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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

Eduard Bernstein



                

0. 들어가며


1989년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민주적 통제의 부재, 경직된 경제체제와 자율적 참여로부터 단절된 정치체제 등의 문제점을 핵심적 모순으로 하여 붕괴되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프란시스 후꾸야마는 ꡐ역사는 끝났다ꡑ며 시장경제의 영원한 승리를 선언했고, 90년대는 개방, 탈규제화, 단일 시장화의 시대로 되면서 전세계는 신자유주의의 세상이 되었다. 소련의 국가주도의 사회주의가 경직성과 그에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외부적 충격으로 붕괴되었다면,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닌 또 다른 한 축인 사회민주주의는 어떠한가.

80년대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유럽 좌파정당의 실각과 미국과 유럽, 그리고 영국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경우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의 변혁이 가능하리라는 이념 자체의 문제와 궁극 목적과 수단과의 딜레마, 또한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의 동요 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득표기반의 확대와 연립정부에의 참여가 가져온 제약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의 탈과격화와 자기정체성의 동요를 가져온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민당들이 민영화 등 시장경제적 요소를 과감히 도입하고 복지수당 삭감을 비롯한 긴축정책을 표명하며 좌파정당에서 탈피해 사실상 중도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토론과 득표활동, 의회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권력장악이라는 목적과 민주적 방법을 통한다는 원칙 사이에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헤롤드 라스키는 ꡒ자본제적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돌발적 행위를 통해 유권자가 섣부르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결정하는 것까지 용납하진 않을 것ꡓ Herold Laski, 1935, 'Democracy in crisis',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두 경로가 이와 같이 모두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질서는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폭력적 방식에 의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자유시장제도에 의한 여러 가지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과제물에서 체제대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최초로 이념적 정식화한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념적 근원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1. 생애


베를린 시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1850년 1월 6일 베를린 중하층계급 거주지에서, 배관공이었다가 후에 철도 기관사가 된 쟈코프 베른슈타인(Jakob Bernstein)의 일곱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베른슈타인은 명석한 학생이었지만 김나지움을 졸업하지는 못하고, 열 여섯 되는 나이에 베를린 은행의 수습사원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두게 된다. 그 후로 공식 교육 없이 혼자 공부하는데, 그것이 대학출신 지식인들로 이뤄진 사회주의 운동권 내에서 이론가로 활동하는데 큰 걸림돌은 되지 않았다. 1869년 말 수습사원을 마치고 다른 은행에서 행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878년 독일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870년대 초, 그와 몇몇의 동료들은 ꡐ유토피아ꡑ라는 이름의 소그룹 토론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이론을 얕은 수준에서나마 접한 베른슈타인은 당시 라살레주의자들과 치열하게 다투고 있던 아이제나허에 입당했다. 1872년 2월의 일이다.

베른슈타인이 사회민주당원으로 첫발을 내딛던 1870년대 초반 독일 사회주의는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로 분열되어 소모적인 싸움을 하던 시기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정책 1871년 이후 물가상승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개되자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발의하고 노동자조직과 좌파 출판물에 체계적이고 전횡적인 탄압을 가했다. Franz Mehring, Geschichte der deutschen sozialdemokratie, Ⅳ, pp.39-48.

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는데, 그 결과 1874년 선거에서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 베른슈타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연설 활동으로 당 지도부 내에서 교제범위를 넓혀 나갔고 베벨과도 친교를 갖게 된다. 이론적인 차이를 넘어 서로에 대해 저열한 인신공격까지 퍼부었던 두 분파는 1874년 제국의회 선거결과를 두고 통합을 고려하게 된다. 마침내 1875년 2월 14일과 15일에 걸쳐 고타(Gotha)에서 최종적으로 당대회가 열리고 5월 22일에서 27일에 걸쳐 통합당대회를 개최하고 고타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통합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이 출범했다. 엥겔스는 고타강령 초안을 보고 맑스주의 원리가 위태롭게 된다는 견지에서 통합에 반대하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고 마르크스는 브라케에 보낸 ꡐ고타강령 비판ꡑ에서 ꡐ이 강령은 훌륭하기는커녕 라살레주의에 대한 신앙을 떨쳐내지도 못했다ꡑ고 논평했다.

