠는가.

나는 어떤 말들보다 그 말이 가장 절절히 다가왔다.

그런데 그 말이 절절했던 건 아마도 나의 무능력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민주노총에서 사회적 교섭안이 부결된다면, 그리고 총파업 투쟁이 민노대대에서 결의된다면 만사가 해결될지도 모르는 그 기대감, 참으로 무기력한 기대감때문에 나는 그 말이 절절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여성노동자도 그럴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동지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단상을 점거한 동지들의 그 절절한 심정을 왜 모르겠는가.

나 같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단상에 함께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거기까지였다.

무엇을 할 것이고,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그리고 그 실천계획이 우리에게는 부족하다.

아니,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질할 수도 있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적 교섭안이 가결되면 민주노총은 한국노총보다도 못한 조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어느 대의원의 발언, 그러나 당일의 모습을 보면 이미 민주노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악질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래도 동지일 거라, 어쨌든 함께 가야 할 '자'들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너무 많았다.

상층에 기대할 것은 없다.

새로운 시작은 윗대가리에게 기대할 수 없음이 명백히 판명되었다.

새로이 일구어야 한다면 가장 아래에서부터 일구어야 함이 더욱 명확히 확인되었다.

 

 

3.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한 달여를 우울모드속에서 허우적댔다.

내가 갈 길이,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의 난장판들이 나를 더욱 힘빠지게도 했고,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이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꾸어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 않는다면 아무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더욱 뚜렷이 알아가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이 원하는 것이리라 믿고 있다.

 

어느 동지의 말처럼, 노동자계급의 소수파는 '그들'이 될 것이다.

역사는 지금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는 지금 내가,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서술될 것이다.

 

구정이라 모처럼 쉬는 오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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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다...

-- 여전히 만나면 씁쓸하기만 하다.

힘들다며, 이 길에 희망이 없다며, 그렇게 떠나간 지인들...

 

나와 함께 했던 그 사람들 모두, 현실에서 '과거'의 고민이 수도없이 들이닥치만,  

과거를 잊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현실의 문제를 애써 눈돌리려는 것인지,

무언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들은 계속 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잊으려 했다. 잊으려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 한순간 어지러웠던 머리는 내 가슴마저도 어지럽히고야 말았다.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답답해 흘린 눈물은,

결국 나를 아직 치기어린 아이로만 만들어 버렸다.

 

답답한 가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감기기운에 연거푸 피워댄 담배때문인지,

아니면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만치 풀리지 않는 그 무엇때문이지...

 

 

-- 괜스레 심해진 목감기와 몸살기가 쉬이 가시지 않는다.

하루종일 누워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해도, 복잡한 머리속을 정리하려 해도 쉽지가 않다.

기침과 함께 섞여 나오는 누런 가래에, 그 잡다한 것들도 섞여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종일 내뱉은 기침과 가래 덕분인지 이제는 골이 흔들리고 어지럽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감기가 차라리 나은 것 같다.

처방전 하나에 주사맞고 약먹으면 금방 나을 감기가, 하루이틀로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에 비한다면 훨 나은 것 같다.

약이나 먹고 자리에 다시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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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1. 새로운 시작?

 

 

내 핸폰 첫 화면에 떠~억 하니 새겨져 있는 문구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은 없다는 걸 알았다.

언제나 나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고

다만 그 시작, 그 처음이 어제와 그다지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기에 나는 일상이 언제나 똑같다고 느꼈을 뿐이다.

 

 

 

2. 일하며 다시 배우며

 

 

이제는 꽤 친해진 회사언니와 하루 좬종일 수다 떨면서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이다.

 

'새로운 시작이 있기나 한거야?'

 

물론 느긋하게 커피한잔을 사이에 둔 수다가 아니라 쏟아지는 물량들 속에서 오고 간 대화지만.

뭐, 어쨌든...

 

언니는 이제껏 내가 고쳐야 겠다고 혹은 조금은 고쳤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어 고쳐보라고 충고한다.

보일듯 말듯 내비춘 나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 보는 듯한 언니는, 나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며 나에게 한걸음 옮기는 법을 가르쳐 준다.

 

지긋지긋한 회사 일을 당장이라도 때쳐 치고 싶지만, '꿈'이 있기에 섣불리 일을 그만 둘 수 없는 언니는 7남매의 넷째이다.

복작대는 아홉 식구 안에서, 언니는 이미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초기에는 회사에 대한 불만을 머리 꼭대기까지 안고 살았지만, 그것이 자기 밥줄을 끊는 지름길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언니는, 이제 누구보다도 회사생활에 열심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에 게으른 건 도저히 눈뜨고는 못보는 언니는, 틈만 나면 나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예전같으면 회사에 길들여진 인간이라며 버럭 성질부터 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의 여유도 그리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만약, 내가 언니였다면... 나도 똑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 통하였느냐?

 

 

언니는, 그리고 나는 서로 통하자고 한다. 그리고 통하고자 한다.

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부를 알 수 없다.

언니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만나 이 공간 안에서 서로 통하고자 한다.

그 통함. 그것이 곧 우리를 만들 것이다.

지금 언니가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인간의 삶과 행동에도 적용된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할 뿐이다.

언니와 나는 같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는 꿈이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새로운 시작은 없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은 없다.

언제나 그것이 있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당장 오늘과 내일의 일을 미루는 변명이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상황을 탓하며, 조건을 탓하며, 시기를 탓하며 매번 새로운 시작을 되뇌였지만, 정작 새로운 것을 일구지 못한 것은 나의 게으름과 나의 치열하지 못함에서 기인한 것 같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치열하다면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도 않을 것이다.

무언가 새롭다는 것은 일종의 기대와 모종의 의지를 북돋우기도 하지만, 노동자의 일상에서 그것은 바라기 어렵다.

대신, 끈질긴 그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면서 내일을 희망차게 만드는 것.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너무 먼 것만을 생각해 왔지 않나 싶다.

참으로 어렵지만 가야 할 길이라면, 가고 싶은 길이라면 하루하루를 긴장의 끈으로 얼기설기 엮어 마침내 보고픈 그 종착역 아닌 종착역에 기필코 다다라야 한다.

물론...

종착역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갈 거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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