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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의 노동관

노동 거부와 자기가치화

-노동에 대한 자율주의의 관점 정립을 위한 몇 가지 생각-

문제설정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지구적 투쟁의 다양성,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편차들
로스엔젤레스: 흑인, 유색인 노동자들-시위, 약탈과 방화
사빠띠스따: 원주민 농민들 --봉기
프랑스: 실업자,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 시위
한국: 조직된 대중 노동자--파업
인도네시아: 학생, 시민 --시위, 약탈과 방화

1.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견해

1.1.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과 그 한계
1.1.1.인간의 삶에서 생산 활동을 특권화, 여가까지 재생산으로 환원,

"인간은 의식, 종교, 또는 그가 무언가를 의욕한다는 점에 의해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들 자신과 동물을 구별짓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청년사,42)

1.1.2.생산의 노동으로의 환원--헤겔에 의해 정의된 노동 개념의 계승--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의 연속성(독일 이데올로기)

위의 정의에는 동물로부터의 인간의 구별, 혹은 인간(정신)의 현상학이라는 헤겔적 문제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1.1.3.삶의 노동으로의 환원에 의한 소외보다 노동의 소외를 문제로 설정, 임금 노동, 노동 일반이 아니라 노동의 특정 형태에 대한 비판.(경철수고)

"노동 대상의 소외 속에는 단지 노동 활동 자체 속에서의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즉 강제 노동이다."(박종철, 1, 75-6)

1.1.4.생산수단, 특히 노동 수단의 발전을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함. 자동장치 노동수단automaton의 형성을 코뮤니즘의 물적 전제조건으로 간주(그룬트리세)--노동자계급에 의한 생산수단 통제를 혁명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이 논리의 연장.

1.1.5.코뮤니즘을 '노동이 삶의 제일차적 욕구로 되는 사회'(고타강령 비판)로 정의하는 것은 자동장치에 의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임금 노동, 강제된 노동에서 벗어날 때 과연 노동이 삶의 제일차적 욕구로 될 것인가? 그것은 삶의 다양성 속에 해소되어 삶의 욕구의 비특권적 일부로 되는 것이 아닌가?

1.1.6.강제로서의 노동과 욕구로서의 노동 사이에서: 노동에 대한 부정적 정의(벗어나야할 것, 기계화되어야 할 것, 강제로서의 노동)와 긍정적 정의(욕구로서의 노동) 사이에서 갈등

1.1.7.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노동 규정에 있어서는 프루동적 색채를 띤다. 노동의 악한 측면을 버리고 선한 측면을 취하라. 노동의 강제성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하라. 그는 노동 자체를 거부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노동을 인간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활동으로 전화시킬 조건과 방법을 연구한다. 러시아 미르 공동체를 이행의 동력으로 인식하게 되는 말년의 시기는 그의 혁명 이론에서는 하나의 '창조적 예외'를 구성한다.

2. 엥겔스, 제2인터내셔널, 스딸린주의의 노동 개념

2.1.엥겔스

노동을 인류의 류적 본질로 사고. 자본주의적 노동과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의 노동을 구별치 않음. 그리고 자연을 인간에 의한 지배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노동을 자연 지배의 과정으로 봄.

"노동과 더불어 시작된 자연에 대한 지배는 새로운 진보가 있을 때마다 인간의 시야를 확장시켰다.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노동을 가지고 언어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 박종철, 5, 382)

2.2.고타강령

1875년 5월 23일에서 27일까지 고타에서 열린 라쌀레파와 아이제나흐파의 통합대회에서 제안된 독일노동자당 강령 제1조: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현 사회에서 노동 수단은 자본가계급의 독점물이다...그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예속은 모든 형태의 빈곤과 노예상태의 원인이다"(프롤레타리아 당 강령, 68)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

고타강령에 격분한 마르크스는 '비판'에서 격렬한 어조로 강령을 비판한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의 원천이다. (그리고 물질적 부는 바로 이 사용가치로 이루어진다.) 노동 자체는 자연력의 하나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노동이 그것에 속하는 대상과 도구와 더불어 수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는 한 문구는 옳다. 사회주의적 강령은 이러한 조건들을 묵살하는 부르주아적 말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모든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의 첫 번째 원천인 자연에 대해 처음부터 그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한에서만, 즉 자연을 인간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한에서만 인간의 노동은 사용가치의 원천이 되며 따라서 부의 원천도 된다. 부르주아들이 노동에 초자연적인 창조력을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거름, 저작선, 232)[마르크스는 여기서 '물질적 부, 사용가치, 노동' 전체를 특정의 역사적 조건[인간이 자연에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역사적 조건]을 중심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엥겔스에게서 인류의 유적 본질로 확정된 자연 지배력으로서의 노동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해되며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더 깊이 생각해 볼 것.]