후에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이론적 수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대체로 당시의 아이제나허들은 맑스의 이론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기본이념의 깊은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사회주의관은 이론적으로 맑스보다는 라살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그들이 라살레가 요구하고 제안했던 어떤 것들을 거부하긴 했지만, 이들은 라살레의 사상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주장, 즉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 시기에서 유래하는 주장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고타 강령은 맑스가 말했던 종류의 라살레주의자들의 승리가 아니라, 아이제나허들이 가지고 있던 불충분한 이론적 통찰의 결과였다. Bernstein, Sozialdemokratische Lehrjahre, pp.45-46



신당은 비스마르크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1877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베를린, 함부르크등 도심지에서 우세를 보이며 9%의 득표율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동안에 베른슈타인은 은행원으로 계속 일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877년 선거에서도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1878년 빌헬름 1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구실로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고, 마침내 1878년 9월 19일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입법되었다. 1878년 11월, 베를린에 준계엄이 포고되고 78명의 사회민주당 당원이 수도에서 추방되었다.


쥬리히 시대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발효되기 직전, 스위스에 있던 부유한 청년 사회주의자 회흐베르크로부터 비서직을 제의 받고 1878년 10월 12일 베를린을 떠나 스위스의 루가노로 이주했다. 회흐베르크는 엥겔스의 조소의 대상이 될 만큼 별 볼일 없는 공상가였는데, 그런 그의 일면은 사회주의가 인텔리겐차를 변화시킴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발상에서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발상에 신랄한 비난을 퍼부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법화된 당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에 나설 필요를 느꼈는데, 이러한 필요에서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쥬리히에 파견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주목하고, 쥬리히에서 중앙당신문을 창간할 것을 제안했다. 베른슈타인은 1879년 쥬리히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가 창간될 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81년 1월 편집장으로 임명되면서 편집자로서의 경력을 쌓는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베른슈타인의 일시적 외국체류를 망명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쥬리히는 런던과 더불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중심지여서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과 사회민주주의 활동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불법화된 상황에서 외국에서 비밀당대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활동을 벌인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당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후에 엥겔스가 언급한 대로 ꡐ당 역사상 최고의 신문ꡑ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또, 사회주의자 탄압법 기간 중 처음으로 진행된 1881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12명의 의원을 진출시키며 승리를 거두고, 이에 자극 받은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입법에 의한 노동자의 복지향상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1883년 의료보험 입법, 1884년 사고보험법, 1889 노후보험법을 입법한다. 모든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884년 선거에서도 승리한 사회민주당은 그러나 곧 당내 좌우파간 분열이 노골화된다. 분열은 독일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식민지 팽창에 대한 입장에서 불거져 나왔는데, 다수파는 식민지 확장이 독일노동자들의 고용기회를 창출한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선로 건조에 찬성했고, 베벨을 포함한 소수파는 모든 선로개척에 반대했다. 베른슈타인의 ꡐ사회민주주의자ꡑ또한 소수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분열양상은 나중에 사회민주당을 심각한 분열에 빠뜨릴 제국주의의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저널리스트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1886년 결혼을 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1887년 의회선거에서 다시 한번 10%의 득표율을 보이며 승리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에 있는 스위스 대사에게 압력을 가하고, 곧 있을 독일-스위스간 무역협정 개정에서 스위스 측에 양보를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쥬리히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베른슈타인은 런던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계속 발행하기 위해 1888년 5월 12일 스위스를 떠났다.


런던 시대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체류하는 기간, 마르크스주의에 최초의 체계적, 이론적 수정을 가하면서 국제적 인사가 되었으며, 17세기 영국 내전에 대한 뛰어난 역사저작을 간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런던에 체류한 기간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런던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스마르크는 실각하고,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1890년 폐지되기에 이른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더 이상 해외에서 당 기관지를 발행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수배자였던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머물면서 ꡐ전진ꡑ의 런던 통신원과 카우츠키가 발행하던 이론지인 ꡐ신세대ꡑ의 정규 기고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주요조항이 폐지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몇 가지 결과를 낳았다. 그 중 하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탄압기를 거치면서 득표수를 3배 이상 증가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민주당이 의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당으로 된 것이다. 새로워진 합법정당은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20% 득표수를 보이며 경의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점차로 개량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개량화의 움직임을 감지한 베벨은 1891년 에어푸르트 당대회에서 기존의 라살레주의적 요소들을 일소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게 한다. 에어푸르트 강령의 이론부분은 카우츠키가, 전술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책임집필했으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견지해 불과 몇 년 후 시작될 수정주의 공세에 저항해 스스로를 지탱할 기반이 되었다.

