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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반대와 평화주의

논설 2 : 파병 반대와 평화주의
금민     메일보내기
I. 국회의 시계는 멈춰 있다

김선일 씨 피살사건은 2003년 제16대 국회가 얼마나 위험스러운 정책에 동의해 주었는지 깨닫게 했다. 국회가 파병안에 동의한 이후 현재까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기에 충분한 사태가 전개되었다. 개전 자체가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다는 사실, 미군 당국에 의한 포로학대 사건 등 이라크 전쟁의 진상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정황이 알려졌다.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으로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신종 테러리즘의 등장은 파병 정책이 전국민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사태의 전개는 파병 정책에 대한 재론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회의 시계는 아직도 멈춰 있다. 국회의 시계는 제16대 국회가 정부의 파병정책에 동의한 시점에서 단 1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제17대 국회는 파병 방침에 대한 재검토를 안건으로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당황스러운 사태’이다. 제17대 국회가 제반 사정의 변화를 인정한다면, 적어도 파병정책을 현시점에서 새로 심의하여야 한다. 국회는 헌법상 부여된 모든 권력과 권한의 행사에 있어서 스스로 이전에 행한 어떠한 결정사항에 대해서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는 국민의 입법주권을 대표하며, 입법주권은 헌법을 제외하고는 어떤 법에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의제를 전제할 때, 법률개폐권을 가진 국회야말로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주권자”(쟝 보댕)이고, 그 이외의 의결에서도 국회는 과거의 결정에 구속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국회의 시계는 멈춰 있고, 파병안과 관련해서 국민주권은 정지되어 있다. 이 ‘당황스런 사태’에 직면할 때, 파병반대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평화운동단체나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과 같은 정당들이 꾸준히 파병반대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김선일 씨의 살해 이후로 파병에 대한 우려를 씻을 수 없는 국민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준다. 그러나 이제 이라크 추가파병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지난 3일 자이툰 부대는 기습적으로 이라크 출병을 강행하였다. 헌법 제5조 위배 여부에 대한 일반적 의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이라크 출병은 단지 제16대 국회의 결정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김선일 씨의 피살을 비롯하여, 그 이후에 전개된 모든 사태, 새로 밝혀진 진실들이 제16대 국회의 결정을 번복할만한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과 관련해서,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논리는 주권의 기본 원칙, 주권자는 모든 것을 새로 논의할 수 있다는 주권의 창설적 원칙을 명백히 위배하고 있다. 국회는 파병안을 재심의하지 않았으며, 국민주권은 장식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국민은 철저히 피동적 위치를 강요받았다.

물론 국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AP 통신사의 비디오 테이프 편집,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 단체의 결성에 대한 첩보 등 새로운 사실들이 김선일 청문회를 통하여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국회가 해야 할 일은 파병정책 그 자체를 새로운 상황에 입각하여 새로 심의 하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을 기정사실로 하고 김선일 씨 피살사건을 단지 재발 방지와 예상되는 피해의 최소화라는 관점에서만 다룬다면, 그것은 분명 국회가 헌법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방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김선일 씨 피살사건은 전쟁, 평화, 인권에 대한 보다 많은 질문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던지고 있다. 국회가 이들 질문을 매우 부분적인 문제 영역에만 한정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국회의 입법주권의 근거인 대의제를 국민주권의 일반 원칙으로부터 화해할 수 없을 만큼 유리시키고, 대의제 자체의 정당성을 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파병을 찬성하는지, 혹은 반대하는지 국민투표를 해 보지 않는 한에서 누구도 미리 전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모든 사안에서 다수가 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병 문제가 제17대 국회가 새로 심의해야만 할 중대 사안, 국민 대다수의 안전과 국가 자체의 존립 목적에 관련된 사안이라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김선일 씨의 피살 이래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제17대 국회는 국회는 파병에 대하여 새로 심의해야 한다. 국민은 현 상황에서 파병의 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파병반대론자들은 왜 파병에 반대하는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권리, 나아가서 파병 문제에 대한 정치적 의사를 형성할 권리가 있다.


II. 찬성과 반대

국회의 시계가 멈춰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은 국민적 관심사에 의견을 표명해야만 하는 정치인으로서, 파병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별적으로 개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찬성이건 반대이건 그들은 이런 저런 논거를 댄다. 파병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과 제반 단체들도 이런 저런 논거를 댄다.