2.3.에어푸르트 강령,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1891년 7월 독일 사회민주당 강령 초안은, 쟁점을 회피하면서 제1조를 노동수단의 소유문제, 특히 그것의 독점 문제에서 출발시킨다. "노동자가 노동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그것을 사회 성원 중의 일부가 독점하게 됨으로써 사회는 노동계급과 유산계급의 두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계급투쟁을 분배의 문제로 사고하게 한다.

그리고 경제의 객관적 과정들에 대한 숭배에 빠지는 이후의 사회민주주의. 이른바 노동 숭배의 경제주의의 대두.

2.4.레닌의 노동개념

테일러주의에 대한 긍정. 자동화, 전력화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2.5.USSR 헌법 초안

"USSR의 새로운 헌법 초안의 주요한 기초는 그 주요한 기둥이 이미 성취되고 실현된 것들인 사회주의 원칙이다: 토지, 임야, 공장, 작업소, 그리고 그 밖의 생산 도구 및 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 착취 및 착취 계급들의 폐지; 대다수의 빈곤 및 소수의 사치의 폐지; 실업의 폐지; '노동하지 않는 자는 또한 먹을 수도 없다'는 정식에 따라 모든 능력있는 시민들의 의무적이고 명예로운 의무로서의 노동; 노동할 권리 즉 모든 시민들이 고용을 보장받을 권리; 쉬고 여가를 즐길 권리; 교욱의 권리 등등."(스탈린 선집, 2, 101) 마르크스는 노동을 모든 부의 원천으로 정의하는 고타강령의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추론한다:"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므로 사회 속의 그 어느 누구도 노동 생산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를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스스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노동에 의해 사는 것이며 그의 문화 또한 남의 노동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고타강령은 마르크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변경없이 통과되었었다.

2.6.반스딸린주의적 급진 좌익의 노동 개념: 노동자 통제

스딸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 좌익들 역시 '노동'의 역사적 특이성보다는 그것의 역사적 보편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노동의 특권화. 많은 역사적 노동자평의회들 역시 노동의 계획적 조직화의 기구로 전화된다. "생산 과정에 대한 노동자 통제에의 명령하달자의 의존과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둔 그들의 평의회주의적 프로그램을 확인함에 있어서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는 자신들이 어느 정도로 평의회주의적 관점에 매달려 있는지를 보여주었는데,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그것의 구체적 연구들 중의 일부는 그 관점을 멀리, 말하자면 숙련 기술 노동자의 관점으로부터 멀리 이동시켜야만 했다. 전후 호황을 파국적 종말로 가져가게 되었던 관점과 투쟁들은 대중 노동자의 관점과 투쟁들이었다. 숙련 노동자의 급진적 관점이, 그/녀가 생산 과정 전체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자본주의적 기생충이 불필요하게 되는 노동자 통제의 개념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테일러화된 대중 노동자의 투쟁은 소외된 노동 과정 전체의 거부, 즉 노동 거부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다."(아우프헤벤, 쇠락의 이론)

3.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획기성

3.1.노동 거부론의 맹아: '일하지 말라'

이런 맥락에 비추어 볼 때, 프랑스 68혁명 당시 '일하지 말라'(상황주의자들)라는 구호의 등장은 획기적이다. "경제는 세계를 변혁하지만 그것은 오직 경제의 세계로의 변혁일 뿐이다."(스펙타클, 30) 이 말을 '노동은 세계를 변혁하지만 그것은 오직 노동의 세계로의 변혁일 뿐이다'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호는 아직은 직관적이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시간에 집착하는데 이 시간은 순환적 시간에서 해방된 최초의 시간이다.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비로소 일은 역사적 조건들을 변형시키는 노동이 된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을 가치로 여긴 최초의 지배계급이다. 부르주아지는...노동의 진보를 자신의 진보로 삼았다.(스펙타클, 119)" "이 비활동은 결코 생산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다. 비활동은 생산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산의 필수품들과 결과물들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이다"(스펙타클, 22) ""현재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즉 여가의 증대는 노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같은 노동이 창조하는 세계로부터의 해방도 아니다. 노동 속에서 상실된 활동이 노동의 결과에 대한 굴복 속에서 회복될 수는 없다."(스펙타클, 22) 노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 그것은 무엇일까? 드보르는 노동자평의회 속에서 노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을 찾는다. 그것은 대중 노동자들이 이룬 노동 거부의 성과를 다시 숙련 노동자들의 노동관 속에 포섭시키는 것은 아닌가? 일하지 말라는 소외된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마르크스의 생각의 단순한 계승이다.