1890년대는 베른슈타인이 그의 수정주의 이론을 만들어낸 중요한 시기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유언 집행인으로 지목될 만큼 엥겔스의 신임을 받았던 그가 베른슈타인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는 최초의 논문을 엥겔스의 사망 1년 후인 1896년에 낸 것으로 보아 엥겔스와의 관계 때문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이탈이 늦어졌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피터 게이, ꡐ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ꡑ 한울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계기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영국의 개량주의적 분위기를 들 수 있는데, 베른슈타인은 자기 조국과는 달리 공장법이 제정되어 있고 경찰이 파업을 파괴하지 않는 영국의 상황을 보면서 평화적으로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1890년대 유럽은 근현대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기였고, 영국의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또한 페이비언들의 점진적인 방법이 그가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의 기술에서 수정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점에 그의 고민을 들여 볼 수 있다.


저의 이러한 ꡐ털갈이ꡑ는 바로 장구한 이론적 진전의 결과이며, 이러한 전환이 특정주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자체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까지 오랜 고민이 있었습니다. 2년 전까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가르침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실천적 현실에 끼워맞추고자 했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론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것은 우둔한 짓입니다.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Bernstein to Bebel, 1898. 10.20., Bernstein Archives


ꡐ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ꡑ을 분별하고자 했던 베른슈타인의 사고의 전환은 1896년에서 1898년까지 ꡐ신세대ꡑ지에 게재된 ꡐ사회주의의 제문제ꡑ라는 논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헤겔주의의 문제, 헤겔주의 대신에 윤리적 측면을 강조할 것, 프롤레타리아 궁핍화 테제, 자본주의 붕괴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의 논조는 비교적 조심스러웠으나, 그의 논문이 사회주의의 궁극 목적을 무시하고 있다는 영국의 사회주의자 벨포트-백스의 지적에 대해 ꡐ나는 사회주의의 궁극목적에 관심이 없다. 다만 내게 의미있는 것은 단지 운동 자체이다.ꡑ라고 대답함으로써 폭풍 같은 논쟁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격렬하게 진행되는 논쟁 속에서 카우츠키와 베벨에게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라는 요구를 받고 1899년 3월에 ꡐ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ꡑ라는 책을 내게 된다. 후에 이 책은 수정주의의 경전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베벨과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의 ꡐ수정ꡑ을 격렬히 비판하고, 스스로 당을 떠나주기를 요구했으나 끝내 그를 제명하지는 않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국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으로 남은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 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이 현안이 되어 있던 1901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귀국한 베른슈타인은 1902년 3월 선거에 출마해 의회로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12년 외교정책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는 의회에서 별로 주목받는 인사가 아니었다. 계속된 수정주의 논쟁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당내 급진파들은 베른슈타인의 제명을 요구했으나, 토론 끝에 급진파는 제지당하고 또한 수정주의자도 견책을 받는 등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행동은 수정주의식으로 하고 동시에 수정주의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급진파와 가까워지게 된다. 이는 베른슈타인이 대부분의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달리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베른슈타인은 황제가 주장하는 ꡐ영국의 위협ꡑ이라는 것은 조작된 것이고 독일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군비증강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동맹이라고 주장, 외교정책 논쟁에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일어난 1914년, 그는 전시공채 발행에 대한 태도에서 판단착오를 일으킨다. 베른슈타인은 사라예보 암살사건과 프랑스 사회주의자인 조레스 피살사건의 배후를 러시아로 보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전 초기의 유유부단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전쟁에 대한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전시공채 발행 투표에서 기권하는 등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한참을 망설이면서까지 당이 분열되기를 원치 않았던 베른슈타인은 그러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제 2인터네셔널을 붕괴시키고 온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정권을 지지한 독일 사회민주당과 1916년 3월24일 결별하게 된다.