파병론자들의 논거는 매우 간단하다. “파병은 국익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국익에 대한 논증 방식 역시 매우 간단하다: 1) 미국은 대한민국의 최대 우방이며, 2) 이라크 전쟁은 한국 경제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 이외에 다른 논거는 파병찬성론자들조차 설득력이 없는 듯 보인다. 이라크의 재건과 평화 유지라는 파병 명분이 논거로서의 설득력을 상실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에서도 절반 이상의 국민이 불신하는 거짓말이고, 김선일 씨 피살사건은 한국 국민에게도 <전쟁 - 테러리즘 - 추가 파병>의 악순환을 깨달게 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서 파병반대론은 여러 가지 논거의 복합체일 것이다. 파병반대론자들은 파병 정책의 ‘논거 없음’을 지적한다. 파병반대론은 파병찬성 논거와 동일한 수준에서 반론의 형태로서 전개되기도 한다. 예컨대 “파병은 국익에 반한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파병반대론은 그 이상의 판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국가 상호간 전쟁에 대한 판단, 내전을 포함하여 국가 기구에 의해서 수행되는 모든 전쟁에 대한 가치 평가를 포함할 수 있다. 파병반대론에는 다양한 층위의 논거가 ‘파병반대’라는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 수렴되어 있다.

누가, 어떠한 정치 세력, 어떤 사회단체가 파병에 반대하는가, 혹은 찬성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국민들에게는 중요한 판단근거가 될 것이다. 국민들은 그러한 단체에 대한 일반적 지지에 의하여 파병과 같이 ‘매우 복잡한 문제’에 대한 판단을 위임하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관점에서 어떤 논거를 들며 파병에 반대하는지 혹은 찬성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야말로, 파병 문제에 대하여 국민 각자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III. 논거의 분류와 유형화

찬성이든지 반대이든지, 하나의 정치적 입장은 수많은 논거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이 입장 자체를 결정짓는 핵심 논거이며, 무엇이 상대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띠는가에 주목한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찬성/반대의 입장들을 충분히 유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입장은 핵심 논거뿐만 아니라 수많은 보조 논거를 사용한다. 또한 보조 논거들은 반론의 형태로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핵심 논거와는 다른 종류의 정치적-철학적 입장에 근거해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논거를 분류하고 유형화하는 일이 시도된다.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찬성/반대의 논거를 유형화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찬성론/반대론의 상정가능한 모든 논거들을 추상적 수준에서 분류하고 유형화하는 일에 목표를 둔다. 파병찬성론의 논거를 동일한 층위에서 조목조목 반박하는 일도 이 글의 목적을 벗어난다. 그것은 파병반대 운동의 ‘실제적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서 국민 각자가 정부의 파병 정책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찬성/반대의 논거를 유형화하기 위해서, 김선일 씨 피살사건에 대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왜냐 하면 이 사건은 <한국 정부>, <미국 정부>, <테러 단체>, <한국인 희생자>라는 4자를 분석적 항목으로 하여 발생했으며, 이 4자의 입장과 행동이 교차되는 지점, 이 4자의 능동과 피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김선일 씨 피살 사건과 관련되어 새로 알려진 모든 사실들도 4자 관계에 새로운 긴장 또는 소통을 일으킨다.

4자가 맺는 여섯 가지 관계 중에서 1) 한미관계, 2) 한국 정부와 한국 국적의 테러 희생자의 관계, 3) 테러 단체와 한국 국적의 희생자의 관계, 4) 미국 정부와 테러 단체의 관계, 5) 한국 정부와 테러 단체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은 파병 정책에 대한 찬성/반대 논거로서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다섯 가지 관계 속에서 찬성/반대의 논거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그리고 그 논거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지, 정치 이데올로기적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를 통하여 우리는 파병반대의 여러 입장 속에서 평화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파병찬성론조차 평화의 외양을 걸칠 수 있다. 예컨대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을 위한 파병”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파병’이라는 주장의 ‘형용 모순적 측면’을 차치하고, 파병찬성론자들조차 이제는 이 주장의 대중적 설득력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 한미관계

미국 정부는 후세인 정부가 대량살상무기를 비축하고 있다는 것을 개전 논거로 하여 현재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후세인 정권을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서 광범위한 저항 세력에 직면해 있고,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이라크에 파병했다. 양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이 조약은 한반도 문제에 국한되며,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구속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한미관계는 한국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파병반대의 논거에도 한미관계의 문제는 큰 작용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한미관계에 대한 이해방식으로부터 비롯되는 파병찬성/반대의 논거들을 따져 본다.

