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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일본 어디로: 사회

日, 혁신세력 몰락과 경기침체로 '총체적 보수화'
미래전략연구원의 '지구촌, 분석과 전망' <3> 일본, 어디로 가고 있나: 사회
등록일자 : 2005년 03 월 28 일 (월) 09 : 13   
 

  일본 사회의 총체적 보수화
  
  최근 일본에서는 의외의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보수 세력의 막가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혁신 세력이나 비판적인 지식인의 목소리는 행방불명이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각급 학교 행사에서 일장기 게양과 천황을 기리는 기미가요의 제창이 강요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파의 목소리가 커지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어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현재의 우경화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구시대의 잔당들이 벌이고 있는 주책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조적인 변화의 산물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자라면 건전하고 조용한 다수의 양식을 믿고 일본 시민 속에 친구를 많이 만들어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와 친선을 도모하면 되는 일이다. 후자라면 일이 복잡해진다. 과거사에 대해 사죄한다는 말이나 몇 마디 듣고 약간의 보상금이나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다. 즉, 한국과 일본은 어떠한 관계를 유지해 가야 하는가를 원점으로부터 재검토해야 하며, 최악의 경우에 친선은 포기해도 실리는 챙길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일관계에서 파란을 일으키는 쟁점이 발생할 때마다 명분론을 내세우는 일본 정부와 말이 통하지 않게 되면 한국의 식자들은 의례 일본의 시민운동과 교류하여 한일관계를 다원화하고 양국의 접촉면을 넓히자는 주장을 하게 마련이다. 시마네현 의회의 독도 영유권 확인 결의 이후에 벌어진 파동에서도 확인되었지만 모든 일본인을 규탄할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는 NGO나 양심적 지식인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등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접근방법 자체는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현재 일본에 보수파 정치인이나 정부의 행동을 견제할 수 있는 독자적 시민사회 세력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2003년 6월 6일, 현충일에 고이즈미 수상을 만나기 위해 방일한 노무현 대통령은 국내 여론에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날 오전, 서울 안국동의 참여연대 건물에 있는 느티나무카페에서는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친선을 바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을 대표한 김지하 시인은 인사말을 통해 "70, 80년대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일본의 양심세력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보수화 되는 세상에서 처지가 어려운 일본의 양심세력을 한국이 도와야 할 때이다"라고 하는 상황 설명을 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실무적인 역할을 맡아 일본과 접촉한 분들은 "전쟁책임, 종군위안부 문제, 북핵 문제와 같은 사안을 선언문에 넣을 것을 한국 측이 주장하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동경대 명예교수 같은 인사들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힘들어 했다"고 그 동안 있었던 애로사항을 들려주었다. 북한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는 러시아사 전공의 와다 교수는 김대중 구출운동에 앞장섰고 헌신적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한 기개있는 지식인이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지식인들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학생운동이나 기타 사회운동이 침체 상태에 빠져있는 일본에서 우경화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조직화된 사회세력이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을 한국에서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를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일본 사회의 총체적 보수화가 진행된 배경과 과정에 대한 분석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출발점은 일본에서 어떠한 계기를 맞아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번영의 80년대와 장기 불황의 9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에 일어난 구조적 변화와 보수화, 우경화라고 부르는 정치적 태도의 형성 사이에 놓여 있는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거품경기의 부침과 사회불안
  
  필자가 도꾜에서 생활하던 1980년대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미국의 에즈라 보겔이 쓴 "세계 최고의 일본(Japan as Number One)"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었다. 사회비평가들은 "포식사회"가 된 일본에도 그늘진 곳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느라고 힘겹게 분투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쌓이는 일본의 무역 흑자와 과잉 국제 경쟁력을 해소하고 선진국 간의 국제수지 균형을 회복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1985년의 플라자 합의와 이에 뒤따른 엔고(円高)는 일본 내부적으로는 일본이 경제대국이라는 자존심을 확인시켜 주고 대외적으로는 위신과 영향력을 일층 고조시키게 되었다. 또한 엔고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산품의 품질 경쟁력 때문에 무역흑자는 계속 누적되어 내부적으로 부동산 가격과 주가 폭등이 유발되어 거품경기가 일어났다.
  
