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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여기에.


 

 

 

 

#. 기억

 

과음이다.

오랜만에 들이킨 빈속의 소주가 내 위장을 괴롭히더니 급기야 식도를 타고 씹어 삼켰던 것들을 게워내게 한다.  

불과 몇 시간 전 맛나게도 먹었던 오돌뼈 우동볶음이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다.

약간의 악취도 동반했겠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난 취했었거든.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1년.

난 과음했던 게야.

너무 급했던 게야.

기억나지 않아.

너무 아팠거든. 그래서 기억이 지워졌나봐.

 

든든한 친구 녀석이 함께해서 였을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기어나온다.

눈물 덕분인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통곡까지 한 듯 하다.

 

취했군.

머, 서러웠던 게 많았나보지.

 

수화기 너머로 해장은 했냐는 녀석의 걱정에 별 일 아니라는 듯 허허~허탈웃음 한번 날린다.

 

 

##. 낯익은 기억

 

간간히 들러보는 싸이트에서 보았던 집회공지를 어렴풋이 기억해낸다.

간신히 술을 깬 새벽녘,

짜증스럽게 부슬거리는 비를 맞고 도착한, 퀴퀴한 자취방 냄새가 너무나도 정겨운,

후배네서 잠자리 들기 전, 수박을 먹는다.

 

내 기억에서 사라진 두 시간을 돌려줘.

그나저나 너도 낼 거기 가지? 같이 가자.

 

마침 그녀의 현재 남자친구이자 내가 그토록 귀여워했던 토실토실하고 열성이었던 후배가 뚱뚱한 동네 아저씨로 변해 있었다.  

수박을 건네며, "수박은 살 안 쪄. 먹고 너도 낼 같이 가자."

그러나 이제 그 녀석도 내키는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하긴, 일상은 그렇게 사람들을 중독시켜 간다.

 

 

###. 오래된 기억, 그리고 현실

 

비가 우라지게도 많이 온다. 퍼붓는다.

밥먹고 가자는 나의 성화에 아이들이 내심 좋아라 했다고 위안하며 도착한 서울역은, 번잡했다.

순간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은 기억은 다시 생생해졌고, 그것은 현실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풍경. 그리고 기억.

 

시선은 쉬이 앞을 향하지 못하고 신발이 젖는다는 핑계로 아스팔트 바닥에 꽂힌다.

그 조그만 확성기 하나 없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들의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건만,

어설픈 주먹질만 허공을 헤맨다.

그렇게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혼자 빠져나와 아는 사람이라도 없나 기웃거려보지만,

예전에 잠시 같이 했던 한 동지만 만났을 뿐이다.

제대 후 무얼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스레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여 담배 하나 나눠 피고 집회장을 다시 배회한다.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것은, 그만큼 나이 먹었기 때문일까.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이미 해 볼 만큼 다 해보았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걸까.

다만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고 있을 뿐인가.

고개를 치켜 세우고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 보지만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하긴,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것 때문에 답답해 하고 있었다.

 

 

####. 나, 여기에

 

혼자 빨빨거리고 다니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던 차였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썰이라도 풀 수 있어 좋고,

만나지 못하더라도 혼자이기에 맘대로 활보하고 다닐 수 있어 좋다.

 

예전만큼 절박은 느껴지지 않지만, 예전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단 하나, 두려워하지 않음은 느낄 수 있었다.

 

두렵지 않아.

헤쳐 갈 수 있어.

 

느낄 수 있었다면 나에겐 그것이 해답일지 모른다.

무수한 사람들 틈에 껴 있던 그 순간, 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박했다 했지만, 절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수히도 부딪쳐 깨졌다지만, 아직 부딪쳐 보지도 완전히 깨져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여기에.

지금, 바로 여기에.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겠지.

인정하면 되는 거다.

 

나, 지금 여기에 발딛고 서 있어. 일어났어.

힘들지만 이제 걸어가야지.

뛰어갈 날도 있을거야.

그래, 뛰어갈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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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에 우린, 세상에 편입되어 간다.

 


 

 

 

 

 

1. 만남

 

실로 오랜만이라 느꼈던 것은 그동안 내가 그 만남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반가움 반, 불편함 반으로 부딪힌 소주잔은 한 시간 사이 금새 십수잔으로 바뀐다.

낮술까지 더해진 지라 취기가 금방 오를 만도 하건만 쉬이 취하지는 않는다.

반가움은 낯설음으로 바뀌고, 유쾌함은 불편함으로 순식간에 뒤바뀐다.

감정의 기운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이,

시간은 벌써 새벽 세 시를 치닫고 있었다.

이제는 좀 거나하게 취한 듯도 했다.  

 

 

2. 스무살

 

그리고 스물 하나, 스물 둘, 스물 셋...

혈기 왕성한 나이, 물불 가리지 않을 나이, 원칙과 꿈을 가지고 있던 나이.

이제 막 대학에 발을 들여놓고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동지였다.

거리에서 같이 뛰고 거리에서 함성을 외쳤다.

거리에서 함께 싸우고 거리에서 밤을 지새웠다.

무언가 꿈을 가지고 있던 나이.

그래서 거침없었던 우리.

 

하지만 이제,

그런 우리는,

없다.

 

 

3. 서른

 

모두가 서른이었고 서른을 넘었다.

서른을 코앞에 두는 나는 그들 눈에 여전히 투덜거리는 아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불온한 꿈을 꾸는 것은 철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꿈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것은 여전히 미성숙한 아이의 성장통일 뿐이다.

 

갈수록 절박해지는 집안문제를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누구라고 편하게 사는 삶이 부럽지 않을까.