a) 국익론

파병찬성론으로서 <국익론>은 한미관계와 무관한 별도의 논거로서 제출될 수도 있다. 즉 파병은 한미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때조차 국익에 부합된다는 논거이다. 이 논거는 국익을 입증할 여러 정치적, 경제적 자료에 의지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한국의 파병찬성론자들은 그와 같은 입증을 충분히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일 것이다. 만약 국익에 부합된다면, 어떤 종류의 파병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5조 제1항이 버젓이 있는 한에서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군국주의>라는 반헌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국익론>은 하나의 논거로서 자기 충족적일 수 없고 그저 보조 논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헌법 제5조 제1항의 효력 범위 안에서 <국익론>은 공적 담론의 주된 논거가 될 수 없고, 반드시 “이라크 파병은 평화를 위한 파병이며,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라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 파병론자들은 ‘국익’을 앞세우기 이전에 파병이 이라크 평화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것임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국익’만 앞세운다면 암암리에 <군국주의>를 선동한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난 제16대 국회가 파병 방침을 결정할 시점에서의 공적 담론에서 <국익>의 문제가 파병 여부를 결정하는데 주된 쟁점이 된 것은 유감스러운 사태라고 아니할 수 없다. 파병비용, 파병지 등을 근거로 하여 “파병은 국익에 반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조 논거일 뿐이지, 파병반대의 핵심 논거가 될 수 없다. <국익론>의 경우와 동일한 질문이 던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파병이 국익에 합당하다면, 평화 구축에 반할 경우에도 파병은 용납될 수 있는가?  

<국익론>은 한미관계라는 요소와 무관한 형태로 제출될 수도 있고, 한미관계에 근거하여 제출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 ‘국익’은 “파병은 한미관계를 고려할 때에 옳은 결정이며, 그래서 국익에 부합된다”는 주장처럼 한미관계를 주된 논거로 하고 단지 보조 논거로서 덧붙여 질 뿐이다. 한미관계에 중점을 둔 파병 논거들로서는 <파병보상론>과 <한미동맹 중시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북핵 위기의 해소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유연한 태도를 취해 줄 것과 이라크 파병을 ‘보상의 관계’로서 연관짓는 사고방식이다. 후자는 북핵위기라는 특정 문제가 아니라 “한미의 역사적 동맹관계”라는 50년간의 지속적인 사태로부터 파병 명분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이다.

b) 파병보상론

북핵 문제와 이라크 파병을 연관시키는 <파병보상론>은 지난 제16대 국회의 파병 결정을 즈음하여 많이 유포되었던 논거이다. <국익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헌법 제5조 제1항과 충돌한다. 아울러 <파병보상론>은 자국의 안전과 평화의 문제를 자국의 안전과 평화에 직접적 관계가 없는 타국에의 파병으로써 해결하려는 것이기에, 만약 미국 정부가 북핵문제에 대하여 <파병보상론>의 논리와 마찬가지의 논리로써, 즉 자국의 안전을 빌미로 하여, 다시 강경한 방침으로 선회한다면, 한국은 미국의 정책 변경에 대하여 이를 제약할 아무런 윤리적 논리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c) 한미동맹/관계 중시론

<한미동맹 중시론>은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과 과연 파병이 평화 구축에 효과적인 행위인지에 관한 판단 일체를 미국 정부에 일임하는 관점이다. 주권국가가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주권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이는 공적 담론의 논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파병론이 한미관계에 의존할 경우에도 주된 논거는 ‘평화를 위한 파병’이라는 점에 두어지고, 한미동맹은 단지 보조 논거로서만 등장해야 할 것이다.

‘평화를 위한 파병’에 대한 입증을 회피하고 ‘한미동맹’에 파병의 주된 논거를 둔다면, 한미동맹을 헌법 제5조 제1항 보다 상위의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한미동맹을 파병론의 보조 논거로 채택하더라도 이라크 파병과 한반도를 범위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상호 구속되지 않기에 <한미동맹 중시론>은 논거로서의 자격을 잃는다. 그것은 단지 군사적 동맹관계에 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한미관계 중시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 경우에도 파병의 주된 논거는 이라크 파병이 “평화를 위한 파병”임을 입증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결코 주된 논거가 될 수 없는 논거들을 파병을 찬성하는 주된 논거로 삼는 이유는 헌법 제5조 제1항에 입각할 때에 유일한 파병 명분인 평화 구축이라는 논거가 파병찬성론자가 보기에도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조 논거는 그저 보조 논거일 따름이고 어떤 경우에도 ‘평화’라는 주된 논거를 대체하지 못한다. 이라크에 파병하려면 그것이 과연 국제 평화를 위한 일임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를 입증하지 못할 때, 국익이나 한미관계를 논거로 한 파병찬성론은 단지 군국주의적 국익이나 주권 포기를 선동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d) 민족주의적 파병반대론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파병찬성론이 있듯이 이 관계에 주목하는 파병반대의 논거도 있을 수 있다. 파병반대에 대한 많은 입장 중의 하나로서 <민족주의적 파병반대론>이 있다. 그것은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내용으로 압축된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이라크 파병은 민족적 이해에 상충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내용을 내포한다. 국회의 청문회를 통하여 밝혀진 AP 통신의 비디오 테이프 축소 편집과 관련된 의혹도 <민족주의적 파병반대론>을 증폭시킨다.