말년의 베른슈타인은 점차로 고립되어 갔다. 당으로 복귀했으나 당 지도부와의 접촉도 단절되고 1920년에 의회에 다시 들어갔지만 주된 활동은 집필활동과 후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말년에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그는 히틀러 집권 6개월 전인 1932년 12월 18일 눈을 감았다.



2. 사상


수정주의 등장의 배경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변화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실천과 대비되는 개량주의적 실천의 이론적 기반으로 자리잡게 된 사상체계라고 규정할 수 있다. 송 병헌, 1999, p90-91, 당대

또한 그에게서 파생된 사회민주주의는 ꡒ사회주의를 목표로서 주장하고 그러한 사회주의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이상적 정치과정으로서 의회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운동을 가르킨다ꡓ Wilde, L. 1994, Modern european socialism. Aldershot: Dartmouth publishing company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ꡐ수정ꡑ하게된 계기를 베른슈타인 개인의 성향과 그가 망명생활을 하던 영국의 개량적 분위기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수정하겠다고 나서기 이전부터 이미 독일 사회민주당의 활동은 개량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를 들고나서자마자 많은 수의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남부 독일지역 당원들의 경우, 1890년대 초반의 농업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선거인의 다수가 소농이기 때문에 소농에 대한 지원방침을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개량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정주의의 등장배경을 좀 더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적 사고를 하게 되는 1800년대 후반에는 자본주의가 성숙되면서 마르크스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그것은 사회보험에 포괄되는 인원의 증가, 신 중간계층의 등장, 노동자층의 생활수준의 향상 등이었는데 이러한 현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적 붕괴론에 대해 의심을 갖게 했다. 이런 측면에서 수정주의를 1890년대의 경제적 호황기의 이론적 반영이라고 하는 평가도 있다. Steinberg, 1976, Sozialismus und deutsche Sozialdemokratie. s. 37

또한 정치적으로는 비스마르크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의회 내에서 세력을 성장해 나간 상황에서 전술적으로 의회활동에 점차 더욱 치중하게 되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890년대이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국가로의 통합가능성에 공감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개량적 조류의 확산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 라살레주의, 페이비언주의도 베른슈타인에게 영향을 준 조류들이다. 거기에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일부 부분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인용하고 재해석,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부르조아지 및 정부는 노동자당의 비합법적 활동보다는 합법적 활동을, 반란의 모든 결과보다는 각 선거의 결과들을 훨씬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또한 투쟁의 조건들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였다. 1848년까지 모든 곳에서 최종적인 승패를 결정하였던 구식의 폭동이나 바리케이트를 친 시가전은 상당한 정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

                                            -엥겔스, 1895, ꡐ프랑스 계급투쟁ꡑ에 붙인 서문.


결론적으로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실재하는 의회내에서 벌이는 개량적 활동과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경직된 이론에 수정을 가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주의의 이론적 전개

에어푸르트 강령의 예상과는 달리 19세기 말 자본주의는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있었다. 1893년에서 1902년 독일의 산업생산률은 45% 증가했는데 이는 186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상황과 더불어 선거에서의 계속되는 승리를 보며, 붕괴론적 전망을 기본으로 한 에어푸르트 강령의 사회혁명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달성 할 것이라는 개량주의적 전술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합법적 틀 안에서 다양한 계층들을 노동자와 사민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되었고, 또한 이론은 변화된 현실에 맞추어 ꡐ수정ꡑ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변화된 현실이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의 집중과정을 통해 소기업이 몰락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생, 유산자와 무산자의 차이가 확대되어 마침내 붕괴한다는 것인데,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현실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기업의 집중화가 일어나긴 했으나, 소기업이 몰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광범한 중간계급과 새로운 소기업의 등장으로 붕괴론적 예견과 어긋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ꡒ더 이상 붕괴론적 사회관은 현재의 발전하는 사회에 전혀 맞지 않는다ꡓ E.Bernstein, 1908, 'Zum Reformismus'. Sozialistische Monatshefte, ?,3, S. 1402