누구라고 안정된 직장과 예정된 수순을 밟고 싶지 않을까.

그 모든 것에서 비껴 있는 삶은 그저 미성숙한 사고에서 비롯된겐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이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던지 간에 나에게,

당신은 미성숙하다고, 철이 없다고, 말을 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거리에서 쌓아온 동지애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말이다.

 

 

4. 현실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쥐어주는 무기조차 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거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모든 것을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서야 현실과 타협하며 세상에 편입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물들어갈지도 모를 미래는 가능성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다시 움켜쥔 주먹 우뚝 세우고 바리케이트 앞에 설 미래 또한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성과 더불어 의지의 영역이다.

누구의 말처럼, 지금을 살면, 되는게다.

천천히, 조금씩, 나를 준비하면 되는게다.

 

 

"현실을 돌아봐. 지금의 너를 봐. 너는 행복하니?"

 

나는 그런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너는 잘 할 수 있어. 너를 믿어."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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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현장을 사수하라!

mms://bijeonju.jinbo.net/media/pa711.wmv

 

: 현자전주 비정규직지회 전면파업돌입 영상 편집본 

  

  

  

  

--- 들불도 단 한점 불꽃으로부터 

  

비정규직 투쟁이 절정을 치닫던 4년 전.  

이후 투쟁의 급속한 썰물을 타면서 등장했던 대공장 사내하청투쟁.  

그러나 그마저도 이렇다할 싸움이 전개되지 못했던 2년 전. 

그리고 지금.  

  

투쟁의 절정에서마저 옥쇄는 부정당하기 일쑤였건만.  

그러기에 전주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은 과감한 일보다.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또다시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결정적 순간에 옥쇄를 접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과감한 일보는 분명 이미 성과로 남을게다.   

  

단협체결과 해고자복직이 요구건만.  

그조차도 듣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는 노조, 거부당하는 활동가/해고자.  

두려워하는게다.  

그 요구조차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옥쇄를 감행한 '노예들'이 더 큰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운게다. 

  

끝까지 투쟁해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단협체결! 해고자 원직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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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봐, 피투성이가 되었어.

트랙팩님의 [성폭력 생존자에 관한 지지와 연대] 에 관련된 글.

 

 

0. 오랜만에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쓴다.

사실 눈팅을 계속 하던 차였다.

그냥 지나치려고도 했었다.

그런데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1. 여자

 

나는 여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여자다.

그래,

나는 여자다.

 

그러나 내가 여성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만 여자라 인식했을 뿐 나는 스스로를 여성이라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인식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른다.

 

남성과는 무언가 다른 대우--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차별받고 있다는 느낌을 수도 없이 "느껴왔지만",

그것이 나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현실'임을 "인식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었다.

내가 비로소 여성이라는 인식.

내가 여성이기에 받아 왔던, 내가 여성이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당했던 수많은 상황들.

그것은 참담했고 패배적이었으며, 그러기에 다른 한편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너에게 그런 상처를 안겨줄 의도는 아니었어.

 

그러나 나는 상처를 입었다. 그것은 결과였다.

그가--그들이 그럴 의도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의 상처는 그들이 내뱉는 말 한 마디로 치유될 수 있는,

그렇게 허허 웃으며 넘겨낼 수 있는,

그런 것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는 편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 그 주둥아리를 닥치기 바래. 아가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3. 재생, 재생, 무한반복, 재생.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아이를 두고 치맛속을 더듬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동네 속셈학원 선생의 탈을 쓴 변태새끼의 쳐죽일 작태는 둘째치더라도.

여고시절 학교 안에서 떠도는 무수한, 미스테리한 사건의 진상을 따지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남학생이 판치는 캠퍼스 안에서 여학생으로 살아남기 버거워 스스로 남성화를 자처하는 여성들을 일상으로 목격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성추행의 경험이 얼마나 피해자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는 가해자가 심심찮게 발견되는지는 둘째치더라도.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긴다는 자의적 해석으로 끝끝내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마는" 이상한 뇌구조의 정신병자들이 지천에 깔렸음은 둘째치더라도.

 

항상 여성은 왜, 당하는 거지?

왜 나는 그런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거지?

왜 우리는 그런 상처에 아파해야 하는 거지?  

무한반복되는 상처의 기억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옆에, 나와 내 주변에서 항상 일어나는 조용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사건은 언제나 미해결. 공소시효 만료. 꽝꽝꽝.

그리고 다시 반복.

 

 

4. 나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고, 나는 그녀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고개를 치켜세우고 눈빛을 칼날같이 벼리는지,

마음으로 느껴진다.

그녀가 받은 상처, 그 상처의 고통을 모두 이해할 것 같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그러한 상처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나는 그녀를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무한반복되는 여성 개인들의 상처가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만 머무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그녀가 내딘 한걸음은 그래서 더없이 소중하다.

상처받은 모든 여성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녀의 선택과 결정을 지지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지를 표할지 고민은 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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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났다.

1.

 

웃음이 났다.

뭔지 모를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고,

그 다음은 뒤통수를 맞은 냥 어안이 벙벙했다.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기도 했다.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듯한

그 거만한 몸짓들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과 웃음이 났다.

 

 

2.

 

조금만 나를 돌아보려 했던 것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게다.

훗.

조금의 미련도 없다.

필요하지만 나를 망가뜨리면서까지 있어야 될 절실한 곳은 아니다.

아니다.

절실했고 올인했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무한한 인내력만을 '강요'하는 곳에서 나는 지쳤다.

나는 아직 덜 여물었는지 몰라도

더 이상의 인내는 나를 더 피폐하게 만들 뿐임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에게 버거운 짐 하나를 내려 놓고 다른 새로운 짐을 지려 할 뿐이다.  