그런데 <민족주의적 파병반대론>의 경우에서도 <국익론>이나 한미관계를 중시하는 파병찬성론의 경우에서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민족적 이해에 상응하고 타국의 강요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라크에 파병해야 할 것인가? 만약 그것이 평화를 위한 것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헌법 제5조 제1항에 반하는 사상을 가진 것이리라.

결론적으로 <민족주의적 파병반대론>,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논리도 파병반대의 주된 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기껏 “이라크 파병은 국제 평화에 반한다”는 주장에 대한 보조 논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파병반대의 주된 논거가 ‘자주의 문제’가 된다면 적어도 이 사태와 관련해서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평화주의를 파병 반대의 핵심 논거로 하지 않는 한에서 <민족주의적 파병반대론>은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이라크 파병이라는 사태에 대하여 반응하고 활용하는 방식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 한국 정부와 한국 국적의 테러 희생자의 관계

이라크 파병과 관련된 논쟁에서 김선일 씨 피살사건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감사원이나 국회에서 이 문제를 조사하면서 국가의 국민에 대한 포괄적 보호의무가 비로소 문제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까지 이라크 파병 그 자체야말로 이와 같은 의무의 이행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은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파병 방침에 대한 재심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사원과 국회에서 조사된 것은 주로 해외 공관이나 기타 국가기구가 맡은 바 소임을 다했는가라는 문제이며, 파병을 기정사실로 한 채 그저 재발방지에 관한 사항에 머물고 있다. 한국 정부의 성급한 추가파병 선언이 김선일 씨 석방을 위한 중재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이라크인 변호사의 증언은 국민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 지난 3일 추가파병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진정으로 논의해야 할 문제는 파병 정책이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 의무에 근본적으로 상충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증 부담은 당연히 파병찬성론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의 안전과 관련된 새로운 상황이 조성된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파병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완벽한 보장이 아니라 최선의 보장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파병을 찬성하는 논거가 될 수 있으려면, 이라크 파병이 국제 평화를 위한 것이고, 국민이 감당해야 할 일임이 먼저 설득되어야 한다. 파병찬성론이 평화논증을 회피하는 한에서, 국민의 안전에 대한 가능한 한 최선의 보장이란 기만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운전자가 피해를 최대한 줄여 보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평화주의는 시민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평화주의는 “자위의 경우가 아닌 한에서 타국에 대한 침략적 전쟁을 포기하고 타국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는 경우에 시민의 권리가 가장 잘 보호될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누가 파병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안전이 보장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평화주의자는 그런 방책이 혹시 시민적 권리의 제한을 수반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유심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파병 효과로서 발생하는 안전 위험을 또 다시 권리의 제한을 통하여 상쇄하겠다는 발상, 테러방지법 제정 등과 같은 발상은 - 파병찬성론이 평화논증을 결여한 경우에는 더욱이 - 마치 교통 법규를 무시하는 운전자가 다른 모든 차들이 멈춰 준다면 피해가 최소화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파병찬성의 논거가 “파병은 국익에 부합되며, 국익을 위해서라면 개별적 국민의 희생은 감수될 수 있고, 파병으로 인한 안전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권리에 대한 제한조차 불가피하다”라는 형태를 띤다면, <시민권을 우선하는 평화주의>에 대한 극단의 대립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공리주의적 논증 형태를 차용한 <국가주의>, <질서맹목주의>일 것이다.  

3. 테러 단체와 한국 국적의 희생자의 관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국제법적으로 정당한지, 또는 점령 정책이 옹호 받을 만한가라는 문제와 김선일 씨를 납치하고 살해한 집단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난한다고 해서 테러 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전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러 단체와 김선일 씨라는 한국 국적의 희생자의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저항 수단으로 삼는 세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1920년 니콜라예브스크 사건처럼 과거에 한국인 반일단체도 300명 이상의 일본 국적의 민간인을 살해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독립군 부대장이었던 박병길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처단되었다. 민간인에 대한 테러는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단체는 희생자 김선일 씨가 AP 사 비디오 테이프가 기록한 인터뷰에서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참하게 살해했다. 김선일 씨가 납치되기 이전에도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 등을 통하여 동일한 입장을 표현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그의 판단은 납치자들로부터 강요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단체는 이라크 저항 단체의 처지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마저도 테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가 테러의 대상이 된 이유를 그의 종교나 그가 일하던 회사와 미군정 간의 계약관계 등으로부터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 단체가 이러한 요소들을 중시한 것 같지는 않다. 학살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김선일 씨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이라크에 추가 파병을 계획하고 있다는 점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테러리즘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9.11 사태 이후의 테러리즘은 개인을 그의 양심이나 신념과는 무관하게 특정한 국가공동체, 종교공동체의 소속원으로서만 파악한다는 특징을 드러낸다.  이런 종류의 테러리즘은 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평화주의자라면 주권국가 이라크가 현재 처해 있는 처지와 테러리즘을 구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다.