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상황에 대해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론을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계층변화의 양상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카우츠키식의, 혹은 더 나아가 마르크스-엥겔스의 계급관점에서 이탈하는 것인데, 결정적으로 정통이론의 계급 양극화론과 프롤레타리아트 궁핍화론을 부정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보기에는 계급의 양극화론은 현실을 무시한 극도로 단순한 관점이며, 현실의 상황은 오히려 자본주의 집중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숫자가 늘어나며, 궁핍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체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베른슈타인은 자본가와 고소득자를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ꡒ현실에서 자본가의 수는 경제기업의 강력한 집중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 증가해 왔다. 따라서 프로이센에서는 50만 마르크 이상의 재산 소유자 수가, 소득통계가 최초로 이루어진 1895년부터 1914년까지 50%이상 증가했으며, 최상위 소득계층은 더욱더 강력하게 늘어났다.ꡓ Bernstein, 1923, 'Die nachsten moglichen Verwirk- lichungen Sozialismus' Der Sozialismus einst und jetzt. S. 129

이렇게 자본가의 개념을 확장시키다 보니, 시민계급의 내용을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한 사회의 상당수 구성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계급투쟁론에서도 ꡐ계급투쟁과 타협은 결코 절대적 대립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운동의 형태들이며 운동만이 영원한 것이다ꡑ Bernstein, 1901, 'Classenkampf und Compromise' S.162

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만약 현실에서 중간계층이 소멸하지도 않고 오히려 증가한다면 노동자-자본가 계급대립이 첨예화되어 전통적 의미의 산업노동자들의 숫적 증가에 의한 정권장악이라는 에어푸르트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전망의 타당성에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에게는 노동자는 아직 사회주의를 달성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인구의 작은 부분이며, 단일한 이해와 요구를 지닌 그러한 덩어리도 아니었다. 이런 발상에서 베른슈타인의 현실 개량적인 전략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사회주의 달성의 대안적인 전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확대였다. ꡒ민주주의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 곧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획득하는 수단이며,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형태이다.ꡓ Bernstein, 1977,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 Berlin: J.W.H. Dietz S. 134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속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공장법의 제정을 두고 보통선거권의 획득에 의해 노동자 권리의 현실적 성장이 가능해졌으며, 좋은 공장법에는 공장 전체를 국유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회주의가 들어있다고 언급했다. 베른슈타인이 이처럼 중요하게 여겼고 사회주의 실현의 방도라고 본 개량은 과연 어떤 개념인지는 다음 언급에 나와 있다.


바로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작은 활동이다. 현대 노동운동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센세이셔널한 전투가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씩 더 강인해지는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다가오는 지위이다. Bernstein, 1901, 'Zusammenbruchstheorie und Colonialpolotik: Nachtrag' Zur Geschichte und Theorie des Socialismus: Gesammelte Abhandlungen. S. 246, 247



또한 그는 사회주의의 달성이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에 따른 긴박한 붕괴상황이 아닌 작은 규모의 현실적 진전에서 반드시 올 수 있다며 개량 가능성에 대해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동시에 사회에 대한 진화론적 신념이 수반된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수정주의적 전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윤리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붕괴론을 부정한 그는 사적 소유권이 보장된 상태에서의 일종의 혼합된 사회주의 개념을 내세웠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서처럼 필연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ꡐ윤리적 요소ꡑ에 의지한 것이다. 그는 정의에 대한 관념이나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를 이끌어 내는 추동력이며 지속적인 대중행동을 위해서는 ꡐ도덕적 충동ꡑ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주의 개념규정은 정치, 사회조직에 대한 규정보다는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의 형태로 보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주의를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회주의 규정은 자유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듯이 사회주의 달성에서 시민사회에서 독립적인 집단간의 연대성이 그토록 중요하며, 개인의 권리, 동등한 자유와 특권의 폐지 등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자유주의와 이념적으로 무척 유사한 것이 된다.


수정주의 비판

베른슈타인이 상정한 수정주의적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한 입법으로 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이뤄내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적 발전과 더불어 ꡐ사회적 연대ꡑ로써 점진적으로 그러한 이상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는 진화론적 신념을 담은 것이다. 그러한 그의 수정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지점은 무엇인가.