나에게는 나의 능력과 열정과 의지를 100은 아니더라도

최소 50은 보장해 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바닥을 쳤다.

솔직히 내 능력과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시험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묻히며 살아온 걸음걸음에 결정의 주체로 남겨온 흔적은 많지 않았다.

 

 

3.

 

뒷걸음질 치며 발자국들을 살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쉬이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다시 시작은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절실하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려 하는 지금이 사실 가장 두렵기도 하지만.

 

그러나

스물 일곱.

나흘 후 스물 여덟.

아직 젊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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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지? Where am I?

1. 

 

길을 찾자고 했다.

한 때는 너무나 명확했던 길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 길은 내 앞에 뻗어 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저 길 중간에는 무엇이 놓여져 있을지 알지 못할 뿐이다.

또다시 부딪혀야 할 장애물들이 무엇일지 몰라 서성일 뿐이다.

시야가 불투명하니 내 자신조차 불투명해지는 것 같다.

불안은 그래서 찾아오나보다.

 

 

2.

 

뒤돌아 보았다.

여지껏 내가 걸오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역시, 그것 또한 안개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만들어 온 시간의 기억은 이제 단편으로만 남았다.

기억이 가물하니 감정의 찌꺼기도 있는듯 없는듯.

다만 알 수 없는 것들만 밀려든다.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했는지,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후회라 말하기엔 열정이 넘쳤다.

회의라 말하기엔 아직도 열정이 넘친다.

 

 

3.

 

언제나 꼭지점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난 그랬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중심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었고, 나를 만드는 것에 대해 망설였다.

이십대 후반, 거칠게 달려온 나의 이십대가 조금은 불쌍하기도 하다.

조금만 나를 찾아보려 할 것을.

조금만 나를 중심으로 바라볼 것을.

조금만 나에게 신경써 줄 것을.

새삼 나 자신에게 미안해진다.

조금만 이기적으로 되볼까.

아주 말고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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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블로그문을 닫습니다.

간간히 찾아주시던 동지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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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 미래연대에서 펌

야코프 스베르들로프(上)



이 글은 1925년 3월 13일자로 발표된 레온 트로츠키의 짧은 기록이다. 여기에서 트로츠키는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라는 한 인물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우리에게 스베르들로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짧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볼셰비키 전통이 얼마나 위대하고 투철한 노동해방 투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영역본 해설


러시아 혁명 2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비할 바 없이 위대한 볼셰비키 조직가 스베르들로프에 관한 트로츠키의 간략한 기록을 재발간한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독자들은 저 영웅적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1917년 혁명과 뒤이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혁명가의 유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는 1885년 6월 3일 니즈니-노브고로드 시에서 태어났다. 조판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짜르 치하 러시아의 노동자계급 가족들이 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열 살이 된 어린 소년 야코프는 김나지움(고등학교와 같은 등급의 교육기관)에 등록했고, 거기에서 5년 동안 공부했다.

열다섯 살이 되자 그는 잡화점에서 일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 다음 해인 1901년, 니즈니-노브고르드에서 최초로 혁명적인 비합법조직이 만들어졌다. 같은 해에 스베르들로프는 16세의 나이로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대단히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는 빠르게 최선두로 나아갔다. 비합법활동의 시기에 그는 사실상 러시아 전역에서 지도적 인물로서 투쟁에 복무했다.

1903년 러시아 노동운동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이 일어났다. 그 무렵 스베르들로프는 볼셰비키 파에 합류했고, 죽는 날까지 볼셰비키 대열에 남아 있었다.

1905년 혁명기에 그는 우랄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노동자대표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그 시절 비합법활동을 했던 모든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감옥과 유형생활을 했다. 그가 처음으로 체포된 것은 1903년이었다. 1905년 혁명 패배 이후인 1906년부터 그는 18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2년간의 감화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되풀이되는 체포, 감금, 유형, 탈출이 이어졌다.

1913년 가을 포로닌에서 볼셰비키 협의회가 열렸다. 당시 그는 유형 중이었기 때문에 협의회에 참가할 수 없었음에도, 당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시베리아 극지방에서 유형 중이던 그는 당장 페트로그라드로 갔다. 1917년 4월 협의회에서 그는 중앙위원회에 또다시 선출되었다.

두 번째 소비에트 총회에서 그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소비에트공화국 의장으로서의 업무와, 볼셰비키 당 ‘조직책임자’로서의 번거로운 책무들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나갔다. 서른네 살의 나이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렇게 활동했다.

볼셰비키 운동이 보유한 이 최상의 조직가에 관해서 지금은 아주 조금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겹겹이 싸인 스탈린주의적 왜곡과 날조가 그의 명성을 뒤덮어버렸다. 소련 당국의 공식 신화는 10월 혁명과 내전 시기에 스베르들로프가 수행했던 역할의 대부분을 스탈린의 업적인 것처럼 치장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스베르들로프를 묘사할 때조차도 스탈린의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변조하려 애썼다. 그러나 조직가로서 스베르들로프는 스탈린과는 정반대의 유형에 속했다. 1927년 트로츠키는 ‘조직가의 유형’이라는 측면에서 스베르들로프와 스탈린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대조해서 보여주었다.