*전 상황주의자 Bob Black: 만국의 노동자여 휴식하라.

3.2.이딸리아 자율운동과 노동 거부

"1970년대 동안에, 자율주의자들은 노동 거부에 관한 가장 발전된 이론화를 생산했다. 또 그들은 자본주의의 위기 및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의 역동적 이론을 위하여 파국주의적 위기 이론에 대한 비판을 생산했다. 자율주의자들은 '사장들의 위기는 노동자들의 승리이다'라는 슬로건에서 예증된 계급 투쟁적 위기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그들을, 생산 관계에 의한 생산력의 질곡으로 초래된 자본의 쇠락에 의해 야기된 일반적 위기를 가지고서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는 측면에서 위기를 설명하는 위기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설명과 날카롭게 충돌하게 했다. 자본이 생산력을 속박한다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지만, 노동자계급이 강한 때에 그 계급은 자본주의적 의미로 이해된 생산력을 속박한다는 점을 망각한다. 노동자계급은 생산력의 발전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대립될 때에는 생산력의 발전을 속박한다.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의 의미는 만인을 위한 노동이라는 사회주의적 꿈 속에서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네그리가 표현했듯이, "생산력의 해방: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가장 총체적인 형식 속에서 폐지에 이르는, 부정에 이르는 과정의 동력으로서이다. 노동-으로부터의-해방으로부터 노동을-넘어-가는 형식으로의 전환은 코뮤니즘의 정의(定義)의 중심, 핵심을 이룬다.""위기가 진척됨에 다라, 새로운 조류가 스스로를 연루시켰었고 구 좌파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노동 거부는 통화주의와 노동의 대규모 재부과의 맹습을 받고 비틀거렸다."(Aufheben, 쇠락의 이론)

4.노동 거부를 둘러싼 아우또노미아 내부의 논쟁

4.1.스펙트럼

(좌파)노동 일반의 거부와 노동의 삶으로의 통합(볼로냐, 호보, 클리나멘 지, 맛시모)
(중도파)소외된 노동의 거부(네그리와 하트)
(우파)노동 거부를 노동 시간 단축으로 양적으로만 이해(고르)

4.2.하트와 네그리의 노동 거부관

"작업(work; lavoro)의 거부는 결코 노동(labour; laboro) 그 자체의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생산성, 창조성, 혹은 창의성(inventiveness)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특수한 관계의 거부였다"(Hardt 1993: 114).... '노동 그 자체'라는 것이 계급 지배의 형식 속에서 추상 노동으로서가 아니라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가. 사회주의적 감수성의 일종에 근거를 둔 것

4.3.{클리나멘}지의 견해

밀라노에 근거를 둔 저널인 {클리나멘}의 편집자들은 '노동 일반'에 대한 비판이 아닌 임금 노동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계속 거부했다(Klinamen 1992: 56). 데 안제리스에 의해 취해진 태도 역시 비슷하며 그리고 그것의 언어 사용에서 거의 동일하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해방 일반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De Angelis 1994: 35)."

4.4.재연된 논쟁에서 호보의 입장

복권 사무실에 근무하던 나이든 여성 피고용인의 운명에 관한 논쟁: 복직인가 편안한 삶인가 그녀는 이른바 새로운 기계들을 작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해고되었다. 이 일화에 대한 토론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빠도바 ECN의 호보(Hobo)가 끼여들어 '모든 사람이 노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덜 일하자'는 노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 여성이 복직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싶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가 편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싶다'(Hobo 1995).

4.5.고르의 양적 관점

노동 시간 단축

4.6.클리버의 종합

노동 거부는 노동의 창조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의 종말이 산 노동의 특권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은 삶의 다양한 욕구들 중의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렇게 변형된 창의적 활동성을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동은 자본주의적 상품 세계에서 의미를 갖는 추상, 광범위한 구체적 활동성(동사들)의 추상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에 대한 양적 관점에 머물면서 그 질적 변형의 시야를 놓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마르크스주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오늘날 사회적 주체성의 구성])

5.노동거부와 자기가치화

5.1.네그리의 생각

네그리는 노동거부를 대중 노동자의 전략으로 이해하면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계급 재구성의 결과 노동 거부보다 자기가치화가 주된 전략으로 대두된다고 본다.

그 논거: 오늘날의 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으로 전화됨으로써 가치가 노동 시간에 의해 측정될 수 없게 된다. 가치 법칙이 위기에 처하고 죽는다.