4. 미국 정부와 테러 단체의 관계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대량살상무기의 은닉 여부였다. 미영 연합군은 이라크에서 대량살사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전쟁의 명분을 찾는다면, 후세인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이라크의 인권상황을 개선시켰다는 논리가 될 것이다. 결국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논박에서는 국민주권과 인권개입주의의 관계가 중요한 논점을 형성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9.11 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의 전쟁 명분인 반테러리즘과는 처음부터 성격이 달랐다. 그러나 테러리즘은 정규전이 종결된 이후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그래서 현재의 이라크 상황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테러리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논점을 형성한다. 전쟁을 통하여 테러리즘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 여기에서 평화주의는 그렇지 않다는 직관을 하나의 정치적-윤리적 입장으로서 대표한다.    

5. 한국 정부와 테러 단체의 관계

한국 정부는 이라크 특정 지역에서 치안을 담당한다고 한다. 한국군은 그곳에서 테러리즘에 직면할 것이다. 파병찬성론은 한국국의 주둔이 테러리즘의 악순환을 끊고 전후 복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며, 파병이 이라크 국민으로부터 지지받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은 미군정의 사례로부터 정반대의 직관을 얻고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한 논증 책임은 파병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한국 정부당국에 있기 때문이다.


IV. 맺으며

위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첫째로 파병찬성론이든 반대론이든 그 핵심 논거는 “파병은 이라크 평화에 기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태로서 구성되어야 하고, 이라크 전쟁 이후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는 파병찬성론이 이 문제에 대해서 논증 부담을 먼저 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파병반대론은 다양한 논거들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평화주의를 핵심논거로 삼지 않는 한에서 파병찬성론의 맹점을 되풀이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은 해외 나들이 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선택의 문제이다. 그것은 전쟁이나 테러를 정상상태로 인정하고 사실상 이 전쟁상태의 한 당사자가 되고자 하는 국가 기구를 통한 보호에 스스로를 의탁하고 권리의 제한을 달게 받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를 위하여 노력하고, 평화주의적 실천을 통해 권리를 보장받을 것인가의 선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자는 평화주의만이 전쟁과 테러를 근절시킬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 시민의 권리를 보장할 가장 유효한 방법, 가장 효과적인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금민 사회비판아카데미 이사장
2004/08/06 [17:05] ⓒpromet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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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날두모
[2004/08/08]
금민씨의 두번째 글 또한 나와 시각이 판이해서 짧게 지적한다.
이 글은 파병이 잘한 일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핵심적 기준은 파병이 궁극적으로 이라크 평화에 기여하는가 여부라는 것인듯 하다. 내가 이 기준을 인정하고 이 기준대로 판단해 본다면 파병은 잘한 일일수도 잘 못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 나름대로 파병의 기준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금민씨의 시각과는 다르게 파병이 '한반도 평황에 기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라고 본다.
물론 우리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므로 이라크의 입장을 생각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평화를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는 이라크 평화를 일차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인들은 당장 내가 살고 있는 땅의 안보와 평화가 일차적인 관심사 아닐까.
가령 나 같으면 당장 멀리 있고 이것저것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내가 좁은 사유와 무기력한 한마디와는 아무련 관련도 없을 이라크 정세에 대해서는 뭐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손익계산서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한반도의 점차적인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는 당장 대선 연기설까지 유포하며 극도의 불안정을 추구하는 미 보수주의 세력들에게 대한민국의 협상력과 동북아에서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파병을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익'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이와같은 대한민국의 안전이 70% 정도 그 다음에 경제적 이익이 20% 정도를 차지하는 우리 국민들의 이익이라고 했을 때 파병은 그 국익에 가장 부합하는 일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이라크의 평화를 진정 고민하는 이상주의자라면 파병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이상주의자가 체질적으로 될 수 없고, 오직 이 땅의 현실에서 나의 그나마의 이 불안한 위치나마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또 나와 같은 많은 생활인들의 불안과 이익을 염려하고 이를 조정하는 노무현 정부의 파병정책을 내심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의 평화를 위할 것인가, 한국의 평화를 위할 것인가.
이 선택적 질문이 양랍불가능 하여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하여 한국의 평화를 위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할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더 길어야 50여년을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역사 구체적인 개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 나와 같은 사람들은 많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위의 글은 설득력이 부족한 듯 한데 그 이유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근본 전제에서부터 달리 시작되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기고자
[2004/08/09]
아래 주장의 설득력의 핵심적인 장치는 국민의 안전에 대한 정서적인 호소이다. 아래 주장은 정서적 호소를 위하여 위 기고문에서 설명한 '파병보상론'을 축으로 하고, '국익론'과 '한미관계론'을 보조적으로 배치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1. 이라크 파병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가? 왜 그런가?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유연해 질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학적 논쟁일 것이다. 파병론자들이 먼저 "파병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는다"라는 정치학적 가설명제를 충분한 사실적인 증거와 더불어 제출한다면,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은 정치학적 문제에 집중하여 논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병론자들은 그런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개연성, 즉 이라크 문제에 관하여 미국 정부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다는 주장만을 돠풀이 했다. 하나의 목적과 특정한 하나의 수단을 연관짓고 동일한 목적에 쓰일 수 있는 여타 다른 수단들을 배제하고자 한다면, 먼저 다른 수단이 목적에 적합하지 않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단지 선택된 수단이 목적에 부합된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수단들이 동일하게 목적에 부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라는 이분법은 아래 주장이 목표로 하고 있는 정서적 호소력의 근간을 이룬다. 한국사회는 대개 이러한 이분법으로 당연하고 합당한 일,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일에 대하여 '이상론'이라는 딱지를 붙여 왔다.