1919년 봄까지 당의 최고 조직가는 스베르들로프였다. 그는 [스탈린과는 달리] 서기장이라는 직함을 갖지 않았다. 그런 명칭은 당시에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그런 역할을 해냈다. 1919년 3월, 이른바 스페인 열병에 걸린 스베르들로프는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내전과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도처에서 사람들이 쓰러져갔고, 당은 이러한 손실의 무게를 고통스럽게 실감했다. 레닌은 스베르들로프를 치하하는 두 번의 장례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이후 스탈린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도 우회적이지만 매우 선명한 빛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혁명과 승리의 과정에서, 노동자혁명의 정수를 보다 완전하고 보다 포괄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베르들로프였다.” 스베르들로프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조직가였다.” “이론가도 문필가도 아니며 비합법활동을 하던 한 겸손한 노동자가 단숨에 비할 바 없는 권위를 획득한 조직가로 성장했다. 그는 러시아 전체 소비에트 권력의 조직가였다. 또한 그는 놀랄 만큼 뛰어난 실력으로 당 활동을 체계화했다.” 레닌은 기념일에서든 장례식에서든 과장법을 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그의 찬사는 동시에 조직가의 임무에 대한 성격 규정이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거론할 만한 단 한 건의 갈등도 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스베르들로프와 같은 조직가가 있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 시절 레닌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 주요 조건들 중 하나에 관하여 적어도 한 차례 이상, 그것도 늘 새롭게 만족감을 느끼면서 서로 이야기한바 있다. 그것은 곧 지도그룹 내의 통일성과 연대였다. 여러 사건들과 장애물들이 가공할만한 압력을 가했고,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들이 등장했으며, 날카로운 실천적 불일치가 때때로 발생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작업은 대단히 순조롭고, 우호적이며, 중단 없이 진척되었다.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우리는 지난 혁명의 단면들을 회상할 수 있다. “지도그룹의 통일과 연대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승리를 보증한다.”

중앙기구의 결속은 볼셰비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준비되어 왔으며, 그 지도자들 특히 레닌의 의심할 수 없는 권위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 없는 일치단결에서 가장 주요한 전문가는 스베르들로프였다. 그의 기예가 갖는 비밀은 간단했다 : 대의라고 하는 단 하나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 당에 속한 노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당 간부층으로부터 음모가 자행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게 되었다. 스베르들로프가 가진 이러한 권위의 토대는 그의 성심(誠心)이었다.

마음속으로 모든 당 지도자들을 비교해보면서, 레닌은 그의 장례연설에서 실천적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한 자질을 겸비하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가정해볼 때, 스베르들로프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그가 혼자 해냈던 작업은, 이제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고 그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단 전체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말들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라, 엄밀하게 실천적인 제안이었다. 그 제안은 실행에 옮겨졌다. 한 사람의 서기 대신에 세 명으로 이루어진 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볼셰비키 당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레닌의 언급으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스베르들로프의 생애 전체에 걸쳐 스탈린은 당 조직 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시기든, 소비에트 국가의 토대와 성곽을 구축하는 시기든 이 점은 동일했다. 스탈린은 또한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해서 만들어진 첫 번째 서기국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스베르들로프에 관한 다음의 추모 기사는 1925년 레온 트로츠키가 쓴 것이다. 이 글은 1926년 당사 연보를 통해 소련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존 라이트(John G. Wright)가 러시아어 원본으로부터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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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스베르들로프


1917년 제1차 소비에트 총회 중 열린 볼셰비키 당 회합에서 나는 처음으로 스베르들로프를 알게 되었다. 스베르들로프가 회합을 주재하고 있었다. 당시 당 내에서는 이 비범한 인물의 진정한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만에 그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펼쳐보이게 된다.

혁명 이후 초기를 거치는 동안 망명가들, 즉 해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과 ‘국내의’, ‘본국의’ 볼셰비키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망명가들은 상당한 강점을 가졌다. 그것은 그들의 유럽에서의 경험, 그 경험과 연결된 넓은 시야, 그리고 과거 분파투쟁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하고 있었다는 데 기인한다. 당연하게도, 망명가와 비망명가 사이의 이러한 분할은 순전히 일시적인 것이었고, 모든 구별들은 오래지 않아 제거되었다. 그러나 1917년과 1918년에 이러한 구별들은 많은 경우 상당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렇지만 그런 시절에조차 스베르들로프에게서는 아무런 ‘지역감정’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조직적으로, 겉보기에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수많은 사건들 및 레닌과의 긴밀한 접촉과 협력 속에서 성장했고, 강고해졌다.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스베르들로프가 처음부터 최상급의 완성된 혁명적 ‘정치가’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혁명이 제기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그는 위로부터, 즉 일반적인 이론적 검토라는 견지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 조직들을 통해 전달된 삶의 직접적인 맥박을 느끼며 아래로부터 문제에 접근했다. 새로운 정치문제가 논의되고 있을 때, 가끔 스베르들로프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특히 그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갈팡질팡하고 있거나 또는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토론을 진행하면서 의견의 평행선을 따라 문제를 풀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 ‘누가 그 일에 적합할까?’ ‘그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우리의 다른 임무들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공동의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곧바로 그 문제의 조직적 측면과 역량 배치의 문제로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거의 언제나 스베르들로프는 광범위한 실천적 제안들을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백과사전과도 같은 기억력과, 사람들에 대해 면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초기 형성단계에서 소비에트의 모든 부서들과 기구들은 역량 배치에 관한 한 그에게 의존했다. 최초로 그리고 대략적으로 당 간부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작업은 유례없이 비상한 수완과 창의성을 필요로 했다. 기존의 기구, 서류, 기록 등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직업혁명가 아무개 씨가 특정한 소비에트 기구(구성되었지만 여전히 단지 이름만 붙여졌을 뿐인 기구)를 이끄는 데 어느 정도로나 적격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심리적 직관이 요구되었다. 때로는 아무개 씨의 경력에서 두세 가지의 문제점들을 발견해내고, 그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곤 했다. 게다가 이러한 교체작업은 인민대표위원, 이즈베스챠[과거 소련의 정부 기관지] 인쇄공장 관리인,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성원, 정부 지도자, 기타 등등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이러한 조직적 문제들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논리적 맥락 없이 발생했다. 즉 최상층으로부터 기층으로라거나 또는 그 반대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형태로, 우연적이고 혼란스럽게 발생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조사를 하고, 인물에 관한 세부 자료를 모으거나 기억을 되새기고, 전화연락을 하며, 사람을 추천하고, 업무를 할당하고, 약속을 잡아나갔다. 이 모든 일들을 그가 어떻게 해낼 수 있었는지, 즉 그의 능력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지금에 와서 정확히 말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이러한 작업의 상당 부분은 그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남겨져야 했다. 물론 레닌의 도움이 컸다. 누구도 그런 역할을 시도해보지 못했으며, 당시 상황은 늘 그렇게 긴박하게 돌아갔다.