먼저 진화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개량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들 수 있다. 그는 기존 질서 안에서 개량적인 활동이 ꡐ누적ꡑ되어 가는 것에 대해 과대평가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질적 단절점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주의라는 목적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관점은 생산 및 소유 관계에 따르는 계급모순을 무시한 것으로, 역사를 경제적 진보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진화론적 관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또, 그의 진화론적 관점은 식민주의에 대한 긍정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발달된 선진 공업국가에서 의회주의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후진지역에서의 사회주의 성립의 가능성이나, 제3세계 식민지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베른슈타인에게 식민주의는 선진국의 제도와 산업을 식민국가에 이전시킴으로써 식민지에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발상이다. 한국의 경우에서는 6,70년대 파시즘적 성장을 옹호하는 경제사가들이 역사발전에 있어서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양적 성장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 시기를 성장의 시기, 근대화의 시기, 6,70년대의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되는 시기로 규정하면서 긍정적이며 진보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른슈타인의 사상과 부르조아적 자유주의와의 친화성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베른슈타인의 계급관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자본가를 생산수단 소유의 관점이 아닌 화폐의 소유여부에서 바라보아, 시민계급과 자본가를 결정적으로 혼동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중산계층의 계급적 지위와 역할,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고, 신 중간계층의 진보성에 대해 근거없이 낙관함으로써 노동자-자본가간의 원천적 모순을 간과했다. 게다가 그는 노동계급에 대한 이상화된 관념- 부르조아지, 성숙한 노동자, 중간계급간의 사회적 연대라는-을 지녔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실 예로, 그가 사망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나찌가 집권했는데, 이는 신 중간계급의 진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것이며 얼마나 유동적인 것인지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상의 추상성과 모호함, 그리고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는 개념은 독일 사민당의 체제 안주적인 실천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결국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 구상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주의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낙관론적 신념에 포박되어 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한 현실정치적 고려와 계급정치적 고려를 결여한 ꡐ진화론적 개량주의ꡑ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p243




3. 나오며


지금까지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수정주의적 사상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서유럽 사민당의 사상적 좌표가 되어 왔고, 현재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 상실과, 목표와 수단간의 딜레마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개량주의적 경향은 비단 서유럽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 지면상의 한계와 본인의 역량의 한계로 학생운동권에 한해, 베른슈타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으로 이 과제를 마치고자 한다.

한국의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먼저 제3세계 국가로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이 변혁운동에서 승리하는 과정은 주로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통일전선체와 주로 외세와 결탁된 소수의 지배세력간의 싸움에서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반외세 진영이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근거로 지배세력을 정치적으로 왜소하게 만들고, 전민봉기를 통한 것이었다. 물론 2000년대 한국의 상황을 베트남이나, 대장정 당시의 중국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나,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서유럽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운동권 사이에서는 ꡐ의회환상ꡑ이 일정정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른바 민족해방계열이나, 21세기 진보학생연합 계열, 민주민주계열을 상관하지 않고 나타나는 경향이다. 한국사회를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되어 있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에도 비교적 독립적인 시민사회로 보는 관점에서 섣부르게 의회주의로 이행한 것인데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 구체적 사례를 한 두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97년 대통령 선거, 그리고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우리 국민들의 변화된,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소중한 바램대로 싸워야만 합니다. 국민들의 바램대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민중들이 믿을 수 있는 민주적 정권을 세우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염원과 같이 진정한 국민들의 편,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국민의 대안으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정치세력화를 해야 합니다. 97년 대통령 선거,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를 추대하여 선거에 임하고 여기에서 얻은 성과와 신뢰를 바탕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정당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당을 중심으로 투쟁하며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집권을 향해 뛰어야 합니다.

내년 대선 투쟁.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이 공동추대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와 함께 합시다. 우리의 후보와 함께, 국민들과 함께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선전합시다. 그리고 모든 진보진영이 철통같이 단결해 투쟁해서 8%이상을 득표합시다. 이렇게 투쟁하면 내년 대선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진영 정치세력화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1996, 40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민중과 함께 승리하는 한총련ꡑ 김경수, 박상진 선거운동본부, p41 


이들은 민족해방계열 내에서 ꡐ사람사랑계열ꡑ이라고 불리는 소수의견을 내놓았던 사람들로, 92년 대선 까지는 비판적 지지론을 폈으나, 96년 4.11 총선에서는 민족민주운동이 ꡐ국민정당ꡑ건설로 일대 도약을 이뤄낼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역별로 ꡐ진보적ꡑ인 후보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97년 대선에서는 국민승리21 지원사업을 하며 민족해방주류의 입장과 차이를 보였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96년 4.11총선은 정치세력화의 발판이며, 97년 대선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민족민주운동권이 정치세력화 했음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2000년대에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단계론적 구상을 보였다.