  당시에도 평화와 풍요가 흘러넘치던 거리의 분위기를 깨는 것은 우익의 소음이었다. 패전 후에 소련이 차지한 쿠릴열도의 4개 섬을 돌려 달라는 내용의 구호를 검은색 차량에 써 붙이고 일장기를 휘날리며 스피커로 군가를 틀어댄 채 질주하는 우익을 제지하는 경찰은 없었다. 길가의 시민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어느 일본인 교수가 '갑자기 소련이 네 섬을 반환하면 오히려 저 사람들은 일거리가 없어져 당황해 할 것이다. 실제로 섬을 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라는 요지의 설명을 해주었다.
  
  1980년대까지도 선진국 중에 노동시간이 가장 길었으며 만성적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바쁜 일본 사회에서 우익의 가두방송을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한 시민은 드물었다. 시민에게 정치 자체가 기피 상품이 되어 '지지 `정당' 없음이 가장 유력한 정치적 태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기 집권하고 있는 자민당과 만년 제1야당인 사회당의 1.5당 체제라고 불리던 보완적 동반 관계는 야유의 대상이 되었지만 전후의 평화헌법에 대한 도전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자는 혁신진영의 호소를 듣는 청중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불길한 징조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선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과 대결하고 있던 미국과 의기투합한 나카소네 수상은 일본을 '불침 항공모함'이라고 선언했다. 전쟁이 나면 소련 함대가 태평양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두어 버린다는 4해협 봉쇄론,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하는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싱가포르까지 해상자위대의 작전 해역을 확장해야 한다는 시레인(sea lane) 방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다고 발언한 피폭 도시 나가사키의 모토시마 시장이 우익에게 저격당한 사건은 세계의 평화주의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1980년대의 일본은 우익 세력의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은 사회였다. 전전에까지 계보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 우익은 위력을 과시하거나 테러를 저질러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위축시키고 있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말해 우익이 전후 민주주의 하에서는 제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비주류였다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시민들은 정부가 선도한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자는 국제화캠페인을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국제화의 기준은 미국과 서구에 놓여 있었다. 재일 한국ㆍ조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을 지원하고, 민간 주도로 발전도상국의 민중에게 유용한 개발원조를 제공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지자체와 시민운동도 나타났다. 국제사회에서 경제대국에 부합되는 공헌을 제공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하기 시작하고는 있었지만 이는 세계 최대의 개발 원조국이 되는 방향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풍요 속에서 혁신세력이 딛고 있는 지반은 급속하게 침하하고 있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자민당 장기 보수정권을 견제하는 위치에 있는 총평-사회당 블록이 쇠퇴했다. 즉, 나카소네 정권의 규제완화와 행정개혁으로 공공부문의 민영화가 진행되어 사회당의 핵심적 기반인 총평계 노조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1989년에는 민간대기업 노조가 주도하는 렌고(連合)가 결성되어 노조 정상단체의 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협조적 경영참가와 정부의 정책 형성 과정에 대한 참가를 중시하는 노동운동 노선이 정착하게 되었다. 엔고는 산업의 해외이전과 촉진했고 정보화도 산업노동자의 증가를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수반한 서비스 산업화는 고용의 유연화를 초래하였으므로 일본식 기업별 노조의 조직 대상이 아닌 노동자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화 가운데서 조직노동자의 정치적 발언권은 높아지기 어려웠다. 또한 같은 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유럽의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였다. 이것은 미일 동맹 하에서도 사회주의권과의 통로를 유지한다는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세력의 국제적 활동영역과 존재 이유가 축소되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1990년대에 들어가며 자민당과 사회당은 일단 동반 퇴진하여 다당화 시대를 초래했다가 자민당만 주도적 세력으로 복귀하였다. 혁신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폭적으로 축소되고 견제기능도 사실상 상실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반면에 신사회운동을 기반으로 한 시민운동, 주민운동은 정ㆍ관ㆍ재 유착구조와 1.5당 체제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서만 존재하며 대안세력의 형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었다. 시민들도 기존의 정치세력이 문제가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으나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조직화된 정치세력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참정권 행사를 기피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 작가 등의 정계 진출이 늘어났다. 이들은 소수 유권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불과하다는 약점을 의식하여 인기 영합적 행동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조직적 정치행동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보수층이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다수의 무관심 집단을 이끌고 나가게 되었다. 즉, 정치적 의사결정이나 권력의 행사를 제어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여론 형성 기제는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일본의 시민운동 세력이나 NGO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요청된다.
  