다양한 직책과 특별한 역할을 위해 집행위원회 성원들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스베르들로프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으로서 조직적 작업의 상당 부분을 완수했다. 특별한 문제를 들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레닌은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와 의논해 보십시오.”

새로 부임한 ‘고위 간부’들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와 상담해보는 게 필요하겠어.” ‘스베르들로프와 의논하는 것’은 비중 있는 실천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물론 스베르들로프 자신은 이처럼 상당히 개인적인 방법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반대로, 당과 소비에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그의 활동 전체는 보다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해결의 조건을 준비하는 데 바쳐졌다.

따를 만한 선례도 없고, 아무런 법령이나 규칙도 없었던 그 시절에는 모든 영역에서 ‘개척자들’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거대한 혼돈의 한복판에서 자기 두 발로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 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있을 수 있는 모든 긴박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그러한 개척자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인물들에 대한 세부 사항들, 가령 어떤 사람이 이런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했었는지를 떠올리고, 이로부터 몇몇 후보자들이 과연 적합하겠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곤 했다.

거기에는 물론 많은 실책이 뒤따랐다. 그러나 놀랄 만한 일은, 그러한 실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놀랄 만한 일은, 뒤죽박죽이 된 과제들, 엉켜있는 난관, 최소치의 인적 자원이라는 상황에 직면해서도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스베르들로프가 어떻게 찾아나갔는가 하는 점이다. [실천적이고 주체적으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적 관점 대신에 추상적 원리나 정치적 편의의 관점에서 각각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물론 훨씬 더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이러한 양상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시기의 본질 그 자체에 의해 바로 지금 우리들 내에서 늘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명백한 목표’와 ‘물질적 인적 자원의 결여’라는 불일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격심하게 느껴졌다. 문제의 실천적 해결이라는 핵심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들 중의 다수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머리를 휘젓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스베르들로프 씨,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러고 나면 스베르들로프는 자신의 해법을 내놓곤 했다. 그의 견해는 이랬다. “이 시도는 충분히 실현 가능합니다.” 주의 깊게 선발된 볼셰비키 그룹이 파견되고, 이들은 정확한 요점을 보고받는다. 적절하게 연결이 이루어지고,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필수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러한 길을 따라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떠한 임무라도 해낼 수 있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고취되어야 했다.

일을 하는 데에서 지치지 않는 낙관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스베르들로프의 작업에 든든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당연하게도 이 말은 각각의 문제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100퍼센트 해결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10퍼센트만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만족할만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10퍼센트의 해결만으로도 구제수단이 되었다. 그것을 통해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바로 이것이 저 전례 없이 고난에 찬 세월 동안 해야 했던 모든 작업의 관건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수송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전염병에 대항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혁명의 미래는 보장되어야만 했다.



 

가장 뛰어난 유형의 볼셰비키 활동가


 

스베르들로프의 자질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잘 드러났다. 예를 들어 반동군대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우리 당을 분쇄했던 1917년 7월의 나날들이 그렇다. 사회혁명당 좌파당원들이 반란을 꾀했던 1918년 7월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에 모두 조직을 재건하는 것, 관계들을 재개하거나 거듭 새로 만들어내는 것, 커다란 시련을 겪은 동지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두 경우에 모두 스베르들로프는 혁명적 냉정함, 원대한 시야, 지혜로움에서 누구보다 출중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스베르들로프가 소비에트 대회 장소인 볼쇼이극장으로부터 레닌의 회의실로 어떻게 왔는지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미소 지으며 우리와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 우리는 인민대표위원회에서 다시 군사혁명위원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늘 그랬듯이, 스베르들로프는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고난의 시절을 거치면서 우리는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잘 알 수 있게 된다.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는 진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확신, 용기, 단호함, 지혜 등 모든 점에서 그는 가장 뛰어난 유형의 볼셰비키였다. 레닌이 스베르들로프를 제대로 알고 진가를 인정하게 된 시기도 정확히 이 무렵이었다. 스베르들로프에게 특별한 긴급조치를 제안하기 위해 레닌은 자주 그에게 전화를 걸곤 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레닌은 이런 답변을 들었다. “이미 했습니다.” 이는 염두에 두었던 조치가 이미 채택되었음을 뜻했다. 이 일을 두고 우리는 종종 “아마도 스베르들로프가 다 처리했을 거야.” 하며 농담을 했다.