그렇다면 이제 묻겠다!

당신은 대한민국 헌법 제5조 제1항의 효력범위 안에서 살아가는 '역사구체적인 개인'이 아닌가?

그것은 당신에게 단지 '이상주의'이고 '현실적인 규범'은 전혀 아니란 말인가? 반헌법적인 것이 역사적 현실이며, 헌법은 이상주의적 규범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날두모
[2004/08/09]
기고자의 물음에 대한 답변글
1. 이라크 파병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가? 왜 그런가?에 대해.
물론 파병이 미국정부의 대북정책이 저절로 유연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파병을 통해 미국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한국의 협상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21세기의 미국은 20세기의 미국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위험한 제국'이다. 미국의 학제와 대학이 갖는 고도의 합리성과 소수 엘리트들의 뛰어난 교양을 깊게 흠모하고 또 배우고 온 대한민국 미국 유학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미국이 제3세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야만적이고 기만적이라는 점은 익히 아는 바다. 그리고 이 점은 현 노무현 정부의 안보정책 라인들도 인식하고 있는 듯 한데, 이처럼 미국의 야만성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 노무현 정부의 파병론과 위에서 언급한 미국유학파들의 미국사랑적인 파병론과는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94년의 한반도 전쟁위기 이후 봉합국면에 있는 동북아 위기(이에 대한 상설은 차치하고) 상황이 대한민국의 급진적인 좌파정부(노무현정부)의 등장으로 오히려 요동칠 수 있는 위험요인으로 작용하는 때에 노무현 정부 자신이(자신의 지지세력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살깍기를 감수하고 선택한 파병정책은 바로 노무현 세력이 파풀리즘에 휩싸여 대한민국을 다시 위기상황에 빠트리지 않는 책임있는 정치리더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게 '파병'을 주고 대신 한반도의 '안전'을 가져오는 전략을 택한 것인데, 기고자가 이 점을 나보고 증명하라고 하면 나로서는 이에 관한 어떠한 증명력있는 문서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변명과 그럼에도 위에서 지적한 나의 추측(!)은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있지 않은가 라는 반문으로 답하겠다. (사족을 붙인다면 최근 6자회담 등의 진행상황을 면밀히 검토하지 못한 관계로 나의 주장이 부분적인 사실에서 반박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2. 당신은 대한민국 헌법 제5조 제1항의 효력범위 안에서 살아가는 '역사구체적인 개인'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대해 ...
기고자는 헌법 5조의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는 조항의 규범성을 내가 받아들이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다. 정부의 변명과는 다르게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나는 침략전쟁으로 생각하고 이에 동조, 수반하여 파병된 대한민국 군대의 파병또한 침략전쟁에 발을 담갔다고 아마 훗날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이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을 해보겠다).
문제는 만일 침략전쟁이 맞다면 이를 옹호하는 것은 바로 헌법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인데 물론 헌법5조만을 놓고 본다면 이 조항에 위반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조항 예를 들면 대통령의 의무 등에 비추어 노무현 정부로서는 또다른 헌법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을 듯 하다. 저번 글에 대한 논쟁에서보 밝혔듯이 나는 헌법에의 위한 여부는 전체헌법체계 내에서 현실적, 정치적 관점 등을 떠나서 생각될 수 없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헌법 내재적인 비판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보 양보하여 침략전쟁에 해당하고 또 헌법에 위반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의 노무현 정부를 4백년전 주자 성리학에 위반됨을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듯이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때 명분을 앞세워 청의 요구에 따른 광해군의 '파병정책'을 반대했던 인조 반정 세력들은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고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바로 오늘 이시점까지도 중국의 역사적 오만함 앞에 우리들을 할말없게 하지 않는가(왕이 머리를 세번 조아렸음을 익히 알고서도 끝내 속국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중국을 비난하는 21세기 우리들은 과연 어떤 동물일까). 이상주의자들의 무모한 명분이 결국 그들의 이상 마저도 초라하게 하는 역사적 과정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때 인조반정 당시 만일 내가 있었고 다행히 선비였다면 행여 '당신은 주자 성리학의 효력범위 안에 살아가는 역사구체적 개인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단연코 "주자 성리학은 무슨 깨뿔! 나는 극히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속의 조선의 현실을 살아가는 구체적 개인일 뿐"이라고 답했을 것 같다.
기고자
[2004/08/10]
프로메테우스의 해당 지면의 댓글의 순서가 바꾸었다. 예전에는 새로 쓴 글이 위에 게재되었으나 이제는 아래에 붙는다. 그래서 위의 모든 글에서 '아래'는 '위'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기고자
[2004/08/11]
1. "파병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에 위기가 온다"라는 가설 명제에 대하여 한 개인에게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다. 국가권력을 쥔 파병론자들이 증거를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한 바가 없기 때문에 위의 댓글 쓴 이와 같은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개인들도 증거를 알지 못한다. 책임 있는 헌법기관이 정보를 공개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좀 더 구체적인 토대 위에서 정치적 논쟁을 전개하기를 회피하는 한에서, 어떤 개인도 - 정치학자와 같은 전문가를 포함하여 - "파병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에 위협이 된다"라는 가설을 증거로써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알 권리'의 문제' 및 '공개의 의무'와 직결된다.

