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동아시아, 신자유주의와 진보의 용광로 -장석준

 

동아시아, 신자유주의와 진보의 용광로

- 백낙청 외, ꡔ21세기 한반도 구상ꡕ, 창비, 2004.



장석준 (기획부장, newer@jinbo.net)


요즘 ‘동아시아’가 난리다. 서점의 인문․사회과학 서가에 가보면 ‘동아시아’를 제목으로 단 책들이 수십 권은 나와 있다. 대체로 한 세기 전의 격동기를 다룬 역사 연구서들이 많지만, 걔 중에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를 다룬 책들도 있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동아시아’를 열쇠말로 해서 한국 사회의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 책들이 잇달아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하영선 엮음, ꡔ21세기 한반도 백년대계ꡕ(풀빛)나 한국동북아지식인연대 엮음, ꡔ동북아공동체를 향하여ꡕ(동아일보사)가 바로 그런 책들이다.   

평자는 최근에 나온 이런 류의 책들 중에서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 바탕을 두었다고 평가받는 책으로 백낙청 외 지음, ꡔ21세기 한반도 구상ꡕ(이하 ꡔ구상ꡕ)을 살펴보려 한다. 이 책은 계간 <창작과 비평>에 2003년 여름호부터 겨울호까지 세 호에 걸쳐 실린 기획특집 논문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창작과 비평>은 본래 문예지이지만 창간자인 백낙청(전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을 중심으로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해왔고 사회과학 논문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왔다. 해외에서는 이 잡지를 한국의 대표적 ‘좌파’ 저널로 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럼 ꡔ구상ꡕ은 ‘동아시아론’의 홍수 속에서 진보적 분석과 대안의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ꡔ구상ꡕ의 구상들은 현재 동아시아 담론 일반이 그런 것처럼, 혼란과 모순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왜 지금 ‘동아시아’인가?


우선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왜 하필 지금 ‘동아시아’가 이렇게 문제냐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동아시아가 화두가 되었던 시기가 언제였는가를 회상해보면 우회적으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때는 정확히 100년 전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였다.

백낙청이 ꡔ구상ꡕ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격변하는 세계 질서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그 혼돈 속에서 역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길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탐색과 논란이 계속되었다.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황쭌셴(청의 외교관)의 ꡔ조선책략ꡕ이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청, 일본, 조선이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구 세력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합종연횡해야 하는지가 이 책의 주된 관심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위정척사파부터 온건 개화파, 급진 개화파까지 어지러이 이합집산했다. 기층 민중들의 세계에서도 동학운동이 나름대로 이러한 초국가적 격변에 대해 대안의 밑그림을 제시하려 했다.   

세월은 흘러 20세기와 21세기의 교체기를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100년 전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것은 단순히 외면상의 유사성만은 아니다. 역사의 기본 구조 측면에서도 유사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100년 전에 동아시아의 격변을 낳은 세계자본주의의 운동이 지금의 세계자본주의 양상과 구조적으로 일치하는 면이 있다. 당시의 세계자본주의는 오늘에 와서 ‘제국주의’라고 불린다. 그것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한 서구 자본주의의 축적 모순을 함포외교를 통한 식민지 해외시장의 확보와 열강간의 극한 대립으로 풀려던 시대였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다시금, 투자 배출구를 찾지 못하는 금융독점자본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다. 그리고 이들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세계화’라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는 군함과 해병대 대신 해외 주식시장을 누비는 기관투자가와 IMF 고위 관료의 서류가방이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지만, 100년 전 제국주의와 작금의 세계화 사이의 유사성은 결코 좌파만의 강박관념은 아니다. 