언젠가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처음에 스베르들로프를 중앙위원회에 참가시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람을 한참 잘못 봤던 것이죠! 상당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대회에서 평당원들이 우리를 교정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조직체계를 뒤섞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결코 거론된 적이 없었음에도,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연합 상태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 당 활동가들의 행동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향을 띠었다. 다음의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상당히 많은 수의 활동가들을 동부전선으로 파견하면서, 무라비예프를 그 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수십 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볼셰비키였던 이 집단의 간사로 한 사회혁명당 좌파 당원이 선출되었다. 다양한 기구와 부서들에서는 우리 당의 신규당원들의 숫자가 더 많았으며, 더욱이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당원들 간의 관계는 불분명했다. 여전히 갓 만들어졌을 뿐인 국가기구에 최근 투입된 당 성원들 사이에는 느슨함이 있었고, 신중함과 응집력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요인 때문에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났다. 즉 군사조직의 기초단위들이 사회혁명당 좌파조직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2, 3일 만에 바람직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이 진행되던 시기, 즉 모든 개별적 관계들이 의심스럽게 되고, 국가기구의 실무진이 술렁이기 시작했을 때에 가장 헌신적인 최상의 공산주의자들은 신속히 서로 밀접하게 결합하며 사회혁명당 좌파와 인연을 끊고 그들과 맞섰다. 공산주의 중핵들은 공장들과 군 조직에 연결선을 대었다. 당과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이는 특히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광범한 영역에 걸쳐 부문별로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 정형화되지도 않은 국가기구들 속에 흩어져 있던 당의 요소들이 즉시 전면에 등장하여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 앞에 일꾼들을 하나로 용접시켰다.

공산주의 중핵들은 어디서든 각 기관들에서 필요한 그 시기의 실제 지도력을 구체화시켰다. 이 시기는 엄밀히 말해 지도적 정당으로서, 노동자국가의 지도자로서, 노동자권력의 정당으로서,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조직적 관점에까지 당원들이 그 구체적인 임무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바로 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스베르들로프의 지도하에 당은 소비에트 국가기구 내에, 소비에트연방의 집행위원회에서든지 인민위원회의 수송창고에서든지, 당조직의 결정적 힘을 형성해 내었다. 10월 혁명의 역사가들은 당과 국가의 상호관계의 발전에 전무후무한 각인을 찍은 이 결정적 시기를 추출하여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역사가들은 이 중요한 전환의 시기에 조직가 스베르들로프의 중요한 역할을 꾸밈없이 이야기했다. 모든 실제적인 결합의 연결망이 그의 손에 있었다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니즈니노브고로드를 침공했을 때, 레닌은 두 사회혁명당원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9월 1일 스비야쥐스크에서 나는 스베르들로프의 전보를 받았다. “즉각 귀환할 것. 일리치 부상. 부상정도는 모름. 정적뿐임. 스베르들로프. 1918년 8월 31일.” 나는 즉각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스크바의 당 회합들은 엄숙하고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동요는 없었다.

스베르들로프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 시기에 책임감과 역할 때문에 주름살이 늘었다. 높은 긴장감을 그의 과민한 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과민한 긴장은 신경과민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바쁜 듯해 보이는 경계심일 뿐이다. 이런 순간에 스베르들로프는 그의 능력이 완전해지는 것을 느낀다.

의사의 진단은 희망적이었다. 방문자들은 그 누구도 레닌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스비야쥐스크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9월 8일자 스베르들로프의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다비도비치(트로츠키), 이 편지를 빌어 몇 자 적겠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상태는 좋아졌습니다. 저는 아마 3~4일 안에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천적 문제들에 대해 다룬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여기에서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레닌이 부상으로부터 회복 중이던 고르키의 작은 마을을 방문한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심각하게 어려운 조건이었음에도 변화들이 강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결정적인 전투였던 동부전선에서 우리는 카잔과 심비르스크를 탈환했다. 레닌에 대한 암살기도 때문에 당은 정치적으로 더욱 정밀한 검사를 진행했고, 경계와 방어를 더욱 강화했다. 레닌은 빠르게 회복했고 업무의 재개를 준비했다. 이 모든 것은 힘과 확신에 찬 분위기를 형성했다. “당이 지금까지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쭉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르키를 방문했을 때의 분위기였다.

도중에 스베르들로프는 내가 모스코바를 떠난 후 일어났던 일을 알려주었다. 창조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는 훌륭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보고는 항상 가장 중요한 것과 조직적으로 특히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간간히 개인들의 간략한 특징들도 동반했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스베르들로프가 해오던 일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그 아래 조용하지만 강력한 확신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우리는 해낼 것이다!”


 

전제적인 의장


 

스베르들로프는 많은 일을 관장했다. 그는 많은 단체와 회합들의 의장이었다. 그는 전제적인 의장이었다. 토론을 중지시키고 발언자의 입을 막는 등의 의미에서가 절대 아니다. 반대로 그는 모호한 말을 하지 않으며 형식적 절차를 강요하지 않는다. 의장으로서 그로부터 전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있다. 그는 항상 실천적 결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는 누가 무슨 말을 할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크고 복잡한 문제들에 항상 존재하는 숨겨진 뒷면들에 대해 정통했다. 그는 발언자가 원할 때 적절한 시기에 능숙하게 발언권을 주었다. 어떻게 때늦지 않게 투표를 제안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의장으로서의 이런 특징은 실제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자질, 인물을 생생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조직적-인적 배합에 있어서의 무한한 창의성 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격동의 시기동안 그는 집회가 소란스럽고 열기를 뿜도록 만들어 놓고선, 적절한 시점에 단단한 손과 날카로운 목소리로 조정하여 질서를 잡곤 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중간키에 검은 얼굴, 마르고 수척했다. 얼굴은 뾰족하고 이목구비는 각져 있었다. 그의 힘 있고 우렁찬 목소리는 그의 체격과는 조화롭지 못해 보였다. 이 또한 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상은 곧 없어진다. 신체적 이미지가 정신적인 것과 융합된다. 수척한 체격에 은근한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강력하고 꿋꿋한 목소리는 최종적 이미지로 부각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레닌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가 특유의 저음으로 얘기할 것이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여기에는 애정 어린 반어법이 있었다.