  1980년대 말에 시작된 거품경기의 붕괴는 전후 일본 사회가 통합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의 하나가 되고 있었던 능력에 따른 평등이라는 믿음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자산 인플레로 타격을 받아 노력하면 마이홈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상실한 일본의 중산층들은 기업이 종신고용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새로운 상실감을 겪게 되었다. 개인과 가족의 생활을 희생한 회사인간과 맹렬사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고 있다는 사회적 약속의 파기는 외국에서 일본적 특성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집단주의적 행동문화만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기초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시민과 정치의 괴리, 기업 조직에 대한 신뢰의 저하는 총체적으로 사회적 불안감의 만연을 가져왔다. 국제적, 국내적 환경의 격변 속에서 전후 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바탕이었던 55년 체제를 구성한 주체들은 퇴장하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질서에 대한 종합적 전망을 제시하는 새로운 주체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이는 전통적 우익에 대한 사회적 관리 기제가 약화되고, 국제 공헌론 내지는 국제적 책임론으로 포장된 민족주의를 내세운 보수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경제적 성공, 북한의 핵개발과 일본인 납치 의혹은 위기감과 대외 적개심을 고조시켜 보수파가 사회적으로 지지세력을 용이하게 동원할 수 있는 소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민족주의와 천황의 재정치화
  
  거품경기의 붕괴와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결과의 하나는 기업의 인력 구조 조정으로 젊은이들의 취직이 어려워지고 계층이동 통로가 좁아진 것을 들 수 있다. 기업은 이미 재직하고 있는 정규직 종업원의 고용을 우선적으로 보장하면서 임금인상률을 낮춰 인건비 총액을 관리하는 방침을 취하였으므로 신규 졸업자들은 비정규직 사원의 일자리밖에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것은 파견사원과 프리타(성인의 아르바이트)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지만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부모에 의존하여 집에 은둔하는 히키고모리족과 같은 병리적 현상의 출현도 무시할 수 없다. 부모세대의 축적이 남아 있으므로 아직까지 취직난이 빈곤의 문제로 직결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노동력 부족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취직난을 경험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느끼고 있는 좌절감과 불안감은 역설적으로 보수적 선동 정치가의 활동 무대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노'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을 주장한 이시하라 신타로 도꾜도 지사의 인기는 민족과 애국을 내세운 보수적 선동정치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국기와 국가를 사용하도록 강요한 이시하라의 방침이 큰 저항에 직면하지 않고 실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교원노조의 약화에서 오는 사회적 대항 권력의 빈곤이라는 요인도 작용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小)민족주의' 담론으로 무장한 보수세력이 대중 동원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소(小)민족주의' 담론은 어디까지나 미일동맹 체제를 전제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점은 과거사 청산 문제로 일본과 분쟁을 겪고 있는 아시아의 전쟁 피해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의 상징, 천황은 일본의 전통적 가치를 체화한 대중적 스타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금단의 존재로서 정치적 토론과 사고의 지평을 제약하고 시민의 정치의식이 성숙될 수 없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천황이 '소(小)민족주의' 담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현실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일본의 국제적 위상과 행동을 고찰하기 위해서도 글로벌리제이션의 진행과 함께 약화되고 있는 기업조직의 사회 통합력을 보완하는 기능적 보완재로서 천황과 일장기, 기미가요,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전통적 상징물이 리사이클되고 있는 현황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정치적 행동 주체들은 냉전의 종식 이후 세계의 유일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의 중국 봉쇄 정책과 일본의 '소(小)민족주의'라는 사회적 동원 기제가 결합되고 있는 현실을 전제로 하여 일본사회와 한일관계에 대한 정책적 입장을 수립해야 할 지점에 있는 것이다.

이종구/성공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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