2. 그러나 "파병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가설에 대한 논증이 "파병은 이라크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논증 보다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전자가 논증되고 국민적 설득력을 얻고 후자는 논증되지 않은 채 파병이 추진된다면, 그때에는 비로소 파병 반대 운동은 평화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한 운동이 될 것이다.

3. 파병 반대는 헌법 제5조 제1항을 지키려는 운동이다. 물론 헌법 조문 전체는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각 조문은 헌법합치적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나 위의 댓글을 쓴 이처럼 이와 같은 헌법합치적 해석이 헌법외적인 모종의 현실정치적 입장에 의하여 선규정된다고 주장한다면, 게다가 그런 헌법해석의 외적 준거점을 현존하는 국가 권력과 연관시킨다면, 그것은 '결단주의적 헌법관', 헌법을 주권자의 명령 - 속류화하자면 - 권력자의 명령으로 이해하는 반민주주의적 헌법관에 불과할 것이다.

4. '성리학과 평화주의'의 비유는 북핵문제로 인하여 위기감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정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사람들은 때로 비유와 수사에 약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진실'에 강하다.

지난 대선과 그 이후로 수사학은 논거 그 자체를 대신하게 되었다. 물론 수사학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던 '명령적 언어'의 정치보다 발전한 것이지만 수사로 논거 자체가 대체된다면, 국민들은 수사에 조작당하는 피동적 주체로 전락할 뿐이다. [이성의 빛]은 논거를 문제삼는다. 논거를 문제삼는 방식은 국민들이 정치적 수사에 휘둘리지 않고 모든 입장에 대하여 논거를 질문하는 능동적 국가시민으로 변모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과 평화주의'라는 '근거없는' 비유에 의지 할 것이 아니라 두 상황을 같은 상황으로 묶을 수 있게 해 주는 논거, 즉 비유 자체를 성립시킬 수 있는 논거, "파병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는 가설에 대한 증거를 제출할 수 있는가를 먼저 되물어 보고,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따져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날두모
[2004/08/11]
현실의 정치가와 규범적 운동가의 관계에 대하여

1. "전자가 논증되고 국민적 설득력을 얻고 후자는 논증되지 않은 채 파병이 추진된다면, 그때에는 비로소 파병 반대 운동은 평화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한 운동이 될 것이다."라고 위의 기고자가 적었는데 나는 이 진술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정말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파병을 둘러싼 논쟁이 위와 같은 명확한 구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러나 위의 훌륭한 태도는 규범적 운동가의 덕목으로서는 훌륭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있는 정치세력, 예를들어 노무현에게 요구할 수 있는 덕목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현실의 정치가와 규범적 운동가는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정치가는 이성과 신중함을 배우고 규범적 운동가는 그 '이성'에 '피와 살'을 섞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게 석여버림으로써 요즘 유행하는(?) 서로의 정체성이 헷갈리게 되는 것이 못마땅하다면 그냥 그대로 계속 충돌하는 것도 '공존'하는 한에서는 사회에 유익할 수 있을 게다.