알고 있다시피, 혁명이전 시기 공산주의자들은 입고 다니는 의상 때문에 적들에 의해 ‘가죽족’이라고 불렸다. 내 기억으로 스베르들로프는 가죽을 제복화하는 데 공이 있다. 행사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죽 모자와 가죽신발로 무장했다. 당시의 상황과도 어느 정도 연관 있는 이런 복장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하활동 시기 그를 알았던 동지들은 조금 다른 스베르들로프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스베르들로프는 내전 첫해의 풍랑 속에 검은 갑옷과도 같은 가죽옷을 입은 모습으로 떠오른다.

정치국이 시작되고 우리가 모였을 때 스베르들로프의 열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중앙위원회 서기 E. D. 스타소바가 참가했는데, 그녀는 스베르들로프의 집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야코프 미하일로비치가 위독하다”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우리는 회의를 짧게 마쳤다. 레닌이 스베르들로프의 집으로 갔고, 나는 전선으로 시급히 갈 채비를 하느라 병참부에 남았다. 15분 후에 레닌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레닌은 극히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죽었어. 그가 죽었어. 그가 죽었어.” 잠시 동안 우리 둘은 수화기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침묵을 듣고 있었다. 그런 후에 수화기를 놓았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야코프 미하일로비치가 죽었다. 스베르들로프가 우리 곁을 떠났다.[1925년 3월 13일.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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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조합주의적 정치에서 변혁정치로

조합주의적 정치에서 변혁정치로

문국진


(본 칼럼은 nodong.net 칼럼난에 연재중입니다)

 

 


1. 조합주의 정치의 폐해

개량주의는 나쁘지만, 개량투쟁은 필요한 것처럼, 조합주의는 나쁘지만, 조합 중심의 활동은 필요하다.

적대적 계급관계로 유지되고 지탱되는 자본주의사회 하에서 노동조합운동은 필연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 계급투쟁의 유의미한 표출이다. 그러나 조합 활동에만 매몰되는 것으로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꿀 수 없다. 조합주의운동의 한계는 곧 노동조건을 일부 개선함으로써 --임노동자의 고통스런 상태를 조금 더 버틸 수 있도록 함으로써--임금노예화에 기초한 사회질서 전체의 유지에 오히려 기여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레닌의 지적에 따라) ‘노동조합적 정치’의 개량주의적 한계라고 부른다.

노동조합은 이처럼 체제내적-개량주의적 일상활동체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자본가에게서 일정한 양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결코 반체제나 반자본의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그러면 노동조합운동은 덧없고 무익한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절충과 타협, 제도개선투쟁에 머무는 노동조합적 정치나, 자본주의 틀 내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오는 실리주의적-사민주의적 정치를 현재의 노동운동 및 노동정치운동은 과연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가?

그러나 맑스는 이와 같이 비록 체제내적 개선투쟁에 주로 몰두하게 되는 노동조합 자체를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학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학교는 학교일 뿐이다. 학교 과정을 다 마치면 졸업을 해야 한다.
즉 투쟁 속에서 사회비판적 계급의식화나 자본/국가의 본질에 대한 계급적 각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맑스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고, 노동조합조직이 미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정치적 훈련과 체제비판적 의식화를 위한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파악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만일 현실의 노동조합운동들이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의 구실을 다하지 않고, 자본/국가와의 무익한 공방전으로 소일한다면, 그리고 대중에게 개량주의적 허위의식만을 갖게 한다면, 그리하여 임노동제 전체의 폐지를 위한 반자본의 총노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동운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노조는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한 학교’로 전락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철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2. 변혁정치로의 전환

노동조합의 협소한 형식(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활동이나 정치의식의 면에서 그 이상의 발전, 즉 정치의식적 혹은 사회주의정치적 발전을 실현할 가능성은 현재로 보아 1차적으로는 현장조직 활동가, 해고자, 노동정치운동단체 활동가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만일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현재의 일진일퇴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운동과 그 조직적 표현인 노동조합적 정치활동은 계급의식화된 선진 사회주의노동활동가들에 의해 ‘변혁적 노동운동’과 그 일상적 활동으로 완전히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운동의 부문운동으로의 전락이나 생래적인 한계를 이유로 비노조적인 또 다른 조직체를 추구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이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추후 별도로 다시 검토하기로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투쟁의 일상기에는 (레닌이 ꡔ공산주의와 좌익소아병ꡕ에서 극히 올바르게 강조했듯이) “노조라는 진흙탕에 우리는 발을 디뎌야만 한다”는 점이다. 즉 사회주의자는 노동조합 속에서 변혁적 흐름을 만드는 대중사업에 주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적 정치를 비판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조합 속에서의 활동 전체를 무시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혁적 노동운동가는 노동조합과 그 내부의 대중들을 올바로 지도하고 견인하며, 투쟁의 발전 속에서 그들이 체제변혁적 의식화를 성취할 수 있도록, 그리고 투쟁 속에서 성장한 활동가들을 더욱 사상무장화되고 변혁이념화된 ‘사회주의전위’로 이끌어야만 한다.---한 마디로 변혁운동가는 노동조합 속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모든 측면들을 올바로 지도하는 당적-혁명적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계급적 좌파” 혹은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진영”,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 등으로 불리우는 ‘변혁지향적 노동운동가’들은 자신의 변혁적 노선의 관철을 위해 현실의 무엇에 대해 싸워야 하는가?