동아시아는 이제 다시 이런 역사적 소용돌이 한 복판에 놓여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동아시아가 전 세계의 행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100년 전의 그것 훨씬 이상이다. ꡔ구상ꡕ에 실린 글들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듯이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시장의 부상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세계자본주의의 사슬 속에서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경제로 부상했다. 그러면서도 이들 국가는 예를 들어 유럽에 비해 훨씬 불안정한 국가 체제, 그리고 국가간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북핵 위기로 집약되는 한반도의 지속적 불안정성은 그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한 마디로 세계자본주의의 장래 한, 두 세대를 좌지우지할 지역이면서 또한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가장 불안한 곳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천형(天刑)인지 우리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로 그 한 가운데에 있다.


ꡔ구상ꡕ의 동아시아론은 과연 진보적인가


하지만 ꡔ구상ꡕ을 비롯해서 ‘동아시아론’을 특징짓는 음조가 꼭 비관적이고 착잡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동아시아가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잘만 하면 한국이 그 흐름의 주된 수혜자 중 하나로 떠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많은 이들을 들뜨게 하고 있는 듯하다.

그 대표자가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부는 전임 김대중 정부에서 비롯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 국가’ 구상을 더욱 발전시켜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중국 시장을 배후로 한 소위 ‘거점 경제’(hub economy)를 구축하기만 하면 한국이 2류 소국에 머무는 대신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게 그 골자다. 다만 ‘거점 경제’의 주축을 놓고 노 정권 내에서도 ‘금융 중심’이냐, ‘물류 중심’이냐, 아니면 ‘연구개발(R&D) 중심’이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위기’를 ‘기회’로 살린다는 변증법적 낙관주의라는 점에서는 ꡔ구상ꡕ도 노 정권 못지 않다. 사실 <창작과 비평>이 애초에 이런 기획을 내놓은 것도 노 정권의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론에 화답하고 그것에 나름대로 개입하려는 취지에서였다. 한 마디로 노 정권의 구상을 상수(常數)로 놓고 그것에 훈수를 두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ꡔ구상ꡕ은 노 정권의 구상과 만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ꡔ구상ꡕ의 필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백낙청 등 <창작과 비평> 단골 필자들은 ‘동아시아론’을 단순히 한국 경제의 생존 전략 차원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백낙청의 언급에 잘 드러나 있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절대적 요구가 인류문명의 발전이나 존속과 양립하기 힘든 성격이라고 한다면,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에서의 대안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을 필요가 절실해진다. (23쪽, 강조는 원저자의 것)


그렇다면 동아시아 변혁과 노무현 정권 식의 구상은 과연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ꡔ구상ꡕ의 가장 야심찬 목표는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를 해명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가에 따라 ꡔ구상ꡕ의 대안이 과연 ‘진보적’인지 아닌지가 판가름될 것이다. 그런데 평자가 보기에 이 목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12편의 논문과 1편의 긴 좌담을 다 읽어봐도(물론 이중에는 한국 사회 정치개혁의 현 주소와 방향에 대해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김종엽의 「정치개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등 썩 괜찮은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변혁과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론이 서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필자들 중 다수가 동아시아 차원의 변화가 한반도 분단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제시해준다는 데 주목한다는 점이다. 남한과 북한, 두 국가의 관계로만 놓고 볼 때 항상 막막함만을 던져주던 분단 체제도 동아시아 다자 질서를 염두에 두고 보면 해결의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북 경제협력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그것이 중국, 일본, 러시아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매개로서 동아시아 차원의 에너지 협력(천연가스관 등)․사회간접자본 협력(대륙횡단철도)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물론 북핵 위기나 동북아의 신냉전 가능성에 비하면 이런 식의 경제협력 전망은 분명히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노 정권의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론 전반을 긍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ꡔ구상ꡕ은 그러한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한다.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극복해야 한다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일환으로 추진되는 노 정권의 정책 방향을 일방적으로 긍정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김원배(국토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동북아중심 구상의 재검토」 같은 글이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을 주장하는 글들과 나란히 한 책에 실리게 되는 것이다.   