2. '기고자는 "성리학과 평화주의'라는 '근거없는' 비유에 의지"하지 말 것을 지적했는데 그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의지하지 말아야 할 근거없는 비유가 아니라 미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이 "반드시 의지해야할 과거로부터의 성찰"이기 때문이다.

3. 인간의 현실의 선택은 법 조문에 대한 규범적 해석이 아니며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가장 합리적이고도 결연한 선택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선택을 판단하는데 과거와 역사로부터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면 과연 앙상한 규범적 이성만 소유한 그 인간이 어떤 유익한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광해군과 인조 때의 외교행위와 그 결과로의 동북아 평화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과연 현재의 이라크 파병문제를 바라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인가. '광해군의 피와 당시 조선민중의 뼈'를 도외시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적 헌법의 옹호자들 또는 규범론자들은 결국 그 자유민주주의적 87년 헌법 자체마저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비이성적으로 날뛰기 보다는 차라리 우리는 역사로부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먼저 비교하고(비유가 아니다) 성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4. 서두에서 적었듯이 나는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밝히고 그 입장에 따라 이라크의 평화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파병을 반대하는 그 '입장'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반대하거나 공격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나는 그 '입장'이 나와 같은 많은 현실인들에게도 '보다 많은 설득력'을 얻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기고자
[2004/08/12]
위 1에 대하여

글을 잘 읽어 보길 바란다. 기고문은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서 파병정책에 대하여 국회가 재심의했어야 함, 국민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알 권리를 가지고 있고, 정치적 의사를 형성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주권의 원칙과 대의제를 화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유리시킬 뿐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정부의 이라크 출병은 16대 국회의 파병안 동의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모든 비판적 논설의 일차적 수신자를 행정부로 이해하는 듯한데, 그런 분화되지 않은 태도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덧붙혀서, 평화주의에 입각한 파병반대 역시 현실정치적 입장이다.

2와 3에 대하여

두 상황을 '유비'로 묶기 위해서는 공통성이 필요하다. "파병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가 위협이 된다"라는 주장이 증거를 가지고 있는 한에서만, 광해군의 파병과 이라크 출병의 유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밝혔듯이, 댓글 쓴 이가 이 주장에 아무런 실체적 근거를 대지 못하는 이유는 '권한을 쥔' 파병론자들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두 상황의 유비를 성립시킬 실체적 근거를 밝히라는 주장에 대하여, 엉뚱하게 '역사성'과 '논리성'의 대립, '역사적 성찰'과 '규범적 성찰'의 대립을 통하여 진행된 대화를 왜곡한다면, 더 이상 대화할 이유가 없다.

기고자가 언제 '역사적 성찰'에 반대했는가? 소위 '역사적 성찰'로서 제기된 '광해군의 파병정책과 이라크 출병의 유비'에 대하여 그런 '유비'를 성립시킬 수 있는 '공통성'에 대한 사실적 근거를 따져보자고 제안하지 않았나?

4에 대하여

평화주의자는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파병논거가 설득력이 있는가? 왜 파병해야 되는데? 누가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한 적이 있나?

그래서 기고문은 파병론자들의 '증거 없음'이 직무유기임을 말한다. 기고문은 논증책임이 일차적으로 파병론자에게 있음을 지적한다. 댓글 쓴이는 파병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가 "파병하지 않아도 한반도 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를 논증하기를 원한다. 그게 설득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파병이라는 상황 변화를 일으킨 것은 파병론자들 아닌가?

댓글 쓴 이는 재차 입증 책임의 전환을 시도한다. 하나는 정부의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정책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입증 책임은 먼저 비판자가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을 국가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행정부와 국회의 파병론이 사실 논증의 형태를 취한다면, 시민들의 파병반대론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전자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먼저 그들의 '논거 없음'을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차적 논증책임을 정책을 비판 하고자 하는 자에게 덥어 씌우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깔려 있다: 권위는 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권위에 반대하는 자가 논거를 필요로 할 뿐이다. 여기에서 물론 '권위'는 권력이고, 즉 행정부이다. 이 얼마나 권력중심적인 생각인가?

그런데 진정 '권위'는 헌번 제5조 제1항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파병론자가 먼저 사실 논증을 했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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