비물질적 노동 ---대중의 지성---사이보그---자기가치화

이런 관점에서 네그리는 오늘날 가장 생산적인 부문인 사회적 노동자가 혁명의 새로운 주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회적 노동자 개념은 많은 빈 공간을 남기고 있다. 네그리의 생각 속에서도 그것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네그리는 한 때 사회적 노동자를 학생과 정보기술 부문 및 행정 부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즉 사회적 노동자를 노동자의 특정한 계층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사회적 노동자의 헤게모니는 그 양적 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적 구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네그리와 아꾸아띠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사회적 노동자를 노동자의 특정한 계층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오늘날 노동자 구성의 질적 특징으로 정의하게 된다.

5.2.네그리에 대한 자율주의자 내부의 비판들

5.2.1.볼로냐의 네그리 비판

계급투쟁의 중심 지대로서의 직접적 생산의 영역에 대한 네그리의 포기가 '재앙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뿐이라는 볼로냐의 생각에 동의를 표하면서, 로마 분파는 그러한 차이는 더 깊은 방법의 차이를 깔고 있다고 믿었다.

5.2.2.스티브 라이트의 네그리 비판

만약 60년대 말에 네그리가 당시의 다른 노동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이한 노동자계급 층들의 특유성을 대중 노동자의 층들로 포섭하는 위험을 무릅썼다면, 70년대 후반의 그의 작업은 계급에 대한 이 부분적으로 구체적인 이해마저도 일반적(generic) 프롤레타리아트 속으로 용해시킬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완전히 자율적인 동기들'을 가진 상이한 주체들의 혼합물로서, 사회화된 노동자의 개념은 제한된 발견적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이제 유통과정의 모든 계기를 가치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는 공장-사회 관계를 둘러싼 노동자주의의 오랜 긴장을 날랜 이론적 책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계급 형상의 묘사, 상당한 주의와 시간을 요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는 경향을 현실로 와해시킴으로써 간단히 성취되었다.

네그리가 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개념규정들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동안에, 그 자신의 틀은 같은 정도로 파국론적으로 되었다. '권력의 균형은 역전되었다'라고 2만부나 팔린 1977년의 한 팜플렛에서 그는 썼다: "노동자계급, 그 계급의 사보타지는 더 강한 권력이며 무엇보다도 합리성과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제부터 투쟁에 의해 생산된 이 역설을 망각하는 것은 이론에서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배의 형식이 자기자신을 더욱 완전하게 하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텅비게 된다; 노동자계급의 거부가 더욱 성장할수록, 그것은 합리성과 기치로 더욱 충만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수이다."

5.2.3.G. Caffentzis의 네그리 비판

네그리는 '가치법칙이 완전히 부패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혹은 '가치법칙은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시골 지역에서의 '뉴 엔클로져는 산업에서의 자동화 과정의 상승을 수반하며, 켬퓨터는 땀공장을 필요로 하고, 사이보그의 존재는 노예를 조건을 삼는다. 고기술 영역에서의 새로운 노동자의 성장을 자기가치화와 연결지은 것은 옳지만 그것은 산 노동의 자기가치화가 아니라 죽은 노동, 즉 자본의 자기가치화이다. 자본의 자기가치화는 지구적 프롤레타리아의 퇴락을 전제로 한다. 지구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네그리의 망각은 계급의 가장 생산적인 요소들로부터 혁명적 주체를 종합해 내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공리의 하나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혁명과 생산의 방법론적 동일시는 역사 속에서 거듭 오류로 확인되었다. 1994년에 발간된 디오니소스의 노동이 그해에 발발한 사빠띠스따 봉기를 혁명적 투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은 네그리가 산업 노동자 중심의 레닌주의를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노동의 종말인가 노예제의 르네상스인가? -리프킨과 네그리 비판])

6.삶과 자기가치화

삶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다양성의 시공간이다.
노동은 삶의 창조적 활동성의 부르주아적 포착형태이다.
노동은 가치화의 법칙에 종속된다.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가치화의 파괴, 가치법칙의 폐지, 삶의 노동시간 및 노동으로의 환원의 거부를 지향한다.
자기가치화는 거부를 통해 확보된 시공간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안내선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치화의 단순한 역전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다시 가치법칙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자기가치화는 가치화, 가치법칙과의 투쟁없이, 달리 말해 노동 거부 없이는 자기위안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법칙의 종언이라는 테제는 위험하며 지구적 노동 현실에 대한 그룻된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가치법칙의 위기가 하나의 경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 현실인 것은 아니다. 자본은 가치법칙을 부과할 길을 부단히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보화 역시 그 모색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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