김원배의 글은 그야말로 노 정권의 정책 지향의 대변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주장은 아주 전형적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제조업 제품의 수출을 통한 발전전략이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만큼 써비스 수출로 전략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55쪽)

 

김원배는 한국 경제가 물류를 중심으로 하고 금융과 연구개발을 보조축으로 하는 ‘거점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는 우정은(미시건대학 정치학과 교수이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인 부인이기도 하다)의 글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세 개의 거울」 역시 마찬가지다. 동북아 금융․물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분단 모순의 극복이 필요하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 김원배와 다를 뿐, 노 정권의 구상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 자체는 다르지 않다.      


전장(戰場)으로서 ‘동아시아’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평자가 동아시아 차원의 경제협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경제가 앞으로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게 결코 아니다. 동아시아 차원의 경제순환구조의 형성이 분단 체제의 극복에 결정적 의의를 지닌다는 주장에도 분명 고개가 끄덕여지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사회 통합의 전망이 항상 신자유주의 교과서를 뒷문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장지상주의에 충실하고 사회적 권리들에 배치되는 정통파 경제학의 낡은 교과서를 따를 때 경제․사회적 통합은 실패하고 만다. 각국 국민의 구체적 이해들과 충돌하는 자유무역협정의 일정들만이 남게 되고,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한 ‘동아시아산(産)’ 초국적 자본이 등장하게 될 뿐이다. 

노 정권의 구상은 이미 이러한 모순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거점 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그 거점 경제가 내수와 어떠한 선순환 구조를 이룰지, 다수 노동 대중은 어떻게 소득과 복지를 확보할 수 있을지, 아무런 대안이 없다. 오직 인천과 광양 같은 몇몇 도시가 부흥하면 국민 모두가 ‘2만 달러’의 소득을 누리게 될 것만 같은 환상만이 덧칠돼 있을 뿐이다. 수출은 호황인데도 내수는 침체하고 국민 전반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현재의 ‘이중 경제’ 상황이 ‘동북아 물류․금융 중심’의 구축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과도기가 아니라 그것이 영구화할 우리의 미래가 아니냐는 의구심에 대해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 전략은 아무런 답도 던져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수 언론이 제시하는 ‘우리 내부에 고립될 것인가, 아니면 바깥으로 향할 것인가’라는 구도는 쟁점을 고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참된 쟁점은 차라리 우리의 눈을 동아시아로, 세계로 돌리되, ‘어떤’ 방향으로 돌리는가에 있다.  

가령 김석철(명지대 건축학과 교수)이 ꡔ구상ꡕ의 기획좌담에서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ꡔ구상ꡕ의 필자들이 가진 현실 인식이나 평자의 그것이나 서로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제일 큰 문제는 인력과 금융자본의 과잉입니다. 4백조가 굴러다니고 있어요. 몇몇 분야의 기술수준은 제가 보기에 최강입니다. 중동에서 가장 제대로 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 그리고 조선과 전자 및 자동차에서 한국을 세계 최강으로 만든 사람들이 밀려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올 때까지 참여했던, 또 그런 과실로 생긴 금융과 인력들이 놀고 있거든요. 잉여금융은 지금 투기자본화해 자본시장․노동시장을 왜곡하고 있어요. (346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그럼 그 ‘400조’를 어떻게 투자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백낙청이나 김석철은 ‘황해도시공동체’의 건설을 주장하는데 그런 식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추진하려면 결국 누가 나서야 하는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 제시하는 것처럼 경제특구를 만들고 규제철폐경쟁을 벌여 ‘바닥을 향한 경주’라는 신자유주의의 전형적 시나리오를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노동자 농민 운동의 목소리가 관통하는 민주화된 국가기구가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투자 계획의 주역으로 나서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적절히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동아시아’라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새로운’ 무엇일 수 없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는 결코 그 자체 해답의 실마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 다른 대안이 각축하는 또 다른 전장(戰場)일 뿐이다.

ꡔ구상ꡕ은 비록 ‘진보적’ 동아시아 담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로서는 성공작이라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적어도 이 전장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의 ‘동아시아 구상’이 정리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