...하지만 총파업투쟁 이후 초기 사회세력화에 성공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보정치세력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민중들의 요구들을 반영하지 못하는 보수정치의 균열은 이제 더 이상 봉합되지 않는다. 97년 대선, 98년 지자체, 그리고 2000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 건설을 향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막힘 없이 흘러갈 것이다.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정치세력화, 중앙정치구도의 보수/진보구도로의 개편은 국민승리21의 진군과 함께 가속화될 것이다. 1997,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Power of one 세상을 바꾸는 힘ꡑ 박종화, 감동완 선거운동본부, p21


위의 글은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서 ꡐ21세기 진보학생연합ꡑ이 펼친 주장의 일부이다. 이들은 90년대 들어 학생운동권에 나타나기 시작한 수정주의적 경향의 대표적인 세력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특히 ꡐPower of one', 즉 개인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다분히 개인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구호를 들고 나왔으며, 올해에는 ꡐ충동ꡑ이라는 구호를 들고 선거에 출마해, 베른슈타인의 ꡐ개인의 도덕적 충동이 사회변혁의 추동력ꡑ이라는 말과 연관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사회적 모순을 보수, 진보의 대립으로 보고 그러한 형태로 전선을 재편하는 것이 한국사회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민중당의 실패에서 보듯 -또한 김문수, 이재오, 이부영의 최근 행보로 볼 때- 한국사회에서 보수, 진보의 구도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또한 한국사회가 서유럽과 다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또한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지원 사업을 벌여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들이 지지하는, 혹은 지지했던 국민승리21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국민승리21의 성격을 함부로 규정해 버렸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이 글에서 국민승리21의 성격을 말할 때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는 최초로 총파업을 호소하는 대선후보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과연 그랬는가는 구체적 정책, 선거운동 방식, 내걸었던 구호 -사민주의적 정책, 전철역에서 유럽좌파의 상징인 장미꽃을 나눠주고, TV토론회나 선거 팜플렛에서 지나치게 표를 의식하는 점, ꡐ일어나라 코리아!ꡑ라는 구호- 를 미뤄 봤을 때 의문의 여지가 많으며, 오히려 대중추수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난 대선을 평가하면서 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와 97년 권영길 후보의 득표수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백기완 후보는 주로 도시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를 보인 반면, 권영길 후보는 울산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노동자층이 두터운 지역에서 선전했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들의 계급정치적 의식의 확대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자의적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울산지역의 높은 득표수가 과연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울산지역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ꡐ민주노총 위원장ꡑ인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장 노조, 혹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되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에피소드를 지적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이것은 과연 진보정당의 행보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97년 초 정국을 강타했던 총파업이 시일을 끌면서 민주노총 상층에 부담을 주게 된다. 나중에 국민승리21을 구성하게 되는 일부 민주노총 상층은 그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ꡐ수요일파업ꡑ이라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지침을 내리게되는데, 물론 결과는 처참하게 끝났다. 이러한 지침은 아무리 봐도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파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희생을 요구하며 어떤 성과를 남기며 준비과정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타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노동악법이 날치기 통과된 상황에서 파업은 어떤 의미였을까. 파업은 노동자의 요구를 내세우는 가장 강경한 수단이고 힘의 균형에서 한번 밀려나기 시작하면 작년 4.19 지하철 파업에서 보았듯이 노조에 상당한 피해를 가져오는 방법이며 그것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는 아무리 강력한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업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이른바 ꡐ국민여론ꡑ에 대한 부담과 계속 파업을 조직화 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현장의 요구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민주의의 딜레마와 관련해서 한번 음미했으면 하는 일화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피터 게이, 김 용권 옮김 (1994) 「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한울

보 구스타프손, 홍 성방 옮김 (1996)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사회주의」 새남

강 경성 (1992) 「베른슈타인의 맑스주의 수정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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