---체제에 포섭당하는 절충적 노동정치, 경제주의적 투쟁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시종일관하는 노동조합적 정치활동, 노동운동의 목표를 “노동해방주의적-반자본주의적 체제변혁”에 두기 보다는 정치-경제적 개량의 획득에 가두는 개량주의적 노동조합활동---이러한 것이 변혁지향적 노동운동가가 싸워야 할 대상이고, 바로 이러한 투쟁에 전선을 확정하고 몰두함으로써 ‘변혁적 노동운동정치’가 발전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글을 작성하기 시작할 때는 구체적인 ‘행동강령’까지 정리하려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구체적인 활동의 기획과 아이디어, 현실적인 활동양식과 실천사업 등에 관해서는 오히려 동지들이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변혁이념의 구체화를 위한 현 단계 활동계획에 관해서는 동지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다만 두 가지만 지적한다.

현 시점의 우리 운동에서는 경제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저널은 지천에 깔려 있으나, 사회주의적 저널이 부족하고, 뛰어난 필자들이 부족한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문필활동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다. 따라서 인터넷이나 오프라인 저널의 지면에서 사회주의적 필자들이 왕성하게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펼쳐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울러 토론과 논쟁, 비판과 논평 등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적-변혁적 정치운동이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한 까닭에 논의의 수준이 지극히 조합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사상적 사업과 실천적 노력의 축적은 이후 민노당이나 사회당이 아닌 새로운 변혁적 계급정당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중대한 역할과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사상과 실천의 결합--이 중에서 특히 사상작업은 일상적 실천의 하중에 눌려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보다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이 아쉽다.

 

 



(추신: ꡔ무엇을 할 것인가ꡕ를 비롯한 레닌의 저작집을 권한다. 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의 부재는 곧바로 당 건설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사민주의의 반대물로서 구성된 것이 레닌주의이며, 맑스에만 머물지 않고 더욱 (특히 정치학적으로) 그것을 발전시킨 사상이 레닌주의라고 한다면, 선진 노동자계급에게 필수적인 학습 중 하나는 바로 레닌에게서 도움을 얻는 작업이라고 본다.)//0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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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들-다시 싸움을!

1. 그 날들

나는 아직 그 날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날들은 여전히 현실이다.

98년 종로의 기억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때 비로소 거리를 느꼈기 때문일게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던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우던 그 감동,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가 전부인 노동자들의 그 깡다구,
처절하게 싸우면서 여기저기 부상투성이어도 동지들 앞에 내색도 않던 그이들과 함께였기 때문일게다.

그 후에도 수없이 이어졌던 거리의 기억들.
99년의 관악을 메우던 서지 투쟁도, 00년초입부터 인천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대자 동지들의 투쟁도, 거리로 나앉게 생겼던 울산노동자들의 가열한 투쟁들도, 01년의 한통계약직 투쟁도, 그리고 03년의 열사투쟁도, 04년 박일수 열사 투쟁도, 자결도, 크레인 점거도 불사하는, 처절함마저 느끼게 하는 투쟁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힘겨운 싸움들.

그렇게 끊이지 않고 터져나오는 투쟁들.
그렇게 이어져온 그날들.
그러나 변한 것은 별로 없다.



2. 그 이들

그 날들 속에 함께 했던 이 중에는 떠난 이도 있고, 남아 있는 이도 있다.
죽어서 떠난 이도 있었고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돌아선 이도 있다.
떠난 이들은 가끔씩 과거를 추억하며 현실의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날들을 함께 했던 그 이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그러나 그들이 배신자가 되어 내 앞에 서게 된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한단 말인가.



3.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들

설마설마했지만 동지들이라 믿었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 눈앞에 섰다.
팔뚝에는 질서유지대를 완장을 차며 '다수파'라는 이유로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소리높여 외친다.
'소수파'는 극좌파의 좌익맹동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역사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흥분하여 말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확히 제출하지 못한다.
절절하게 호소하는 총파업 요구는 우리의 무능력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총파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조차 구체적이지 못하다.
뿌리깊게 자리잡은 개량주의의 근원을 도려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싸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누구도 속시원히 대답하지 못한다.

싸움은 여전히 쳇바퀴를 돌고 있다.
싸움의 내용도 총파업 요구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싸움의 방식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윗대가리들'만 겨냥할 뿐, 대중과 함께하는 싸움은 조합투쟁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민주노총'식'의 총파업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대중적인 총파업이 무수한 패배를 겪으면서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총파업 이상의 요구가 추상적인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총파업 자체가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이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들이 바로, 지금, 지나가고 있는데 말이다.



4. 다시 싸움을!

솔직히 나 또한 민주노총의 작태를 보면서, 그리고 사회적 합의주의의 완전정착과 그로 인해 닥쳐올 노동자 생존권의 완전박탈을 목전에서 지켜보면서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제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전노투의 투쟁을 지지한다.
다시 그러나, 전노투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되어서는 안된다.
전노투의 싸움은 그 내용에 더욱더 과감하고 구체적인 것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과 계획/일정은 보다 치밀하고 아래를 향해야 한다.
이미 반동의 길로 들어선, 배신자 민주노총 지도부의 작태와 경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오직 아래로부터의 투쟁, 계급대중의 압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내부의 적만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심장을 겨누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3월 15일, 그리고 오늘은 이미 '그 날들'도 기록되었다.
이후에 이어질 '그 날들'은 계급성과 당파성으로 무장한 노동자계급이 승리의 깃발을 내리꽂을 수 있도록, 그렇게 채워질 수 있도록, 분투, 또 분투해야 한다.
동지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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